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봉급날
그림/삽화
봉급날
작품등록일 :
2022.09.22 02:14
최근연재일 :
2022.10.29 23:55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3,167
추천수 :
88
글자수 :
275,051

작성
22.09.28 23:55
조회
52
추천
3
글자
11쪽

21화

DUMMY

장난스럽게 노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검은 레이스가 달린 긴 소맷자락이 손짓에 따라 흔들린다.


레오나드 파티의 메인 딜러 노엘.


경매장 측에서 준비해준 것인지 고급스러운 셔링이 달린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머리와 눈동자.


탄식을 자아내는 얼굴 소유자 노엘은 깊은 눈동자로 가만히 나를 주시한다. 어떤 감정의 편린도 느껴지지 않아서 묘하게 섬뜩한 구석이 있다.


마치 무생물을 보듯이 무감한 눈빛이었다.


원작에서는 감정에 서투른 캐릭터로 나와서 몰랐는데 직접 보니 노엘의 배경이 실감났다.


레오나드는 어떻게 저런 위험해 보이는 눈을 한 노엘을 영입할 생각을 한 것인지 새삼 놀랍다.


지금 당장 내게 칼을 꽂아도 놀랍지 않을 것 같다.


울렁거리는 기분에 인장 반지를 쓸었다.


“이름이 뭐지?”


혹시나 실수할까. 제일 먼저 이름을 물었다.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노엘은 드디어 입을 연다.


“노엘. 넌 누구지.”


내게는 레오나드 같은 말재주는 없다. 그러니 나는 판을 깔기로 했다.


표정을 갈무리하며 판을 짜낸다. 이번 무대의 컨셉은 흑막이다.


전조도 없는 멸망을 입에 담는 것보다는 신빙성이 있으리라.


"노엘. 이 세상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무게를 한껏 잡으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때마침 땅거미가 내려앉으며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


검은 머리칼이 짙은 그림자를 만들며 하얀 피부가 창백하게 느껴진다. 흐트러짐 없는 노엘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어림도 없었다.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끄떡도 없는 노엘을 보자 한숨이 나올 것 같다.


조금이라도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하지 그래.


나는 아무렇게나 헛소리를 지껄였다.


“잘 생각해봐. 제국이 너무 긴 세월 동안 평화로웠다고 생각하지 않나.”


노엘은 시종일관 무미건조하다.


심연을 닮은 검은 눈동자는 가만히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라면 무슨 뜻인지 이해했겠지.”

“아니. 그게 무슨 뜻이지.”


노엘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보통 거기서는 물어보기 뻘쭘해서라도 조용히 있는 타이밍이 아니냐며 푸념하고 싶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은 듯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노엘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나와 같이 대업을 이뤄보지 않겠나.”


얼어붙은 공기가 느껴지는듯해서 얼른 말을 이었다.


“너에게도 나쁜 제안을 아닐 거야. 나한테 충성을 맹세한다면 작위 주지.”

"······나한테 그걸 제안하는 이유가 뭐지?“


노엘 입장에서는 난데없이 대뜸 대업을 이루자고 하는 상황.


무덤덤하게 아티팩트로 가려진 눈을 가리켰다.


“내가 눈이 좋거든.”


어쩐지 권태롭게 느껴지는 눈동자에는 어떠한 파문도 일지 않았다. 너무도 태연한 눈에 아무리 나라도 이쯤 되면 곤욕스럽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너는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고 그저 내 일을 조금 도와주면 되는 거지.”


노엘은 마치 공들여 만든 밀납 인형처럼 보인다.


‘무심과 권태로움.’


내가 노엘에게 느낀 유일한 감정이었다.


“당장 결정하긴 어렵겠지. 고민할 시간은 충분히 주지.”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터무니없이 명료하게 나온 대답에 가까스로 평정심을 유지했다. 레오나드가 영입을 제안했을 때도 이렇게 빨리 결단 내리지 않았다.


도리어 깊은 수렁에 빠진 듯이 스멀스멀 위화감이 올라온다.


"······조건이 있는데 괜찮나?"

"뭐지."

"내게 맹세를 하나 해줘야겠어."

"그러지."


일말의 틈도 없이 긍정이 나오자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하다.


하지만 고작 미심쩍다는 이유 하나로 거절하기엔 너무나 달콤한 이야기였다.


"내 이름은 티타니아 르웰.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것을 맹세해. 배신의 기준은 명을 어기는 것, 살인, 폭력 다 안돼."

"알겠다."


이상하리만치 간단해서 꺼림직하다.


당장 죽으라고 명령이라도 하면 어찌할 것인지. 어째서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는 것인가.


눈빛이 이상하더니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닌가.


일이 간단하게 풀렸지만 석연치가 않았다. 뭐가 되었든 본인이 허락하였으니 나는 몸을 일으켰다.


노엘의 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노엘의 몸을 감싸고 있는 마나가 감지된다. 심장에서 흐름이 꼬여서 원활하게 마나가 흐르지 못하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나는 노엘의 심장을 향해 마나를 주입했다. 갑자기 마나가 뭉텅이로 쑥쑥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미리 때는 안 그랬잖아?"


설마 대상자의 마나량도 연관이 있는 거였냐며 기겁했다.


순식간에 마나가 바닥을 드러내고 나는 급하게 주변의 마나를 끌어모은다. 한참이나 실시간으로 마나를 공급하고서야 진동이 느껴진다.


"나 노엘 루시안은 티타니아 르웰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


마나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이내 사그라든다.


급격히 머리가 어질거려서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는다.


나는 노엘을 보고 손끝을 까딱였다.


"뭐지?"

"이쪽으로 가까이 와봐."


노엘은 망설이지 않고 움직여 내 앞에 섰다. 커다란 덩치가 바로 앞에 서 있으니 상당히 위압적이다.


"눈높이를 좀 낮춰줄래?"


노엘은 얌전히 한쪽 무릎을 세운 채로 몸을 낮췄다. 무릎을 굽히고 있음에도 비굴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집요하게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 매끈한 노엘의 얼굴에는 흠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노엘의 턱을 잡고서 옆으로 돌렸다. 노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었다.


"옆으로 돌려봐."


잠자코 말을 따른다. 나는 노엘의 목을 감싸고 있는 구속구를 쥐자 맥박과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인장 반지를 내려다봤다. 구속구에 홈을 찾아 인장 반지를 가져다 대자 바스라지더니 검은 입자가 되어 흩어진다.


노엘은 어색한지 하얀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내 계획을 말해주지."


나는 레오나드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갈 생각이었다.


"용병 패를 발급받아서 신분을 만들고 2학기에 아카데미로 편입하도록 해."


아카데미에서 졸업하면 남작 작위를 얻을 수 있으니 거짓말은 하지 않은 셈이다.


같이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노엘이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 것이 용이하다.


아카데미는 평민의 경우 낙제를 두 번 받으면 바로 퇴학이다. 특별히 1학년 1학기동안 퇴학자가 나오면 추가 입학시험을 진행한다.


이때 새롭게 등장하는 캐릭터 중에 성녀 아리엘이 있다. 원래는 평민 출신이지만 성녀라는 지위 덕분에 귀족반으로 편입한다.


나는 아공간에서 주머니를 꺼내 금화를 넉넉히 담고 노엘에게 건냈다.


"이걸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도록."

"......."


노엘은 가만히 금화 주머니를 내려다본다.


"그동안은 자유행동을 해도 좋아. 대신 꾸준히 보고를 주고받을 수 있게 거처를 마련해."

"알겠다. 지금 출발해야 하나?"


노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움직이는 게 좋겠지.


미련 없이 몸을 일으킨 노엘은 기척도 없이 밖으로 향했다.


마리는 노엘이 떠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감히 노예가 반말이라니요!"


노엘이 너무 자연스럽게 반말을 써서 몰랐는데 듣고 보니 그렇긴 그랬다.


어쩐지 옆에서 마리가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노엘을 보고 있다 했다.


원작에서도 노엘이 반말 캐릭터로 나와서 위화감이 하나도 없었다.


레오나드의 메이드인 리사가 특히 격분해서 존댓말을 쓰게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왜 그래야 하지?]


노엘은 의문스러워했으며 리사는 노엘의 어빌리티에 오만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레오나드도 신경 쓰지 않으니 결국 리사도 포기했다.


하여튼, 원작을 아는 나는 죽어도 노엘의 말투를 고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쓸데없이 힘뺄 생각은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언제 다시 보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마리가 노엘을 보고 쓴소리를 할 수 있으련 지는 모르겠다.


마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아가씨 그 대업이 뭔가요? 저도 옆에서 계속 듣고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 가요."

"그런 게 있어.“


나도 내 대업이 뭔지 잘 모르는 터라 마리에게 대충 둘러댔다.


이제 쓸모없어진 인장 반지를 손에서 빼냈다. 괜스레 손에서 둥글리며 보다가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문득 아공간 팬던트가 눈에 들어온다. 푸른 보석이 박혀 있는 부분을 만지작거리다가 갑자기 이상한 괴리감이 든다.


‘잠깐만. 근데 나 왜 이거 본 적이 없지?’


원작에서 티타니아가 이걸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공작이 원작에서는 티타니아에게 아공간 아티팩트를 안 줬을까. 아니. 그럴리가 없다.


이유 없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면 아공간 펜던트는 어디로 증발했을까?


티타니아가 팬던트를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잃어버렸다. 나는 팬던트를 꽉 쥐며 엄중하게 보관해야겠다며 다짐했다.


* * *


무언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원하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인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책에서 발견한 가사 상태에 이르게 하는 독초.


임무 중에 그것을 발견했다. 이상한 우연이었고 나는 충동적으로 독초를 삼켰다.


그곳에서는 죽은 자는 버려졌으니 문제 없이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독초를 삼켰던 부작용으로 노예 상단에게 사로잡혔지만 문제는 없었다.


그들은 내게 구속구를 채웠고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 가뒀다. 독초의 부작용 때문에 시간이 걸릴 뿐이지 구속구를 푸는 건 아무 문제 없다.


그들은 폭력을 휘둘렀고 나는 그들의 손목에 그려진 문양을 보았으니 문제는 없다.


그들은 눈을 가리고 나를 어디론가 이송했다. 안대가 벗겨지고 화려하게 꾸민 연회장 앞에 세워진다.


100골드로 나를 구매한 수상한 여자.


'이상하군.‘


여자는 장난스러운 태도로 손을 흔든다. 분명히 기억에 없는 얼굴인데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


"이름이 뭐지?“

"노엘. 너는 누구지.“


그러나 여자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고 의미심장한 질문을 했다.


“노엘. 이 세상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나는 지루한가.


지루하다는 감정은 대체 어떤 것이지.


나는 무엇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여자는 분명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내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노엘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지. 나와 같이 대업을 이뤄보지 않겠나.”


대업을 이루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어째서 내게 제안하는 것이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기에.


나는 무엇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기시감이 느껴지는 여자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알 수 없었지만 알고 싶었다.


노예를 벗어난다고 한들 하고 싶은 일은 없었으니까 무엇을 해도 상관 없겠지.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제안을 받아들이지.”


여자는 맹세를 원했고 나는 아무것도 꺼리지 않는다. 여자의 손아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어차피 맹세는 내게 어떤 의미도 없으니까 아무 문제도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2 22화 22.09.29 50 2 12쪽
» 21화 22.09.28 53 3 11쪽
20 20화 22.09.27 57 2 12쪽
19 19화 22.09.26 56 2 12쪽
18 18화 22.09.25 58 3 11쪽
17 17화 22.09.24 57 3 11쪽
16 16화 22.09.23 63 3 12쪽
15 15화 22.09.22 71 3 11쪽
14 14화 22.09.22 67 3 12쪽
13 13화 22.09.22 67 3 11쪽
12 12화 22.09.22 65 3 12쪽
11 11화 22.09.22 67 3 12쪽
10 10화 22.09.22 71 3 12쪽
9 9화 22.09.22 72 3 12쪽
8 8화 22.09.22 79 3 12쪽
7 7화 22.09.22 87 3 12쪽
6 6화 22.09.22 89 1 11쪽
5 5화 22.09.22 99 1 12쪽
4 4화 22.09.22 100 2 11쪽
3 3화 22.09.22 114 2 11쪽
2 2화 22.09.22 166 2 11쪽
1 1화 22.09.22 286 2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