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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의 서재입니다.

아포칼립스물의 망나니 공작영애

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판타지

봉급날
그림/삽화
봉급날
작품등록일 :
2022.09.22 02:14
최근연재일 :
2022.10.29 23:55
연재수 :
52 회
조회수 :
3,166
추천수 :
88
글자수 :
275,051

작성
22.09.23 01:05
조회
62
추천
3
글자
12쪽

16화

DUMMY

금발 여자는 손가락 사이를 교차하며 천천히 깍지를 낀다. 그 위에 턱을 올려놓는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매의 눈을 했다.


“나는 나탈리. 3학년이야. 입부 희망자지?”


박력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진다. 나탈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뜬다.


깍지를 풀어내고 앞에 놓인 무늬 없는 하얀 찻잔을 들고 후후 식히더니 한 모금 머금는다.


“히스. 입부 신청서 좀.”


나탈리의 말에 회색 머리 남자가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온다. 히스는 날 보고 눈웃음을 지으며 내 앞에 반듯이 입부 신청서를 내려놓았다.


‘날 기억 못 하진 않겠지?’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금붕어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모를 리가 없다.


열 받는다고 갈구는 거 아닌지 몰라. 히스에게서 악감정은 읽히지 않았지만, 속단은 금물이었다. 아닌 척,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손바닥을 척 들어 올렸다.


“잠깐. 바로 당장 가입하겠다곤 하지 않았어요. 설명부터 해주셨으면 하네요.”


물론 가입은 할 생각이지만. 이왕이면 인간관계도 유리하게 시작하면 좋지.


원래 쉽게 주어지는 것은 고마운 것을 모르는 법이다. 고마움을 느끼게 해주면 마음에 빚이 생기겠지.


고작 이 정도로 엄청난 부탁을 하는 건 무리겠지만, 다소 부담스러운 정도라면 고려해보겠지.


나탈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침음을 내뱉는다.


“으음, 신중하구나.”


혼잣말하듯 ‘그래. 신중한 게 좋지.’라고 중얼거리며 접시에 잔을 내려놓는다.


“연금술을 연구하는 동아리라는 건 이미 알고 왔을 테고, 궁금한 게 있어?”

“동아리에 입부하면 활동 내역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들었어요. 자세히 설명해주실래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했다. 안 그래도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동아리에서 너무 과도한 걸 요구하면 잠깐은 괜찮아도 지속할수록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플랜을 바꿀 생각도 있다.


나탈리는 눈을 빠르게 깜박이나 싶더니 테이블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린다.


손톱을 세워 톡톡 탁자를 두들린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에 시선이 머문다.


“그냥, 평범해. 연구 일지 작성도 하고 그게 힘들면 약초를 제출해도 돼.”


나는 다시 나탈리를 보며 눈썹을 추켜올렸다. 고작 그거면 되는 건가. 약초를 제출하기만 하면 된다니 꿀이다. 플랜을 바꿀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혹시 함정 깔려 있을 수도 있으니 확인해보자.


“약초를 제출한다고요? 아무 약초나 다 되나요?”


나탈리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더니 촛불을 바라본다. 주먹을 말아쥐고는 엄지로 손을 문지르며 입술을 달싹거린다.


“······너무 흔한 건 안 되고. 학회 기준 희귀도 중 이상이면 돼. 직접 채집을 해도 되는 거니까······. 부담 갖지 않아도 괜찮아.”


나탈리는 추운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며 손바닥으로 팔뚝을 여러 차례 쓸었다.


그러더니 테이블 위에 팔을 세워서 벽을 만드는 가 싶더니, 잠시 뒤에 다시 내린다. 이번엔 머리카락을 계속 만지작거린다.


"근데 나탈리 선배. 아까부터 왜 그래요?“


이쯤 되니 나도 지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 정신이 사납다. 한 자세로 오래 있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 마치 초조해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동아리로서는 신입생을 모집해야 하긴 하지. 근데 고작 그것 때문에 나오는 반응이라고는 너무 지나치지 않나.


"내, 내가 뭘?"


나탈리는 말을 더듬더니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아까부터 너무 정신 사나워서요.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 내가 그랬나. 하하."


나탈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상체를 뒤로 물리며 의자에 등을 기댄다. 이마를 손등으로 연신 훔치더니 손부채질을 했다.


“어우. 너무 당황해서 땀이 다 나네. 그런 거 아냐.”


나는 나탈리가 대체 왜 저러나 싶어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바라봤다. 가만히 그러고 있으니 나탈리가 안절부절하며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더니 결국 고개를 아래로 떨군다.


“.......”


아무 말도 못 하는 나탈리를 보며 내 의심은 확신으로 변해간다.


마녀의 항아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잖아. 고작 정원의 향기인지, 냄새인지 하는 동아리를 이겨 먹겠다고 저런다는 건 말이 안 되지.


뒤에 있던 학생이 이쪽으로 다가오더니 나탈리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얼굴을 가까이하며 나탈리의 귓가에 속삭인다.


“나탈리, 그만 됐으니까. 나와.”


애석하게도 내게도 다 들리긴 했다. 여학생은 나탈리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주고는 나탈리의 팔을 잡고 의자에서 비키도록 끌어낸다.


여학생은 팔짱을 낀 채 치켜 올라간 눈꼬리로 날 내려다본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가입할 생각이 없으면 꼬투리 잡지 말고 그냥 가라.”


파리를 쫒듯 손을 휘휘 내젓는 모습이었다. 외부인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가보다. 심상치 않은 사건의 냄새가 난다.


그나저나 나탈리가 저렇게 여린 줄은 몰랐지. 플랜이 틀어져 버렸다. 애걸복걸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플랜 B로 가는 수 밖에.


“아뇨. 가입할 건데요?”

“......”


뻔뻔하게 바라보자 갈색 머리의 여학생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다문다. 정적이 흐른다.


“어······. 진짜?”


반신반의하는 여학생을 보며 힘 있게 고개를 까닥였다. 거짓말로 이런 소리를 왜 하겠어. 당연히 진짜지.


“어, 진짜.”

“진짜?”


말장난처럼 나와 여학생이 주고받는다. 상황이 우스워서 웃음이 나온다.


나는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걸었다. 머리라도 척 날려주면서 잘난 채 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머리를 묶고 있다.


“네. 제가 돈이 많거든요.”

“······”


좌중에 침묵이 내려앉는다. 하나 같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미동도 없이 굳어버린다. 마치 메두사라도 된 기분이다.


“······그렇다면야. 말릴 필요가 없지. 야! 펜 가져와!”


메두사의 석화에서 홀로 풀려난 여학생이 외친다. 부스 안이 분주해지더니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난다.


금세 눈앞에 깃털 펜이 텅하고 놓인다.


“자! 빨리 써!”


마음이 급해진 건지 테이블을 쿵쿵거리는 여학생을 흐린 눈으로 응시했다.


멋쩍어하며 잉크 뚜껑을 손수 열어주고는 여학생이 물러난다.


깃털 펜을 들어 잉크를 콕 찍었다. 입부 가입서에 이름부터 시작해서 차곡차곡 기입한다. 금방 다시 조용해진 부스 안.


사각사각. 글자를 적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마침내 작성을 마친 나는 깃털 펜을 내려놓았다.


여학생은 떨리는 손으로 입부 신청서를 걷어간다.


눈으로 내용을 읽으며 신중히 확인한다. 확인이 끝나자 두 손으로 하늘 높이 종이를 들어 올리며 괴성을 지른다.


“꺄악! 됐다, 됐어!”


자기들끼리 껴안고 난리가 났다. 설마 이번 신입생 중에서 내가 처음 입부한 걸까.


던전 동아리 갔다가 입부 신청서 내고 온다고 시간이 상당히 흘렀는데 아직 한 명도 없었단 말인가. 필요해서 들어온 거지만 기분이 상당히 미묘하다.


“야, 너 혹시 친구 없어? 꼬실 친구 말이야.”


할 말을 잃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학생은 부정하는 의미로 받아들인 건지 아쉽다며 입맛을 다셨다.


대체 왜 이렇게 신입생 모집에 혈안이 된 것인지 무척 궁금해진다.


“너 아니고 티타니아.”

“아! 그래, 그래. 티타니아라고 써져 있었던 것 같다. 미안. 동아리는 이번 주부터 자유롭게 나오면 돼.”

“네.”


볼일이 끝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벌써 늦은 저녁이다. 할 일도 있으니 슬슬 돌아가야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스 밖으로 향한다. 나탈리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잠깐만! 입부회 끝난 뒤에 뒤풀이할 건데 그때 오지 않을래?”

“네. 시간 봐서 갈 수 있으면 갈게요.”


긍정적으로 대답한 나는 발걸음을 다시 돌렸다.


‘이틀 뒤인가.’


머릿속에 입력 해두기로 했다.


근데 신입생 환영회면 모를까. 뒤풀이에 신입생이 끼는 건 뭔가 싶다. 이해는 안 가지만 나는 친분을 쌓는 것이 목적이니 참가할 수 있다면 참석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슨 일인지 상당히 흥미가 깊다.


기숙사에 거의 다 도착해서야 잊고 있던 레베카가 떠오른다. 발걸음을 되돌리긴 귀찮다. 적당히 둘러대야겠다.


거처로 돌아와 보니 마리가 못 보던 옷을 입고서 창문을 닦고 있었다. 얼마나 열심히 청소 중인지,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마리는 주근깨가 난 콧등을 찡그리며 집중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눈치를 못 채고 있는 것 같다. 문득 장난기가 올라온다. 귓가에 대고서 속삭인다.


“마리.”

“힉!”


마리는 매미처럼 창문에 철썩 달라 붙는다. 고개를 녹슨 경첩처럼 기긱 돌린다. 나는 잔뜩 겁을 먹은 마리의 얼굴을 보고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눈썹 앞머리를 모으고 꽉 다물린 입술과 오들오들 떨리는 다리. 앞으로 잔뜩 말린 어깨와 꼭 맞잡은 두 손.

퍼렇게 질린 마리의 낯빛을 보면 누구라도 웃지 않을까.


여기서 나 아니면 또 누가 이름을 부른다고 저렇게 놀라서 돌아보는 건지.


‘슬슬 티타니아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반응이 너무 좋으니까 놀리는 맛이 있다. 실제로 티타니아도 마리가 귀여워서 놀린 게 대부분이었다.


마리는 손바닥으로 가슴 위에 얹고서 숨을 크게 내뱉는다.


“휴우. 노, 놀랐어요.”

“들어와도 모르고 있길래. 장난 좀 쳐봤어.”


마리가 아랫입술을 내민다. 눈치를 보더니 다시 금방 입을 밀어 넣고 원상복구 하는 마리. 다시 쏙 들어가는 아랫입술이 웃기다.


“오, 오늘도 늦으셨네요?”

“동아리 입부회를 한다고 해서 들렀다가 오느라 늦었지. 마리는?”


나야 그렇다 치지만 여기에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심심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마리 성격에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보여 더더욱 그랬다.


“아, 저는 오늘 연수원 다녀왔어요.”


마리는 다시 창문을 닦기 시작했다. 야무진 손길로 창문을 반짝반짝 닦는다. 이미 충분하게 깨끗해 보이는데 마리 눈에는 다른 모양이다.


“연수?”

“네, 그. 아카데미에 동행한 전속 메이드들은 받아야 하는 연수가 있어요. 꽃꽂이나 자수 같은 것들도 취미로 배울 수 있나 봐요.”


그런 것도 있나 보다. 아카데미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는 것 같다. 다행히 심심하진 않겠다.


걱정 안 해도 되겠다고 생각하며 소파로 가서 앉았다. 마리는 다시 뒤돌더니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린다.


“이것도 연수원에서 지급해준 메이드 복이에요.”


‘어쩐지 못 보던 옷이다’ 했다. 아카데미의 남색 니트조끼와 치마에 포인트 컬러로 금색이 들어가 있는데 색 배열이 똑같다. 거기다 교복처럼 아카데미 엠블럼도 박혀있다.


“응. 교복이랑 비슷하네.”

“······그렇죠.”


나는 아공간에서 이리나가 준 초대장을 꺼냈다. 초대장을 힐끔 본 마리가 페이퍼 나이프를 챙겨다 줬다. 칼을 틈 사이에 넣어서 자르고 내용물을 꺼냈다.


개나리처럼 노란 초대장은 로렌시아가 공을 들인 티가 났다.


향수라도 뿌려둔 건지, 초대장에서 꺼내자마자 은은한 꽃향기가 풍긴다. 무슨 꽃인지 모르겠지만 향은 좋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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