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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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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음여류
작품등록일 :
2012.11.16 14:10
최근연재일 :
2018.03.2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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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2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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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Rebirth [폭탄마] 240초

DUMMY

‘다들 똥줄이 타겠지, 3kt의 폭발력이 문제가 아니야. 방사능에 휩싸인 월스트리트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핵이라 방호벽도 치지 못하니 나 같은 놈이나마 불렀겠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어.'


그는 모니터 속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게 왜 함부로 건드려서는..”


툴툴 웃음을 흘리며 일어선 그는 크게 기지개를 켜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조금 아쉽군. 월가가 아니라 세계경제가 핵폭발에 휩싸여 날아가는 모습을 감상하지 못하다니.’


회의용 테이블에 걸터앉아 텅 빈 건물과 거리를 감상하려 들 때, 대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니엘! 자네도 들었겠지만, 대피 작업이 끝났네. 이제 우리만 철수하면..그런데 정말로 어떻게 안 되겠나?


아무런 대답도 없자 그는 땅이 꺼지라 한숨을 뱉었다.


-자네가 손도 대지 못하는 걸 보니 어쩔 수 없나 보군.

-뭐, 그렇게 됐습니다.


다니엘의 무미건조한 답변에 눈살을 찌푸리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젓고 무전을 열었다.


-그래, 알겠네. 안타깝지만 그렇게 됐으니 일단은 그곳에서 나오게, 더 지체할 시간이 없어. 헬기로 5분이면 1차 피해지역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옥상으로 올라오게.


애처롭게 쉰 목소리에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암울한 날에의 절망을 읽어 낸 다니엘은 크게 입을 벌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곤 여전히 평이한 어투로 말했다.


-대령님, 지금 헬기로 5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뭐? 혹시 무슨 방법이라도 찾은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안타까워서 미칠 것만 같거든.


그의 뜬금없고 알 수도 없는 말에 대령은 짜증을 냈다.


-이 미친놈이 이번에는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지금 그럴 시간이 없다니까!


다시 환히 웃은 다니엘은 혀로 입술을 축이며 답했다.


-대령님, 내 부탁 하나만 꼭 들어주십시오.

-아니, 지금 그럴 때가..

-제발, 이렇게 애원할게요.


한창 이동 중이라 거칠어진 호흡을 애써 고른 대령은 솟구치는 울화를 삼키며 물었다.


-무엇을 원하나?

-대령, 휴대폰으로 당신의 얼굴을 찍어서 보내주면 안 될까? 너무 궁금해서 말이야. 혹여 껄끄럽다면 부하나 다른 놈들의 절망한 얼굴이라도 좋아. 공황상태에 빠진 놈이면 동영상으로 부탁하고. 요즘은 버튼 하나면 되니까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짧은 침묵 끝에 경멸을 잔뜩 담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놈은 정말.. 그래, 예전부터 그랬지. 너는 내 앞에서만 그 개 같은 가면을 벗었어. 도대체 왜 내게만 이러는 거야?

-이 와중에 이유 같은 게 중요합니까?


급히 시계를 본 대령은 뭔가 결심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못들을 테니까.

-우리 대령님, 이 꼴 사나운 인생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나 봅니다?


아무런 대답도 없는 대령에게 그는 은밀히, 속삭였다.


-뭐, 말해주는 게 어려운 건 아닌데.. 비밀이 유지될까요?

-이 라인에는 우리 둘만 있네.

-우리 둘?


그게 뭐가 우스운지 낄낄대던 다니엘이 이죽거린다.


-우리 대령님이, 내 비명을 홀로 감상하고 싶었나 본데?


대령은 짐짓 인상을 굳히며 답했다.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대외적으로 알려진 자네 명성 때문에 내가 신경..


이제는 아예 배를 잡고 웃으며 그의 말을 끊어 버린 다니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예..예!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이 와중에 제 명성까지 챙겨주시고, 이거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납니다?

-할 말이 없으면 이만 가겠네.

-아니요, 아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요. 가는 길.. 다 털어놓죠.


대령은 옆에서 같이 이동 중인 상황병을 힐끗 보곤 마른 입술을 적셨다.


-듣고 있네.

-제가 커널 대령님 앞에서만 가면을 벗었던 이유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였습니다.

-거..울?

-그러니까 99년부터 현재까지, 내가 아는 것만 173명인데.. 얼마나 더 있죠? 그리고 왜 임산부들만 노리는 겁니까?


단순한 문장의 나열만으로도 역겨운 물음이 전파를 타기 무섭게 무전기 너머로 제삼자의 의문성과 총성이 뒤섞였다. 찰나 간 침묵이 흘렀고, 무전기는 이내 울었다. 군인답게 절제된 목소리에 섞여 든 희열이 다니엘의 귓가를 간질인다.


-84년부터 지금까지 319명, 임산부만 죽인 이유는 내가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해서 그렇다네. 나는 말일세, 그들의 아름다운 목소리와 눈빛을 모두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어. 생명을 잉태한 여인들의 부드러운 살결, 그 자태, 울음과 눈망울은 정말로..


잠시 말을 끊고 들뜬 신음을 흘린 대령이 이어갔다.


-그냥 마구잡이로 죽여대는 너와 달리 나는.. 나는 말일세, 진정한 사랑을 알아. 그녀들의 모성애를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끼기에, 내 목숨과 그들을 동일시하기에!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거야. 이 끔찍한 세상에서 미혼모가 어찌 홀로 살아갈 수 있겠나?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절절한 진심이 담겨서 더 섬뜩하고, 희열을 억눌러 더더욱 역겨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자 다니엘은 쓴웃음을 흘렸다.


-젠장, 조금 더 그럴듯한 이유인 줄 알았는데, 이거 참 아쉽네.

-그럴듯한 이유라고?

-이를테면, 그 연약한 살에 내 검을 담금질해야 더 날카로워진다든지.. 아니면 뭐, 신의 명령이라서 그랬다든지 이런 거 말이야. 한데 대령, 당신은 그 놈과 똑같아. 나 때문이 아니라 빌어먹을 그들을 위해서라며 끊임없이 합리화하지.

-그게 무슨 소리인가?


대답없이 이죽거리던 다니엘의 동공에 일순 광기가 어린다.


-야이 병신 새끼야, 그냥 솔직해져! 나처럼 그냥 죽이고 싶어서, 타오르는 인간의 몸부림이 황홀해서, 오롯이 그게 전부라고 토로하란 말이야! 그저 추악한 괴물일 뿐이라고.


절레절레 고개 저은 대령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군, 이건 위선이 아니라네. 자네는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을 이타심의 발로지. 실은 내가 91년도에.. 그래, 마치 내 엄마를 보는 것만 같았어. 그녀는..


그의 역겨운 고해성사와 합리화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다니엘은 무전기의 스위치를 내렸다. 그리곤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죽음의 무도를 재생시켰다.


“병신,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들 재미가 없어.”


문득 술 생각이 나서 입맛을 다시던 그는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대며 욕구를 삼켰다.


“이제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그냥 다 잊어버리자. 그래도 즐겁게 놀다 가야지.”


그는 지휘라도 하려는지 양팔을 정신없이 휘젓다가 유리벽에 비친 자신과 우연히 마주했다. 왜소한 히스패닉계 백인이 그곳에 서 있었는데, 알코올에 찌든 모습을 보니 참 초라하고 안쓰러워 보였다.


“병신.”


그는 눈앞의 폐인을 아래위로 훑어 내리다가 이내 킬킬거렸다.


“시체를 남길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다들 이렇게 가는 거지.”


그렇게 합리화하며 곧 다가올 죽음에 집중하자 과거의 단편적인 장면들이 떠올라 들뜬 희열을 가져다 준다. 이제는 찾아오지 않을 전율을..


“아프가니스탄.” 심장을 옥죄이던 짐승의 포효가 절규로 바뀔 때 천국에 올랐었다.


제블린이 그린 아름다운 궤도, 온몸을 관통하는 찌릿한 굉음, 오르가슴을 느낄 수밖에 없는 황홀한 폭발, 주변을 삼키고 하늘 높이 솟구쳐 오르는 경이로운 화염의 자태.


“그때는 나도, 나도 신을 찾았어.”


이렇게 흔적을 더듬는 것만으로도 발기되고 입에 군침이 고이자 그는 생의 마지막 사정이라도 하려는지, 탄성을 토하고 거칠게 호흡을 뱉었다.


“이제는 천만 명을 죽여도 안 돼!”


수많은 인간의 피와 살로 만들어진 그동안의 모든 희열이 그 거대한 승리감 앞에서 완벽하게 부정됐다. 결코 채워지지 않던 갈망이, 한 인간을 살인마로 만들었던 허기가 절대적 포만감으로 채워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나는 그놈들을 죽이기 위해서.. 그러니까 무슨 사냥꾼 같은 거로 태어난 걸지도 몰라. 빌어먹을, 사냥꾼이라니.”


뱉어 놓고 보니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 킬킬대던 그는 갑자기 진중한 어조로 뇌까리며 맑은 하늘을 바라봤다.


“내 생애 처음으로, 정말로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게 행복했습니다.”


혹여 저 위대한 자가 이 뒤틀린 놈의 기도에 답하려 나타난다면, 그 개 같은 새끼의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사지를 불태우리라.


“그날 이후로 나는 죽었어. 왜, 왜 내게 기회를 안 주는 거야!”


계획된 자살을 240초 앞둔 광인은 저 유리벽에 비친 평범하고 왜소한 곱슬머리, 이제는 완전 타인으로 보이는 폐인에게 걸어가며 물었다.


“살아가는 이유가 뭐였지?”


쓸데없는 두루뭉술한 가치나, 어디선가 주워들은 뜬구름 잡는 망상이 아니라 지금 숨 쉬는 이유가 뭐냐고?


작가의말

다음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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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Rebirth [완] +9 18.03.26 527 17 10쪽
» Rebirth [폭탄마] 240초 18.03.26 244 7 9쪽
358 Rebirth [폭탄마] 멋진 하루 +2 18.03.23 250 7 11쪽
357 Rebirth [폭탄마] 악마의 선물2 18.03.22 220 9 7쪽
356 Rebirth [폭탄마] 악마의 선물1 +1 18.03.22 242 8 10쪽
355 Rebirth [구원자] vs 블레이저 2 & 완 +1 18.03.20 223 8 14쪽
354 Rebirth [구원자] vs 블레이저 1 +3 18.03.16 214 8 10쪽
353 Rebirth [구원자] 텀 +4 18.03.14 242 8 10쪽
352 Rebirth [구원자] 주의 뜻 +2 18.03.13 238 8 9쪽
351 Rebirth [구원자] 블레이저 18.03.09 200 8 14쪽
350 Rebirth [구원자] 광기 +2 18.03.06 267 7 10쪽
349 Rebirth [구원자] 그 도시 +5 18.03.05 279 14 13쪽
348 짧은 공지. +8 18.02.26 258 10 1쪽
347 Rebirth [진혼곡] Prologue & Episode 2 +4 18.02.14 217 9 9쪽
346 Rebirth [진혼곡] Prologue & Episode 1 18.02.14 205 6 11쪽
345 Rebirth [진혼곡] 완 +4 18.02.12 250 9 15쪽
344 Rebirth [진혼곡] 자격 +2 18.02.08 245 6 12쪽
343 Rebirth [진혼곡] 보증인, 그리고.. 18.02.07 213 8 13쪽
342 Rebirth [진혼곡] 참전 +2 18.02.07 203 7 13쪽
341 Rebirth [진혼곡] 파멸의 선고 +6 18.02.06 225 7 12쪽
340 Rebirth [진혼곡] 제왕 +6 18.02.05 220 6 14쪽
339 Rebirth [진혼곡] 조율의 명 +4 18.02.02 254 8 11쪽
338 Rebirth [진혼곡] 자각, 그리고 장난감 18.02.01 230 8 13쪽
337 Rebirth [진혼곡] 목적 +4 18.01.31 204 10 12쪽
336 Rebirth [진혼곡] 강림 +2 18.01.30 240 9 9쪽
335 Rebirth [진혼곡] 세 번째 아이. +2 18.01.29 238 8 12쪽
334 Rebirth [진혼곡] 사랑의 전사 마이너스 그리고 헬기. +2 18.01.27 262 1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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