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번째 괴식 – 훈제오리 참외 바게트빵
오늘은 어떤 괴식을 만들어볼까?
복날이 다가온다.
복 시즌이 되면 닭이 역시 불티나게 팔린다.
복날 개 먹던 풍습이 이제는 닭 먹는 걸로 정착된 듯 하다.
요즘처럼 먹을 게 많은데
굳이 눈총 받아가며 개를 먹을 이유가 없어진 거다.
그리고 개고기 시장의 틈새를 닭이 비집고 들어와
공장형 양계장 하시던 분들이 대박이 터진 거다.
가업으로 양계장하다가 불과 몇 년 새
어마어마한 재벌로 등극하신 분들이 아주 많다. (ㅎㄹ ㄱㅊ ㅎㅅㅇ ㄱㄴ...)
다들 돈을 진공청소기로 흡입하고 계시는 중.
나도 시골 내려가서 병아리나 좀 키울걸.
병아리가 돈인데.
맨날 알껍질 까기 전에 후라이로만 먹었네.
유정란 사서 먹지 말고 부화시킬 걸.
병아리 양육을 포기한 오늘도
괴식은 계속된다. 재료를 찾자.
닭이 불티나게 팔리면
닭의 유사품인 오리가 또 잘 안 나간다.
한방 사료 먹인 훈제 오리가
가격이 너무 쎄서인지 며칠째 매대에서 나가질 않는다.
이미 좀 상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폐기 후에도 아무도 가져가려는 사람도 없었다.
나도 못 먹는 한약 먹고 큰 오리.
얼마나 약빨을 받았을지 기대가 된다.
그리고 여름에 남아 도는 참외랑
판매된 지 3일 지난 바게트빵이 괴식 재료로 결정됐다.
보통 과일은 농익은 것보다 덜 익은 게 안 좋다는데
참외는 농익은 것도 몸에 안 좋다고 한다.
BUT 세상은 상식대로 돌아가진 않는다
냉장고에 1년 정도 있었던 참외를 먹어 본 적 있냐?
리얼로 난 있다.
사놓고 냉장고 야채칸에 검은 비닐 봉지에 싸여서
그게 뭔지 별로 관심도 없었는데
어느날 하도 배가 고파서
냉장고를 뒤져보니 떡 하니 있었다. 1년 골은 참외가.
그걸 먹었냐고? 당연하지.
그래서 죽었냐고? 안 죽었으니까 처묵질 하잖아.
어땠냐고?
....
난 우리나라 냉장고가 그렇게 성능이 좋은지 몰랐다.
의문의 빨갛고 파란 점이 몇 개 박힌 거 빼고는 (그 색깔점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와서 알고 싶지도 않다)
고대로다. 리얼.
맛도 고대로. 상태도 고대로.
다만 식감은 수분이 거의 말라서 조금 퍽퍽했지만
그런대로 그것도 괜찮았다.
먹고 혹시나 해서
건강을 체크했는데 전혀 문제 없었다.
1년 골은 참외를 먹고도.
...
답이 나왔다.
내 위장, 소장, 대장은
폐기물 처리용으로 최적화되어 내 몸 속에 세팅됐다.
쉽게 말해서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
그리고 그 성능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
어쩌면 폐기품 처묵질은 나의 예정된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평생 이렇게 살아갈 팔자인지도 모른다.
너무해 내 운명.
억울한 마음에 퍽퍽 허공에 주먹질을 해댄다
침도 뱉어볼까 하다가 그건 또 치워야 돼서 관둔다.
다음 훈제오리.
생각할 것 없이 팬에 볶았다.
오리 자체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이 나오기 때문에
따로 기름을 뿌리지 않았다.
볶아보니까 정말
이 정도면 유전이다.
기름이 펑펑펑 쏟아져 나온다.
보고 있나? 사우디?
인간의 미각을 위해
자기 기름에 자기가 튀겨지는 살신성인의 현장
갑자기 급경건해진다.
안데르센의 대표작 미운오리새끼.
백조 새끼가 엄하게 오리새끼인 줄 알고 왕따당하다가
존버 끝에 백조돼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그 동화는 안데르센 자기 얘기라고 한다.
못 생기고 성격도 좀 안 좋아서 맨날 왕따당했던 자기의 무명시절 이야기.
자기의 트라우마를 동화로 써내 초대대대대박을 터뜨리며
돈과 명예를 한 손에 잡은 거다.
역시 되는 놈은 트라우마도 돈이 된다.
나도 언젠가 트라우마를 팔았던 적이 있다.
어디서 들었는데 여자를 꼬시려면 트라우마를 슬쩍 내보이라는 것이다.
일단 여자들은 감성이 풍부하니까
감성팔이를 하란다. 처음 보자마자.
(지금 생각하면 어떤 놈이 지만 당할 수 없으니까
딴 사람들한테까지 약 판 거다. PPL by 00제약)
고딩때 떨리는 마음으로 소개팅 나간 날
최선을 다해서 있지도 않은 트라우마
(병명은 말 안하고 불치병 있다고 뻥쳤다) 까지 들먹이며 감성팔이짓을 했다.
그러면 먹힐 줄 알고.
모성본능 느껴줄 줄 알고.
...
그것도 뭐가 좀 있는 놈이 팔아야지
와꾸, 능력, 돈, 스펙, 키, 유머 다 떨어지면서
트라우마까지 있는 놈한테 여자가 붙겠냐?
여자들은 트라우마 있는 잘 생긴 남자한테 모성본능을 느끼지
트라우마만 있는 빻은 남자한테는 환멸만을 느낀다.
햐~ 진짜 트라우마는 그 후에 생겼다.
내가 뻥쳤던 불치병이
그 흔한 암도 아니고 백혈병도 아니고
영구 ㅂㄱㅂㅈ 이라고 소문이 났다. 가뜩이나 여자들이 피하는데...
이제 어떤 여자가 나랑 사귀냐고!!
한동안 내 별명이 김GOJA였다. ㅜㅜ
(하긴 뭐 김처묵이나 김GOJA나... 작명 클래스가 거기서 거기기는 하다)
정말 답답했다.
하루 날 잡아서 전부 모이라고 해서
다 까고 수년간의 야동으로 단련된 나의 솟구치는 남성성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정말.
너무해 내 운명
또 허공에 쉐도우 복싱질.
이러다보니 오리가 거의 익어간다.
참외 껍질을 과도로 쓱쓱 벗겨낸다.
참외는 과육 부분의 중간에 씨가 몰려있다.
그 부분을 파내고 안 먹는 경우가 많은데
그 씨를 둘러싼 하얀 부분. 그것이 당분의 결집체다.
씨 부분을 발라내고 최대한 그 많은 씨를 털어낸다.
하얀 줄기(?) 부분만을 남기기 위해.
자, 이제 바게트 빵 위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오리와 참외의 만남만 이루어지면
이번 괴식은 끝이다.
3일 지난 바게트빵은
그냥 바싹 딱딱하게 말라있었다.
수분이 별로 없으니 곰팡이도 없다.
바게트빵을 렌지에 살짝 데워서
그 위에 오리와 참외를 얹는다.
또 그 위에 참외의 속 하얀 줄기를 띄엄띄엄
남아있는 씨를 발라내며 얹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게트빵으로 덮는다.
완벽한 바게트 샌드위치로 재탄생.
바게트 전문 P모 빵집에서 8000원 정도에 팔릴 컨텐츠다.
오리의 기름으로 벌써 눅눅해지려고 한다.
재빨리 한 입 뜯고.
!!!!
와 이건 진짜 무슨 맛이지??
오리의 기름진 고소한 맛을
참외의 시원함이 잡아주면서
하얀 줄기 부분의 단 맛이 이 모든 걸 콘트롤한다.
맛이 고급스럽다.
싸구려 설탕이 흉내 낼 수 없는 참외 속의 극강 단 맛.
자기 기름으로 자기를 튀긴 살신성인 오리의 치명적 고소함
갓 구운 빵이 코스프레 할 수 없는 오래 묵은 바게트의 거친 식감.
이 모든 게 아우러진다. 굿 테이스트~~
그리고 부수적으로 얻은 자아발견.
음식물 쓰레기 처리에 최적화된 나의 신체.
언젠가 마트를 그만두게 되면
음식물 쓰레기 처리 회사에 들어갈 것 같다.
그리고 잘 적응하며 살 것 같다.
운명적 직감이다.
사랑해 내 운명.
혼밥괴식회 ... 오늘도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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