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디폴트 캐릭터
Prologue. 디폴트 캐릭터
물먹은의자
뎅겅-
“후우! 보람차다 보람차!”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제국 최후의 황제 테레무어 4세의 목을 쳐내자, 세상이 어둠으로 물들어간다.
더 이상 저항할 힘이 남지 않은 인류는 파멸에 삼켜졌다는 문구와 함께 올라오는 엔딩크레딧.
하지만, 엔딩 크레딧의 끝에 나오는 단어는 시청자들 기대와는 달랐다.
Game Over
"이렇게~ 멸망은 답이 아니에요~ 이 작은 뉴비들아, 내가 이 방법을 안 써봤겠어요?"
<라스트호프>의 수많은 엔딩 중 인류를 배신한 배신자 엔딩.
하지만 게임의 끝을 본다 한들, 하나를 제외한 모든 엔딩은 게임오버.
즉, 클리어 실패 판정을 받는다.
"꼭 보여줘야 믿는다니까"
[법사권익위원회 : 와 배신 엔딩은 클리어로 안 쳐주는구나, 진짜 클리어하게 해줄 생각이 없네]
[Babyrian : 크라칸도 이렇게 보내주는게 맞냐]
보이드홀의 하수인이 되어 대륙을 배신한 [배신자 크라칸]의 장렬한 게임 오버 엔딩은 인상적이었으나, 시청자들이 기다리는 방송의 메인 디쉬는 따로 있었다.
캐릭터 선택 창에서 어떤 특전도 받지 않고 이름도 정하지 않은 채, 바로 확인 버튼을 누르면 생성되는 디폴트 캐릭터 [호프만].
시작 시 받는 능력은 [랜덤 시드] 단 하나.
[랜덤 시드]는 원래라면 게임에서 변경할 수 없는 세계 요소를 변화시킬 수 있다. 물론 랜덤으로.
[BegBard : 님들 디폴트 캐릭터로 해봄? 랜덤 시드로 팔 한쪽 없이 시작하기도함ㅋㅋ]
하지만, 내게 있어 클리어 엔딩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캐릭터이기도 했다.
“클리어는 내일 보여드릴 테니까, 다들 많이 찾아오십쇼~ 그럼 이만!”
내일 방송에서 그 끝을 보기로 했다.
***
탁-
컴퓨터를 끄자 찾아오는 정적.
“내일로 안 되면 접자. 이제 놔줄 때도 된 거야.”
쪼르륵-
5년 전 어머니께서 마련해주셨던 단칸방.
이제는 유일하게 남은 흔적인 낡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따랐다.
냉장고 속의 깜빡거리는 전등을 보고 있자면, 곧 고장 날 것 같은 것이 괜히 나 같아서 쾅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여전히 사고로 잃은 손가락이 잘 적응되지 않아 흘린 물을 닦아내고 탁상에 앉자 밀려오는 피로감.
모니터에는 꺼진 방송과 게임의 불빛이 어두운 방 안에서 저 혼자 점멸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방송하고 있던 게임은 지난 5년간 나와 함께한 <라스트호프>.
내일은 그 마지막 방송이 될 터.
괜시리 5년 전 처음 <라스트호프>를 샀을 때가 떠오른다.
단단한 콘크리트 층을 자랑하는 '던전크롤러' 장르의 게임 중 역대급 흥행을 올린 <라스트호프>.
죽으면 캐릭터 삭제, 장비 삭제.
아무리 파밍 해도 적의 공격 한방 한방이 살을 깎는 난이도.
그러나 그 시련을 넘어섰을 때 분비되는 폭발적인 도파민.
처음부터 이 게임을 좋아했던 건 아니다.
그저 좋아하던 방송인이 플레이하던 걸 우연히 봤을 뿐이고, 구매한 건 지극히 충동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처음 켜본 게임은
‘아니!!! 씹... 그걸 어떻게 피하냐고!!!’
화도 나고.
‘그렇지! 거기서 넌 들어올 수밖에 없다고 데이터 쪼가리 자식아’
즐겁기도 했다.
[양손무기는하남자 : 님들 이거 부활 어떻게 시켜요? 저 이거 죽으니까 캐릭터가 없어졌어요.]
처음엔 오기로 시작했던 <라스트 호프>는 첫 캐릭터가 죽을 즈음에는 삶의 일부가 되어있었다.
***
방구석 폐인이었던 나는 랭크에 광적으로 집착했었는데, 이 게임에서 랭크는 기본적으로 누가 더 메인 퀘스트 달성률이 높은가로 결정되었다.
원래도 경쟁이 심한 랭크 보드 였지만, 어느 날 이 경쟁에 불을 붙인 글이 하나 올라왔다.
<라스트호프> 공식 커뮤니티 ‘희망호’에 올라온 공지.
[GM호프만 : 첫 클리어가 나오면 한 달 안에 DLC내고 실사 영화 촬영 시작합니다. 당연히 주인공은 클리어 유저겠죠? 상금도 있으니 당신도 도전해보세요!]
이때는 그야말로 전국을 <라스트호프>가 점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복 공략 시도에도 출시된 지 5년 동안 클리어한 유저가 나타나지 않자, <라스트 호프> 또한 점차 인기를 잃고 시들해져 갔다.
***
그럼에도 바로 오늘.
시작한 지 딱 5년이 되는 날.
내 캐릭터 [호프만]은 기어코 온갖 수단을 동원한 끝에 클리어 엔딩에 다가가 있었다.
일부 하드코어 유저들만이 선택하는 디폴트 캐릭터 [호프만].
처음 방송에서 클리어 공약을 걸고 디폴트 캐릭터를 만들었을 때 가장 충격이었던 것은 랜덤 시드로 걸린 능력이었다.
***
당신은 무력과 관련된 스탯 및 스킬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마법과 관련된 스탯 및 스킬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재주와 관련된 스탯 및 스킬을 습득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겐 희망이 있습니다.
***
6종의 스탯 모두를 습득할 수 없다는 돌아버린 패널티.
심지어 디폴트 캐릭터의 랜덤 특성은 계정별로 일정 시간이 지나야 바뀌기 때문에 일단 공약을 걸어버린 이상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진행해야 했다.
라스트호프의 클리어 엔딩 도전 시의 최종전, 보이드 홀의 코어 파괴 임무.
아무도 성공한 적 없는 이 극악의 난이도 미션을 전투를 못 하는 잡캐로 이겨내야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직접 가서 코어를 부순다는 발상을 지우자, 오히려 클리어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최종 계획 단계
마스터급 무인의 일격으로 장벽을 찢는다. ☑
제국의 기술력을 동원해, 장벽의 복구를 막는다. ☑
대 마법 '메테오'가 코어를 타격한다. □
모험가 개인이 아니라 집단 대 집단의 압도적 무력을 통한 원거리 파괴.
필요한 것은 정치력과 집단의 힘.
용사도 내 개인의 무력도 필요 없다.
우주를 유영하던 천체가 마스터 메이지의 손에 이끌려 지상에 강림하고, 차원을 찢어놓던 마계의 중심과 천체가 맞닿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외부에서 코어를 부순다는 사도(邪道)로 첫 클리어가 나오고 있었다.
평소 2~3명 보던 방송도 지난 두 번의 최종계획 이후 오랜만에 북적인다.
[똑똑한청년몽크 : 이 사람 5년을 날먹이랑 꼼수만 쓰더니 기어코 그걸 모아서 클리어까지 가려고 하네 ㅋㅋ]
채팅창에서 가끔 보이던 백수놈인가. 부러우면 부럽다 말하도록.
[도끼바바맨 : 솔직히 전투 한 번 안 치르는 거 보면 실력 없는 듯]
하남자들의 패배감 짙은 보이스는 들리지 않는다. 전혀.
‘도끼바바맨’을 차단하시겠습니까?
YES / NO
‘딸깍’
‘도끼바바맨’을 차단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경 안 쓰인다.
거대한 충돌과 함께 모니터에 뿜어져 나오는 빛...
스으으으-
솨아아아!!
"근데 이거 점점 빛이 심해지는 거 원래 이런가? "
[지영ol남편 : ㅋㅋ 승천 연출 기가 막히네요. 이제 방송인으로 진로 잡은 건가요?]
“아니 이거 진짜 이상하다니까?”
딸깍
딸깍
딸깍딸깍딸깍!!
아무리전원 버튼을 눌러도 꺼지지 않는 모니터.
엔딩 크레딧인 줄 알았던 빛은 점점 심해진다.
아니, 점점 심해지는 걸 넘어서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
눈앞이 깜깜하게 물들고...
시야가 천천히 돌아오자 보인것은...
저 멀리서 보이는 500번은 넘게 본 특징적인 빨간색 망루.
“아”
내게 일어난 일은 거액의 상금도 영화의 카메오 자리도 아니었다.
양산형 K-게임의 주인공 그것도 대충만든 디폴트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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