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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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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7.06 18:50
연재수 :
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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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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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1
글자수 :
357,178

작성
24.05.0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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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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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글자
13쪽

5. 형제(1)

DUMMY

이야기를 본다고? 듣는 게 아니라?

시현은 유혹하듯 일렁거리고 있는 녹색 몽로를 보면서 말했다.


“혹시 외부인이 보면 안 되는 이야기야?”

“지난 이야기라서 괜찮긴 한데.”


은롱이 망설이자 세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시현 씨가 만약 여기서 일을 안 하시게 된다면 나가실 때 기억을 지울 거니까 괜찮습니다.”


시현은 흠칫 놀랐다. 기억을 지운다고?


“걱정하지 마세요. 몸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단지 죽림 전당포에 들렀던 일을 잊으실 뿐이에요.”

“응, 형아,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은롱이 시현의 허리춤을 토닥거렸다. 제 딴에는 등을 토닥거려 주려고 한 것 같지만 키가 작아서 손이 허리춤까지밖에 닿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시현이 입을 열었다.


“그럼, 맛을 한번 보겠습니다.”

“형아, 용감해. 용감한 사람인 거 내가 첨 볼 때부터 알고 있었어!”


은롱이 시현에게 엄지를 치켜올려 보이더니 숟가락을 꺼내 시현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거 들고 있어.”


은롱은 청록색 구슬을 시현이 들고 있는 숟가락 위에서 톡 쳤다. 구슬에서 맑고 투명한 초록 방울이 한 방울, 이슬처럼 숟가락 위로 톡 떨어졌다.


“맛만 보는 거니까 요만큼만.”


이거 먹어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네. 영우가 나보고 언젠가 호기심 때문에 큰코다칠 거라 했는데.


시현은 숟가락을 들고 살짝 맛을 보았다. 씁쓸한 풀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


다라랑!

풍경 소리가 울리면서 전당포 안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등이 굽은 것으로 보아 나이가 좀 있는 남자인데 두툼한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코 위까지 올려 둘렀다.


날씨가 이렇게 더운데 옷을 왜 저렇게 입었지? 생각하던 시현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니다. 이건 현재가 아니라 몽로의 기억을 지켜보고 있는 거구나. 예전에 저 사람이 이 전당포에 왔을 때는 겨울이었던 거야.

창밖을 보니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책상 뒤쪽에서 녹색 터틀넥 스웨터를 입은 세나가 일어섰다.

남자가 주춤주춤 다가와서 세나가 안내하는 소파에 앉아 목도리를 풀었다.

흰 머리와 구부정한 자세 때문에 나이가 많은 줄 알았는데 드러난 얼굴을 보니 생각보다 젊었다.

사십 대 후반이나 오십 대 초반 정도? 피곤한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남자는 불안한 듯 전당포 내부를 이리저리 훑어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세나가 복숭아정과 몇 조각을 담은 접시와 차를 내주었다.


“밖이 춥지요? 드세요. 속이 따뜻해질 겁니다.”


남자가 머뭇거리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것도 한 조각 드세요.”

“아 저는 단것은 별로 즐기지 않아서요.”

“한 조각만 드셔 보세요. 말씀하시기 좀 편해지실 겁니다.”


세나의 권유에 따라 마지못해 정과 한 조각을 입에 넣은 남자의 눈이 커졌다.


“맛있네요······.”


남자가 들릴 듯 말 듯 목쉰 소리를 내었다.


“제가 단 음식은 잘 안 먹는데 이건 맛있군요.”


정과를 한 조각 더 집어 먹은 남자는 눈에 띄게 편해진 모습이었다.


“단것은 제 동생이 즐기는데 걔가 좋아할 맛이네요. 나이가 마흔이 되어도 어린애 입맛이거든요.”


동생을 입에 올린 남자의 입꼬리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입에 맞으셔서 다행입니다. 자, 그럼 뭘 맡기러 오셨는지 말씀해 보실까요?”


세나가 자리를 고쳐 앉을 때 안쪽 문이 빼꼼 열리고 흰 여우가 살그머니 나와서 세나의 옆에 앉았다.


“여우······.”


남자가 은롱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여우가 있는 전당포라고 듣긴 했지만 진짜 있네요.”

“삐잉!”


은롱이 인사하듯 고개를 까딱하면서 삐잉 울자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여우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동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여우는 아주 귀엽게 생겼군요.”

“삐잉!”


은롱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고 남자는 긴장이 좀 풀렸는지 어깨에 힘을 빼면서 세나를 향했다.


“어디선가 우연히 들었는데, 여기서 이야기를, 음, 이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야기를 매입하거나 저당 잡아 주신다고.”


남자는 말을 하면서도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세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희는 이야기도 받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가요?”

“실은······.”


남자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이 전당포에 대한 말을 몇 년 전에 들었습니다. 그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긴가민가하면서 한 번 와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때도 요 앞 큰길까지 왔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이 전당포가 보이지 않았어요. 두어 시간이나 헤매다가 결국 그냥 돌아갔거든요. 혹시 그때는 소재지가 여기가 아니었던 건가요?”


세나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니요. 죽림 전당포는 그때도, 그전에도,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여기 있었습니다.”


남자는 조금 당황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데 왜 못 찾았을까요. 이번엔 쉽게 찾았는데.”

“그때는 아직 여기 오실 만한 마음의 준비가 안 되셨던 모양이지요.”


남자는 세나의 말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런 건가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남자는 다시 눈을 들어 은롱을 한 번 보더니 말을 시작했다.


“그때 못 찾고 돌아간 뒤로 이곳에 대해선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최근 잠을 잘 못 자서요. 자꾸 안 좋은 꿈을 꾸거든요. 속이 계속 답답하고요. 그러다 이 전당포 생각이 났어요. 예전에 이 전당포 이야기를 했던 사람도 악몽에 시달렸는데 여기 와서 악몽 이야기를 맡기고 대신 좋은 꿈을 받았다고 했거든요.”


남자는 충혈된 눈을 비볐다.


“저는 그렇게 매일 악몽을 꾸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답답하고 피곤해서요. 좀 편한 잠을 자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와봤습니다.”

“그러시군요.”


세나와 은롱이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자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말을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얘길 해야 하나······. 제가 어렸을 때부터 말을 해야 할 것 같네요.”


***


남자의 부모는 남자가 태어났을 때 이미 나이가 꽤 있는 편이었다. 부부 금슬이 좋았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아쉬워했다고 한다.


-엄마가 서른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이제 아기는 포기해야 하나 싶었을 때 네가 찾아왔단다. 얼마나 고맙고 기특했는지 몰라.


남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를 안아주며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남자는 늦둥이에 외동아들로 흠뻑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형이나 동생이 있으면 좋겠다고 엄마 아빠에게 투정을 부린 적도 있지만 외동이라고 별로 나쁠 것도 없었다.


-우리 동욱이, 형제가 하나쯤 있으면 서로 의지 되고 좋을 텐데.


엄마 아빠도 가끔 말은 했지만 이미 나이가 있으니만큼 동욱 하나만 잘 키우자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동욱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생각지도 않게 늦둥이 동생이 생겼다. 어머니는 이미 마흔 줄에 접어들었는데 아이가 생긴 것이다.


-동욱아, 동생이 생겼어. 이제 우리 동욱이도 혼자가 아니야.


처음엔 좋았다. 잠든 채 입을 오물거리는 아기의 조그만 손이나 발을 만지작거리며 빨리 커서 같이 놀자고 속삭이기도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동생이 생겼다는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었다. 아기는 울고, 기어 다니고, 아무거나 입에 넣고, 동욱의 장난감이나 책을 찢고 침을 묻혔다.

엄마도 아빠도 아기 때문에 전처럼 동욱만 봐주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형이니까 참아야 했다.


아기가 자라고 세 살, 네 살이 되면서 피곤한 일이 더 많아졌다. 또래가 아니어서 같이 놀지도 못하는데 동생은 계속 동욱을 쫓아다녔다.

친구들과 놀 때 동생이 따라오면 친구들과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동생을 봐야 했다.

한두 살 터울이라면 동생이 뭘 잘못했을 때 다투거나 싸울 수도 있을 텐데 너무 어리니까 다툴 수도 없었다.

동욱의 마음속에 조금씩 불만이 쌓여 갔다.


“부모님이 편애를 하거나 그러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맏이라고 저한테 기대도 더 많이 하시고 신경도 더 많이 써주셨지만, 어렸을 때는 그게 더 부담스러울 때가 있지 않습니까?”


어린 동생은 그저 막둥이로 귀염만 받고 자라는데 자신은 형으로서 부모의 기대에 보답하고 동생에겐 늘 양보하고 잘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이 어린 동욱의 어깨를 눌렀다.


게다가 동생은 개구진 데다 어디 가서 지는 성격도 아니어서, 여섯 살이나 위인 형을 잘 따르긴 해도 지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런 동생이 싫었던 건 아니지만 동생 본 첫째에게 가끔 찾아오는 우울함이 동욱에게도 왔었다.


하지만 형제간에 이 정도 갈등은 어느 집이나 있을 수 있고, 아마도 그대로 시간이 지났으면 세상의 여느 형제가 그렇듯 그 시기를 잘 넘겼을 테지만, 미국에 사는 이모가 다니러 왔던 어느 날 동욱은 어머니와 이모가 남몰래 하는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언니도 그렇고 형부도 그렇고 참 대인배야. 어떻게 그렇게 둘을 똑같이 키울 수 있어?


이모가 소곤거렸다.


-그냥 보육원에 보내자니까 굳이 집에 들여서. 부모도 모르는 남의 자식 키우기가 어디 쉬워?

-말조심해. 둘 다 내 자식이야. 절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지?

-애들은 착하지. 하지만 나중에 친형제 아닌 거 알게 되면 어쩔 거야? 벌써 좀 껄끄러운 게 보이던데.

-친형제도 싸우면서 커, 우리 동욱이랑 성욱이 정도면 아주 양호한 거야.

-에휴, 암튼 사서 고생이야.

-너만 비밀 잘 지키면 돼. 너 말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절대 애들 귀에 들어가게 하지 마. 눈곱만큼이라도 조카들 차별하면 내가 가만 안 있는다.

-나야 뭐 미국 가면 눈에 안 보이니까 속 편하지만 언니가 고생이지. 누군지 핏덩이를 버리고 간 그 인간은 꼭 천벌 받았음 좋겠네. 애도 언니 마음을 알아야 할 텐데.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배에 방석 싸매고 몇 달을 고생했는데.


열두 살이었던 동욱은 그날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성욱은 친동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동욱은 성욱을 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전에는 성욱이 미운 짓을 하거나 엄마 아빠의 사랑을 더 받는 것 같아도 동생이니까 참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따끔따끔한 기분이 가슴 어딘가에서 불편하게 느껴지곤 했다.


엄마 아빠의 마음을 생각해서 티를 내지 않고 동생도 잘 돌보려고 노력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성욱을 쌀쌀맞게 대할 때가 있었다.

천성이 밝고 개구진 성욱은 동욱의 태도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더 형을 따라다니며 귀찮게 굴곤 했다.


-우리 동욱이는 장남이니까 의젓하지. 동생도 잘 보살피고.

-형님네 동욱이는 공부도 잘한다며? 부럽네. 장남이 든든해서.

-성욱이? 성욱이야 뭐 아직 애긴데 그냥 저 하고 싶은 대로 놀게 둬. 동욱이가 든든하잖아? 나중에 제 형이 잘 챙기겠지.


아버지나 친척 어른들이 하는 말도 귀에 거슬렸다. 아무도 모르는 새 동욱의 마음속에는 조금씩 어둠이 쌓여 갔다.


어느 여름, 이웃 가족과 함께 계곡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저쪽은 물살이 세서 위험하니까 절대 가지 말고 이쪽에서만 놀아라.”

“동욱이랑 현우가 동생들 잘 보살피고.”


동욱은 그때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이웃집 현우는 막 고등학생이 된 참이었다. 현우의 동생들이 열세 살과 열두 살, 성욱은 아직 여덟 살이었다.

얕은 곳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현우가 간식을 가지러 가고 동욱도 한눈을 파는 틈에 장난꾸러기 성욱이 어른들이 가지 말라고 한 물길 쪽으로 몰래 넘어갔다.


“사실은 보고 있었습니다.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동생이 수영을 잘하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고 말리지 않았어요.”


마음속의 검은 어둠이 속삭였다.


-상관없잖아. 어차피 진짜 동생도 아니면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형한테도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어리광만 부리는데. 개구쟁이는 한번 혼이 나보는 것도 좋아. 만약 위험해 보이면 그때 건져주지 뭐.


“하지만 정말 물에 빠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수심도 허리 높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거든요. 기껏해야 물을 조금 먹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동욱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수십 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기억하면 몸이 떨리는 모양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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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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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 두부달걀채소쌈(1) +7 24.05.10 1,221 56 11쪽
7 5. 형제(2) +7 24.05.09 1,218 55 11쪽
» 5. 형제(1) +3 24.05.09 1,307 54 13쪽
5 4. 복숭아구이 +7 24.05.08 1,381 64 11쪽
4 3. 서왕모의 복숭아 +5 24.05.08 1,469 65 11쪽
3 2. 이상한 전당포(2) +6 24.05.08 1,604 70 13쪽
2 2. 이상한 전당포(1) +8 24.05.08 1,634 71 12쪽
1 1. 흰 여우 +18 24.05.08 2,082 77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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