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결단(死生決斷)
상해 제2 국제공항.
중도 그룹 이 회장이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말자 전화를 바로 걸더니 무언가 답답한 듯 지시를 하다 전화를 급하게 끊고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중국 고위층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인사를 한 뒤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에 올라탔다. 자동차가 출발하고 편안하지 못한 표정의 이 회장이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자 마침 전화가 울린다.
‘대통령!’
발신번호를 확인한 이 회장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대검찰청 흡연실.
양 검사가 초조한 듯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유리문 밖 이 비서관의 동향만 주시하고 있다.
“형, 그러다 필터까지 피겠수. 그만 꺼.”
조 검사의 말에 손에 든 담배를 힐끗 쳐다 본 양 검사가 담배를 끄더니 조 검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야, 미쉘 권 홍콩계좌 확인 한 번 더 하자. 걔네들 아직 퇴근 전일 거야. 파나마 말고 버진아일랜드에 있는 계좌랑 연계해서 조사하면......”
“됐어. 이미 미끼는 던졌는데 뭘. 휴...... 여기까지 한 것도 그나마 형이 있어서 한 거지, 대단한 거야. 이번 일이 잘 안 되도 대통령이 형은 잘 챙겨......”
“어, 어떻게 됐어? 뭐래요?”
이 비서관이 흡연실로 들어오며 담배를 물기 무섭게 양 검사가 옆으로 다가와 묻지만 이 비서관은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연기만 내뿜었다.
“왜? 아니야? 좆 됐어?” 조 검사도 가까이 다가와 물었지만 이 비서관은 넥타이를 풀며 연거푸 담배만 빨았다.
“좆 됐네, 좆 됐어. 젠장, 시간만 좀 더 있었어도, 썅!”
조 검사가 분풀이라도 하듯 발을 들어 재떨이를 걷어차려다 관두고 바닥만 여러 번 세게 내리쳤다.
“왜? 아니래?” 양 검사가 담배를 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 비서관의 눈을 쳐다보며 되묻자 그제야 이 비서관이 고개를 들어 양 검사를 바라봤다.
“휴, 청와대로 들어오시라는 데요.”
“청와대는 왜? 이 회장이 뭐라 했는데? 그 정도 깠음 저쪽도 대충 알아들을 텐데...... 시나리오는 그것밖에 없었다고. 이비도 우리 얘기가 맞을 거 같다며.”
“아 형, 그만해. 우리가 헛집은거야.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였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중도가......”
“내일 바로 중도를 치고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준비해야 돼서 청와대로 들어오시라는 겁니다. 헤헤헷!”
방금 전까지 쓰고 있던 인상이 확 펴지더니 멀뚱멀뚱 서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이 비서관이 재밌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뭔 소리야...... 대체......”
“하하하핫, 대통령 전화 한방에 이 회장이 넉다운 됐답니다. 성공했어요, 성공! 둘이 예상한 시나리오가 딱 맞았다고요!”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을 어깨동무하며 이 비서관이 신나게 흡연실을 뛰어다닌다.
중도호텔 일식당내 밀실.
검찰총장과 중도물산 장 회장이 커다란 도미요리를 앞에 두고서도 손도 대지 않은 채 어색한 침묵만 나누고 있다.
“전화가...... 꽤 오래 걸리네요.” 젓가락을 놓으며 총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서 이상한 놈이 툭 튀어나와가지곤...... 초비상이지 뭐.” 도미 살을 뒤적거리던 장 회장도 젓가락을 놓고 술잔을 입에 갔다 댔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대선자금만은 건드리면 안 됩니다. 저쪽도 저쪽이지만 우리랑 지금 야권도 무사하지 못해요.”
총장의 말에 장 회장이 말없이 술병을 집어 들자 총장이 따라주려고 손을 뻗었지만 괜찮다고 한 뒤 자신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야. 나라고 하고 싶겠나, 휴.” 아무런 맛도 없는 쓴 물이 장 회장의 목을 적셨다.
“아니죠. 이럴 때 일수록 가려야죠. 그래봤자 오년, 아니 이 삼년 뒤면 힘 빠지는데 그걸 못 기다립니까? 이 나라에서 안 살아본 사람들처럼...... 쯧.”
혀를 차며 총장이 술을 마시자 그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며 장 회장은 생각했다.
‘네까짓 게 감히......’
“대선 건은 넣어두고 일단 네, 네 하고 지나가자고 하세요. 회장님 그 정도 파워는 있지 않습니까. 이 회장님 잘 달래서 이번엔 한 번 넘어가자 하세요. 저는 뭐가 좋아서 이 자리에 아직 앉아있겠습니까. 세상이 다 그런 거예요. 지내다 보면 또 좋은 시절 오는 거고 뭐, 지금 칼자루가 저쪽에 있다고 언제까지 저들이 희희낙락할 거 같습니까? 금방 이예요, 금방.”
총장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장 회장이 단숨에 술을 입에 털어 넣은 뒤 북술북술하게 털이 난 손등으로 입을 쓱 닦았다.
“그런 건 난 잘 모르겠고 회장님이 자네를 보자고 했으니 뭔 얘기가 나오겠지. 요리나 먹게. 살도 실해보이누만.”
‘자네’란 말이 귀에 거슬렸지만 총장은 아까의 장 회장과 똑같이 자신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고 두 사람의 술 따르는 소리만 들리길 여러 번,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중도그룹 김 실장이 상기된 얼굴로 밀실 안에 들어오자 장 회장이 벌떡 일어나 김 실장 옆으로 다가갔다.
“그래 회장님이 뭐라 시나? 얘기가 꽤 길던데...... 하래? 화 많이 나셨어?”
“저 잠시 물 좀 마시고.”
“어어, 미안.”
김 실장이 자리에 앉아 맥주잔 가득 물을 따라 연거푸 두 잔을 벌컥거리며 마셨다.
“푸후~”
땅이 꺼져라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길게 내쉰 김 실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세를 똑바로 잡고 앞에 앉은 두 사람을 쳐다본다.
“총장님, 그리고 장 회장님.”
김 실장의 한 마디에 두 사람의 표정도 굳어져만 갔다.
“아까 말씀드린 건 회장님이 일단...... 없던 일로 하자고 하십니다.”
“아, 그래. 잘 됐네. 그렇잖아도 총장이 걱정을......”
반색하며 반기는 장 회장의 말을 자르며 김 실장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총장님, 이번엔 저희 좀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검찰 내 저희 쪽 사람들 다 모으면 얼마나 되겠습니까?”
김 실장이 안경을 치켜 쓰며 검찰총장을 똑바로 바라봤다.
늦은 저녁 청와대.
빠른 걸음으로 소회의실을 들어온 대통령이 구석으로 가 벽면을 노크하자 잠시 후 이 비서관이 문을 열어준다.
“미안, 빨리 한다고 했는데 일정이 밀려서. 어 양 검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하.”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양 검사가 일어나자 대통령이 다가가 두 손을 맞잡고 격하게 흔들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하하하. 일은 잘 되고 있습니까?”
“네. 아무래도 윤곽이 나오다보니 추적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하하하하, 수고하셨어요, 진짜. 어 조 검사. 너도 수고 많았다, 짜식!”
대통령이 오건 말건 샌드위치를 입에 물고 모니터만 보고 있는 조 검사의 등을 대통령이 토닥였다.
“말만 하지 말고 뭐라도 좀 줘요. 이 넓은 청와대에서 하필이면 제일 구석지고 좁은 방을, 휴~”
“알았어, 조금만 참어. 내일 발표하고 나면 검찰청에서도 제일 좋은 사무실로 빼주라 할 테니까.”
대통령의 말에 세 사람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대통령을 쳐다봤다.
“내, 내일이요?”
“형! 미쳤어? 이제 대충 감만 잡은 거라고. 뭐 내놓을 거 하나 없어.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이 비서관과 벌떡 일어난 조 검사가 대통령에게 한소리 하는 사이 양 검사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싼다.
“검찰총장이 지금 중도호텔에서 물산 장 회장이랑 기획실 김 실장이랑 얘기중이래. 이거 맛있게 생겼네. 일정을 당기다보니 나도 밥을 못 먹어서.”
대통령은 사람들이 놀라건 말건 자리에 앉자마자 몇 조각 안남은 샌드위치를 집어 들어 한 입 가득 밀어 넣었다.
“우물, 우물. 셋이 모였다는 건 우리 예상이 맞았고 대신 곧, 율래야 거기 콜라 좀 줘라. 켁켁...... 뭔가 반격을 하겠지. 이런 건은 속전속결이 맞아요.”
시원하게 콜라를 들이 킨 대통령이 넥타이를 풀며 샌드위치를 다시 입가로 가져간다.
“아니 그래도 발표할 내용이 없다고. ‘이럴 거다’란 예상만으로 어떻게 외부에 발표를 해. 그러다 진짜 큰 코 다쳐!”
“너 아깐 확실하다며. 전화로 그랬잖아. 이 회장 반응도 즉각 오고. 흐흐흐, 아까 이 회장한테 전화했더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쪼는 게 확 느껴지더라. 크흐!”
빵부스러기가 묻은 손가락들을 털며 대통령이 말했다.
“우와, 미치겠네. 그땐 예상이 확실하다는 거고 발표는 또 다른 문제지. 우리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 뭘로 하게, 엉?”
“조 검사 말이 맞습니다. 소환조사를 하거나 영장신청까진 아니더라도 드러내놓고 조사를 하기 위한 내용은 아직까진 별로 없습니다. 중도의 변호사들이라면 한 시간도 안 되서 저희 논리를 깨버릴 겁니다.”
“그럼 끝이야, 형. 그나마 추적할 수 있는 증거들은 싹 다 없어지고 기업탄압이다, 쓸데없이 경제 불안을 야기한다면서 집중포화를 맞게 될 거라고.”
듣고만 있던 양 검사가 말을 하자 대통령이 샌드위치를 집다 말고 내려놓는다.
“양 검사님.”
“네.”양 검사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피의사실 공표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동안 검찰에서 주요사건들 수사할 때, 특히 정치권 관련해서 기자회견이나 중간브리핑 할 때 가장 많이 한 말이 뭘까요?”
“형, 아니 대통령님. 지금 한가하게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닙니다.”
조 검사가 말을 하며 대통령의 팔을 잡자 대통령이 쳐다보지 않은 채 그 위에 손을 덮는다.
“조사 중, 조사 예정, 조사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맞습니까?”
“네, 뭐......”
“어차피 소문은 납니다. 총장까지 불려간 마당에 계속 이런 식으로 뒷방에서 조사하다간 저들의 방해공작에 놀아날 수밖에 없어요. 일단 지르고 수습은 나중에 합시다. 축구 좋아하세요? 지금이 역습찬스라고요. 우리 진영에서 막 공격이 이뤄지다가 어쩌다 하프라인 넘어 공이 넘어왔어요. 수비는 두 명, 공격수는 한 명. 우르르 우리 편과 상대편이 내 쪽을 향해 달려옵니다. 어쩔까요? 일단 저쪽 골대를 향해 냅다 뛰어야죠. 어찌됐든 빨리 상대 페널티라인까지 가져가야 패스를 하든 슛을 하든 할 거 아닙니까. 잠깐이라도 멈칫했다간 뒤따라온 수비수들에게 공을 뺏긴다니까요. 그러니 저를 믿고 골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립시다. 내가 어떡해서든 양 검사님 뒤따라 열심히 쫒아갈 테니.”
대통령이 조 검사의 손을 토닥이며 이 비서관과 양 검사를 둘러보지만 선뜻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는다.
“어허! 찬스라니깐, 찬스. 이렇게 머뭇거리단 공 뺏겨요. 이비, 문 실장님 언제 오셔?”
대통령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삐비빅하며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문 시민 비서실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다들 문 실장을 말없이 쳐다보자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통령 옆에 다가온 문 실장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또 막무가내로 밀어 붙이셨죠? 저랑 얘기 하신 다음에 말씀하시라니깐, 참...... 아 뭘 그리 보고 서 있어요? 대통령이 하자고 하면 해야지. 하루이틀 당하는 것도 아니고 용빼는 재주들 없음 얼른 앉아요. 할 얘기 많아.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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