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팅커테일 님의 서재입니다.

사람을 읽는 변호사가 세상을 바꿈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팅커테일
작품등록일 :
2023.09.06 15:27
최근연재일 :
2023.11.21 12:00
연재수 :
74 회
조회수 :
110,413
추천수 :
1,934
글자수 :
393,542

작성
23.10.17 12:00
조회
1,190
추천
20
글자
12쪽

039.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3)

DUMMY

속량문기(贖良文記).

조선시대 주인에게 속가(贖價)를 지불하고 노비의 신분에서 해방되었음을 증명하는 문서.

한마디로 돈 내고 노비 신분을 면했다는 증서인 것이다.

강 팀장은 테이블에 놓인 속량문서를 보며 말했다.


“이게 광해군 때 속량문기인데요. 중요한 건 이 노비의 주인이 바로 서석사 주지였다는 겁니다.”

“정말요?”


재혁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맞다니까요. 그쪽에 있는 헌책방, 골동품점을 아주 싹 다 뒤져서 얻은 거예요.”

“거기에 뭐 중요한 내용이 있었나요?”

“저희 소송에 필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게······.”


속량문기의 주인공은 장대(長大)라는 노비.

그의 증조모 석을년(石乙年)이 서석사의 노비로 들어온 이래 조모, 모친을 거쳐 서석사의 노비로 있던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서석사가 불에 타 없어졌을 때 다른 노비들은 다 도망갔으나, 장대 일가만은 서석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서석사 승려들이 현재의 장소에 절을 다시 세울 때 성심을 다해 일을 했다.

그런 장대 일가에 감동한 서석사 주지는 그에게 속가를 받지 않고 속량을 해 주게 된다.

그때 속량을 받았던 장대의 속량문기가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정말 귀한 문서네요.”

“네. 정말 어렵게 찾았습니다.”

“그런데, 장대가 속량을 받은 거랑 우리 사건이랑 무슨 관계가 있죠?”

“여기를 보십시오.”


강 팀장이 속량문기 가운데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자로 쓰인 한자도 모를 판에 흘려 쓴 걸 알아볼 리가 없었다.

나와 재혁은 손가락 쪽으로 보고 있다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어 강 팀장을 쳐다봤다.

강 팀장이 살짝 거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바로 장대가 이사한 내역입니다.”

“이사한 내역이라고요? 그럼 서석사가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다는 게 거기 나온다는 겁니까?”

“네. 여기 보면 임진왜란으로 서석사가 불에 타서 현재 있는 곳으로 이전했다는 내용이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와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내가 엄지를 들어 보이자 강 팀장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강 팀장이 이런 귀한 자료를 어떻게 구한 건지 궁금했다.


“이걸 어떻게 구하셨어요?”

“홍산 쪽에 있는 골동품점을 돌아보고 있는데, 이게 딱 눈에 띄지 뭡니까? 그래서 주인장한테 물어봤는데, 이거 별 가치도 없는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를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요?”

“네. 몇 년 전 고령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이 속량문기를 가져와서는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보인데 내용이 뭔지 알려 달라고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주인장이 속량문기라는 사실을 알려 줬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노발대발 화를 내고 갔답니다. 근데, 며칠 있다 다시 와서 이 속량문기를 던져 놓고 아무 말도 없이 가 버렸대요. 그래서 지금까지 갖고 있었다는 거예요.”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보가 속량문기였다니 그 농부가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갔다.

며칠 고민한 끝에 가보를 버리기로 한 그 결정은 또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런 그의 고통 덕분에 우리는 재판에 필요한 증거를 얻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거는 얼마나 주고 사신 거예요?”

“그냥 가져가라는 걸 10만 원 드리고 왔습니다.”

“네. 고생하셨고요. 재판 끝날 때까지 뭐가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강 팀장이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재혁아. 이거 번역해서 재판부에 제출하자. 이거 제출하면 일단 같은 사찰이었다는 건 입증이 될 거야.”

“알았어.”


재혁은 테이블에 놓여 있던 속량문기를 들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두 가지 요건 중 사찰의 동일성은 이제 입증이 되었다.

하지만, 나머지 하나의 요건.

왜구가 불상을 훔쳐간 사실에 대한 입증은 막막했다.

재판장이 예고한 변론기일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


김앤전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실.

김형모 대표가 젊은 변호사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사건은 어떻게 돼 가고 있어?”

“지금까지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1심과 달리 재판장도 저희 편을 드는 것 같고. 일본 변호사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서석사에서 변호사를 바꿨다며?”

“네. 법률사무소 일혁이라고. 처음 들어보는······.”

“뭐? 뭐라고? 일혁?”


김 대표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영문을 모르는 변호사가 어리둥절했다.


“네. 근데, 뭐가 잘못되기라도?”

“아··· 아니야. 미안하네. 나도 모르게 그만.”

“네. 대표님.”


갑작스러운 불호령에 놀랐던 변호사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재판장이 석종현 부장인가?”

“네. 맞습니다.”

“그래. 알았어. 마쓰자카 변호사 불편하지 않도록 잘 부탁하네.”

“네. 대표님.”


변호사가 인사를 하고 대표실을 나가자 김 대표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네.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 아이고. 석 부장. 잘 지내죠? 얼굴 못 본 지가 꽤 됐네.

- 대표님이 바쁘시니까 그렇죠. 저는 언제든지 준비가 돼 있습니다.

-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네요.


두 사람 모두 흡족한 웃음소리를 냈다.


- 석 부장. 재밌는 사건하고 계시죠?

- 재밌는 사건이라면 어떤 사건을?

- 대마도에서 불상 하나가 들어왔다던데.

- 아아!! 그 사건이요?


석종현 부장판사가 이제 알 것 같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 그거 일본 쪽에서 관심이 많은 사건이야. 가뜩이나 이 정권 들어서 관계가 안 좋은데, 이 사건까지 안 좋게 결론을 내리면 양국 관계에 더 부담이 되지 않겠어요?

- 그거야 그렇지만 법원은 법리로 판단하는 곳이라···.


조금 전 들은 것과 달리 석 부장판사가 약간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김 대표는 석 부장의 말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대번에 알아들었다.


- 석 부장 같이 유능한 법관이 고등법원에만 있으면 되나? 곧 정권도 바뀌고 대법관도 바뀌는데 말이야.

-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석 부장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 지금이야 대법관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이 많지만, 석 부장이 안 되리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력만 하면 다 되는 게 대한민국 아니겠어?

- 그거야 그렇죠. 노력만 하면 다 될 수 있는 나라죠.

- 나는 석 부장이 좀 더 큰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한일 관계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이야.

-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 우리 아버지나 자네 부친이나 같은 동경대 동문이잖아? 자네랑 나도 동문이고.

- 네. 그렇습니다.

- 그런 사이에 서로 돕고 살아야지. 안 그래?

-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두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쩔쩔매는 석 부장을 상상하며 김 대표는 호탕하게 웃었다.

석 부장은 왜 갑자기 김 대표가 웃는지 몰랐으나 그냥 그를 따라 웃었다.

잠시 후 통화를 끝낸 김 대표는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창 쪽으로 걸어갔다.

이름도 없는 애송이들에게 벌써 세 번이나 체면을 구긴 김 대표였다.

이번에는 반드시 놈들을 제압하고 본때를 보여 줘야 했다.

특히 그놈에게는 더욱더.


***


“변론기일 연기 신청은 어떻게 됐습니까?”

“예상대로 불허됐습니다.”


정성식 국장이 애써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대방에게 편파적인 재판장인데 기일을 연기해 주는 게 더 이상했다.


“저번에 강 팀장님이 가져오신 속량문기 빼고 다른 증거는 못 찾으신 거죠?”

“네. 노력을 해 봤는데, 너무 오래전 일이라 마땅한 문서가 없습니다.”


정 국장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지나면 변론기일인데 뭐라고 해야 되나? 일단 서석사가 동일 단체인지는 해결을 했는데. 불상이 왜 대마도에 건너가게 됐는지는 알 수가 없으니···”

“왜구가 훔쳐가지 않으면 불상이 거길 왜 갔겠어? 그리고 대마도 정토사를 창건한 사람이 왜구 두목이었던 토요시(豊吉)라는 게 밝혀졌는데 말이야. 토요시는 1509년에 정토사를 창건했고, 창건할 때 바로 그 불상이 봉헌된 거야. 이건 누가 봐도 뻔하다고.”


재혁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정 국장, 강 팀장이 재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구가 불상을 가져갔다고 해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남은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래도 문제야. 훔쳐갔다고 하더라도 자주 점유는 인정되는 것이고, 그러면 점유취득시효에 의한 소유권 취득이 인정될 수 있잖아.”

“그건 형 말이 맞아. 그래도 왜구가 훔쳐갔다면 파리 협약에 의한 반환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내가 보니까 그것도 문제더라. 파리 협약은 약탈한 문화재를 반환하는 협정이고 이 사건처럼 민법의 문제로 푸는 것이 아니라 나라 간의 협의를 통해 해결하도록 되어 있어. 한 마디로 그건 별개의 절차라는 말이지.”


재혁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 사건에 적용될 수 있는 규정이 아니라면 아무리 좋은 규정이라도 무용지물이었다.

답을 내야 하는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완전한 해결책은 그 왜구들이 불상을 빌려 갔다는 문서가 있으면 되는 겁니까?”


정 국장이 아주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물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렇죠. 근데, 그런 문서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왜구가 약탈하러 와서 불상을 빌려 달라고 했겠습니까?”


재혁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정 국장은 무슨 생각에 하는지 재혁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불상 사건 첫 회의 때 똑같은 말을 했던 정 국장이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이다.

얘기를 듣고만 있던 강 팀장이 정 국장에게 핀잔을 줬다.


“형님은 왜 똑같은 말을 하고 그러세요? 상식적으로 왜구가 불상을 도둑질하면 도둑질을 했지 그걸 빌려 달라고 했겠어요?”

“그럼 왜구가 불상을 갖고 갔는데, 그걸 찾아오지 못하는 건 상식적이냐?”


강 팀장의 말에 정 국장이 버럭 했다.

갑작스런 정 국장의 반응에 우리들은 모두 그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뭔가를 생각하던 정 국장의 눈에서 그의 마음이 들려왔다.


< 그 자식한테 연락을 해야겠어. 그놈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


그 자식? 그놈?

나는 정 국장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럴 때 도와줄 사람 어디 없나?”


나는 넌지시 정 국장의 반응을 보려고 했으나 그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재혁이 답답한 듯 뒷목을 잡으며 말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어? 일단 변론기일에 나가서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고 말해 봐.”

“말해서 들을 사람이면 진작에 연기 신청을 받아 줬겠지. 하여간 말은 해 볼게.”

“응.”

“자. 자. 국장님. 팀장님. 이제 얼마 안 남았는데, 증거 있는지 샅샅이 찾아봐 주시고요. 마지막까지 파이팅 하시죠.”


나, 재혁, 강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정 국장은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국장님은 안 일어나세요?”

“저는 통화를 할 데가 있어서요. 변호사님 먼저 가십시오.”


정 국장이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누구한테 전화를 하려고 하느냐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참고 돌아섰다.

회의실의 문이 닫힐 무렵 정 국장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 지금 어디냐? 좀 만나자.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사람을 읽는 변호사가 세상을 바꿈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46 046. 상표권 분쟁 (2) +4 23.10.24 1,072 27 12쪽
45 045. 상표권 분쟁 (1) +3 23.10.23 1,132 24 11쪽
44 044. 궁예의 후손 (2) +4 23.10.22 1,190 24 12쪽
43 043. 궁예의 후손 (1) +3 23.10.21 1,168 27 12쪽
42 042. 변론 재개 +5 23.10.20 1,197 21 12쪽
41 041. 재판장은 친일파 +3 23.10.19 1,179 23 12쪽
40 040.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4) +3 23.10.18 1,141 24 12쪽
» 039.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3) +4 23.10.17 1,191 20 12쪽
38 038.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2) +3 23.10.16 1,243 23 12쪽
37 037. 서석사 불상 도난 사건 (1) +3 23.10.15 1,447 27 11쪽
36 036. 승소. 그러나, 험난한 미래 +3 23.10.14 1,435 27 12쪽
35 035. 결정적 증언 +4 23.10.13 1,430 28 12쪽
34 034. 증인을 잡아라 (2) +4 23.10.12 1,410 27 12쪽
33 033. 증인을 잡아라 (1) +5 23.10.11 1,449 26 12쪽
32 032. 거짓 증거를 깨라 +4 23.10.10 1,490 29 12쪽
31 031. 전관 변호사가 비호감 +3 23.10.09 1,515 28 12쪽
30 030. 노예 아이돌 (3) +4 23.10.08 1,540 26 11쪽
29 029. 노예 아이돌 (2) +6 23.10.07 1,516 24 12쪽
28 028. 노예 아이돌 (1) +4 23.10.06 1,621 27 11쪽
27 027. 좋은 생각 +2 23.10.05 1,748 29 12쪽
26 026. 갑질의 끝 (2) +4 23.10.04 1,783 30 12쪽
25 025. 갑질의 끝 (1) +6 23.10.03 1,775 25 12쪽
24 024. 강남서 강력반 강호 (2) +1 23.10.02 1,768 28 12쪽
23 023. 강남서 강력반 강호 (1) +2 23.10.01 1,865 27 12쪽
22 022. 사장은 또라이 (2) +2 23.09.30 2,015 24 12쪽
21 021. 사장은 또라이 (1) +2 23.09.29 2,106 27 12쪽
20 020. 꼬리 자르기 +3 23.09.28 2,126 30 12쪽
19 019. 내부자 +3 23.09.27 2,155 29 12쪽
18 018.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 (2) +3 23.09.26 2,171 28 11쪽
17 017. 드러나는 사건의 실체 (1) +3 23.09.25 2,162 27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