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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님의 서재입니다.

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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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목
작품등록일 :
2024.05.08 11:32
최근연재일 :
2024.07.02 18:50
연재수 :
6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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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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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0
글자수 :
334,566

작성
24.05.08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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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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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글자
13쪽

2. 이상한 전당포(2)

DUMMY

고, 고양이가 말을 했어!

시현은 놀라서 뒤로 물러서다가 의자에 부딪혀 넘어질 뻔한 몸을 가까스로 가누었다.


“마, 말을 했어. 고양이가 말을 했어요.”


고양이를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며 시현이 세나를 쳐다보자 세나가 나직하게 웃었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손님. 여기는 아주 특별한 전당포거든요. 금손 씨는 그중에서도 특별한 분이고요.”


흑백이 분명한 세나의 눈이 시현의 눈을 빨아들일 것처럼 깊어졌다.


“그런 얘기 들어보신 적 없으세요? 우연히 다른 세상을 다녀왔다거나, 전설 속의 신수를 만나 소원을 빌었다거나, 산 자와 죽은 자가 교차하는 장소를 보았다거나······.”


마치 주술처럼 잔잔하게 읊조리는 세나의 목소리가 시현의 귀에 흘러들었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고 살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어딘가 특별한 모퉁이를 돌면 신기한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들이 곳곳에 숨어 있답니다.”

“······.”

“죽림 전당포는 세상의 그런 모퉁이 중 한 곳입니다.”


특별한 전당포. 말하는 고양이. 은빛 머리와 금빛 눈을 가진 사내아이.

여우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우, 그래, 아까 그 여우!

시현이 은롱을 휙 돌아보자 아이가 샐쭉 웃었다.


“이제야 안 거야? 맞아. 손님이 날 따라왔잖아. 밖에서 날 알아보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라 신기했어.”


은롱이 눈을 살짝 휘면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꼬리라고? 아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사내아이의 반바지 뒤쪽으로 희고 복슬복슬한 꼬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심지어 꼬리가 두 개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후드득 몸을 떨면서 출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 어디에 들어온 거지? 진짜 여우에 홀려서 이상한 곳에 들어온 건가. 대낮에 꿈이라도 꾸는 건가?


“자, 자, 많이 놀랐겠지만 진정하게. 세나는 정과 좀 가져오고.”


노란 고양이가 시현에게 다가와서 몸을 살짝 기댔다. 고양이의 목 안에서 뭔가 진동하듯 골골골 부드러운 울림이 전해져 왔다.

세나가 자그마한 단지 하나를 가져오더니 집게로 뭔가 발그레한 걸 한 조각 집어서 시현이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의 입에 쏙 넣었다.

사탕인가? 아니 사탕처럼 딱딱하지 않고 쫀득하고 몰캉한 것이 시현의 입안에 깊고 풍부한 단맛을 가득 채웠다.

시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오물거렸다. 복숭아네, 젤리? 아니 정과(正果)인가 보다.


복숭아정과의 달콤한 맛을 입 안에 머금은 채 고양이의 따뜻하고 토실토실한 몸에서 나직하게 울리는 골골거림을 듣고 있는 동안 왠지 모르게 시현의 놀란 가슴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팔에 오소소 돋았던 소름이 잦아들면서 말하는 고양이도,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도 어쩐지 모두 있을 수 있는 일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우. 시현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어느 모퉁이, 그렇구나.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해주시던 옛이야기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어쩐지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이 모든 일이 순순히 받아들여졌다.


“어때? 이제 괜찮지?”


시현이 어느 정도 안정된 것을 본 금손이 조금 뒤로 물러나 앉더니 앞발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귀여운 목소리인데 말투는 어울리지 않게 고풍스러웠다.


“그래, 송가미록을 찾는다고?”

“······.”

“송윤수 숙수가 쓴 책 말이지? 송문기 대령숙수의 아들. 혹시 송윤수 숙수와 관계가 있는 사람인가?”

“예······, 고조부 되십니다만.”


나 고양이에게 존댓말을 했어!

자그마한 고양이에게서 위엄이 느껴지는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공손하게 대답한 시현에게 금손이 다시 물었다.


“자네 이름은 뭔가?”

“송시현이라고 합니다.”

“그렇군, 송가의 자제였어.”


반가운 듯 시현에게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온 고양이가 눈을 반짝였다.


“송가미록은 우리와도 인연이 있는 책이지. 선대 주인장이 그 책을 매입하고 싶어서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는데 절대 안 팔겠다 해서 못 사긴 했지만.”


고양이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런데 몇 년 전 송 숙수의 후손이 송가미록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뒤늦게 들었지. 그런 귀한 걸 아무렇게나 팔아넘기다니 그 집안도 다 됐구나 싶었는데 그래도 송가미록을 되찾으려고 이렇게 찾아다니는 후손이 있는 걸 보니 송가의 맥이 끊기지는 않을 모양이군.”


금손은 대견하다는 듯 시현을 훑어보았다.


“은롱이를 알아보고 스스로 여기를 찾아왔다는 말에 이미 범상치 않다는 생각은 했네만, 역시 인연이 있어서 우리 전당포를 찾아온 거였어. 송가의 진전을 이을 사람이려나?”


금손이 둥근 눈을 깜박이며 시현을 다시 보았고 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대령숙수 할아버님의 뒤를 이을 만큼 실력이 좋지는 못해요.”

“아니, 내가 말하는 건 대령숙수 말고 자네 고조부일세. 기인이라는 말을 들었던 송윤수 숙수 말이야.”

“고조부님이라면······.”


시현의 고조부는 대대로 대령숙수를 지냈던 선대들과는 달리 특이한 요리사였다고 한다.

전통 요리 외에 양식이나 이국의 요리에도 관심이 많았고 아무도 보지 못한 신기한 요리를 만들곤 해서 전통 요리계에서는 이단이라는 말까지 들었다는데, 그럼에도 그가 꽤나 이름이 났던 것은 그의 요리를 먹어 본 사람은 그 특이한 맛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던가.

약선 요리를 잘 만들어서 그가 만든 보양식이 병자들에게 약보다 효과가 좋았다는 말도 있었다.


고양이는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리며 시현을 뜯어보다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송가미록을 읽을 사람이 이번 대에 나올 수도 있겠군. 물론 수행을 많이 해야 하겠지만.”

“?”

“자네, 송가미록에 빈자리가 있는 걸 아나?”

“예. 봤습니다.”

“그 빈 부분을 읽어낼 수 있어야 송윤수 숙수의 후인이 될 수 있는 거야.”


고양이는 연둣빛 눈을 반짝거리며 시현을 훑어보다가 몽실몽실한 앞발을 들어 책상을 탕 쳤다.


“좋아, 내가 한번 알아보겠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송가미록이 주인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면 저 세상에서 송 숙수도 기뻐하겠지.”


금손이 귀를 쫑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송가미록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내가 정보통을 좀 가동해 보지! 만약 시중에 매물로 나온다면 분명히 내가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야.”


고양이가 정보통이 있어? 그것도 옛 조리서 쪽으로?

시현이 미심쩍게 금손을 바라보자 고양이는 크지도 않은 가슴을 쫙 펴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지 말게. 이래 봬도 나 금손은 수라간에서 나고 자란 고양이야. 주상 전하와 수라상을 함께 받은 왕의 고양이였고 대령숙수의 친구였다네.”


***


금손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눈앞의 청년을 바라보았다.

살빛이 희고 이목구비가 곱상해서 언뜻 보면 곱게 자란 것 같지만 길쭉한 손가락과 모양 좋은 손에는 요리사답게 기름 튄 자국이며 칼에 베인 흔적이 적지 않았다.

눈이 맑은데 눈매가 깊고 살짝 그림자가 있는 것이 마음고생 안 하고 평탄한 길만 걸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그 아이를 닮았네.

금손은 오래된 기억 속에 잠긴 어떤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현을 향했다.


“내가 송가미록을 찾아 줄 수는 있는데, 맨입으로는 안 되지. 우린 전당포거든.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착수금 말씀인가요? 못 찾으면 돌려주는 거죠?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시현이 묻자 금손이 싱긋 웃었다.


“돈으로 대가를 치를 만한 일은 아니고, 어떤가? 내가 송가미록을 찾아 주는 대신 자네가 여기서 요리를 해주는 건?”

“요리요?”

“그래, 우리 전당포에서는 아주 특별한 식자재를 조리하곤 하는데, 그 재료를 만질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 그래서 요리사를 구하기 어려운데 내가 보기에 자네라면 만질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물론 먼저 시험을 해봐야겠지만.”

“나, 나, 내가 설명할게!”


창가의 소파에서 짤막한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고 있던 은롱이 폴짝 뛰어내려 시현을 향해 달려왔다.

깡충 뛰어 시현의 옷자락에 매달리려는 은롱을 세나가 붙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꼬맹이는 좀 기다려. 이런 건 지배인이 설명하는 거야.”


은롱이 입을 삐죽 내밀며 뺨을 부풀렸다.


“난 후계자야. 세나 누나는 직원이고! 왜 내 말을 안 들어?”

“선대께서 가게 일은 나한테 맡기라고 했어, 안 했어? 인간 상대는 인간에게 맡기라고 했어, 안 했어? 아직 꼬리도 두 개밖에 없는 게 벌써부터 주인이라고 갑질을 하려고.”


세나가 은롱에게 콩 꿀밤을 주자 은롱이 손을 머리에 올리면서 캥 하고 울었다.


“하극상이야, 폭행범이야, 히잉!”

“······자, 호!”


세나는 조금 미안했는지 은롱의 머리에 대고 입바람을 호 불고 쓱쓱 쓸어준 뒤 시현을 향했다.


“손님, 죄송해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세나가 시현을 소파에 앉히고 언제 준비했는지 커피잔을 앞에 놓았다.

안 그래도 입이 말랐던 시현의 코끝을 향긋한 커피 내음이 자극했지만 시현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커피잔을 내려다봤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건가? 뭔가 약을 탔다든지, 마시고 잠든 사이에 간이라도 빼 먹히면······.


“그렇지 않아요. 손님, 요즘 구미호는 사람의 간 같은 건 먹지 않아요. 그건 아주 구세대적 발상이에요.”


세나가 마치 시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살랑살랑 손사래를 쳤다.


“은롱이를 보고 짐작하셨겠지만, 우리 전당포의 주인은 대대로 구미호였어요. 여기서 손님들을 상대하며 수행을 한 뒤 여우의 업을 벗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음, 구미호의 옛이야기라면 물론 들어 보셨겠지요?”

“예. 사람의 간을 천 개 먹고 나면 인간이 된다는······.”

“그거 엉터리야! 헛소리야! 루, 루머야!”


은롱이 세상 억울하다는 듯 눈꼬리를 치켜세우며 반박했다.


“옛날에 뭐 그런 여우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전당포의 구미호는 사람의 간을 먹은 적이 없어. 우리는 이야기를 먹어!”

“이야기요?”


세나가 설명을 보탰다.


“우리 전당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받습니다. 가끔 사연 있는 물건을 사고팔기도 하지만 보통은 어디엔가 풀어 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입하거나 저당 잡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대신 내주지요. 그리고 그 이야기는 전당포의 주인이 먹고 정화시키게 됩니다.”


천 개의 이야기를 먹으면 여우의 업을 벗고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뭐, 신선 같은 게 된다는 건가요?”

“정확하진 않지만 비슷해요. 아무튼 업을 벗고 한계를 넘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천 개의 이야기라, 천 개의 간처럼 직관적이지 않다 보니 더 아리송한데?


“음, 그런데 여기서 요리사가 필요한 이유는 뭔가요?”


진짜 천 개의 간을 먹어야 한다면 다양한 간 요리를 위해 요리사가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아니 미쳤냐, 송시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시현은 재빨리 손을 휘저으며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떠오른 간 구이며 간 볶음 등의 연상을 훠이훠이 떨쳐냈고 세나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가끔 상황에 따라 음식을 내드려야 하는 손님도 계시고요. 더 중요한 건 이번 후.계.자.님의 입이 매우 까다로우셔서 그래요.”


은롱을 향해 살짝 눈을 흘긴 세나가 말을 이었다.


“구미호는 원래 대부분 미식가라서, 전당포에 상근 요리사를 두고 있었는데요. 반년 전까지 일해 주셨던 정 셰프가 연로하셔서 그만두셨거든요. 그 이후로 은롱이 밥투정이 심해서 이야기 소화에도 매우 지장이 있습니다.”


이야기 중에 시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저, 세나 님도 여, 여우이신······?”

“아니, 아니, 저는 사람이에요. 사.람.”


세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사람이지만, 우리 집안에선 대대로 한 명이 죽림 전당포의 집사 역할을 맡아 왔어요. 시대가 바뀌어서 집사 대신 지배인이라고 부른 지가 꽤 됐는데, 요즘은 지배인도 좀 구식인 것 같아서 실장이나 매니저라고 바꿀까 생각 중이지만요.”

“난 집사가 제일 부르기 좋은데 말이지. 왠지 집사라는 단어에 친근감이 느껴져.”


금손이 수염을 만지면서 말했고 세나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고 지배인이고 이번 대에는 그냥 보모인 것 같아요. 예전에 마땅한 요리사가 없을 때는 집사가 요리사를 겸한 일도 종종 있었다지만, 저는 음식 솜씨가 별로라 저 꼬맹이, 아니 후.계.자.님의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 않은데, 우리 전당포에서 일할 수 있는 요리사를 찾는 게 또 하늘의 별 따기라서요.”

“그야 그렇겠지요.”


구미호가 운영하는 전당포에서 일할 수 있는 요리사가 그렇게 찾기 쉬울 리가.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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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전당포의 신비한 요리사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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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복숭아구이 +7 24.05.08 1,194 56 11쪽
4 3. 서왕모의 복숭아 +5 24.05.08 1,272 57 11쪽
» 2. 이상한 전당포(2) +6 24.05.08 1,395 61 13쪽
2 2. 이상한 전당포(1) +8 24.05.08 1,424 63 12쪽
1 1. 흰 여우 +17 24.05.08 1,826 69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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