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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알 님의 서재입니다.

백랑의 불꽃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외로운해
작품등록일 :
2021.02.01 23:01
최근연재일 :
2021.02.24 19:11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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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수 :
214,918

작성
21.02.15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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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017

DUMMY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크리시스는 어째서 마을의 엘프들이 전과는 다른 시선을 보냈는지 알 것 같았다.


'필라소 할아버지와 페로씨가 죽은 게··· 모두 인간 때문이라서.'


이전에는 실질적인 피해를 본 적이 없기에, 인간에 대한 거부 반응이 없었던 것뿐.

실제로 참담한 일을 겪으니 그들도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것이다.


"필라소님이······ 잠시만, 또 다른 한 분의 이름이 페로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페가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파이스는 어째서인지 표정에서 괴로운 감정이 엿보였다.


'필라소 할아버지가··· 페로씨가···.'


죽었다고?


크리시스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못했다.

이미 페가논씨와 다른 엘프들은 그렇게 믿고 있는듯했고, 정황상으로도 그게 맞다고 가리키고 있으니까.


'그건 희생이었을까?'


필라소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런 결과가 나올 줄 알고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으니까.'


페로씨가 진으로 들어가니까 문제가 사라져 진이 작동했다고···.

만약 페로씨가 없었더라면 필라소 할아버지가 애써 계획한 일은 수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 두 사람의 희생으로 마을 사람들은 목숨을 건진 셈.


'인사라도 하려고 그랬는데···.'


그럴 틈도 없이 떠나버린 그들의 모습이 아련하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저희 마을 사람들의 사체를 봤다고요?"

"······그렇다고 하더라. 나는 그때 기절해 있어서 몰라. 하지만 예전에 너희 마을에 갔던 사람들 몇몇이 얼굴을 알아보더라고."

"······."


크리시스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잠시··· 갔다 올게요."


그 말을 알아들은 페가논은 몸소 일어서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돌아오면 페로하고 필라소님께도 들러야지."

"두 분의 무덤도 있나요?"

"몸은··· 찾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 만들 수는 없잖아?"

"···알겠어요."


*


크리시스가 어딘가로 가려 하자, 파이스도 같이 가도 되겠냐 물어왔다.


"상관없어요."


그렇게 크리시스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예전에 자신이 직접 만들었던 무덤이었다.

그런데······.


"·········."

"크리시스님, 이건···."


크리시스는 한껏 굳은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두더지 땅을 판 듯이 온통 헤집어져 있는 무덤.

더 심한 건 이런 게 한둘이 아니었다.

모든 무덤이 빠짐없이 파헤쳐져 있었고.

그 안에는 있어야 할 시체가 사라진 상태였다.


'바토르, 바토르!'


크리시스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원래 바토르가 묻혀 있던 무덤으로 향했다.


"······."


역시, 다른 무덤과 똑같은 상태였다.

양옆에 있던 아저씨, 아주머니의 무덤도 마찬가지.


"크리시스님······."


파이스는 크리시스가 무덤에 있던 이들하고 어떤 관계인지 모르지만, 그의 반응으로 미뤄볼 떄 무척 가까웠던 사이라는 건 알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이들의 무덤이 이토록 처참하게 파헤쳐져 있으니··· 도대체 어떤 악인이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군.'


그도 자신이 절대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존재했다.


'죽은 자를 모욕하는 건··· 그 선을 한참이나 넘은 행위지.'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직접 손봐주고 싶었지만.

이미 죽은 자들을, 그것도 시체 하나 남기지 않은 이들을 찾을 방법은 아무리 그라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이스 할아버지···."

"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가슴이 먹먹해지는 말이었다.


크리시스는 지금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감히 이런 짓을 벌인 이들에 대한 분노를.

하지만.


'이미 그들은 죽었다고 하는데,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이 분노를 풀 수 있는 거지? 내가 할 복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결코, 벌여서는 안 될 짓을 벌인 악인들을 심판할 수도, 똑같이 복수할 수도 없는 처지.

가슴에 응어리진 분노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위태로웠다.


"나는······."


손톱이 살을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처럼, 주먹을 세게 움켜쥔다.


*


숲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찾아간 곳은 두 사람의 무덤이었다.


"안에는 생전에 쓰던 물품이 들어 있어."


페가논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에는 선객이 있었다.


"크리시스."

"프라시아씨."


크리시스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녀의 발목으로 향했다.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거기에 팔과 몸 사이로는 목발을 끼고 있었다.


"이건 별거 아니야.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나을 수 있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페가논의 눈치를 봤다.

그녀의 시선은 계속 그의 팔이 잘려나간 곳에 머물렀다.

페가논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못본 채 하며 말했다.


"필라소님은 하이엘프의 권능이 있어서 웬만한 상처는 치료할 수 있으셨지만, 지금은 없으시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맞아···."


고개를 살짝 숙인 프라시아는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만 가 볼게. 나중에 봐."

"······그래."


크리시스는 볼 수 있었다.

고개를 숙여 땅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처럼 그렁그렁한 것을.


그녀가 떠나고, 남은 세 사람은 잠시 동안 페로의 무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침묵 속에서 페가논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떠나기 전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어."

"네?"

"예전에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고통스러워서 몸부림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안색도 그렇고 고통스러워 보이지도 않잖아?"

"네···."


맞는 말이다.

크렘노스님 덕분에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거에 대한 감사 인사도 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필라소님의 무덤 앞에다 대고 얘기하는 게 전부.

새삼스럽게 삶의 덧없음을 깨달아가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 멀쩡하던 두 사람이 그렇게 떠난 게··· 정말 허무해지네.'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떠나려고요."

"어디로 떠나는데?"

"오면서 갈 곳을 찾았어요."

"그래? 아마 여기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다른 숲으로 이주할 거야."

"네? 어째서."

"하이엘프가 없는 숲은 위험하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엘프가 하이엘프가 있는 숲에 머물러. 사냥당하지 않기 위해서.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그럼 이 무덤은 남겨지는 건가요?"

"어쩔 수 없어. 아무래도 나고 자라고 죽은 곳에서 묻히는 걸 두 사람도 좋아할 테니까. 그래도 뭔가 조치는 취해두고 가야겠지."

"그런가요."

"그래."

"······."

"······."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파이스는 그 틈을 타서 입을 열었다.


"말씀이 끝나셨으니 하는 말인데, 그건 아마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제 주인님께서요."

"당신의 주인님이라면······."

"네. 드래곤이시죠."

"······."


예상은 했는데 그걸 관련자에게 직접 들으니 놀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두 분의 무덤 모두 크렘노스님의 보호 아래 유지될 것입니다."

"어째서? 페로는 그분과 아무런 관련이···."

"아닙니다. 페로님도 관련이 있으십니다."

"아니야. 그 녀석은 한 번도 드래곤 같은 대단한 존재를 만난 적이 없어."


항상 페로와 같이 다녔던 페가논이기에 확신했다.

그러나 파이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페로님의 아버지인 시스테마와 관련이 있으시지요."

"아저씨가?"


어릴 적 시스테마를 기억하는 페가논으로서는 믿기 힘든 얘기였다.


'그 아저씨··· 되게 게으름뱅이 같았는데?'


매일 잠만 자는 게 일상인 데다가.

죽는 순간까지도 자다가 편안하게 갔던 페로의 아버지.


"시스테마가 어떻게 행동했길래 그런 표정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시스테마는 원래 크렘노스님과 친분이 있으셨습니다."

"어떻게?"

"자세히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크렘노스님이 하고 계신 연구를 도왔었습니다."


아마 페로가 태어나기 전 이야기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바깥에서 이주해 왔다고들 했었지.'


한참 페로, 프라시아와 함께 싸돌아다닐 적 그런 얘기가 종종 들려오고는 했다.


"어쨌든 잘 부탁해. 그분께도 잘 부탁드리고."

"네. 잘 전하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크리시스는 오늘 밤만 예전에 머물던 오두막에 머무르다가 다음날 떠나기로 했다.


"페가논씨. 인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 악마와 인간이 공격한 이유가 뭘까요?"

"살아 있는 엘프를 가져갔다고 했으니까 정상적인 이유는 아니겠지."


말하면서도 증오가 끓어올랐는지 페가논은 이를 뿌득 갈며 마침 옆에 있던 나무를 주먹으로 힘껏 때렸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무가 떨렸지만, 힘 조절을 했는지 나무가 쓰러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복수할 수는··· 없겠죠."


크리시스가 무심코 던진 말에 페가논은 흠칫하다가 다시 냉랭하게 표정이 가라앉았다.


"아마도 그렇겠지. 직접적인 복수는···."


갑자기 가던 길을 다시 멈춰선 페가논.

그에 따라 크리시스도 멈춰 섰다.

파이스는 시스테마의 무덤을 묻고 잠시 보고 오겠다고 해서 지금 자리에 없었다.


"크리시스. 너는 너와 같은 종족인 인간이 어떻다고 생각해?"

"갑자기 그런 말은 왜······."

"나는 이 모든 게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니까, 너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 거야."

"······."

"악마? 나쁘지. 그런데 더 나쁜 건 그런 악마를 소환해서 개짓거리를 하려고 한 인간이 나쁜 거 아니냐?"

"······."

"후··· 나는 다른 마을 사람들을 따라가지 않을 거야."

"그러면 어쩌시게요?"

"숲을 나와서 내 방식대로 살아야지. 옛날에 필라소님이 밖은 위험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엘프는 손쉽게 당한다고 하셨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인간과 섞여 살아가는 엘프가 없는 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는 내 기준에 어긋나는 모든 인간을 죽일 거야."

"위험한 생각이네요."

"그래. 나도 알아. 진짜로 그러다가는 몇명 죽이지도 못하고 내가 죽거나, 노예로 팔려가겠지. 허무맹랑하게 들릴 수도 있어. 하지만 나는 진지하게 하는 소리야."


어떻게든 그런 일을 벌였던 인간과 비슷한 인간을 죽이고, 죽이고, 계속 죽이다 보면.


"그게 복수가 아닐까? 복수가 뭐 별건가? 억울한 이들의 넋을 위로해 주면 그만이지."


"그러니 크리시스. 너는 길을 벗어나지 않길 바라고 있어. 내가 봐 왔던 너는 싹수도 없고, 어두침침한 녀석일지언정."


"내장을 다 분리해도 시원찮을 그런 녀석들과는 확실히 다른 녀석이니까."


"그래서 페로도 네가 신경 쓰였던 거겠지···."


"하지만 만약. 네가 그런 녀석들처럼 변한다면··· 나와 평생 만나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나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너를 죽일 거니까."


그의 충혈된 눈과 죽고 죽인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모습이 상당히 섬뜩했다.


"···나는 널 믿어."


그는 크리시스의 어깨를 툭툭 치며 몸을 돌렸다.

크리시스가 정면을 보니 어느새 오두막에 도착해있었다.


'페가논씨.'


크리시스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 밤.

오두막의 내부가 몇 번이나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


다음 날 아침.

크리시스와 파이스의 앞으로 페가논과 프라시아가 있었다.


"이제 떠나는구나···."


이별의 시간이 찾아오자 그 새 든 정이 적지 않은 지 프라시아는 쓸쓸한 눈빛으로 크리시스에게 말했다.


"잘 때 조심하고. 또 지난번처럼···."

"네. 조심할게요."


아직도 그것이 몽유병이라 알고 있는 프라시아의 걱정에 크리시스는 순순히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페로가 네게 전할 물건이 있다고 하던데······ 받았냐?"

"네? 뭘요?"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크리시스를 보고 두 엘프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못 받은 것 같은데?"

"그분은 도대체 그걸 어떻게 한 거야?"

"무슨 일인데요?"

"그게 사실··· 페로가 네게 전할 물건이 있다고 해서 축제가 끝난 뒤에 주려고 했다는데, 네가 갑자기 떠나버리는 바람에 전하지 못했어."


페로는 크리시스가 그대로 영영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크렘노스와 함께 왔던 드래곤, 에나스에게 물건을 전해달라 부탁했다.


"그런데 그분, 아니 그냥 그 여자라고 하자. 그 여자는 귀찮은지 거절할듯싶었는데 웬일인지 알겠다고 하며 받더라? 그래서 나나 페로는 그게 전달되려나 싶었지."

"하지만 제게 온 건 아무것도 없는데··· 파이스 할아버지?"

"저도 모르는 일 입, 아. 그러고 보니···."

"왜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네. 에나스 님이 마차에 쪽지 같은 걸 남기셨는데··· 아마 거기에 적혀 있을 수도 있겠군요."

"···뭐, 어쨌든 네가 잘 찾아봐. 그래도 페로가 너한테 주려고 힘들게 만든 거니까 버리지는 말고."

"그럴게요."


크리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제 가 봐라!"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왜 이래? 안 하던 인사를 다 하고. 쯧··· 그래, 뭐··· 너도 잘 지내고."

"페가논, 네가 그런 인사도 할 줄 알았어?"

"하하, 넌 좀 조용히 해."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자 프라시아는 히히 웃었다.

크리시스는 저 둘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래도 이별하는 자리라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은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 그러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연기가 워낙 어색해서 그걸 눈치채는 건 한순간이었지만.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아직도 슬픔을 떨치지 못한 저들이 베푸는 호의였다.


크리시스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손을 흔드는 프라시아와 담담한 표정의 페가논을 뒤로하고 마차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유도키아는 한 번도 못 봤네.'

"뭐 놓고 오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없어요. 그런 거."


크리시스는 멍하니 아름다운 색상의 천장을 바라봤다.

부유하는 느낌과 함께 마차는 출발했다.


*


"크리시스···."

"유도키아. 그냥 나오지 그랬어."

"애가 뭐 그리 숫기가 없냐. 쯧쯧."

"죄송해요···."


유도키아는 사실 크리시스가 두 사람과 인사할 때부터 수풀 사이로 지켜보고 있었다.

유도키아가 크리시스가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내일 크리시스가 떠난다고 하더라. 너도 갈 거면 가고."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페가논은 지나가듯 말했고, 유도키아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여 어찌어찌 장소 근처까지 찾아오기는 했다.

하지만··· 끝내 크리시스와 마주하지 못했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도저히 크리시스의 얼굴을 보지 못하겠어.'


아직도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 유도키아는 부모님까지 다치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거기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다가오자 한참이나 망설였던 것.

그렇게, 결국 크리시스와 얼굴을 마주 보고 사과하지 못했다.


"어떡하냐? 이제 크리시스는 영원히 안 올 텐데."

"페가논! 너는 애한테 하는 말투가 왜 그리 얄미워?"

"내가 뭘?"

"우으···."


유도키아는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봤다.

단 한 발짝, 고작 한 발짝을 내딛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누군가의 봄날은 꽃이 피지도 못한 채 저물어갔다.


*


"파이스 할아버지. 저를 내려 주시고 이제 돌아가시는 건가요?"

"그래야 하겠지요. 아, 그 물건에 관해서는 크렘노스님께 여쭈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만약 행방을 찾으면 어떻게든 편지를 보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네."


유품이기도 한 페로의 물건을 찾는 것은 다소 어려움을 겪을 것 같았다.

또 다른 드래곤이 가져갔다고 하니.


'어쩌면 못 받을 수도 있겠지.'


드래곤은 예부터 지배적이고 제멋대로라고 했다.


'크렘노스님을 보면 허언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단편적인 것만을 보고는 모르는 일이니까.'


혹시 모른다.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멀쩡해 보이던 그가 괴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을지도.


'그래도 페로씨의 유품이니까. 처음부터 포기하기는 마음에 걸려.'


한편으로는 전하려던 게 무엇이길래 굳이 드래곤에게까지 맡기면서 전하려고 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인연이 내게 닿으면 알 수 있겠지.'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그곳에 집중해야 한다.


'힘을 키워야 해.'


여러 시각을 통해 깨달았다.

이 세상은 힘이 있는 자가 곧 심판이라고.

힘만 있다면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손쉽게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다.

설령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해도.

힘이 있는 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곧 법이기에.


권력은 아무리 높다 한들 힘 있는 자의 검이 더 가까운 법이었다.


'만약···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무덤을 파헤친 자들을 만난다면···.'


복수해야 조금이라도 더 넋을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

페가논씨처럼 극단적으로 다수를 적대하지는 않더라도, 일을 저지른 당사자들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지키거나, 복수하는 것도 모두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야.'


권력이라는 다른 힘도 있기는 하지만, 평민이라는 신분적 한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얻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와도 가까웠다.


적어도 실질적인 힘은 실선에 가까운 길이라도 보인다.


'내가 만약 그때 힘이 있었더라면 모두가 죽지 않았겠지.'


적어도, 예전의 괴력만 있었더라면 그런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직접 사람들을 묻어 줄 필요도 없었을 텐데.

과연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가 살아 있어도 되는 걸까?


'역겨워.'


크리시스는 속에서 올라오는 자기혐오를 애써 진정시켰다.


'너를 그렇게 만든 자들을 용서하지 않을게. 설령 그들이 죽었다고 해도.'


그것이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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