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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망친 악녀가 날 너무 좋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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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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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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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아가씨가 이상하다

DUMMY

후작가의 유일한 자식인 엘리제 버몬트가 집사 레온하르트 번스타인을 만난 것은 5살의 일이었다.


미운 4살도 지났으나 이미 이 시절부터 엘리제는 성악설의 산증인 같은 존재였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건 조금도 견디지 못하는 성미였고 시종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일단 손부터 나가고는 했다.


가지고 싶은 건 가지고 하고 싶은 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고압적인 성격.


어리셔 그렇다.


커가면서 교육하면 달라질 거다.


그런 희망을 무참히 박살이라도 내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교사를 붙여도 크게 달라지는 게 없다. 귀족 영애로서 예절 같은 건 제대로 익혔지만, 사갈 같은 품성은 왕국 최고의 교사조차 교정을 포기할 정도였다.


그런 엘리제 곁을 10년이나 지킨 레온하르트.


애칭 레오.


엘리제가 큰 추문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레오의 공이 정말 크다는 걸 후작가의 모두가 안다. 그가 영애를 잘 제어해서? 아니다. 최후의 일선을 넘기 전에 레오가 곁에서 그 히스테리를 다 받아낸 덕분이다.


그나마 레오라는 필터를 한 번 거친 덕분에 엘리제의 잔악무도한 행실이 순해졌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후작가문의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도 덮고 묻는 건 한계였을 것이다.


각종 추문에 휩싸였겠지.


상황이 이러하니 양심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면 레오에게 감사하는 게 정상이지만, 당연히 엘리제는 그런 마음 같은 건 조금도 보인 적이 없었다.


후작 부부가 레오의 공을 크게 사고 있긴 하지만··· 정작 엘리제에게는 감정 쓰레기통 대우만 24시간 365일 받아왔다.


어떻게 해야 사사건건 귀찮게 구는 저 인간을 키울 수 있을지, 감사는 고사하고 그런 생각과 행동으로 가득했다. 본인 기분이 특히 심하게 나쁜 날에는 차라리 어디 크게 다쳐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아무렇지 않게 독설을 쏟아내기까지 했다.


레오가 자신에게 봉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거였고 그 충성에 보답할 생각이나 고맙게 생각하는 마음 같은 건 슬라임 눈물만큼도 없다는 거다.


평생 영애 엘리제에게 감사 같은 건 받을 일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레오 역시 그런 마음 진작 접고 살았는데,


"레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지시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꿈에서도 본 적 없는 그 일이 뜬금없이 벌어진 것이다.


갑자기 피크닉을 나가고 싶다는 엘리제의 요구에 따라 마차를 타고 저택을 벗어나던 중에 나온 말이었다.


맥락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그 발언에 레오는 덜컥 말문이 막히고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이건 또 무슨 패턴이지?’


평소였다면 지시할 일이 있었으니 불렀겠지.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사는 거야?


별 이유도 없이 이런 모욕을 뱉으며 터무니없는 요구나 했을 사람이 돌연 고맙다고 말한다.


항상 감사하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소리는 죽는 날까지 들을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예상이 빗나갈 줄은 몰랐다. 너무나 예외였고 그래서 역으로 불안했다.


감동이나 아가씨가 변하긴 하셨구나, 하는 그런 감탄보다 식은땀이 줄줄 흐르려고 한다.


요즘은 무슨 욕을 해도 반응을 안 보이니 패턴을 바꾼 건가 싶다.


칭찬하고 기분 좋게 만든 후에 패대기치려는 그런 계산인가 싶었던 것이다.


다 죽어가는 목숨을 구해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고맙다는 말 한마디 안 하고 왜 더 빨리 구해주지 않았느냐고 따귀를 때릴 것 같은 엘리제 버몬트 영애가 지금 감사하다고 한 거야?


예측 불가능한 사태에 위기감이 경종을 울려대는 레오였다.


"제, 제가 뭔가 잘못한 일이라도···. 시정하겠습니다."


이럴 때는 일단 납작 숙이는 게 답이다.


폭풍이 지나갈 때 그 폭풍에 정면으로 맞서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잔뜩 웅크리고 부디 무사히 폭풍이 지나가길 기도하는 게 정상 아니겠는가?


비굴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레오는 긴장한 기색으로 엘리제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 레오를 보며 희미한 슬픔과 분노가 교차하는 눈빛을 보였다.


분노.


그 감정을 엘리제의 눈에서 읽어낸 순간 레오는 각오를 다졌다.


자기 노림수가 통하지 않았다고 어쩌면 더 화를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엘리제가 분노를 향한 대상은 레오가 아니었으니까.


지금 엘리제가 분노하는 대상은 과거의 자기 자신, 레오에게 모질게 굴었던 자신이었다.


그 증거로 엘리제는 자신이 손을 들기 무섭게 뺨이라도 때릴 줄 알고 움찔하는 레오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애틋하게 뺨을 쓰다듬었다.


때리는 대신, 마치 아기라도 쓰다듬는 것처럼 자기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레오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심이에요. 정말 레오에겐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지금부터는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했다면서 웃는 엘리제.


사교계의 꽃.

백금의 아가씨.


사교계 데뷔 이후 이런 수식어가 끊이질 않고 따라붙는 엘리제의 미소는 가히 아름다웠다.


성격과 미모가 반비례라도 하는 건지 추악한 마음과 달리 외모만은 꽃도 부러워할 미모였다. 그런 엘리제가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으니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설명하면 입만 아픈 수준이다.


하지만 10년 동안 매일 같이 본 탓도 있고 저 미모에 홀려 수렁에 빠진 남자를 한두 번 본 게 아니라서.


이젠 자신을 그런 식으로 가지고 놀고 파멸시켜 쫓아낼 생각인가 의심만 들었다.


그런 레오의 반응에 뺨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면서 엘리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이건 다 업보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살짝 입술을 깨물며 안타까운 듯, 슬픈 듯 이해 못할 소리를 중얼거리는 엘리제.


가련함 그 자체인 모습이었지만 그녀가 교양으로 연기 수업도 받았고 그 연기력으로 숱한 영식들을 희롱해온 걸 아는 레오는 고작 이 정도로 흔들리지 않았다.


부동심을 유지한 채 자신을 시험하는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바란다.


그런 레오의 반응에 엘리제는 고뇌하고 번민하던 기색을 싹 감춘 채 분위기를 바꾼다.


"지금 레오의 실력이 소드 유저 상급이었던가요?"


"예? 그렇습니다."


뜬금없이 검술 실력을 체크하는 주인에게 레오는 어리둥절한 마음을 숨기며 또랑또랑 답한다.


"겨우 스물에 소드 유저 상급! 과연 레오네요."


진심으로 훌륭하다는 듯 말하는 엘리제를 앞에 두고 레오는 똥 씹은 표정을 감추느라 혼났다.


‘······놀리는 건가?’


만약 레오가 기사 집안 출신이 아니었다면 확실히 대단한 성취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레오는 대대로 버몬트 후작을 모시는 기사 가문 출신이다.


체계적인 검술을 배웠고 어린 나이에 마나연공법도 익혔으며 보양식 수준이지만 영약까지 먹었다.


그런 주제에 상급이고 뭐고 아직 마나 유저인 것이다.


괜히 레오가 과거 성인이 된 후에 집을 떠나면 칼밥 정도는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한 게 아니지.


자신의 재능이 평범하다는 건 레오가 가장 잘 알고 있었고 아마 기사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소드 유저조차 되지 못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스물에 벌써 소드 유저 상급이라고 칭찬하니까 조롱처럼 들릴 수밖에.


다른 사람이었다면 잘 몰라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수도 없이 많은 기사에게 구애받는 엘리제 버몬트가 그런 걸 모를 리가 있나.


애초에 버몬트 후작가는 대단했던 기사가 세운 가문이다.


지금은 대를 거듭하면서 무력보단 다른 걸 주력으로 삼는 가문이 되었지만, 전통만은 변하지 않아 이렇게 보여도 엘리제 역시 검술에 기초적인 소양이 있다.


그 기초적인 소양조차 객관적으로 레오 이상이었고, 아마 끈기 있게 검술에 전념했다면 엘리제는 대단한 기사가 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았을 거다.


정작 그 끈기라는 게 그녀와 가장 거리가 멀다는 게 문제였지만.


아무튼 그런 주제에 소드 유저 상급이라 대단하다고 칭찬하니 듣는 레오 입장에선 칭찬인데도 속이 불편했다.


"그러면 2년 후 아카데미에 갈 때 레오도 호위로 따라갈 수 있겠네요."


그러거나 말거나 생글생글 웃으면서 엘리제는 자기 할 말을 이어 나가는데, 그걸 듣는 순간 레오는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끔찍한 소리란 말인가?


왕국의 귀족가 자식들은 예외 없이 거치게 되는 왕립 그랑시아 아카데미.


3년의 교육과정을 거쳐 왕국을 이끌어갈 동량을 두드리고 연단 한다는 취지였는데 그 취지에 맞게 개개인이 시종을 대동할 수는 없다.


예외적으로 안전을 위한 조치로 딱 호위 한 사람만 동반 입학이 가능했고 당연히 레오는 그걸 이용해 3년 동안 잠시나마 자유를 찾고 숨 좀 돌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아가씨가 뭐라고 한 거야?


자신을 호위로 대동하겠다고 했나?


"그···."


귀를 의심하고 싶은 소리에 레오는 전율하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 호위는 최소 엑스퍼트 하급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호위는 호위다워야 호위다.


경호할 실력도 없는 사람을 호위라고 부르진 않지.


"맞아요. 하지만 아직 아카데미 입학까진 2년이나 남았잖아요?"


이 말은 즉 2년 안에 소드 유저 상급을 넘어 엑스퍼트에 이르면 된다는 거였다.


이 말에 레오는 속으로 헛웃음밖에는 흘릴 수가 없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였다면 세상에 오르지 않는 성취 탓에 번뇌하는 검사는 없겠지.


지금 당장 레오가 소드 유저 상급이니 한 단계만 올리면 된다고 쉽게 생각해선 곤란하다. 원래 그 한 단계 올리기가 가장 힘든 법이니까. 소드 유저에서 엑스퍼트로 넘어가는 일은 유저 하급에서 상급으로 가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레오는 자기 분수를 잘 안다.


어려서부터 주변인에게 숱하게 들어온 말이 있으니 모를 수가 없지.


특히 7살 어릴 적 스쳐 가듯 만나 한 수 가르쳐준 선생님의 평가가 냉혹했었다.


"밥 한 끼 얻어먹은 값은 하고 싶어서 남는 무공이라도 하나 전수해줄까 했다만, 관두자. 괜히 헛바람 들어서 칼침 맞을라. 태극권 초식 몇 개 알려줄 테니까 그걸로 분수에 맞게 동네 골목대장 노릇이나 하고 놀아라."


딱 봐도 아버지보다 강해 보이던 고수의 신랄한 발언은 반발심도 안 들 정도로 아픈 교훈을 주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더러 엑스퍼트, 그거 되면 될 거 아니냐는 말을 하니까.


벽을 넘어 경지에 이르는 게 애들 장난도 아니고.


소설처럼 마침 기연이 굴러다녀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손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무슨···.


"그래요, 바로 그거예요. 기연."


엘리제의 욕받이 노릇에서 잠시나마 숨 좀 돌리고 싶었던 레오는 필사적으로 안 되는 이유를 설파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엘리제는 너무도 쉽게 얘기한다.


"실은 지금 그 기연, 가지러 가는 거랍니다."


"······예?"


건방지게 주인이 말하는데 반응이 그게 뭐냐고 맞을 거 각오하고 되묻는 레오.


"후후."


각오가 무색하게 얼빠진 레오의 반응에 엘리제는 사랑스럽다는 듯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 아가씨의 모습에 레오의 혼란은 한없이 커지기만 한다.


작가의말

선작, 추천, 댓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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