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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님의 서재입니다.

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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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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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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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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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04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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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2장 살인의 목적 (2)

DUMMY

“안부 전해줘. 이모 아들은 내가 잘 데리고 있다고.”


[스피커폰으로 듣고 계셔.]

이희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오은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다. 시키는 건 다 할 테니 내 아들 굶기지만 마라.]

오은명은 심상치 않은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이모, 언제부터 듣고 계셨어요? 규진이 바꿔 드릴게요.”

유엔이 공중전화 수화기를 규진에게 내밀었다.


“잘 지내셨어요?”

[그래. 그런데, 아들 아까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시노 집에는 왜 가겠다는 거야? 무슨 일 생기면 어쩌려고.]


“시노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나 봐요. 일단 믿어보려고요.”

[한 가지만 부탁할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잊으면 안 돼.]

아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거라고 믿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불안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강제로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건 오은명의 방식이 아니다.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바보를 기르는 것과 같다.


“네, 그럴게요.”

[저녁에 다시 전화해 줄래? 손님 올 시간이라서.]



규진이 전화를 끊자 유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터미널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도 화난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규진이 뒤따라 오며 유엔을 불렀다.

“어디 가? 서울 안 가?”

“그러니까.”

유엔은 무뚝뚝하게 대답하고는 제 갈 길만 갔다.


거제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도착한 터미널 간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규진은 유엔에게 다시 물었다.

“터미널이 여긴데 어디 가겠다는 거야?”


유엔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너야말로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내가 같은 터미널에서 버스 갈아타는 거 본 적 있어? 혹시라도 누가 미행하는 사람 있나 몇 달이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숨어지냈는데, 넌 지금 시노 집에 빨리 가겠다고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야? 거기가 어디라고 겁도 없이 가겠다는 거야? 응?”


유엔은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울먹울먹한 얼굴로 규진을 노려보았다. 규진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얼어붙었다.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늦기 전에 서울 데려다줄 테니까.”

유엔은 진주 시외버스터미널 앞에 대기 중인 택시에 올라탔다.


규진이 허둥지둥 택시에 올라타자 유엔이 낮게 말했다.

“기사님 진주역으로 가주세요.”


* * *


나나미는 불안한 마음에 주먹을 꼭 쥐었다.


자동차 뒷좌석에 같이 앉은 이지영은 차가 출발한 이후 단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목적지가 어딘지 말해주지도 않았다. 나나미는 일본에서 납치되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몸서리가 났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디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마침내 이지영의 교활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궁금합니다.”

약자로서의 겸손함을 담아 나나미는 짧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옆에 앉았으니 최소한 친구인 척하는 게 좋겠죠?”

“네?”


“친구가 되려면 일단 숨기는 게 없어야겠죠? 이 자리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세요. 내 남편 말고 그쪽 남편요. 지금. 스피커폰으로.”

이지영은 거절할 수 없는 단호한 말투로 명령하듯 나나미에게 말했다.


기선이 제압된 나나미는 저도 모르게 전화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래도 이유는 물어봐야겠지?

“왜요?”


“지금 만나러 간다고.”

무슨 소리지, 의심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최대식에게 전화걸었다.



“오랜만이야.”

[무슨 일 있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최대식의 떨리는 음성이 들렸다.


“지금 만나러 갈게.”

[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온다는 거야?]


“글쎄. 그건 별로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네. 옆에 앉은 사람이 아는 거 같으니까.”

[누구? 시노는? 시노는 어디 있어?]


“별 소식 없는 거로 봐서 잘 지내나 봐.”

전화기에는 거친 숨소리만 들려올 뿐 최대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지영은 팔을 뻗어 나나미 전화기의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너무 떨고 있는 거 같아서 신랑 목소리라도 좀 들으시라고 전화걸라고 했어요. 이제 좀 안심이 되세요? 놀라는 거 태아에게 안 좋잖아요.”

이지영이 능청스럽게 이죽거렸다.


“남편에게는 임신한 거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시나 봐요?”

“선수가 많아지면 누군가는 한 골 넣겠죠. 속죄든 단죄든 그게 뭐 중요한가요?”


목적지가 가까워졌는지, 이지영과 나나미를 태운 차는 어느새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시골길 끝 어느 저택 대문 앞에 최대식이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지영과 나나미를 번갈아 보는 최대식은 미간을 찌푸리며 긴 숨을 내쉬었다.


* * *


이지영은 경호원과 운전 기사에게 그대로 차에 있으라고 말을 남긴 뒤 차에서 내렸다. 반대편 문으로 내린 나나미는 어색하게 최대식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 같이 들어가시죠. 초대받고 가는 거니까 안심하세요.”

이지영은 최대식과 나나미를 흘끔 보더니 대문 옆에 달린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이 열리자 마당을 가로질러 보이는 야외 테이블에서 오은명이 기다리는 게 보였다. 최대식이 따라 들어오는 걸 보고 오은명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입술을 굳게 다물더니 태연한 척 손님을 맞이했다. 이쪽에 앉으시죠, 오은명은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은명입니다.”

오은명이 최대식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물론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었지만, 둘 다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최대식은 소매에 손바닥을 쓱쓱 문지르더니 주눅 든 표정으로 오은명의 손을 잡았다. 이른 가을이었지만 오은명의 손은 차가웠다.


오은명이 곁눈질로 이지영의 표정을 살폈지만, 최대식을 의심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희경은 쟁반에 담긴 생수 페트병 다섯 개를 야외 테이블에 놓았다.


“독이 든 게 한 병 있으니까 잘 골라서 드세요.”

오은명이 이지영을 쳐다보며 농담을 던지더니 자기가 먼저 하나 골라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아수라발발타에 소질이 없어서 전 사양할게요.”

이지영이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느리게 말했다.


이희경은 이지영보다 최대식에게 더한 거부감을 보였다. 독한 말을 퍼부을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었지만, 어려운 자리였기 때문에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서로 알고 지낸 지 오래되었는데 인사도 못 한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축하할 소식도 전할 겸.”

이지영은 나나미를 보며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일단 소개할까요? 저분은 저랑 동서지간인 형님 오은명 여사님. 동광무역의 두 번째 대주주 되시는 분입니다. 앞으로 지분 관계가 좀 더 복잡해질 거란 소식을 전해 드리려고 오늘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최대식, 다마루 나나미 부부. 그리고 저기 저분은 가정부? 아, 그냥 가정부가 아니시구나. 돌아가신 김 실장 부인이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어금니를 깨문 이희경을 향해 이지영은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계속해봐.”

분위기가 험악해진 걸 느낀 오은명이 이지영에게 낮게 소리쳤다.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말할게요.”

나나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며 가방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아까 이지영에게 보여주었던 초음파 사진이었다.


“전남편 앞에서 이런 거 내밀어서 미안하지만, 임신 30주 초음파 사진입니다.”


나나미는 최대식을 ‘전남편’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어 불렀다. 최대식의 눈빛이 복잡하게 떨렸고, 얼굴 근육은 여러 방향으로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은명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초음파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몸길이를 의미하는 [BPD 7.46cm]라는 글자 옆에는 [29w 5d]라고 임신 기간이 인쇄되어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동광무역 지분 4%의 권리를 가진 아기라고 하면서 나나미가 한 시간 전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또 뭘 들고 왔는데, 아! 상속포기각서. 그다음부터는 차마 제 입으로는 말 못 하겠네요. 어지간히 끔찍한 소리를 해야 말이죠.”

오은명이 침묵하자 이지영이 차가운 말을 쏟아부었다.


나나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숙였던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부인이 낳은 자식을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봅니다, 박재열 대표. 뒤늦게 후계자를 바꾸려고 하는 걸 보니 말입니다. 그래도, 같은 여자 끼리 먼저 얘기하는 게 도리인 거 같아서요. 최소한의 성의만 보이면 제가 상속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릴 겸.”

나나미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허리를 곧게 펴고 턱을 당긴 채 또박또박 말했다.


“중요한 건 쏙 빼고 말하네요. 들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즉시 경찰에 잡혀갈 만한 안락사 약을 들고 와서 박재열에게 먹이라고 한 얘기가 먼저 나와야죠.”

이지영은 남편을 박재열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두 사람 얘기는 잘 들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도와드릴 일이 뭔지 본론부터 들어볼까요?”

오은명은 이지영을 지그시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솔직히 상속 포기라는 조건이 매력적이긴 해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건강한 남자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으면 경찰도 그냥 넘어갈 리 없잖아요. 제가 바보도 아니고, 좀 더 말이 통하는 분들이 함께 의견을 모으다 보면, 불륜 저지른 상간녀 머릿속에서 나온 말보다는 좀 더 현명한 생각이 나오지 않을까 해서 모이자고 했습니다.”


불륜 같은 거 아니라고 그 자리에서 반박하고 싶었지만, 나나미는 말을 아꼈다. 먼저 흥분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에게 당한 이야기는 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짐은 주고 싶지 않았다. 불륜 같은 게 아니라는 건 최대식도 알고 있을 게 아닌가? 나나미는 간신히 참고 있는 최대식의 인내심에 불을 붙이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내 집에 모여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지 의논하자는 건가? 그런 거라면 나랑은 상관없는데, 정말.”

오은명이 여유를 부리며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히자, 이지영이 앞으로 허리를 숙였다.

“상관이 있어서 찾아온 겁니다. 박씨 집안의 일은 박씨 집안에 맡기고 전 친정으로 돌아갈 생각이거든요. 아버님이 남긴 유산은 유언대로 조카가 상속받고, 남편이 남길 유산은 제가 낳은 아들딸들이 받고. 어때요? 형님이 애타게 원하던 그림 아닌가요?”


“이제 와서 남편을 버리시겠다, 그 말인가?”

“밖에서 질질 흘리고 다니는 걸 참아주는 것도 정도껏 이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을 저 자리까지 올려줬는데 솔직히 실망스럽네요.”

맨발로 더러운 걸 밟은 표정으로 이지영은 테이블에 양팔을 올리더니 손에 깍지를 꼈다.


“그래도 인정머리 없네. 20년이나 한 이불 덮고 산 남편인데.”

“우리 형님 은근히 로맨틱한 면이 있으셨네. 각방 쓴지는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어떻게 인정머리도 절반으로 깎아주시려나? 그런데, 지금 로맨스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남편 불륜 때문에 제가 화내는 거로 보이십니까? 세상에는 남의 눈이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최소한 기본적인 선은 지켰어야죠. 죽어가는 암 환자 앞에서도 머릿속에 그 생각만 득시글한 게 그게 인간입니까? 그게 어디 소문이라도 나 봐요, 회사 체면이 뭐가 됩니까? 안 그래도 성격 깔끔한 아들이 얼마나 실망이 크겠습니까?”


말끝마다 ‘불륜’이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하는 이지영의 독설에 나나미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걸 본 오은명이 이지영의 말허리를 잘랐다.

“자네보다 도덕심이 낮다면 정말 심각한 수준인 건 인정하지. 그래서, 인류 평화를 위해서 큰 결심이라도 한 건가?”


“제 손에 피 묻히는 게 아니라면 상관하지 않겠다는 정도.”

이지영은 남일 말하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로 거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해? 게다가 내 집에서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얘기는 그만하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오은명이 잔뜩 여유를 부리자 다급해진 건 이지영이었다.


“좋아요.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거래가 가능한 조건을 먼저 말씀하세요.”


작가의말

살벌하지 않은 말 한마디가 없었습니다. 적의와 살기를 가득 품은 채 화살처럼 날아다니는 말들은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날카롭게 박혀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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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23장 타이거 앤드 울프 (3) 19.03.13 61 0 13쪽
71 23장 타이거 앤드 울프 (2) 19.03.11 60 0 12쪽
70 23장 타이거 앤드 울프 (1) 19.03.08 52 0 13쪽
69 22장 살인의 목적 (3) 19.03.06 51 2 12쪽
» 22장 살인의 목적 (2) 19.03.04 70 1 12쪽
67 22장 살인의 목적 (1) 19.02.28 73 1 11쪽
66 21장 허술한 작전 계획 (3) 19.02.27 66 2 12쪽
65 21장 허술한 작전 계획 (2) 19.02.25 75 2 11쪽
64 21장 허술한 작전 계획 (1) +1 19.02.22 86 2 13쪽
63 20장 염곡동 살인사건 (7) 19.02.20 69 2 12쪽
62 20장 염곡동 살인사건 (6) 19.02.18 117 3 14쪽
61 19장 숨탄 5월 (3) 19.02.15 76 3 13쪽
60 19장 숨탄 5월 (2) 19.02.13 82 2 12쪽
59 19장 숨탄 5월 (1) 19.02.11 72 2 12쪽
58 18장 가벼운 것들의 무게 (4) 19.02.08 78 1 13쪽
57 18장 가벼운 것들의 무게 (3) 19.02.06 78 2 13쪽
56 18장 가벼운 것들의 무게 (2) 19.02.04 92 2 12쪽
55 18장 가벼운 것들의 무게 (1) 19.02.01 93 2 12쪽
54 17장 이중 납치 (3) 19.01.30 86 1 13쪽
53 17장 이중 납치 (2) 19.01.28 80 2 15쪽
52 17장 이중 납치 (1) 19.01.25 79 1 11쪽
51 16장 함정에 빠진 속임수 (3) 19.01.23 77 2 12쪽
50 16장 함정에 빠진 속임수 (2) 19.01.21 113 1 12쪽
49 16장 함정에 빠진 속임수 (1) 19.01.18 92 2 12쪽
48 15장 햄릿의 칼끝 (3) 19.01.16 87 1 12쪽
47 15장 햄릿의 칼끝 (2) 19.01.14 87 1 11쪽
46 15장 햄릿의 칼끝 (1) 19.01.11 80 1 13쪽
45 14장 거짓말 게임 (3) 19.01.09 85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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