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과장
3
“좋네! 그 대신 내 말을 명심해 듣게.”
“뭐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이제 자세가 역전이 되었다.
“내 자네를 아껴서 하는 말이네만.......”
‘두 번만 아꼈다가는 사람 잡겠군.’
태준의 생각이야 어떠하든 일단 운을 뗀 방 이사가 망설임 끝에 말했다.
“지금과 같이 하다가는 내 장담하건데 1년 안에 망할 것이니, 생각과 태도를 180도 달리 하시게.”
“알겠습니다.”
답한 태준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말했다.
“가시죠!”
“어딜?”
“룸싸롱!”
“이 사람이 지금 몇 신데?”
방 이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태준이 자신의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 차차! 그럼, 저녁 때 뵙겠습니다.”
꾸벅 머리를 조아린 태준이 씩씩하게 밖으로 걸어 나가자 뒤에서 방 이사가 말했다.
“사직원은 내고 가야지.”
“협력업체로 등록되는 날, 바로 내겠습니다. 그럼, 저녁 때 모시러 오겠습니다.”
돌아서서 꾸벅 다시 한 번 인사를 한 태준이 이내 발길을 돌렸다. 방 이사의 답변도 채 듣지 않고.
* * *
이날 저녁 오후 6시.
태준은 사원전용 주차장에서 방 이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차 안에서. 그런 그에게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퇴근시간임을 직감한 태준이 차문을 열고 나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마침 방 이사가 송 차장과 함께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송 차장을 본 태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존경(?)과 경멸 사이를 오가는 기묘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송 차장이야말로 방 이사가 이사로 승진하기 전까지는 자신과 매우 유사한 처지였다. 그 또한 과장으로 7년을 재직하고도 여전히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방 이사가 이사로 승진한 다음날부터 무슨 결심을 했는지 그의 꼬붕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견원지간이었던 그가. 누가 보거나 말거나, 공적이나 사적 자리에서 한결같이 그의 꼬붕 행세를 한 것이다.
한 번은 이런 광경도 보았다. 아내와 모처럼 외식을 하러 모 유명 뷔페 점에 들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태준은 두 사람을 멀리서 보게 되었다.
그들도 금방 왔는지 막 방 이사가 의자에 앉으려 하고 있었다. 이때 송 차장은 벌써 그의 뒤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방 이사가 벗어주는 양복 윗저고리를 받아들더니, 그의 의자 등받이에 고이 거는 것이 아닌가.
이 모습이 태준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 다고 절대 아부를 몰랐던 그의 머리에 지금도 강력한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물론 이 후에도 송 차장은 음식을 혼자 담아 부지런히 나르는 광경이며 여타 밸도 없는 듯한 모습을 수없이 연출했었다.
아무튼 그런 송 차장과 방 이사가 다가오자 태준은 재빨리 두 사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안 볼 수 없게 된 방 이사가 말했다.
“자네 정말 왔는가?”
“모시겠습니다. 단 저 혼자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사님!”
“여기 송 차장은 자네도 알다시피 내 분신 같은 사람이니 괜찮네.”
“그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이 사람이........!”
이 지경까지 되자 송 차장이 알아서 기었다.
“이사님! 오늘은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끙.......!”
“그럼.......!”
고개를 조아린 송 차장이 멀어지자 태준이 재빨리 말했다.
“모시겠습니다.”
말과 함께 손을 내미니 마지못해 방 이사가 자신의 차키를 태준에게 주었다. 곧 최고급 승용차 운전석에 앉은 태준이 사방을 만지기 시작했다. 이 모양을 본 방 이사가 짜증스런 투로 물었다.
“왜 그래?”
“이런 최고급 승용차는 처음이라 서요.”
“참 내.......!”
어이없는 웃음을 짓던 방 이사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 같더니 뒷좌석 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차 밖에서 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내가 운전하고 갈 테니.”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던 태준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오자 그가 운전석에 앉으며 낮게 투덜거렸다.
“앓느니 죽지.”
그러나 태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차를 한 바퀴 돌아 조수석에 가서 앉았다. 그런 그를 힐끔 보던 방 이사가 말했다.
“안전벨트나 매.”
“네, 네!”
곧 차량은 주차장을 빠져나오는가 싶더니, 수위들에 의해 한창 검색이 진행되는 정문도 유유히 통과해 이내 4차선 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봉명동 4거리 신호등에 결렸던 차량은 곧 좌회전을 하는 것 같더니, 방 이사의 단골 룸싸롱도 지나 운천동 방면으로 향했다.
이에 억지로 몇 번 회식에 참석해 그의 단골 룸싸롱을 잘 알고 있던 태준이 방 이사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자네 지금 바로 룸싸롱으로 직행하려고 했나?”
“네!”
태준의 서슴없는 대답에 또 한동안 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방 이사가 깨우쳐주듯 말했다.
“지금은 초저녁이라 너무 일러. 아직 아가씨들도 출근하지 않았단 말일세. 그러니 입가심부터 하고 얼큰해서 들어가자고.”
“아, 네!”
그러는 사이 차는 운천동을 지나 율량동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10분을 더 달린 차량은 도심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 ‘상록수 가든’이라는 곳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한참이건만 이곳만은 한마디로 아직도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아니 일 년 내내 그런 집이었다. 작은 전구들이 상록수며 곳곳에 설치되어 형형색색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눈밭에 그런 장관을 연출하니 더 멋져 보였다.
곧 넓은 주차장으로 차가 진입하자 대기하고 있던 종업원이 차를 쫓아 달려왔다. 이내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구십 도로 허리를 꺾은 젊은 종업원이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팔각정! 불 눠놨나?”
“아직.......!”
난처한 표정으로 종업원이 대답하자 방 이사가 지나가는 말 비슷하게 말했다.
“이 집도 얼마 못 가겠군.”
“겨울이라 서요.”
“누가 겨울인지 몰라?”
쩔쩔 매며 종업원이 말했다.
“특실로 모시겠습니다. 이사님!”
“자네 날 아나?”
“우리 집의 V VIP 손님인데 모를 리가 없죠.”
그제야 표정이 조금 누그러진 방 이사가 종업원을 재촉했다.
“앞장서시게.”
“네, 이사님!”
곧 세 사람은 일층을 지나 이층 매실 앞에 섰다. 그러자 또 다시 90도로 허리를 접은 잘생긴 총각이 말했다.
“곧 아가씨를 들여보내겠습니다. 아니 저기 오네요.”
“이제야 뭐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군.”
멀어져가는 종업원을 향해 한마디 던진 방 이사가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태준도 그의 뒤를 따랐다.
곧 두 사람이 착석하자마자 감청색 투피스 정장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맨 여종업원이 따라 들어와 고개를 조아렸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외투나 좀 벗거든.”
“아, 네! 죄송합니다.”
급히 고개를 꺾는 아가씨를 음충맞은 미소와 함께 방 이사가 아래위로 훑었다. 그 순간 태준의 머리를 강타하는 생각이 있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준이 급히 방 이사 뒤로 돌아가 말했다.
“벗으시죠.”
“자네.......!”
더 이상 말은 입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았다. 단지 태준을 아래위로 훑는 방 이사의 표정이 과히 볼만 했다. 아니 마치 지신을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하는 방 이사의 눈길에서 태준은 내심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참았다.
“벗으시죠.”
“응, 그래. 그런데 자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변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제 명에 죽을 것입니다.”
“하하하.......! 이제 제법 썰렁한 농담도 다하고.”
어찌되었든 태준의 농담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방 이사가 순순히 외투며 양복윗저고리를 벗어 태준에게 건넸다. 태준은 이를 조심스럽게 받아 저 멀리 방구석에 놓인 나뭇가지처럼 생긴 횃대에 걸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니 그때까지 메모판을 뒤적이던 방 이사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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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고맙습니다!
소원성취하는 한 해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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