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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 님의 서재입니다.

좀비 그대를 위한 핑크빛 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로맨스

완결

복선
작품등록일 :
2020.11.25 18:35
최근연재일 :
2021.01.11 22:00
연재수 :
53 회
조회수 :
1,063
추천수 :
22
글자수 :
270,363

작성
21.01.0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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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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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END

DUMMY

날씨는 맑았다.


맑아 봐야 하늘은 무채색이었지만 어쨌든. 비도 오지 않았고 바람은 미풍이었고 온도도 적당했다.


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이마에 땀방울을 한 줄기씩 달고 있었다.


"동쪽!"

"완료!"

"서쪽!"

"완료!"

"남쪽!"

"지금 싣습니다!"


머지않은 곳에서는 평군인들이 땅에 박아 놓았던 바리케이트를 파내 트럭에 싣는다고 바빴다.


"저걸 다 싣고 다니는구나."


"다음에 새로운 군대 집결지를 만들 때 필요하니까."


여진은 바닥에 가방을 놓고, 그 가방을 깔고 앉은 채 중얼거렸다.


옆에서 가방을 메고 서 있는 알렉스가 대답해 줬다.


사람들이 바쁘고 힘들어 보였다.


그래서 현진은 벌써 '저들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빌려주겠다' 며 저쪽으로 뛰어간 지 오래였다.


일이 끝나면 돌아오겠지.


여진은 그런 현진을 기다리느라 여기 앉아 있는 것이었다.


'평화롭네.'


멍하니 생각했다.




모든 일이 끝난 지.

그래서 현진과 떨어져 있어도 불안하지 않게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리고 오늘은 군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생존지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아니지.


평군인들에게는 '돌아가는' 날이지만.

깨어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가는' 날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놈들이 일제히 몰려가면 다들 어떤 반응을 할지 저엉말 궁금하군."


알렉스는 비아냥거리듯 말했지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비아냥거리는 사람이 자기 부하들을 보면서 저렇게 흐뭇한 웃음을 지을 리 없으니까.


"다들 잘 받아주겠지."


갑자기 왼쪽에서 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움찔. 몸이 본능적으로 방어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곧 여진은 의식적으로라도 경계를 풀고 그를 바라봤다.


"오셨습니까. 진 리더님."


알렉스는 상대를 확인하곤 짧게 목례했다.


"그러게 부르지 말라니까."


진이 손을 내저었다.


진은 창이나 군모 등 군대 물품들을 바리바리 들고 있었다. 트럭에 짐을 실으러 가는 중에 잠깐 들른 모양이었다.


그는 수척해져 있었지만 예전처럼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은퇴 서류 제출 전까지는 리더님 아니십니까."


"자네에게 편하게 불릴 일은 없게 생겼군."


진은 리더직을 내려놓을 뿐만 아니라 군인 생활 자체를 청산하기로 했다고 했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은퇴하는 것처럼 처리된다는 모양이었지만.


[나만이 기억하고 있는 아이잖나. 제대로 기억해주기 위해 노력해 보려고 해.]


그는 말했다.


잘못이 많은 인간이었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그저 묻어 버리기로 모두가 합의했다.


군대 안의 누구도 무죄가 아니었으니까. 진 하나만 처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진도 자신이 처벌받지 않았을 뿐, 떳떳하지는 않은 상황이라는 걸 알아서...


"가 보도록 하지."


저렇게 잠깐 잠깐 말을 섞는 것 외에는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곤 했다.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여진은 잠깐 느꼈던 공포도 잊고 가만히 생각했다.


밝은 앞날을 빌어주는 데에 돈이 들지는 않았으니까.




진이 떠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저기 남수 리더님 오시는데."


알렉스는 여진이 보고 있는 반대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엑. 잘 있어 나 도망간다."


단박의 여진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나는 상사의 명령을 우선시한다. 도망칠 경우 붙잡겠다."


"에이 정말."


"여진 씨! 함께 가 주시면 안 되나요!"


남수는 저 밖에서부터 짜랑짜랑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


여진은 반쯤 포기한 채 귀를 막았다.


"여진 니이이이이임!"


오늘은 뒤에 진수도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그럼 더 시끄럽겠지.


"함께 가요, 여진 씨."


"여진 님이 생존지 안 가시는 건 말이 안 됩니다!"


"치료제의 최초 발견자시잖아요."


"게다가 저 사람들 다 구하지 않으셨습니까!"


"여진 씨 없었으면 군대에 또 싸움이 났을 테고요."


"공로가 존나, 아니 겁나 많으신데 어떻게 같이 안 가십니까아아!"



"...다 좋은데 둘 다 얼굴 좀 멀리 하고 말해 줄래요?"


여진은 양쪽 귀 한 짝씩 붙들 것처럼 소리치는 남수와 진수를 쭉 밀어내려고...


노력했지만. 군인 둘을 말리는 건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 시끄러.'


좀비들을 다 치료했으니 이제는 주변이 좀 조용하려나 싶었는데 꼭 그러지도 않았다.


남수와 진수가 틈만 나면 이렇게 쫓아와서 함께 생존지로 가자고 졸라 대는 탓이었다.


"멀리 하고 말하면 따라와 주실 건가요?"


"헐 진짜요? 대박! 갑시다! 가는 검다 갑시다 갑시다!"


"말했잖아요."


결국 여진은 둘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서 웃었다.


"나와 현진이는 생존지로 가지 않는다고."


처음으로 남수의 권유를 받았을 때, 솔직히 여진도 고민했었다.


이런 세상에서 둘이서만 살아갈 수 있을까? 싶어서.


하지만.


사람들을 구했다.

치료제의 최초 발견자가 되었다.

딱히 원해서 찾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너무 많은 일을 이뤄 버렸다.


"모두가 있는 곳으로 가면 너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 버리겠죠. 그건 싫어요."


더 이상 깜냥에도 안 맞는 큰일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었다.


여진이 처음부터 끝까지 원한 건 딱 한 가지뿐이었다.


현진과 함께하는 것.


"나는 당분간 그 사람하고 둘만 있고 싶거든요."


생존지로 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침울해져선 중얼거리는 남수에게 여진은.


"게다가..."


"게다가?"


"결혼식을 올려야 해서요!"


웃으며 왼손을 쫙 펼쳐 보여줬다.


용케 부서지지 않은 약지의 반지가 지금도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결혼식? 결혼식이 뭠까?"


진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생존지에서는 현대와 같은 웨딩 개념이 사라져 버렸다는 모양이었다.


각박한 시대니까. 옷을 차려입느니 하는 것 자체가 사치였겠지.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여진은 대충 얼버무렸다.


의미를 알고 있을 알렉스만 피식 미소지었다.


진수에게는 미안하지만 결혼식에 대해 설명해주는 일은 뒤로 미루기로 했다.


왜냐하면 지금은...


"여진아!"


"다 도와줬어?"


"응!"


저기서 뛰어오는 현진과 함께 떠날 때기 때문이었다.


손을 앞으로 뻗었다.

현진의 손을 맞잡았다.


피부가 맞닿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여전히 현진은 여진의 세상을, 여진은 현진의 세상을 분홍색으로 물들였다.


"얼굴에 무슨 생각 하는 지 다 보여."


현진은 방긋 웃었다.


"너도 똑같거든?"


여진도 마찬가지였다.


"꽁냥은 작별 인사 끝낸 후에 떨도록 해."


알렉스가 여진의 등을 툭 밀었다.


뒤돌아보니, 그녀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울먹울먹하는 진수와 어쩔 수 없다는 듯 여진에게서 물러난 남수도 마찬가지였다.


가벼운 작별.


"우리 가요!"


"바이."

"잘 가요."

"잊지 마십셔!"


"네, 네."


이거면 충분했다.


그렇게 모두와 헤어지고서,


여진과 현진은 걸었다.


꾸준히 군대로부터 멀어졌다.


손 흔들어 주던 사람들은 여진과 현진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도 손을 흔들어 준 뒤 군대 트럭에 올라탔다.


트럭들이 차례차례 지평선 저 멀리로 사라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여진은 입을 열었다.


"현진아."

"응?"

"결혼할래?"


대답은-



*



"찍습니다아, 하나 둘 셋!"


여진이 소리쳤다.


카메라 셔터는.

눌리지 않았다!


애초에 카메라 같은 건 찾을 수가 없었다.


한때 카메라였던 기기들을 몇 개 찾기는 했는데 이미 녹슬거나 망가져서 쓸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그래도 여진은 목청껏 외쳤다.


웨딩 사진을 찍고 싶다고 현진이 말했으니까.


"...여진아 이제 그만 해도 될 것 같..."


정작 현진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여진 팔을 꼭 붙들고 있었지만.


"왜? 사진 찍고 싶다며!"


"아니 그거야 그랬는데... 카메라도 없이... 이러는 거 솔직히 조금 쪽팔려..."


지금 여진과 현진은 전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깨지지 않은 것을 정말 어렵게 구했다.


검은 정장에 하얀 드레스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지만 대신 백정장에 검은 드레스를 예쁘게 차려입었다.


"다시 한 번 찍습니다-!"

"여진아 그만... 진짜 그만..."


물론 여진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하객도 없고 카메라맨도 없어서 신부가 [찍습니다]를 외쳐야 하는 상황에 웨딩 사진이 중요한 건 아니라는 걸.


그리고 허허벌판에서 둘이만 옷 차려입고 사진 찍는다고 소리지르려니 참 쪽팔리다는 걸.


그치만.


"찍습니다! 이거 찍고 이번에는 옷 바꿔 입고서 찍어 볼까?"

"너 일부러 그러지!"


현진의 표정이 시시각각 쪽팔림에 물들어 가는 게 생각보다 너무 보기 즐거웠다.


이래서야 더 놀려먹을 수밖에 없었다. 슬슬 그만둬야겠지만.



마침 바람이 한 자락불어 왔다.


면사포와 정장 자락이, 여진과 현진의 등 뒤에서 적당히 물결쳤다.


"바람 부네. 감자 심어 놓은 거 괜찮나."


"한참 분위기 내다가 갑자기 그런 얘기야?"


"뭐야. 현진이 너 쪽팔리다며. 그만 하라며."


"그러긴 했는데..."


현진이 우물쭈물했다.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 켜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좋았어?"


"..."


"좋았어? 좋았어? 입으로는 싫다고 했지만 사실은 좋았던 거야?"


".......됐고 이거나 받아."


귀까지 샛분홍으로 물든 현진이.


고개 푹 숙인 채 불쑥 뭔가를 내밀었다.


꽃다발, 이었다.


생화는 아니었지만.


장미 재갈과 조화와 꽃이 그려진 종이책 표지 같은 것들을 잘 접고 자르고 묶은 것에 불과했지만.


"꽤 예쁘게 만들었네."


여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또 온통 핑크인 것만 제외하면. 너 그 취향 진짜 어떻게 안 되냐."


"이씨,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반항하던 현진이.


어느 순간 결심한 듯, 반짝 고개를 들었다.


"좋아합니다."


'아.'


듣는 순간 어렴풋이, 여진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법에 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귀어 주세요."


여기에서 눈을 뜨기 전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이번에는 그 꿈이 역재생되었다.


군대의 사람들과 있었던 일. 결혼 날짜를 잡은 날의 기억. 다리에 알은 배겼지만 음식이 맛있어 행복했던 무전여행. 흑기사와 흑장미. 술자리 약속. 캠퍼스 커플.


그리고 열아홉 살의 여진과 현진.


분홍 팔찌와 분홍 도시락.


"응."


여진은 몽글몽글한 기분을 꼭 간직하고 있다가.


그것을 뱉어내듯 입을 열었다.


핑크 남자와 핑크 파우더와 그것을 쫓는 여자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사랑해."]

[여진도 웃으면서 답했다.]


라고.




이야기는 끝났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은 아직 질릴 만큼 많이 남아 있었다.


작가의말

여진을 좇아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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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여담 +2 21.01.11 25 1 5쪽
» END 21.01.09 46 0 11쪽
51 종결장 21.01.08 19 0 10쪽
50 경우의 수 21.01.07 15 0 12쪽
49 경우의 수 21.01.07 12 0 10쪽
48 경우의 수 21.01.06 13 0 13쪽
47 악마의 사정 21.01.06 12 0 10쪽
46 악마의 사정 21.01.05 14 0 11쪽
45 악마의 사정 21.01.05 12 0 10쪽
44 악마의 사정 21.01.04 9 0 11쪽
43 악마의 사정 21.01.04 15 0 11쪽
42 악마의 사정 21.01.03 14 0 11쪽
41 축제 21.01.03 15 0 12쪽
40 축제 21.01.02 13 0 11쪽
39 축제 21.01.02 15 0 11쪽
38 축제 21.01.01 13 0 11쪽
37 축제 21.01.01 16 0 11쪽
36 축제의 서막 20.12.31 22 0 12쪽
35 축제의 서막 20.12.30 17 0 12쪽
34 축제의 서막 20.12.29 29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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