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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읽는 변호사가 세상을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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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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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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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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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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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4)

DUMMY

서울고등법원 401호 법정.

재판장인 석종현 부장판사가 완고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어야 되나?’


안 그래도 비호감인 얼굴에 인상을 쓰고 있으니 봐주기 어려울 정도였다.

석 부장이 인상을 쓰면서 기록을 읽다가 나를 보며 말했다.


“원고 측 증거 제출하셨네요. 이게 뭔가요?”

“광해군 때 장대라는 노비의 속량문기입니다.”

“속량문기요? 그게 뭡니까?”

“노비가 양인으로 속량될 때 작성되었던 문서입니다. 번역본도 따로 제출되어 있습니다.”


번역본이라는 말에 석 부장이 기록을 들춰봤다.

원하던 걸 찾았는지 잠시 석 부장이 유심히 내용을 들여다봤다.


“이제 좀 이해가 되네요. 장대라는 노비가 서석사의 소유였는데, 현재 서석사가 있는 자리에 새로 절이 중건되면서 장대도 그쪽으로 옮겨졌다. 그러니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서석사와 지금의 서석사는 동일한 단체다?”

“네. 맞습니다.”


석 부장이 옆에 있는 주심에게 뭐라고 말을 하더니 피고 측을 보며 물었다.


“피고 측은 이에 대한 반론이 없나요?”

“일단 노비 제도는 반인륜적인 제도이므로 이 제도를 기반으로 한 주장은 인정될 수 없고, 설령 장대라는 노비가 서석사를 따라 거주지가 변경되었어도 단체의 구성원이 동일하게 이전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본인 변호사의 얘기를 듣고 한국 변호사가 통역해서 말했다.

재판장이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나를 보며 말했다.


“원고 대리인. 피고 주장에 대해서 할 말 있습니까?”

“먼저 조선 시대를 현대 기준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인륜적인 제도라고 해서 그 당시 노비 제도의 효력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 시대 노비는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니라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주인이 거주지를 옮기면 같이 옮겨져야만 합니다. 따라서, 불상 도난 당시 서석사와 지금의 서석사는 동일 단체로 보아야 합니다.”

“좋습니다. 양 측의 주장 들었으니 이 부분은 재판부가 판단을 해 보겠습니다.”


재판장이 더 이상 딴지를 걸지 않고 넘어갔다.

하지만, 다음 말에서, 왜 그가 무난하게 넘어갔는지 이유가 드러났다.


“원고 측은 이 속량문기 말고 다른 증거는 없나요? 서석사의 동일성 문제 말고도 불상의 도난 경위와 관련된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얼마 전에 재판부에 변론기일 연기 신청을 했습니다만 증거를 찾는데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한 기일만 더 주시면···.”

“저번에 분명히 말씀드렸죠? 더 이상 기일을 잡는 건 안 된다고요.”

“그래도 재판장님.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을 주셔야지 이렇게 판결을 선고하시면 올바른 결론이 나오지 못할 수도 있···.”

“원고 대리인. 결론을 내리는 건 재판부지 원고 대리인이 아니에요. 말조심하세요.”


석 부장이 미간을 찡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의 여지가 없을 것 같아 옆에 있던 주심 판사를 쳐다봤다.

주심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바로 시선을 돌렸다.


< 왜 날 봐? 나도 이런 판결하기 싫어. 제발 증거를 갖다 줘. 증거를···. >


여전히 주심은 우리 쪽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주심이 원하는 그런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석 부장이 회심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만 변론 종결하고 한 달 뒤에 선고하겠습니다.”


항의를 해도 꿈쩍하지 않을 것이니 뭘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피고 측은 재판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사를 하고 법정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런 피고 측 변호사들을 보며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앞 한적한 카페에 앉아 있던 정성식 국장은 초조한 얼굴로 연신 시계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이 새끼. 안 나오는 거 아냐?’


시계와 카페 출입문을 번갈아 보기를 여러 차례.

그때마다 정 국장의 표정은 더욱 더 초조하게 변하고 있었다.

정 국장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나가려고 할 무렵 출입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가운데 가르마를 하고 번들거리는 피부에 뾰족한 턱을 한 한봉석이었다.


“계장님이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약속 시간에 늦고도 태연하게 말하는 놈을 보니 정 국장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린 후 한봉석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냈냐? 집행유예 받았다는 애기는 들었는데.”

“계장님이 잘해 주셔서 전과자가 됐죠.”


한봉석이 눈을 치켜뜨며 비꼬았다.


“네가 잘못했으니까 벌을 받는 건 당연하지. 그런 좋은 기술을 갖고 왜 쓸데없는 일을 하냐?”

“먹고 살려니까 그런 거죠. 제가 뭐 다른 재주가 있어야죠.”


문서를 위조하는 기술을 좋은 재주라고 해 주니 배배 꼬였던 한봉석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때다 싶어 정 국장이 봉석에게 운을 띄웠다.


“너 그 일은 한글만 되는 거냐? 아니면 한자나 영어도 되는 거냐?”

“내가 한자나 영어를 그렇게 할 일이 어딨어요? 먹고 살려고 몇 번 그런 것뿐인데···.”

“네가 대한민국에서 최고라며? 그것도 못 해?”

“누가 못한데요? 한 번도 안 해봤다는 거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기분 나쁜지 봉석은 목소리를 높였다.

봉석이 흥분하는 모습을 보자 정 국장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할 수 있다는 거야? 뭐야?”

“한글이나 한자나 영어나 다 거기서 거기지. 어디서 힘을 줬는지 각도가 어떻게 꺾이는지 눈으로 보면 다 아니까.”

“그래? 그거 잘됐네.”

“잘 되긴 뭐가 잘 돼요.”


싱글벙글 웃고 있는 정 국장을 보며 봉석은 살짝 짜증을 냈다.

정 국장은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봉석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야! 한봉석이. 너 애국 한 번 해라.”

“애국? 애국자, 애국가 할 때 그 애국?”

“그래. 이 새끼야! 애국자 한 번 되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난데없는 애국 얘기에 봉석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정 국장은 눈에 힘을 팍 주고 봉석에게 말했다.


“지금 대마도에서 갖고 온 불상이 있는데, 그거 ···500년 전에 왜구들이 훔쳐간 거야. 근데, 그 새끼들이 불상 돌려달라고 해서 지금 거의 돌려줘야 할 판이거든. 그러니까 네가 도와줘야겠다.”

“그걸 내가 왜 도와줘요? 불상이 일본에 있든 북한에 있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

“야! 그게 왜 상관이 없어? 문화재를 일본놈들이 가져간 건데.”

“아!!! 몰라요!!! 난 또 대단한 일 있어서 부른 줄 알았네.”


봉석은 앞에 있던 커피를 후루룩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정 국장은 테이블에 있던 안경을 쓰며 나직하게 말했다.


“한봉석이. 문서 위조나 하고 다니는 새끼한테 애국할 수 있는 기회를 줬더니 뭐가 어째? 너 이 새끼 그동안 경찰 조사에서 무혐의 받은 게 몇 개더라? 그거 다시 재조사해 달라고 전국 검찰청에 순회공연 다녀 볼까?”


일어나던 봉석이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숨을 몰아쉬며 화를 삭이던 봉석이 짜증 가득한 눈으로 정 국장을 쳐다봤다.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결송입안(決訟立案)이라고 조선 시대 판결문 같은 것이 있는데, 그걸 네가 써주면 되는 거야.”

“결송입안? 나보고 조선 시대 판사가 되라고요?”

“판사는 아니고 정확하게 말하면 부사지. 홍산부사.”


조금 전까지 짜증이 가득했던 봉석은 조선 시대의 문서라는 말을 듣자 흥미가 생기는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정 국장은 그런 녀석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됐어. 이제 조선 시대 종이를 만들어 줄 수 있는 놈만 찾으면 돼.’


***


“하아··· 이제 2주 남았네. 이렇게 끝나나. 흐으···.”


앞뒤로 이어진 재혁의 한숨소리에 내 맘도 착잡했다.

할 수 있는 주장은 다했지만 재판장의 심증을 뒤집을 결정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재판장의 완고함 앞에 무력할 뿐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결과를 기다려 보자.”


내가 재혁에게 해 줄 말은 이 정도 뿐이었다.

재혁도 내 맘을 알았는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휴대폰을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드르륵. 쾅.


문이 거칠게 열리고 강 팀장이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변호사님. 귀한 걸 구해 왔습니다.”


재혁과 나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고문서로 향했다.


“이건 뭐예요?”

“결송입안이라는 문서입니다.”

“결송입안이라면 조선 시대 판결문 같은 건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재혁의 질문에 강 팀장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갑자기 판결문은 왜?”

“이거요. 제가 서석사에다 증거 좀 찾아보라고 말했는데, 며칠 동안 샅샅이 뒤져서 찾아낸 겁니다.”

“정말요? 여태 안 나오다 갑자기 뭔 일이야?”


재혁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고문서를 조심스레 살펴봤다.

재혁의 말을 들은 강 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뭔 일은요? 왜놈한테 불상을 줄 수 없다는 하늘의 뜻이겠죠.”

“이거 내용이 뭡니까?”

“여기 번역본이 있습니다.”


내가 질문하자 강 팀장이 가방에서 문서를 꺼냈다.

번역본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508년 10월 15일 원고(原告) 정명과 피척(彼隻, 피고) 풍길 사이의 송(訟)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결(決)한다.

피척이 함부로 취한 불상의 소유가 서석사에 있음을 확인한다. 다만, 피척의 원(願)에 따라 왜의 포교(布敎)를 위해 불상을 피척에게 빌려주고 10년 후 피척은 원고에게 불상을 반환한다.

홍산부사 이선무


놀라운 내용이었다.

이 결송입안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결정적인 증거 정도가 아니라 결론이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결정적인 증거가 이 시점에 발견된 것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강 팀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사무장님. 이거 정말로 서석사에서 발견된 게 맞아요?”

“허, 헛··· 맞다니까요. 이거 서석사에서 며칠 동안 싹 다 뒤져서 찾아낸 거예요.”

“어디서 찾은 건데요?”

“아, 그게··· 지난번에 창고를 뒤졌던 스님이 깜빡 잊고 상자 하나를 빼먹었었는데 다시 찾다 보니까 그 상자에서 이게 나왔다 그래···.”


더듬더듬 말하는 강 팀장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의심스러웠다.

좀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 재혁이 끼어들었다.


“형. 이게 어디서 발견된 게 뭐가 중요해? 지금이라도 나온 게 중요하지. 시간 없어. 이거 빨리 제출하고 변론 재개해 달라고 신청하자.”


듣고 보니 재혁이 말이 맞았다.

이 문서의 진위는 어차피 변론이 재개되면 감정으로 결정될 일.

재판장이 감정도 하지 않고 이 문서를 인정할 턱이 없었다.


“그래. 일단 문서 제출하고 변론 재개 신청을 하자.”

“알았어. 앗싸. 이거 완전 대박인데. 팀장님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는 재혁의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쭈뼛쭈뼛 서 있던 강 팀장도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팀장님. 이거 문제없는 거죠?”

“그··· 그럼요. 정말로 서석사에서 찾은 거라니까요.”


강 사무장이 대충 얼버무리고 방에서 나가려는 찰나 그의 마음이 들려왔다.


< 에라 모르겠다. 형님이 알아서 하겠지. >


형님이 알아서 한다고?

강 사무장이 형님으로 부를 만한 사람은 정 국장뿐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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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041. 재판장은 친일파 +3 23.10.19 1,179 23 12쪽
» 040.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4) +3 23.10.18 1,142 24 12쪽
39 039.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3) +4 23.10.17 1,191 20 12쪽
38 038.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2) +3 23.10.16 1,243 23 12쪽
37 037.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1) +3 23.10.15 1,448 27 11쪽
36 036. 승소. 그러나, 험난한 미래 +3 23.10.14 1,435 2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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