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대결 (2)
"미끼?"
"나도 당황스러우니까 우리 천천히 좀 따져보자고. 자 아까 했던 질문. 지금 4년이 넘게 살아 있던 기억이 있나?"
"..."
대답이 없는 거 보니 없군.
"아무래도 그래도 그런 기억이 아주 없을 수 없잖아. 네가 안 받은 거야. 네가 섬기는 그 뭔가가 너에게 주지 않았다고."
갑자기 눈을 노리고 <팬텀 블레이드>? 아이고 귀 긁혔다. 따끔해라.
이거 잘못 맞으면 죽진 않아도 회복에 애쓸 정도는 되겠다.
곤잘레스가 모든 코어에서 에너지를 끌어낸다. 코어의 수는 총 여섯 개, 심장 위치에 메인 코어. 머리와 네 팔다리에 하나씩.
표정에 잘 적혀 있네... 인정할 수 없다고.
모르긴 몰라도 나와 만날 때는 내가 너보다 훨씬 약했나보지?
<팬텀 블레이드>에 <파괴 파동> 이 얽힌다. 그리고 아~주 거대한 <회전감옥>.
하이고야. 전혀 방어에 신경을 안 쓰고 모두 공격으로 돌린다고? 커다란 곳에 가둔 채 나를 잘 다져서 스무디로 만들겠다 그거야?
그래라. 정면에서 깨 주마.
메인은 <전하 붕괴>. 하나 더 꺼내서 쌍소멸시켜도 좋지만... 쟤가 휘말려 죽겠지.
주 공격은 맞받아치고, 자잘한 영향은 <세이프하우스>로 막으면 된다.
마지막을 뭘 쓰지. 저걸 다 뚫은 다음 들어갈 공격기가 지금 없네.
어차피 결정타는 한 번이다. 오래 안 끌 거니 <신화투영>으로 가자.
주변에 휘말릴 사람은 없고, 지금 발 딛고 있는 땅이 한국이니까 가장 좋은 건 제우스의 번개를 뿌리는 벽력지팡이 <아스트라페>. 전하 붕괴와 뒤섞으려면 이게 가장 좋아.
한국 땅인데 제우스가 가장 좋을 거라니 뭔가 이상하네. 에이 우리나라에 그리스 로마 신화만한 메이저가 어디 있어. <신화투영>은 그게 중요하다고.
자, 온다.
블레이드의 공격은 모두 일곱 방향. 쳐내고, 흘리고, 비틀어 쳐서 틈을 찾는다.
스킬의 완성도는 높다. 한 번 충돌한 정도로 제어를 잃거나 사라지지 않아. 들통나지 않게 칼날을 한 쪽 방향으로 모으고.
<반작용 올가미>의 감옥 벽이 덮쳐온다. 벽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며 전파까지 강해진다. 세이프하우스가 깨지면 띵 소리 난 전자레인지의 안의 따끈한 뭔가가 되어있을 상황.
더 가까이 와라. 더, 한 번에 없애버리게. 좀 더... 좋아.
"잘 받아 봐."
쉽지 않을 거다, 14만 출력이 그대로 담긴 번개니까.
아스트라페가 뿜어낼 번개에 <전하 붕괴>를 결합. 둘을 그냥 더한 것보다는 효율이 분명 더 좋을 거야.
그렇게 뻗어나간 번개가 <반작용 올가미>를 산산조각내며 직격했다. 죽을 정도로 쏘진 않았어. 그래도 비틀거린다.
좀 약하게 할까?
"다시, 집중해."
<아스트라페>의 에너지로 팽창한 공기의 충격, 내리꽂는 벼락의 에너지와 밀도, 그것과 얽혀 사방으로 흩어지는 에너지 구조를 깨 버리는 <전하 붕괴>분해식.
네가 이걸 막을 방법은 전혀 없어, 소년. 받아들이고 포기하라고.
그래도 좀... 살살 할까?
"무릎 꿇었다고, 멈추지 않아."
"아니 너... 너..."
세 번째 공격 작렬. 휴우우. 간만에 총 출력을 다 끌어내 썼더니 머리가 띵하다.
이제 알겠지.
곤잘레스는 바닥에 엎드린 채 일어나려 안간힘을 쓴다. 안 돼, 몸에 들이찬 전기 다 빠질 때까지 말 안 들을 걸.
나는 가까이 가서 툭 던지듯 말한다.
"네가 졌다."
"웃기지... 마!"
"<전하 붕괴>를 쓰고 있거든, 미안하지만 회복에 쓸 에너지가 안 모일 거야."
그러니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다. 단 하나를 제외하면.
"이제 불러내. 너와 계약했다는 그거. 그 놈이 왜 이랬는지 좀 알아야겠어."
"너..."
니콜로는 반응이 없다. 숨어있겠지.
니콜로가 '준비' 한 건 그때 카유가 보여준 것 같이 균열 같은 다른 공간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니콜로는 그걸 필요로 한다고 했고.
"불러낼 수 없나?"
"후회할거다, 너, 그 분이 널 산산조각 낼 거다!"
진짜 이 친구 왜 이래. 진짜 이게 요새 10대 유행이야?
그런데 그 진노는 없을 거야.
너를 약한 상태로 둔 채 나를 불러냈다는 건, 나를 그 곳으로 유인하려는 거니까.
시작됐다.
곤잘레스를 중심으로 공간이 펼쳐진다.
균열 안에 들어오는 것처럼 피부가 살짝 저리고... 어두웠다가 금방 밝아진다.
보인다. 곤잘레스의 바로 옆. 까만 옷을 입었고, 음식 먹을 때 칼로리 엄청 신경 쓸 것 같은 귀공자.
여덟 명 중 둘째... 좀 기괴하네. 저예산 뮤직비디오에 분장 하고 나온 가수 같잖아.
웃고 있고, 소년의 어깨에 손을 댄 채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기분 나쁜 눈과... 목소리다.
"처음 만나는군. 사서 이진협. 이진협 맞지? 지금 내 발음 별로 한국어스럽지 않지?"
"여기에서 처음 본다는거야, 아니면 여러 번 중에 드디어?"
"여러 번 중 드디어."
"그럼 반갑겠네. 나 꽤 유명하잖아. 사인 필요해?"
비웃는군.
무슨 속셈인 거냐. 말해 봐라.
"그 뭐라고 해야 돼. 두번째 씨. 나를 왜 탐내지?"
"쓸만하니까. 곤잘레스? 괜찮다. 떨지 않아도 돼. 잘 했어. 아주 잘 했다."
위로하는군.
만약 나로 갈아탈 생각이라면 저 소년을 포기시킬텐데.
그건 또 아닌가?
'둘째' 가 말한다. 약간의 분노가 얹힌 듯 낮게 깔린 목소리로.
"그런데 말이지, 일곱째가 약속을 어길 리 없고, 막내가 무모한 짓을 할 리 없으니 남은 건 형이거나 어머니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너무 허술해서 형일 줄 알았지. 나와."
니콜로가 내 뒤에서 '걸어나온다'. 활짝 웃으면서.
저 쪽도 지금 여유만만인데 둘 다 헤죽거리고 자빠졌으면 누가 유리한 거야? 말 좀 해봐.
"오랜만이다. 렌즈."
렌즈? 저 둘째 별명이 렌즈? 들은 쪽의 표정을 보니 좋은 의미의 별명은 아니네.
"그렇네, 형. 여기 시간으로 620년이면 우리 쪽에선 대충 820일 정도 되나?"
"그렇지."
"그만하면 정신차릴 때 아니야?"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니 되돌려 주겠다."
둘이 그만 싸우고 그래서 누가 누구에게 걸려든 겁니까? 저 쪽도 다 알고 유인했다는 눈친데요, 니콜로.
둘째는 계속 곤잘레스에게 미소지으며 또 나를 보고, 곤잘레스를 보는 걸 반복하며... 니콜로를 본다.
"판에 끼어들고 싶었으면, 형. 룰을 지키던가 해야지. 이거 장난치는 거 아니야. 진지하다고."
"나도 안다. 보니까 다섯이 나란히 미친 짓을 하고 있더라고. 재미있어 보여서 좀 끼어들기로 했다."
"괜찮겠어? 형은 여기서 추방되면 끝일 텐데. 은하를 떠돌다 지구를 붙잡으려고? 1억 년 쯤 노력하면 될 지도 모르겠네."
니콜로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왜 이래 이 사람. 기분나쁘게.
"실패 안 해. 나는."
"형은 그게 문제야... 조금만 형 생각대로 되면 다 성공한 줄 아는 거."
니콜로의 말이 없어졌다.
"어머니를 가뒀을 때에도 그러다가 당했지."
"네놈은 특별하게."
"특별?"
"내가 중앙을 차지하는 날, 소멸시켜달라고 울 때까지 흩뿌려주마."
저 사람들 기준으로 꽤 진지한 협박인 것 같은데 들은 쪽은 너무 즐거워하네. 모르겠다, 미친놈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형은 나에게 별로 관심 없었지만 나는 좀 아니었어. 억울했지."
"네가 유달리 보잘 것 없는 걸 받았으니까, 넌 그냥 렌즈일 뿐이고."
"그랬어. 그렇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아니더라고. 가장 대단한 걸 받은 게 나였던 거야, 사실은. 여기 와서야 알았지."
니콜로가 웃는 걸 멈췄다.
"무슨 말이냐."
'렌즈'는 니콜로에게서 눈을 떼고 곤잘레스에게 말을 건다.
"곤잘레스."
"예. 주인님."
"괜찮다. 앞을 봐라."
"네..."
"네 소원이 뭐였지?"
"무엇이든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던, 누구던."
렌즈은 이제 나를 응시하며 곤잘레스에게 말한다.
"이 안에서 저걸 없애면 네가 진짜다. 첫 번째는 저거다. 가라."
눈을 한 번, 깜빡이니... 곤잘레스가 있던 자리에 내가 있다.
뭐야 이거.
나는 내 손을 뒤집어가며 살펴보고, 내 옷을 한번 당겨보고...
뭐 하는 거야, 나. 현실감각을 되찾자, 자, 자. 저기에 내가 있어. 여기도 내가 있고.
미친?
니콜로에게 묻자.
"지금 이거, 예상 범위 아니죠?"
"아니다. 잠깐 기다려 봐."
그럴 줄 알았지.
"플랜B 같은 건 없을 거고, 달라진 건요?"
"기다리라고, 아니 일단, 싸워, 싸우면서 버텨!"
하이고, 나는 대책 없는 놈들이 싫어...
싸우라는 말은 여기 있는 내가 들었는데 왜 저쪽의 내가 덤비는 거야. 유행 탄 적 없는 개그도 아니고.
세상에.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니 태어나서 처음이네.
출력은 나와 똑같은 모양. 속도, 공격과 방어의 판단, 떠보기와 진짜 공격을 뒤섞는 습관도 같아.
저 번개 지팡이를 잡는 법까지, 나 그 자체네.
우와,
이렇게 보니 대단해. 나는 정말 대단했어. 이렇게 빠르고 강하구나.
시간이 많다면 이 쉐도우 복싱을 원하는 만큼 하겠지만, 연습도 할 겸?
"니콜로."
"기다리라고! 아니, 말해라. 뭐냐?"
"일단 두들겨 팹니다."
번개 공격은 아까 쓴 <방패벽>으로 빗나가게 하고, 근접전을 걸게? 안 되지, <시간 왜곡>을 먼저 쓸 거거든.
내 얼굴을 때리자니 좀 슬퍼지네.
너무 울적해하지 말자. 때린 것도 나잖아?
<시간왜곡>, <윈드워크>, <스틸스킨>. 세 개에 출력을 똑같이 나눠서 빠르게.
몇 대 맞고 나면 당연히 날 따라하겠지 - 그럼 킬리 누님의 기술, <증오하는 적>. 졸릴 걸. <시간왜곡>은 나도 쓰고 있고, 스틸스킨이나 윈드워크로는 이걸 못 피해.
<세이프하우스>. 나는 그 스킬의 약한 부분을 알아. 넓게 들어오는 약한 공격에는 거의 무적이지만 이렇게 한 점에 집중해 뚫으면 방어구조가 와해된다.
기선을 잡은 틈을 타서 <전하 붕괴>로 에너지의 응집을 방해, 때린다. 한 대 더 때리고, 또 한대 더.
정신차리기 전에 킬리 누님의 <증오하는 적>. 지금 잠들 수 없지. 호흡 참고 숨 고르기도 어려울 거고.
그것 봐, <세이프하우스>밖에 쓸 게 없지? 그래서야 아까랑 똑같잖냐.
한대 더 맞아라. 아니, 두 대. 세 대, 네 대. 사람을 때릴 땐 이렇게. 오른발, 왼손...
이만하면 알아먹지 않을까?
"슬슬 이 야만적인 행동을 끝내고 문명인답게 대화로 풀지 않을래?"
아니 왜 또 화를 내. <팬텀 블레이드>! 아까보다 위력이 좋다. 거기에 섞여서 <전하 붕괴>.
미라의 스킬을 좀 빌리자. <공간 제어>. 완벽하진 않아도 아는 만큼만 쓰면 돼.
전하 붕괴도 당연히 '없는' 공간으로는 침투할 수 없고, 나는 잠깐 유지되는 '없는' 공간에 있다가 뛰어나가며 가슴팍을 세게 친다. 아주 세게. 잠깐 숨 못 쉬게.
<공간 제어>는 못 따라하겠지. 나도 모르니까 너는 더 못 쓸거야.
가슴을 맞고 콜록거리다 악에 받쳐 공격해온다. 눈 뒤집혔나? 내가 화가 많이 나면 이러지. 부끄럽게도.
그래도 때리는 데 마음이 편해서 다행이다.
나는 그래도 그... 몸이 좀 튼튼한 편이니.
이렇게 때려도 골병 안 들 것 같은 기분은 들잖아. 어디까지나 기분만.
...지금까지 몇 대 정도 때렸지. 스무 대 넘었나? 그만 할까?
"더 할 거냐?"
대답이 없다.
그래, 그만두자. 맞는 것도 내 모습이라 좀 마음이 아파. 솔직히 그래.
나는 겨우 서 있는 '내'가 된 곤잘레스의 어깨를 잡고 '둘째' 쪽으로 밀친 다음 손을 털었다.
나는 한 대도 안 맞았다고 너스레 떨며 웃어주고.
렌즈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보고 있지만 그러니까 그... 저쪽 식으로 말하면 '연산' 이 막힌 것 같네.
"그 둘째 양반. 왜 이런지 이해가 안 가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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