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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알 님의 서재입니다.

백랑의 불꽃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외로운해
작품등록일 :
2021.02.01 23:01
최근연재일 :
2021.02.24 19:11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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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수 :
214,918

작성
21.02.19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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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021

DUMMY

아침 식사가 진행되는 자리는 여느 때와는 다르게, 무척 적막했다.

연장자 쪽에 속하는 글뤼페와 카라, 쉴라베는 끄트머리 자리에 앉아 마주 보고 식사하는 두 사람을 의식했다.


크리시스는 조금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달리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앉은 엘라이온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른 아침이어도 웃는 표정을 보여주었던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있었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나는 기억이 나지 않으니 알 수가 없네.'

'어제 크리시스님을 따라 나가더니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다른 때라면 오늘 하루 계획을 물으며 천천히 식사했겠지만, 지금같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는 빨리 빠져나가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런 와중, 가장 먼저 일어난 건 크리시스였다.


"전 먼저 올라가 볼게요."

"그러십시오. 아, 그러고 보니 이따가 제 방에 잠시 왔으면 하는데, 어딘지는 알고 있죠?"

"네. 언제쯤 들리면 될까요?"

"식사가 끝나고 하녀 한 명이 가서 문을 두드릴 겁니다. 그때 제 방으로 오면 됩니다."

"네. 그럼."


크리시스가 떠나고, 잠시 빵을 몇 번 깨작거리던 엘라이온은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펴졌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먼저 가서 연습하고 있을게요."


달칵.


엘라이온이 떠나고.

여기저기서 나직한 한숨 소리가 나왔다.


"하··· 어제 뭔 일 있었나요? 왜 저렇게 두 사람 다 분위기가 엉망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위기만 보면 싸운 것 같은데요?"

"흠··· 혹시 아그노스씨는 두 사람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아니요, 저도 오늘 아침에 저러는 걸 처음 발견했어요."


아그노스만은 아까의 상황 속에서도 태연히 있길래 뭔가 아는 게 있는 줄 알았다.

되도록 원만하게 지내주면 좋으련만.

글뤼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따가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군.'


사실 어제 파티를 시작하고 얼마 안 있고 부터 이상한 낌새를 느끼긴 했지만.

애들 일에 어른이 끼면 괜히 더 큰 분란만 조장한다는 생각에 간섭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터질 일이었어.'


간섭했든, 안 했든.


앞으로 하루 이틀 얼굴 보고 살 사이가 아닌데 벌써부터 저러면 곤란했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 다 음식을 남기다니. 주방장이 보면 슬퍼하겠군.'


덩그러니 남겨진 음식은 온기를 잃어갔다.


*


똑똑


"네···, 아그노스?"


벌써 식사가 끝났는지 글뤼페가 보낸 하녀가 왔다고 생각한 크리시스는 문을 열었고.

예상치 못하게 문 앞에 서 있던 건 한 떨기 꽃처럼 예쁜 소녀였다.


"안녕?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

"무슨 얘기? ···잠시만."


밤에 조금 잠을 설친 탓에 저기압이던 크리시스는 작게 하품을 했다.


'자는 도중에 계속 깨어난 것 때문인지 계속 하품이 나오네.'


생각이 많은 밤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별로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크리시스는 크게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용건을 물었다.


"저기··· 어제 엘라이온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크리시스도 그녀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아침에 흐르던 무거운 분위기를 감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으니까.


'나는 별로 신경 안 썼는데.'


자신이야 원래 말이 없었지만, 엘라이온까지 덩달아 그러니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크리시스에게는 이미 끝난 일이지만.

엘라이온이 아직도 앙금을 품고 있다면 그걸 자신이 어쩌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도 시비를 거는 상대에게도 우호적일 만큼 자신은 대인배가 아니니까.


"···그래?"


아그노스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몰라도 크리시스가 그 건에 대해 더이상 할 말은 없었다.


"그걸 물어보려고 온 거야?"

"뭐 그렇기도 하고, 이걸 전해주려고 왔기도 하고. 자, 받아."


가면 갈수록 아그노스는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분명 방금까지는 이걸 물어도 되나? 싶은 기색으로 질문하다가도, 갑자기 이런 걸 건내다니.


"이건···."


크리시스가 얼떨결에 받아 든 것은 하얀 꽃 한 송이었다.


"그 꽃의 이름은 칼미아라고 해."

"이건 어디서?"

"길에 떨어져 있길래 주워왔지."


꺾어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김 하나 없이 만개한 꽃이었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그냥? 그 꽃을 보니까 네가 떠오르길래 주워왔지.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냥 혼란스러웠다.

꽃을 준 이유도. 알 수 없는 저 표정도.


"무대 연습하러 가다가 잠깐 들른 거라 다시 가 봐야 해. 나중에 봐~"


손을 흔들며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어? 안녕하세요."


모퉁이를 돌더니 누군가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쪽 복도를 오는 이유는 자신의 방에 오기 위한 것밖에 없었다.


잠시 후, 예상대로 얼굴에 주근깨가 피어있는 하녀가 크리시스 쪽으로 다가왔다.

문 앞에 서 있는 그를 보고 살포시 얼굴에 홍조를 띤 그녀는 말했다.


"남작님이 데리고 오시라고···."

"···알겠습니다."


크리시스는 찝찝함을 유지한 채 방에 잠시 들어가 꽃을 책상 위에 놓고 다시 나왔다.


*


하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글뤼페의 방.

하녀가 문을 두 번 두드리며 크리시스를 데려왔다고 알리자 안에서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제 일을 마친 하녀는 물러가고, 크리시스는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크리시스님."


글뤼페는 다과가 놓인 테이블로 크리시스를 이끌었다.

자리에 앉은 크리시스는 그녀의 권유에 따라 차를 먼저 한 모금 마셨다.


'이건···.'

"라벤더 차입니다.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능이 있죠."


찻잔에서 입술을 떼고 안을 들여다보니 벼 이삭을 연상케 하는 찻물이 들어 있었다.


'필라소 할아버지···.'

"차가 마음에 안 드시나요?"

"네? 아니요."

"한참 차를 빤히 쳐다보고 계시길래···."

"···그냥 누군가가 생각났어요. 그 사람도 제게 이 차를 줬었거든요."

"아, 라벤더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제 주변에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분이 누굴지 정말 궁금하군요."


죽었어요.

···라고 차마 말하지는 못하고 크리시스는 저도 모르게 모호한 미소만 남겼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표정은 정말 좋군요. 보고만 있어도 다음 작품의 주인공이 떠오르는 미소입니다."

"···제가 웃었나요?"

"네. 그분이 크리시스님에게 굉장히 좋은 기억을 남겨 주셨나 봅니다."


좋은 기억이라 할 것까지는 없지만···.

정말 선한 사람 같아서,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막상 필라소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착잡하기만 했는데,

차를 마시니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마음 한켠에 따스한 햇살이 드는 기분이다.


"그분에 대한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저도 잘 알지는 못해요. 알게 된 지 몇 달도 되지 않아서."

"단편적인 것도 좋습니다. 무엇이 크리시스님을 웃게 했는지 초점을 맞춰서 얘기해 주시면 좋겠군요."

"······."


'할아버지의 무엇이 날 웃게 만들었냐, 라···.'


골똘히 생각하던 크리시스가 입술을 뗐다.


"이타적인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인연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죠. 말은 자신을 위해 그러는 거라 했지만, 그의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는 은혜나 다름없었겠죠. 그래서 그렇게···, 아. 네."


뭔가 어정쩡하게 끝났지만 글뤼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가 모여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대충 휘갈겨 적고는 금방 돌아온 그녀는 말했다.


"실례했습니다. 생각난 소재는 즉시즉시 적어야 까먹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런 대화에 소득이 있었나요?"

"영감이란 멀리 있는 게 아닙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저는 언젠가 지나가고 있던 개를 보고도 무언가를 느낀 적이 있죠."


"다른 이에게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는 것도 보는 이에 따라 달라지기 나름입니다."


글뤼페는 쿠키 담백한 쿠키를 집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의 티타임이 기다려지는군요. 크리시스님. 제가 어째서 당신에게 뮤즈가 되어달라고 했는지 아시나요?"

"······."


외모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외모 때문이라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글뤼페는 귀신같이 알아맞혔다.


"물론 그것도 맞습니다만··· 이런, 생각해 보니 초면에 제가 외모 칭찬만 하긴 했군요.

사실 다른 이유가 더 있습니다. 그건 바로 크리시스님에게서 느껴지는 깊이 때문이죠."

"깊이요?"

"네. 처음에는 외모에 혹해서 간 게 맞지만, 직접 만나 보니 외모만큼이나 값진 보물이 눈 안에 숨어져 있더군요."

"저는 잘 모르는데···."

"후후, 그냥 여자의 직감이라 생각해 주십쇼. 그리고 다시 생각해도 제 예감이 틀린 것 같지는 않군요.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자유롭게 쉬셔도 괜찮습니다. 아, 혹시 질문하고 싶은 신 건 없으신가요?"

"그러고 보니··· 여기 목욕은 어디서 하죠?"

"어? 제가 말씀 안 드렸나 보군요? 욕실은 바로 옆 방에 있습니다."


무심코 빈방이라 생각했던 곳이 욕실이라니.

크리시스는 당황스러웠다.


'특별한 표식도 없던데.'


욕실 문은 너무 자연스럽게 자신이 머무는 방의 문이랑 똑같은 문으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따로 글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빈방인 줄 알았는데···."

"아하··· 사실 그건 이 저택에 살았던 전 주인이 그런 겁니다. 그 방도 원래는 전 주인이 머무는 방 중 하나였는데, 자고로 욕실은 방과 완벽히 분리되어 있으면서도 가까워야 한다나? 그랬다 하더군요."

"그런가요··· 아, 그리고 자유 시간에는 밖으로 나가도 되나요?"

"네? 흐음······."


의외로 쉽게 된다고 할 줄 알았던 사안인데.

글뤼페는 난감한 듯 침음을 흘렸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얼마든지 허락해 주고 싶지만··· 수도라고 해서 마냥 안전한 건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야···."


크리시스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줄은 그녀도 몰랐는지 움찔거렸다.


"······제 마차를 타고 아가토스와 동행하는 조건이면 가능합니다. 마차에서 내리더라도 꼭 아가토스와 동행해야 하며···."

"아가토스는 또 어떤 분이죠?"

"한번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지난번에 마차가 준비되었다고 알려준 집사 말입니다."

"아··· 그분."


눈이 뭔가 이상했던 노집사.

기억대로라면 그녀가 가문에 있을 때부터 경력이 있던 집사였다.


"아가토스에 대해 미리 말해 놓을 점이 있다면··· 이거겠죠. 그는 사실 시력을 잃었습니다."

"···이상하긴 했지만, 지난번에 봤을 때는 전혀 앞이 안 보이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그건 그가 다른 감각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나서 그런 것도 있고, 익숙하기 때문인 점도 있습니다. 그가 이 저택에 적응한 지 꽤 됐을 테니까요."


아무리 감각이 초월적으로 뛰어나다 해도 시야를 대신할 정도가 될까?

크리시스는 상상도 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과거에 눈을 잃지만 않았어도··· 아직까지 뛰어난 기사로 남아 있었을 겁니다."

"기사요?"

"네. 아가토스는 집사이기 이전에 기사였습니다. 저희 가문의 기사단을 이끌었었죠. 은퇴 후에는 집사를 자처했지만···."


"갑작스런 사고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이후, 아가토스는 영원히 빛을 볼 수 없는 몸이 됐죠···."


그걸 말하는 글뤼페의 분위기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

혹시나 그녀가 더 얘기할까 싶었지만, 그 대신 다른 주제가 튀어 나왔다.


"아, 그러고 보니 혹시 어제저녁에 엘라이온씨랑 무슨 일이 있었나요?

"······."


이걸 얘기해야 할지 말지 잠시 고민됐지만.

아무래도 엘라이온에게 혹여 무슨 일이 있으면 그녀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어제 파티장을 나가고······."


이야기를 모두 전해 들은 그녀는 작게 침음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도 그날 감정적으로 말했어요. 먼저 말을 심하게 한 건 엘라이온지만 저도 잘한 건 없죠."

"······."


혹시나 그녀의 화가 엘라이온에게 집중돼서 불화라도 생길까 봐 급히 덧붙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그녀의 표정은 연민의 기색이 가득했다.


"엘라이온씨는 듣기로 어릴 적 흉포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맞는 게 일상이었다고 하죠. 거기에 어린 동생도 있었으니 모든 걸 다 책임져야 했죠. 어린 나이에."


"그래서 평소에는 밝은 척을 하다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자격지심인지, 아니면 질투인지···."


"은근 아닌 것 같아도 세상이 곱게 보이지 않는 눈을 가졌으니까요."


"만약 엘라이온씨가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면 제가 일단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건 어떻게 아신 거죠?"


사과야 받으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라.

크리시스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저는 단원을 뽑을 때, 가장 중시했던 게 인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되지만, 몰래 뒷조사를 맡겨 단원들의 과거를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이죠."

"그렇군요."


크리시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그녀는 돌연 질문했다.


"그나저나 엘라이온씨가 그러기를 아그노스씨하고 친하게 지내는 질투했단 말이죠?"

"네··· 어차피 아그노스하고 저는 별로 상관이 없는데 말이에요."

"흠··· 제가 보기에는 아닌데."

"네?"

"아닙니다. 후후, 그보다 예전부터 엘라이온씨가 그런 기색이 있었지만, 진짜였나 보군요. 아, 그래서······ 역시 치정 싸움은 무서운 법이네요."

"네?"

"후후."


그녀는 티타임이 끝나고, 크리시스가 나갈 때까지도 계속 알 수 없는 웃음만 흘렸다.


*


티타임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크리시스는 당장 나갈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일단 몸부터 씻고 방으로 돌아왔다.


개운한 상태로 어제 샀던 기초 마법서를 꺼내 펼쳤다.

너무 쪽수가 많아서 하루 내에 다 읽는 건 불가능했지만, 두고두고 읽을 생각이었다.


'나랑 방법이 다르다고 해도 어딘가 내 마법과 관련된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법서를 읽는 중간중간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봤다.

불 이외에 지난번에 실패했던 물, 바람, 땅··· 등의 마법을 써보려 했지만, 줄줄이 실패했다.


'뭐가 문제지?'


크렘노스가 알려준 지식으로는 마법은 곧 의지의 발현이다.

원하는 바를 강렬히 떠올리면 의지와 마나의 조합으로 원하는 결과가 되어 튀어나오는.


"그런데 어째서 불 말고는 되는 게 없을까···."


이것도 불이 하얀색인 것처럼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하지만 그것까지 해결하기에는 크리시스가 자신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내가 태어난 곳과 부모도 모르고, 있는 기억이라고는 바토르네 가족을 만난 이후부터니까.'


결국,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무한한 시도밖에 답이 없다, 였다.


'차라리 불이라도 마음대로 조종···.'


···왜 이걸 시도해 보지 않았을까.


크리시스는 문득 떠오른 가능성에 이제는 익숙한 하얀 불꽃을 작게 피워냈다.


'움직여라.'


단순 의지만으로 불을 움직이는 것.

그걸 왜 여태껏 애초에 불가할 것이라며 상정했을까.

하면 이리도 쉽게 되는 것을.


"진짜 되네···."


의도한 대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이리저리 춤추는 마법의 불꽃.

크리시스는 허탈한 감정도 들었지만 이어 실험해 볼 것이 남아 있었다.


"···된다."


호기심 반, 희망 반으로 손에서 불꽃을 떼어냈다.

그러자 이번에도 의도한 대로 손을 떠나 하늘을 나는 불꽃.


크리시스는 자신의 손에서 떠났음에도 불꽃이 말을 듣는 모습에 희망을 보았다.


그렇게 시작된 불꽃의 세례.


처음에는 하나둘 허공을 떠돌던 불꽃이 어느덧 30에 가까워졌을 때, 펼쳐진 광경은 자신이 했다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신비로웠다.


허공을 수놓고 있는 30여 개의 불꽃.

거기에 일반적인 불꽃도 아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하얀 불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시작했는데.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잠깐··· 아주 잠깐쯤은 이런 시간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지만···.


크리시스는 일시에 모든 불을 꺼뜨렸다.


"이제는 다른 방법이 뭐가 있을지 생각도 해 봐야지···."


지금의 평화에 안주하면 남는 것은 훗날의 후회밖에 없으니까.

그걸 뼈저리게 잘 알기 때문에 노닥거릴 시간은 없다.


'괜한 후회는 남기지 않아야지···.'


여유는 죽어서 부리면 그만이다.


*


저택은 조용했다.

크리시스가 있는 방의 위치상 그런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연습을 한다고 떠나서 저택이 비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일하는 사용인들과 크리시스 정도.


'머리가 너무 아파.'


쉼 없이 마법을 사용해서인가.

크리시스는 강한 두통을 호소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마법을 사용해 볼까 했지만.

아무리 쥐어 짜낸다고 해도 지금 상태로는 무리일 것 같았다.


크리시스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에 털썩 몸을 뉘었다.

과부하가 걸린 거라면 잠깐의 휴식을 통해 증상이 나아질 거라 생각했다.

뜀박질도 쉬지 않고 달리면 심장이 아프지만, 잠시 쉬어주면 또다시 달릴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크리시스가 간과한 게 있었다.

마법은 뜀박질과 성질 자체가 다르다는 것.


'뭐지? 왜 마법이···.'


갑자기 턱 막힌 것처럼 잘만 나오던 불꽃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크리시스는 초조해졌다.


'뭔가 잘못된 건가?'


혹시라도 유일하게 찾았던 길마저 무너질까 봐 크리시스는 불안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낙천적으로 생각하려 애썼다.

너무 오래 연습을 하였기에 그런 거다, 아직도 과부하 상태인 것이라 자위하며 크리시스는 머리를 식혔다.


'가만히 있으니까 더 불안해. 정말 별일 아닐 수도 있는데···.'


머리는 아직도 아팠지만, 침대에서 일어났다.

크리시스는 복도로 나와 누군가를 찾아 헤맸다.


'머리도 식힐 겸, 나가자.'


맑은 공기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보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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