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야 3
중도일보 허 양표 논설주간 사무실.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고풍스런 인테리어의 사무실을 허 주간이 생각에 빠져 이리저리 걷고 있다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책상 쪽으로 다급히 다가와 여러 대의 핸드폰중 하나를 집어 든다.
“......”
연락을 기다리곤 있었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선 상대방이 말할 때까진 기다려봐야 했다.
“저 총장입니다. 허 주간님.”
“허허, 통화하기 힘드네요. 총장님.”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다.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지겠죠.”
“아무리 그래도 통화 한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뭐 차지하고, 요즘 요상한 소문이 돌아서 연락드렸어요.”
“한우리 때문에 그러시죠?”
“한우리도 한우리지만 종편 쪽으로 확대시킨다던데.”
“에이 선배님. 그런 찌라시들 다 믿고 어떻게 일하십니까.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애들이 뭔가 한건 해보려고 그런 거 같은데 한우리에서 일단락 될 겁니다.”
“우리 쪽 정보도 종편 한두 군데는 건드린다고 하던데.”
“한우리 광고영업 해주던 회사가 중간에서 삥땅 좀 친 거 같은데 종편 쪽 물량도 좀 있었나 봅니다. 근데 그렇게까지 건드리다보면 끝도 없죠. 안되면 제가 중간에서 적당히 자를테니 너무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걱정은 무슨. 종편이랑 우리가 무슨 상관이라고, 허허허. 우리야 기사거리 뭐 좀 있을까 해서 전화 드린 거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네, 말씀하세요. 오랜만의 통환데 궁금하신 거 있음 다 물어보십쇼. 하하하.”
허 주간이 총장의 웃음소리에 잠시 뜸을 들인다.
“청와대랑 기 싸움 중이란 얘기도 있던데......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오늘 고려 일보에 난 기사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렇잖아도 아침에 제가 전화해서 한바탕했습니다. 기 싸움은 무슨....... 정권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해도 모자를 판에.”
“총장, 나한텐 다 얘기해도 되요. 회장님께서 우리 총장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제가 모를 리가 있습니까. 근데 정말 아닙니다. 청와대에서도 임기는 지켜주기로 약속했고 저도 그때까진 성심성의껏 일해야죠. 명예롭게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게 제 마지막 임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필요한 거 있음 알려줘요. 나나 회장님이 도와줄 테니.”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이 자리에......”
툭 끊긴 듯 말이 없어진 전화.
“여보세요?”
“아, 네. 선배님. 전화가 이상해서, 하하하. 이래서 옛날폰 들은 못 쓴다니까요. 하하하. 아까 어디까지 말씀드렸죠?...... 아!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다 선배님들 덕분인데 제가 그걸 잊을 리 있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고, 오히려 제가 도와드릴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하하하.”
“그럼 우린 총장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아 다음 연락은 어떻게 하면......”
“이번처럼 메모 남겨주시면 제가 이 번호로...... 네, 이 번호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바쁜데 전화 줘서 고맙고 다음에 밥한끼 합시다. 들어가요.”
“네 들어가십쇼. 선배님.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고 핸드폰들을 서랍 속에 넣다 허 주간은 왠지 뒤통수가 간지러운 걸 느낀다. 뭔가 일을 하다만 것처럼, 이빨에 분명 뭐가 껴있긴 한데 칫솔질도, 치실로도 없애거나 찾아내지 못한 그런 불편함...... 서랍에 넣던 핸드폰중 하나를 다시 꺼내들곤 창가로 다가간다. 확실히 하지 않으면 언젠간 탈이 나는 법이었다.
“어, 난데 회장님 언제 들어오시나?...... 어, 지금 통화할 수 있으면 좋고......”
“총장님, 자꾸 이러시면 저도 커버해드리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총장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으며 젊은 남자가 한 마디 해보지만 총장은 일언반구도 없이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내가 뭘 그랬다고 그러나......”
“말씀하실 때 자꾸 어색하게 툭툭 끊기는데 그럼 상대방이 눈치 챌 거 아닙니까. 무슨 신호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자네가 그렇게 뻔히 보고 있는데, 흠흠......”
“뭐가 그리 찔리시는 게 많으신지 쯧...... 남은 기간,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 손으로 총장님을 잡아넣을 순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알겠네. 내 좀 더 조심하겠네......”
“이거 올라온 김에 가져온 인사발령 건입니다. 싸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총장이 쓱 훑어본 뒤에 싸인을 하자 젊은 남자가 만족스런 표정을 짓는다.
“감사합니다, 총장님. 그럼 전 이만.”
“참, 조 검사.”
깍듯이 90도로 허리 굽혀 인사하고 나가던 젊은 남자를 총장이 불러 세운다.
“한우리 건은 이대로 마무리 되는 거 맞지?”
조 검사로 불린 젊은 남자가 씩하고 웃으며 문을 닫는다.
중도호텔 스위트룸.
직원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고 학수 민정수석이 한 남자의 안내를 받으며 스위트룸으로 들어선다.
“어 학수야. 차 많이 밀리지.”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이 학균 중도그룹 부회장이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나 맞아주지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고 수석은 악수를 하는둥마는둥하며 건너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회장님 언제 오시니?”
팔짱을 끼고 고 수석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 부회장이 창가 쪽에 마련된 바 테이블로 다가가 술한잔을 따른다.
“오늘 오신다고는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네.”
이 부회장이 창가를 내려다보며 무심한 듯 대꾸하자 고 수석의 표정이 날카로워진다.
“오늘도 사람들 시선 피해 오느라 힘들었다. 알고는 있는 거지?”
“에이 그럼. 대 청와대 민정수석이신데...... 얼마나 바쁘신 걸 우리가 왜 모르겠어.”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이 부회장이 술한잔을 더 따라 고 수석 앞에 놓으며 자리에 앉는다.
“아무리 그래도 죽마고우 사이에 술한잔 할 시간이 없으면 쓰나. 안 그래?”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아직 정권초기라 할 일도 많고 사람들 시선도......”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잘못했어. 자, 사정은 나중에 얘기하고 목도 마를 텐데 한잔 쭉 마셔. 너 좋아하는 거잖아. 자 건배!”
이 부회장의 행동이나 말투가 꺼림칙하긴 했지만 원래 남의 기분은 신경 쓰지 않는 사람 이였기에 고 수석은 더 이상 대꾸없이 잔을 들었다.
“얼굴 본지도 오래됐고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보자고 한 건데...... 네가 그리 신경 쓰는지는 몰랐다. 회장님도 오늘 들어오신다고 한 건 맞아. 아직 연락이 없어서 그렇지. 됐지?”
“나도 미안하다. 제대로 되는 일들이 없어서 좀 날카로워 졌나봐. 사과하마.”
“됐다. 우리끼리 무슨 사과는. 한잔 더 줄까?”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 수석의 잔을 집어 드는 이 부회장을 고 수석이 말린다.
“아니, 됐다. 무슨 맛인지도 모르겠어. 오늘은 그만하고 술은 나중에 한잔하자.”
“에이, 그러지 말고 한잔해. 이따 애들도 오기로 했는데.”
“무슨 애들?”
고 수석의 질문에 이 부회장이 알 듯 말 듯 한 미소로 대꾸하며 고 수석의 잔을 채운다.
“너 쓸데없는 짓하면 나 바로 간다.”
“거 참, 아는 사람끼리 모여 오래간만에 술한잔 하자는데 너, 자꾸 이럴래?”
“네가 말한 애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그 여자애들이라면 나 바로 간다고. 알겠어?”
고 수석이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이 가져온 가방에 손을 언자 분위기가 싸해진다.
“하하, 알았다, 알았어. 농담 한 번 했는데 아주 죽자고 달려드네. 됐다, 농담이라고. 거 무서우니 표정 풀고 술이나 한잔해.”
이 부회장이 손을 뻗으며 건배를 제안하지만 고 수석은 잔을 집어들 생각이 없어 보인다.
“더 이상 안 마신다고 했다. 나 또 일하러 청와대로 들어 가봐야 돼.”
“마셔.”
분명 이 부회장의 입꼬리는 웃고 있지만 그 사이에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고 수석도 더 이상은 거부할 수 가 없었다. 이 부회장이 따라준 술을 끝까지 다 마신 고 수석이 잔을 내려놓자 아몬드 통을 고 수석의 앞까지 밀어주며 이 부회장이 입을 연다.
“국세청은 보기 좋게 마무리됐더라.”
아몬드가 쓴 건지 술이 쓴 건지 고 수석이 아몬드를 깨물며 다른 맛을 찾아보려 했지만 이 부회장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늘따라 영 입맛에 맞지 않았다. 도대체 오늘 그것도 방금 전에 만나고 온 일을 어떻게 아는 것일까? 제 아무리 중도그룹의 정보력이 국정원보다 낫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고 수석은 차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아 미안. 내가 너무 앞서갔나?”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 문 실장님이 워낙 바쁘셔서 내가 대타로......”
“짜식 겸손하긴. 그나저나 너 자꾸 그렇게 빼면 은근 나 섭섭하게 생각해. 알지?”
이 부회장이 고 수석의 잔을 다시 채우지만 고 수석은 말리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자기 위주로 말하는 저 말투...... 언제 들어도 적응 안 되는 말투였다.
“한잔해. 뭘 그리 멀뚱거리며 보고 있어?”
이 부회장의 말에 잔을 들지만 아까처럼 그리 쉽게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들어오면서 방안을 살펴보지도 않았었다. 술잔을 입에 대고 찬찬히 방 안을 둘러본다. 율래가 그랬다. 어디를 가나 지켜보는 눈들을 조심하라고......
“왜? 애들 어디 숨겨 놨을까봐? 크크큭. 농담이라니깐 농담. 회장님 오실지도 모르는데 내가 애들을 불렀겠니?”
“아니 그냥. 그나저나 오늘 회장님이 보자고 하신 이유는 뭐야?”
“뭐 있겠어. 청와대 분위기도 궁금하고 너 잘 지내는 지도 궁금하신 거겠지. 우리 회장님이 널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시는데, 잘 알잖아.”
“그러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빨리 하자. 진짜 다시 들어 가봐야 돼.”
고 수석의 재촉과는 상관없이 이 부회장이 느릿느릿 말을 꺼낸다.
“요즘 지지율도 별론데 자꾸 일이 터지는 거 같아서 뭐 도와줄 일이 없나...... 생각하셨나봐. 이럴 때 서로 도우면 좋잖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러게 말이다. 우리 편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이럴 때 회장님이라도 좀 도와주시면 힘이 되겠지.”
“뭐 좀 도와줘? 말만 해. 회장님 오시면 바로 전해드릴 테니.”
“국회의원들 좀 싹 갈아달라고 할까? 아님 언론들 좀 손봐달라고 할까? 네 생각엔 어느 게 낫겠니? 후후.”
“둘 다 해달라면 해주고. 하하하.”
농담으로 하는 말이 농담처럼 안 들릴 때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 수석은 알지 못했다.
“총장은 계속 끌고 갈 거야? 괜히 들쑤셔서 더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거잖아. 애들 관리 하나 못하고 그 인간도 참. 그게 밑에 애들이 딱 봐도 힘이 이젠 없거든. 그러니깐 개기는 거야. 허수아비지 허수아비.”
“우리 쪽 준비해둔 카드는 다 써버렸고 딱히 흠 없는 사람을 임기 전에 자릴 내놓으라고 할 수 도 없으니...... 근데 총장 너희랑 가깝지 않아?”
이 부회장이 자기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술잔으로 입을 가린다.
“다 회장님 사람들이지. 내가 뭘 알겠니.”
“꼭 알아야 하나. 대한민국 고위직 공무원치고 너희 사람 아닌 걸 찾는 게 더 힘들 텐데.”
“너 그런 비밀을 너무 자꾸 입 밖에 꺼내면 위험해진다.”
“크큭,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아는 사실을 굳이 비밀이라고 까지 하기엔 그렇지 않나?”
“하긴, 그렇기도 하네. 하하하.”
“이번 건은 알아서 잘 처리하겠다고 했으니 한 번은 믿고 가야지. 우리도 아직 거기까지 손 뻗치기엔 사람이 없다, 사람이.”
“필요하면 말만 해. 괜찮은 사람들 목록 뽑아 줄 테니. 우리 쪽 사람들이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듣는 다니깐.”
고 수석이 남은 술을 단숨에 마신다.
“좀만 기다려라. 아직 내가 누굴 추천할 단계는 아닌 거 같고...... 정권 안정되면 그땐 도움 좀 많이 받아야지. 회장님 연락 한 번 해보지 그래.”
“어 너 다시 들어가야 된다고 했지? 그러지 말고 바쁘면 들어가. 오셨음 벌써 전화 왔겠지.”
“그럼 그럴까...... 회장님한텐 못뵈고 가서 죄송하다고 좀 전해주고.”
“그래그래. 내가 잘 전할게. 청와대 분이신데 어련하시려고. 아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던 고 수석이 이 부회장의 말에 멈칫한다.
“국회의원이든 언론이든 총장이든 필요한 거 있음 말해. 너 위해서라면 우리가 다 해줄 테니.”
눈을 찡긋하며 이 부회장이 농을 던지자 고 수석이 환하게 웃어 보인다.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갈게.”
서로 웃으며 서둘러 자리를 마무리하긴 했지만 둘 다 찝찝한 마무리라는 걸 모를리가 없었다. 고 수석이 멀어지는 걸 확인한 이 부회장이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어, 난데 오늘은 올 필요 없고...... 어 그래. 약속 취소됐으니깐...... 누구?...... 아 걔, 어 알아. 오늘 나오기로 했다고?....... 어, 어. 잠깐만...... 일단 전화 끊어봐. 아니 취소가 아니라 잠깐 기다려보라고. 내가 멤버 다시 준비해서 금방 전화할게. 응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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