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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알 님의 서재입니다.

백랑의 불꽃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외로운해
작품등록일 :
2021.02.01 23:01
최근연재일 :
2021.02.24 19:11
연재수 :
26 회
조회수 :
795
추천수 :
5
글자수 :
214,918

작성
21.02.01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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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쪽

001

DUMMY

하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잔디 언덕에 앉은 소년.

소년은 붉은 눈동자에 하염없이 맑은 하늘을 담았다.


"여긴 어딜까···."


곁에 아무도 없었기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조금 전, 문득 깨어나 보니 무척 낯선 곳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혔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의 이름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크리시스."


소년의 이름이었다.


크리시스는 자신이 일어났던 자리에 그대로 상체만 일으켜 앉은 상태였다.

머리가 백지처럼 하얘서, 무엇을 할지도 제대로 감이 서질 않았던 거다.


"어? 넌 누구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크리시스는 고개를 돌렸다.

흔한 갈색 머리에 코 주변에는 주근깨가 피어있는 남자아이.

남자아이는 언뜻 보기에는 크리시스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남자아이는 윗 길목에서 언덕으로 내려와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왜 여기서 혼자 있어? 못 보던 얼굴인데··· 흠."


남자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나 크리시스 본인도 어째서 자신이 여기에 있는 건지 몰랐기에 있는 사실 그대로 전했다.


"눈을 떠 보니 여기에 있었어."

"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눈을 깜빡여도 크리시스가 할수 있는 대답은 고개를 젓는 것밖에 없었다.


"나도 몰라."

"흠··· 부모님은 어디 계셔?"

"부모님? 모르겠어."

"···너 정말 아는 게 뭐냐?"


남자아이는 나이에 답지 않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쩌지? 너 집은 어딘지 알지?"

"아니."

"그럴 것 같더라··· 그럼 일단 우리 집으로 갈래? 아니, 가자."


남자아이는 이대로 크리시스를 두고 가기에는 걱정됐는지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크리시스가 대답도 하기 전에 강제로 일으켜 세우고는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아, 이것도 모르려나."

"크리시스."

"···알고 있구나? 그래. 설마 그 나이 먹고 자기 이름도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남자아이는 도도도 앞질러 나가더니 크리시스를 마주 보고 멈춰 섰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바토르'야. 만나서 반가워. 크리시스."


어쩌면 아이다운 뜬금없는 인사에 크리시스가 멀뚱히 내민 손만 보고 있자, 바토르가 뚱한 얼굴로 재촉했다.


"뭐해, 나 팔 떨어지겠다. 빨리."


그제야 크리시스도 손을 내밀어 악수하자 바토르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운 표정이 번졌다.

바토르는 반갑다는 듯이 팔을 내저었다.


"응응. 잘 부탁해!"


크리시스는 여전히 감정이 깃들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붉은 눈동자 안에 함박웃음을 짓는 바토르를 담았다.


*


"엄마!"

"바토르!"


직전까지만 해도 수다스럽게 입을 놀리던 바토르는 한 여성이 나와 있는 걸 보자 힘껏 달려나가 품에 안겼다.

크리시스와 대화할 때만 하더라도 어른스러운 척했던 바토르도 겨우 7, 8살 된 아이였다.


"어디 갔다 왔니? 한참 찾았잖아."

"헤헤. 잠시 산책을 좀···."


바토르의 엄마는 천진난만하게 웃는 바토르를 게슴츠레하게 보더니 이내 등 짝을 한 대 때렸다.


"아!"

"너. 아까 내가 청소 좀 하라는 소리 듣고 도망간 거 모를 줄 아니?"

"헤헤···."


멋쩍은 듯이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피하다 바토르는 크리시스와 눈을 마주치고 원래 용건이 생각났다.


"응?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니?"

"엄마··· 그게 있잖아요."


바토르는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손발까지 써가며 설명하는 모습이 꽤나 간절해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안 될까요? 네? 저랑 같이 자면 되잖아요. 네?"

"그래. 얘기는 다 들었어. 그래도 일단은 저 아이와 얘기를 해 봐야겠지 않겠니?"

"네···."


바토르도 부모님이 크리시스가 머무는 것에 허락할지는 확신을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작정 데려온 자신에게 책임이 있으니 어떻게든 부모님을 설득시키려 애를 썼다.

바토르는 엄마의 표정이 워낙 아리송해서 몇 번이나 불안한 눈빛으로 힐끔거렸다.


"···크리시스. 이리 와 봐."


바토르의 손짓에 크리시스는 곧 두 모자 앞에 당도했다.


"어머···."


바토르의 엄마는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열었다.


"혹시 엘프? 엘프 아니니?"

"엄마. 무슨 소리세요? 크리시스가 엘프라니··· 에이. 말도 안 되는."

"그만큼 놀랍다는 거지. 나도 엘프의 귀가 길다는 건 알고 있단다. 이 아의 귀는 우리와 똑같으니까 아니겠지."


그리 말하면서도 엄마가 눈을 반짝이며 크리시스를 보자 바토르는 속에서 왠지 모를 질투심이 생겨났다.


'엄마도 참. 이쁜 걸 너무 좋아해서 탈이야···. 거기다 엘프라니.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크리시스가 아무리 잘 생겨 봐야······.'


아무리 잘 생겨 봐야 엘프에 비하겠냐 말하려던 바토르도 크리시스의 외모를 다시 보고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래. 잘 생기긴 했네.'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오뚝한 코와 맨날 햇빛 아래서 놀아 탄 자신의 피부와는 다르게 깨끗하고 하얀 피부색.

턱선도 날카롭고, 하얀 머리와 붉은 눈동자는 신비로움을 더해줬다.

바토르는 자신이 촌놈이라 잘은 몰라도, 저 정도면 대도시에 가도 최고가 아닐까 싶었다.


"이름이··· 크리시스? 라고 했었지?"

"네."

"나는 바토르의 엄마란다. 편하게 '누나'라고 부를래?"

"아, 엄마!"


바토르도 이건 못 참겠는지 오만상을 쓰며 질색했다.


"그렇게 정색하기 있니? 당연히 농담이지. 농담. 크리시스? 편하게 아줌마라고 부르렴."

"네."


크리리스는 그녀의 호칭이 어떻든 상관없다는 기색이었다.


'모든 게 낯설게 느껴져.'


갑작스레 맺은 인연이 나쁘지는 않지만, 과거가 없다는 사실이 신경 쓰였다.


'나는 과연 누구였을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생각이 안 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나룻배처럼.

오직 몸만을 건사한 채 떠도는 느낌이었다.

그런 크리시스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바토르의 엄마는 선뜻 말을 꺼냈다.


"크리시스, 사정은 대충 들었어.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하던데··· 맞니?"


크리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토르의 엄마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는데, 그 모습이 아까의 바토르를 연상시킬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럼 일단은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니? 혹시라도 기억이 떠오르면 언제든지 돌아가도 된단다."

"······."


이번만큼은 크리시스도 바로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녀는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크리시스에게 말을 덧붙였다.


"혹시라도 부담돼서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단다. 아이가 곤경에 빠지면 도와주는 게 어른이잖니?"


바토르의 엄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리 말하자, 옆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바토르도 거들었다.


"맞아. 당장은 갈 데도 없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지내. 안 그래도 요즘 할 일이 너무 많았거든. 너랑 같이하면 일이 반으로······."

"얘는!"

"아!"

"할 일이 있어 봤자 얼마나 된다고?"

"내가 뭐 틀린 말 했나요? 맞잖아요! 우리 집 일은 그렇다 쳐도 다른 집 일까지 사서 고생하니까!"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우리도 풍요로워지는 거야."

"치··· 알긴 알지만. 그래도."

"애가 철이 덜 들어서 어쩌면 좋을지 몰라···. 크리시스, 너는 이 아줌마 말 잘 들을 거지?"


크리시스는 자신도 모르게 끄덕여지는 고개에 놀라고, 바토르의 엄마는 그런 크리시스와 바토르의 머리에 손 한 짝씩을 올리고 따뜻하게 쓰다듬었다.


"좋았어. 오늘은 기념으로 엄마가 실력 발휘좀 제대로 해 볼게!"

"엄마, 그런데 왜 제 머리는 거칠게 쓰다듬으면서, 크리시스는 부드럽게 쓰다듬는 거죠?"

"그거야 당연히, 크리시스는 머릿결이 곱잖니. 너는······."


말을 하다 말고 싱긋 웃는 엄마의 표정으로 대충 어떤 대답이었는지 유추한 바토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 머릿결 나쁜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호호."

"······."


크리시스는 화목한 모자(母子)의 모습을 한 걸음 물러나 지켜봤다.

너무나 정겨워 보여서 자신이 들어가도 될까 싶어서였다.


밖은 나무가 무성했지만, 크리시스의 안은 여전히 회색빛이었다.


*


"크리리스, 이것 좀 먹어 봐라."

"아빠. 걔 알아서 먹게 좀 내버려 둬요."


늦은 저녁.

마을에서 사냥꾼 노릇을 하는 바토르의 아빠는 집에 돌아오고 처음으로 크리시스를 보게 됐다.

처음에는 왠 처음 보는 아이가 우리 집에 있는 건가 싶었지만, 곧 아내의 설명을 듣고 이해했다.

아니,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어찌 보면 자기 아들을 대하는 것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크리시스를 대했다.


"맛은 어떠니?"

"맛있어요."


입에 든 음식을 우물거리며 크리시스가 대답했다.

바토르의 부모님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야··· 내 꿈이 뭔지 아니? 둘째를 갖는 거였단다."

"쿨럭! 네? 둘째요?"


바토르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처음 듣는 얘기였으니까.


"설마··· 요즘 밤에 이상한 소리가 나던 것도. 아!"

"얘가! 그런 거 아니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얼굴이 붉어진 바토르의 엄마는 헛기침했다.

바토르의 아빠도 마찬가지.

그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는 줄 알았는데···."

"네? 뭐라고요?"

"아, 아니다. 그나저나, 어쨌든 너도 어느정도 머리가 굵어져서 그런지 이제는 귀여운 맛이 사라져 버렸어."

"···그래서요?"


바토르는 눈을 살짝 찌푸리며 불만을 표했지만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둘째를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기왕이면 딸로. 그런데···."


바토르의 아빠는 크리시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뜻밖의 가족이, 그것도 나를 닮은 너와는 다르게 귀여운 아이가 생겼으니···. 나는 행복해서 여운이 없구나. 하하."

"하아··· 네네. 그러시겠죠."


바토르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시스가 아무리 잘 생겼다 하더라도 생긴 걸 가지고 이렇게 차별하니 서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렇다고 크리시스를 집으로 데려온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아들의 감정을 알아챈 엄마는 슬쩍 남편을 타박했다.


"당신은··· 물론 크리시스도 귀엽지만, 우리 바토르도 귀엽거든요?"


그 말 한마디에 바토르가 움찔했다.

마치 고양이가 귀를 움찔거리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 본다고 했지, 만들겠다고 한 적은 없었잖아요. 어디서 거짓말을···."

"그, 그랬었나?"

"그랬어요. 더군다나 갓난아기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알아요? 당신은 밖에서 사냥만 하니까 몰라서 그래요. 바토르도 키울 때 충분히 힘들었는데··· 아무튼. 이제는."


크리시스는 그녀의 눈길이 자신에게 닿자 고개를 들어 마주 봤다.

그에 바토르의 엄마는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임시지만, 바토르만큼이나 귀여운 가족이 생겼으니까요. 둘째, 아니지. 셋째는 필요 없겠죠?"

"여, 여보. 그건 너무 섣부른···."

"당신은 밥이나 마저 먹어요. 그치 얘들아? 너네만 있어도 외롭지 않겠지?"

"뭐···."

"······."


두 사람 다 어정쩡한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 바토르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다만, 표현하기 부끄러워 감추는 것뿐이지.


그리고 크리시스는 여전히 자신이 여기 있어도 될까 싶은, 불편한 마음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가족이 된 크리시스의 밤도 깊어만 갔다.


*


"바토르! 이리 좀 와 보렴!"

"···크리시스."

"가위바위보?"

"응."


바토르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외쳤다.


"가위, 바위, 보! 아싸! 내가 이겼다!"

"그렇네."

"얼른 갔다 와."


바토르의 엄마, 메테르는 자신이 불렀던 아들 대신, 크리시스가 오자 의아한 듯이 보았다.


"바토르는 어딨니?"

"저도 잘 모르겠어요. 아까 나간 것 같던데···."


목소리에 고저가 없이 평화로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허나,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에 이제는 그녀도 진실을 알고 미간을 찌푸렸다.


"또 혼자서 일하기 싫어서 숨어 있겠지. 아휴··· 언제 철이 드는지···."


그리 말하며 메테르는 크리시스를 보았다.

크리리스가 기억을 잃어 자신의 나이를 모르지만. 외모만 보면 얼추 바토르와 비슷한 나이대 같았다.

그렇기에 웬만하면 비교를 안 하려 하지만, 크리시스는 겉치레로 어른 흉내를 내는 아들과는 다르게 실제로 성숙했다.


'그래서 대견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깝지.'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나, 기억을, 자신의 이름 하나 빼고 모든 과거를 잊었다는 생각에 크리시스가 매우 가엾게 느껴졌다.

하여 동정심에 비교적 바토르에게 일을 더 많이 시키려고 했건만.


'이 녀석은 자기가 친구라고 데려온 애를 노예처럼 부려 먹고 있어···. 나중에 진짜 크게 혼나야지 정신을 차리지.'


그녀는 창고에 넣어둔 몽둥이의 위치를 생각했다.

조만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렇게 성실한 아이의 부모는 과연 누굴까?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메테르가 한참 생각의 나리를 펼치고 있을 때, 크리시스가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어, 어? 아. 이것 좀 젓고 있어 줄래? 본의 아니게 많이 시켜서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크리시스는 군말 없이 그녀가 쥐고 있던 국자를 넘겨받아 솥 가득 담겨 있는 수프를 젓기 시작했다.


"어때, 맛있어 보이지? 이따가 마을 사람들 모두하고 같이 먹을 음식이란다."

"모두요?"

"그래. 오늘은 '성 기다'가 태어난 날이니까."

"아··· 오늘이었군요."


바토르의 집에 살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바토르를 전부터 가르치던 아저씨의 수업을 크리시스도 같이 들었다.

크리시스는 아저씨가 지나가듯이 탄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말한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렇게 바빠 보였던 거구나.'


메테르가 아침부터 평소보다 더 이것저것 준비하며 돌아다니던 모습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성 기다'의 탄신.

마을 전체가 믿는 종교인 '아시노' 최초의 성인이 탄생한 날로, 바로 오늘이 그 날이었던 거다.


"콩이랑 당근, 토마토, 양파 등의 재료를 넣었지. 생긴 것부터 맛있어 보이지 않니?"

"네. 맛있어 보여요."

"호호. 내가 이래 봬도 마을에서 한 솜씨 한단다. 아, 내 정신 좀 봐. 크리시스, 내가 잠시 이웃에 다녀와야 할 일이 있거든? 잠시 동안 그렇게 젓다가 어느정도 다 만들어졌다 싶으면 불 좀 꺼 주겠니?"

"네. 알겠습니다."

"그래. 어휴, 기특해라."


메테르는 가기 전에 크리시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집을 나섰다.

솥의 수프가 부글부글 끓는 소리만 나는 고요한 집.


"갔지?"


방에서 혹여 들키면 된통 잔소리를 들을까 봐 벽에 딱 붙어 숨이 있던 바토르가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이리 줘. 나머지는 내가 할게. 너는 옆에서 좀 쉬고 있어."

"아니야. 괜찮아."

"내가 안 괜찮아. 빨리!"


결국 바토르는 강제로 뺏어서 주걱을 돌렸다.

졸지에 일을 뺏긴 크리시스는 이마에 조금 땀이 맺히려 하는 바토르를 보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부끄러워?"

"···조용히 해."


크리시스는 알고 있다.

바토르가 자신에게 모든 일을 떠맡기는 듯하면서도, 보는 눈이 없을 때는 남은 일을 몰래 처리한다는 걸.


'지금 생각해도 미안해 죽겠네.'


바토르는 힘껏 국자를 저으며 과거를 떠올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신적으로 미성숙했던 자신의 잘못을.

크리시스와 같이 살기로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에는 지금처럼 겉으로 일을 시키는 게 아닌,

진짜로 모든 일을 떠맡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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