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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님의 서재입니다.

일곱 개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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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야
작품등록일 :
2018.08.2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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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5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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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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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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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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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27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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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21장 허술한 작전 계획 (3)

DUMMY

“엄마가 다른 사람으로 변했어. 엄마 마음속에 뭔가 이상한 게 자라고 있어.”


시노는 말을 멈추더니 한참 망설였다.


“나나미가 좋아하지 않을 거야, 너 이러고 다니는 거.”

“너 정말 공감 능력 제로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어.”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유엔은 태연하게 말했다.


시노가 분한 표정으로 유엔을 꼬나보자, 규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나, 눈치가 없어서 미안한데, 도대체 왜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건지 그냥 말해주면 안 될까?”


시노는 규진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단하게 생각했어, 아픈 엄마 죽고 나면 누가 나 찾을 일도 없을 거라고. 사실 난 숨어서 지낼 만큼 누구에게 큰 원한을 산 것도 아니잖아? 나야 뭐 솔직히 유산이랑 상관도 없는 사람이니까, 조용히 수능 준비나 하다가 잠잠해지면 대학교 다니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

“사실 맞는 말이야.”

유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런데, 엄마 때문에 변수가 생겼어. 적당히, 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야, 마지막까지.”

시노가 한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서 어쩔 생각이야?”

“뭐라도 해봐야지.”


“지난번처럼 설마 이번에도 무모하게 덤빌 생각은 아니겠지? 너 창고에서 구하느라 규진이와 내가 위험에 빠졌던 거 잊지 마.”

“그래서, 같이 계획 세우자고 만난 거잖아.”


“좋아, 그럴듯한 계획이라면 협조할게.”

“협조는 내가 하는 거지. 유산 상속받고 싶어도 못 하는 건 너희들이잖아. 박재열, 이지영 무서워서. 내 말이 틀려?”

시노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소리치더니 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틀린 거 없어. 숨어서 기회만 엿보는 중이지, 7개월째.”

규진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 다 같이 서울로 올라가서 함께 힘을 모아보는 거 어때?”

시노의 말에 유엔이 손을 들어 팔을 빙빙 돌리며 계속해봐, 라고 말했다.


“일단 엄마, 아빠를 만나서 무슨 계획인지 물어보고 서로 같이 돕는 거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쉽게 생각해. 아무리 나쁜 짓을 밥 먹듯이 했던 사람들이지만,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에 예전처럼 무식하게 공격하지는 않을 거야. 난 박재열을 맡을게. 예전에 하던 거래 계속하고 싶다고. 만나자고 하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믿어 줄까?”


“도쿄에서 히로시마까지 다 합해도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겨우 한 달이야. 헤어진 지 일곱 달이나 지났어. 게다가 너희 둘은 사귀는 사이라고 벌써 소문이 났어. 박재열이 봤을 때 아니 누가 봐도 규진이는 내게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보일 거야.”

사실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이라는 뒷말은 입안에 숨기고 시노는 입술을 굳게 닫았다.


“그렇다고 치고, 계속해봐.”

유엔이 광대뼈 주위에 근육이 뭉치도록 인상을 쓰며 다그쳤다.


“내가 박재열의 시선을 끄는 동안 규진이는 상속을 집행하는 거지. 이지영은 우리 엄마가 맡을 수 있을 거야.”

시노는 자신 있다는 표정으로 허술한 작전 계획을 늘어놓았다.


“나나미와 네가 이지영, 박재열을 한 명씩 맡겠다고?”

“응.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작전 아니야?”

유엔의 질문에 시노는 지체없이 반문했다. 시노의 말에 유엔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날카롭게 눈을 떴다.


유엔은 눈꼬리를 치켜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지금 당장 시노 네가 진짜로 숨기는 게 뭔지 말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절교할 거야. 특히 나나미가 당분간 찾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한 그 진짜 이유 말이야.”

여태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거칠고 단호한 유엔의 말투는 분위기를 압도했다.


“숨기는 게 뭔지 지금 당장 말하라고.”

유엔의 얼굴에 깃든 말 붙이기 어려운 험악함에 기가 눌려, 시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 * *


규진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노의 불안한 눈빛을 보았다.


시노가 그렇게 심하게 떨고 있는 걸 본 건 처음이었다. 영문은 모르지만, 시노에게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규진은 말없이 양손을 뻗어 시노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마침내 시노는 결심이 선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임신했어.”


“뭐, 임신? 누가 임신했다는 거야?”

유엔은 자리에 주저앉았고, 규진은 깜짝 놀란 소리로 경악하며 물었다.


“엄마.”

시노의 말은 오래된 사찰의 큰 종소리처럼 긴 여운을 남겼다.



긴장한 유엔의 손이 파르르 떨리더니 탄산수의 기포가 차르르,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그래서, 나나미 다시 한국으로 온 거구나.”

시노의 떨리는 눈빛을 보고 난 후, 유엔은 자기 생각이 맞다는 걸 확신했다.



“나도 우연히 알았어. 겉보기에는 별로 티 나지 않았거든.”

“얼마나 된 거야?”

“임신 30주, 계산해보니 2월 중순인 것 같아.”

“우리가 히로시마에 있었을 때?”

“아마도. 너희들은 이런 기분 모를 거야. 분만예정일이 11월 9일이라고 적힌 엄마의 산모수첩, 불편하고 거북해.”

유엔은 흥분한 탓에 팔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며 시노의 대답을 들었다.


“몸 괜찮은 거야? 아기 낳을 수 있어?”

규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노에게 물었다.

“항암치료는 예전에 중단했으니까, 몸은 문제 될 게 없을 거야. 게다가 우리 엄마 생각보다 젊어, 이제 겨우 마흔일곱이니까.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야?”

“우리 아빠는 그날 창고에서 우릴 구해주고 곧장 돌아갔거든. 그 뒤론 만난 적이 없어.”

시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규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끙, 소리가 나도록 힘을 주어 고개를 파묻었다.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유엔도 머리를 쥐어짜며 앓는 소리를 냈다.


* * *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지영은 입술을 깨물고 거실 테이블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쳐다봤다.


핸드폰 화면의 초록색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지만, 이지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없긴 전화를 건 쪽도 마찬가지였다. 흔한 스팸 전화가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누구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다마루 나나미라고 합니다.]


빚 독촉 전화를 받은 사람처럼 이지영의 손은 파르르 떨렸다.


“누구시라고요?”

이지영은 카랑카랑한 쇳소리를 내며 소리를 질렀지만,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듣고 싶으신가요? 다마루 나나미라는 이름.]


“무슨 일이죠?”

[단둘이 만나고 싶습니다. 오후 2시 청계산입구역 스타벅스에서 뵙죠.]

나나미는 요점만 간단히 말했다. 군더더기 없는 차분한 말투였다.


“내가 왜요?”

[상속 문제로 중요한 용건이 있습니다.]


이지영은 잠시 고민했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요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상속 문제로 나나미가 만나기를 청한다면 해가 될 건 하나도 없다.


“좋아요.”

뭐라고 덧붙이는 말을 할까 입을 달싹거렸지만, 이지영은 그냥 짧게 대답했다. 나나미는 전화 예절 따위는 배운 적도 없는 사람처럼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지영은 쌍자음이 들어갔을 법한 단어를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뱉으며, 거실 수족관으로 눈을 돌렸다. 여러 색깔의 물고기가 저마다의 방향으로 헤엄치는 가운데 관상용 상어 한 마리가 여유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물지 못할 작은 크기의 상어였지만, 묘한 위압감을 줬다.

‘뭘 믿고 감히 날 보자고 하는 거야?’

이지영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핸드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휴대폰을 들고 최근 통화목록을 보며 한참을 고민하던 이지영은 누구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고 다시 폰을 내려놓았다.


* * *


나나미는 10분 일찍 커피숍에 도착해서 커피 두 잔을 주문해 창가 자리를 잡았다. 느린 동작으로 나나미는 초소형 녹음기와 핸드폰 녹음 기능을 둘 다 켰다. 누가 봐도 티 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창밖에는 형형색색의 옷을 입은 중년 남녀가 청계산 등산로를 향해 걸어갔다. 젊고 건장한 남자의 시선이 느껴지더니 등산객이 움직이는 반대 방향에서 이지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경호원 한 명을 밖에 세워두더니 곧장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와 나나미가 앉은 창가 자리로 걸어왔다. 이지영은 사진을 통해 나나미의 얼굴을 미리 확인이라도 한 듯 주저하지 않고 옆자리에 앉았다.


“커피는 제가 대접할게요.”

나나미는 미리 주문한 커피 한 잔을 내밀었다. 독이라도 탄 건 아닌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씨익, 웃을 뿐 이지영은 음료에 손을 대지 않았다.


“중요하다는 그 용건부터 들어볼까요? 아니, 제가 먼저 제안해도 될까요? 잠적한 애들 찾는 걸 도와준다면 대가는 확실히 보장하겠습니다.”

이지영은 거침없이 말을 꺼냈다. 딸을 키우는 엄마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표정으로 이지영은 온화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나나미는 씩 웃었다. 부처님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손바닥 위를 날고 있는 건 누군지 훤히 보인다.


나나미는 호의는 감사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하는 표정을 짓더니 묘한 웃음으로 답했다.

“전 오늘 다른 얘기를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이지영은 미국 코미디언의 스탠딩 개그처럼 과장되게 어깨를 들썩이더니 계속 말해보라는 고갯짓을 했다.


나나미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이지영에게 내밀었다. 초음파 사진이었다.


한눈에 봐도 산부인과에서 찍은 초음파 사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지영은 흠칫 놀란 표정으로 나나미를 바라봤다.


“임신 30주 사진입니다.”

나나미는 왼손으로 아랫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뱃속에 암 덩이를 키운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게 아기로 바뀐 모양이네요.”

의도치 않은 경련이 생겼는지 이지영의 한쪽 얼굴이 씰룩, 움직였다.


“모든 아기는 신의 축복이죠. 게다가 태어나면서 동광무역 지분 4%를 보장받는 아기라면 그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식만 계산해도 120억인데 물론 다른 재산도 더 있겠죠?”

나나미는 입꼬리를 올려 괴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지영은 ‘30주’라고 혼잣말을 하더니 머릿속으로 뭔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때 창고 지하에서?”

조용하던 커피숍이 들썩하도록 이지영은 큰 소리를 냈다.


나나미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했다.

“남편분 일이 아니라면 제가 찾아올 이유도 없었겠죠.”


나나미를 향한 분노인지 남편을 향한 경멸인지, 이지영의 얼굴은 여러 방향으로 일그러졌다.


“그때는 눈도 못 감고 당했지만, 지금 와서 그걸 문제 삼을 생각은 없어요. 태어날 아기가 알아봐야 좋을 거 없는 기록은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나나미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듣자 하니 혼혈이라는 첫째 딸도 그렇게 임신한 거라더니, 뭐 그쪽으로는 소질이 좀 있나 봐요? 다마루 나나미 씨.”


시노의 탄생을 비웃는 얘기를 들으면서도 나나미는 표정에서 여유를 잃지 않았다.

“얼굴이 예쁘다는 의미로 받아들일게요.”


“그게 오늘의 용건인가요? 그런 거라면 제 남편을 찾아가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더러운 몸에서 태어나더라도 핏줄이라면 조금은 끌릴지도 모르잖아요?”

이지영은 남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더러운 벌레를 씹기라도 한 듯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제안할 거래는 남편분과는 상의할 수 없는 문제라서요.”

나나미는 여전히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다.


“말씀해 보세요, 그 제안.”


작가의말

나나미는 두려움 속에 숨어있던 게 아니라 이를 갈며 복수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완벽한 계획이 아니면 시작하지 않으려 했던 생각에는 균열이 생겼지만, 최선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직감했습니다. 혼자 깍지낀 규진의 손가락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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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24장 가짜 열쇠 (2) 19.03.18 76 1 14쪽
73 24장 가짜 열쇠 (1) 19.03.15 76 0 11쪽
72 23장 타이거 앤드 울프 (3) 19.03.13 61 0 13쪽
71 23장 타이거 앤드 울프 (2) 19.03.11 60 0 12쪽
70 23장 타이거 앤드 울프 (1) 19.03.08 52 0 13쪽
69 22장 살인의 목적 (3) 19.03.06 51 2 12쪽
68 22장 살인의 목적 (2) 19.03.04 70 1 12쪽
67 22장 살인의 목적 (1) 19.02.28 73 1 11쪽
» 21장 허술한 작전 계획 (3) 19.02.27 67 2 12쪽
65 21장 허술한 작전 계획 (2) 19.02.25 75 2 11쪽
64 21장 허술한 작전 계획 (1) +1 19.02.22 86 2 13쪽
63 20장 염곡동 살인사건 (7) 19.02.20 69 2 12쪽
62 20장 염곡동 살인사건 (6) 19.02.18 117 3 14쪽
61 19장 숨탄 5월 (3) 19.02.15 76 3 13쪽
60 19장 숨탄 5월 (2) 19.02.13 82 2 12쪽
59 19장 숨탄 5월 (1) 19.02.11 72 2 12쪽
58 18장 가벼운 것들의 무게 (4) 19.02.08 79 1 13쪽
57 18장 가벼운 것들의 무게 (3) 19.02.06 78 2 13쪽
56 18장 가벼운 것들의 무게 (2) 19.02.04 92 2 12쪽
55 18장 가벼운 것들의 무게 (1) 19.02.01 93 2 12쪽
54 17장 이중 납치 (3) 19.01.30 86 1 13쪽
53 17장 이중 납치 (2) 19.01.28 81 2 15쪽
52 17장 이중 납치 (1) 19.01.25 80 1 11쪽
51 16장 함정에 빠진 속임수 (3) 19.01.23 77 2 12쪽
50 16장 함정에 빠진 속임수 (2) 19.01.21 113 1 12쪽
49 16장 함정에 빠진 속임수 (1) 19.01.18 92 2 12쪽
48 15장 햄릿의 칼끝 (3) 19.01.16 87 1 12쪽
47 15장 햄릿의 칼끝 (2) 19.01.14 87 1 11쪽
46 15장 햄릿의 칼끝 (1) 19.01.11 80 1 13쪽
45 14장 거짓말 게임 (3) 19.01.09 85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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