레이모스

22화 Episode 03. 헤론.T. 스트로커스. 책략(策略)(5)

“내가 지금껏 수많은 여자들을 봐 왔지만, 너처럼 대책 없고 황당한 여자는 또 처음이다.”

“칭찬 고마워.”

“칭찬 아니거든?”

수아는 자신의 옆에 찰싹 붙어서 주위를 경계하는 헤론을 흘끗 넘겨보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헤론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식은땀이 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숨을 골랐다. 저번엔 갑자기 날아온 나이프를 무심코 잡을 뻔했다. 나이프가 눈앞까지 와서야 뒤에 있는 헤론을 깨닫고 손을 멈췄지만, 헤론이 그것을 봤다면 충분히 의심을 받을 만했다.

'하지만 좀 이상한데.'

그날,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나이프가 날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의문의 네오스들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설정인 이상, 한 번 정도는 헤론의 눈앞에서 위협을 당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때문에 그녀는 조직원 중 한 명에게 미리 언질을 주고 자신을 향해 나이프를 던지라 명령해 두었다. 그 조직원은 나이프를 다루는 것에 익숙한 사람으로 혹여 헤론이 그녀를 보호하지 못하더라도 치명상은 입지 않도록 급소를 피해 던지기로 약속해 두었다.

하지만 그날 그녀에게 날아온 나이프는 정확하게 그녀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만약 헤론이 막지 않았더라면 중상을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화가 난 그녀는 헤론이 집을 비운 어제 오후 전화를 통해 예의 조직원과 연락하려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상대방과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안내를 들으며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계획에 희미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던 그녀는 결국 또 한 번의 기습을 만들어 냈다. 오늘 오후 3시 45분. 그녀가 자주 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 커피숍에서. 이번엔 꽤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달걀 한 판을 들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헤론을 향해 말했다.

“우리. 이왕 나왔는데 차나 한잔하고 갈까?”

***

헤론은 점원이 얼굴을 붉혀 가며 내려놓고 간 커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김이 오르는 까만 액체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자신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하필 야외 테라스야? 안에도 자리 있었잖아.”

“날씨가 좋잖아? 이런 날에 밖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의 각별함을 모르다니, 무드가 없네. 그런 남자는 인기 없다, 너?”

“가뜩이나 노려지고 있는 주제에 태평하게 야외에서 차나 마시며 ‘나 잡아 잡숴 주세요.’ 하는 간 큰 여자도 인기 없긴 마찬가지거든?”

헤론의 퉁명스러운 말에 수아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빙긋 웃었다.

“뭐 어때. 지킬 자신 있다며.”

“그것도 네가 스스로를 지킬 생각이 있을 때의 얘기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는데 퍽이나 잘 지키겠다.”

“어머, 자신 없어? 천하의 헤론.T.스트로커스가?”

“누가 자신 없대?”

헤론은 미간을 구기며 찻잔을 들었다. 쓰디쓴 액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새까만 색깔부터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맛은 기가 막힐 정도로 쓰고 떫었다.

비교적 단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는 왜 마시는지 이해하기 힘든 맛이었다. 당장이라도 시럽을 듬뿍 넣은 카라멜 마끼아또로 바꿔 달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이런 걸 늘 맛있다며 마셔 대는 쌍둥이나 판, 티그로얼의 미각을 걱정하며 헤론은 차가운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린애네. 커피도 못 마시고.”

“시끄러. 그러는 너도 오렌지주스가 뭐냐? 애도 아니고.”

“나처럼 지적인 외모의 여인이 커피를 마시면 남자들이 어려워하거든. 이 정도의 갭이 있어야 더 귀여워 보이는 거라고.”

“아유, 내가 귀를 먹었나? 이젠 별 헛소리가 다 들리네.”

“죽을래?”

헤론은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는 수아를 보며 즐겁다는 듯 웃더니 무심코 시계에 눈길을 돌렸다. 커피숍에 오고서 시간이 꽤 지났는지 시계바늘이 벌써 3시 반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슬슬 가자고 수아를 보챌 생각에 눈길을 돌리던 헤론이 수아의 팔을 잡아 끌어당긴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의자가 넘어지는 요란한 소리에 사람들의 눈길이 두 사람을 향했다.

수아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에 검게 그을린 흔적을 발견하고 새하얗게 질렸다. 총을 사용하라는 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테이블 위의 컵을 맞추는 정도였다. 게다가 안전을 위해 일부러 검은 옷에 눈에 띄는 오렌지주스를 주문했다.

그러나 총알은 정확히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물론 그걸 눈치채고 수아를 끌어당긴 헤론도 헤론이지만, 지금 그녀는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헤론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는 수아를 카페 안으로 밀어 넣고 총알이 날아온 곳을 향해 뛰었다. 각도와 거리, 건물의 위치로 보아 범인은 꽤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순식간에 가까운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 그는 맞은편 건물의 창문으로 살짝 튀어나와 있는 라이플의 총구를 발견했다. 서둘러 그곳으로 간 헤론은 문을 열고 나오던 인물과 딱 마주쳤다.

너무도 뜻밖인 인물의 얼굴에 헤론은 멍하니 상대방의 이름을 불렀다.

“……판?”

판은 낭패라는 얼굴로 헤론을 마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판은 한 쪽 손에 수갑을 차고 있었다. 수갑의 다른 쪽은 처음 보는 남자의 손에 채워져 있었다.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인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기절한 모양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판이 저격수를 제압했다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헤론은 차마 고맙다느니 수고했다느니의 말 따위는 할 수 없었다. 판이 저격수를 제압했다 해도 왜 하필 판이 이곳에 있는지, 저격수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등등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문득 헤론은 자신이 수아에 대해 조사해 달라 부탁했던 것이 생각났다.

“아, 혹시 내 부탁 때문에 채수아를 미행하다가 잡은 거야? 그렇게까지 할 건 없었는데, 고생했네. 고맙다, 야.”

어색하게 웃으며 너스레를 떠는 헤론의 모습을 보며, 판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말없이 바닥을 보던 그는 이내 결심이라도 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야.”

“어?”

“내가 쐈어.”

순간, 헤론은 입을 다물었다. 판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헤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걸 던진 것도 나다.”

헤론은 판이 양복의 안주머니에서 꺼내 드는 나이프를 본 순간 아찔한 감각에 비틀거렸다. 얼마 전, 수아의 조사를 부탁하며 맡겨 둔 폴딩나이프가 판의 손에 들려있었다. 헤론은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하자면 길어. 나중에 본부에서 제대로…….”

“지금 말해. 카샤랑 네가 짜고서 날 엿 먹이려 했다는 거면 여기서 널 줘 패야 속이 좀 풀릴 것 같으니까.”

정말로 화가 난 듯 굳은 얼굴로 주먹을 쥐는 헤론의 모습은 이제껏 오랫동안 함께해 온 판으로서도 낯선 것이었다.

확실히 헤론의 입장에선 화가 날 만도 했다. LM에 와서 처음 맡은 호위 임무였는데 의뢰인을 노리고 있던 것이 같은 LM 단원에, 심지어 소꿉친구인 판이었으니. 놀림당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흥분한 헤론이 다시금 판을 닦달하려던 순간, 판이 입을 열었다.

“채수아는 평범한 수영 선수 같은 게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