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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루이야기


[한마루이야기] 장가가기와 시집가기.

장가가기와 시집가기.

장가간다는 말은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살림 사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그 옛날 우리나라 결혼제도가 남자 중심이 아닌, 여자중심이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모계사회의 잔존이라 생각되며, 여자를 얻는데 대한 보상 차원에서 행해진 관습일 것이다.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면 분가하여 일가를 이룬다.

이런 제도는 조선중기까지 관습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세종의 성리학적 주자가례에 따른 중국식 결혼제도 수입에 의해 바뀌기 시작했다.

관습의 변화로 인해 삶의 방식이 달라진 사례를 보자.

예)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申師任堂.

1504(연산군 10) ~ 1551(명종 6)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문인.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이며,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인 이이(李珥)의 어머니이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그밖에 시임당(媤任堂) · 임사재(妊思齋)라고도 하였다. 당호의 뜻은 중국 고대 주나라의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것으로서,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北坪村)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중종11)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사화의 참화는 면하였다. 외할아버지 사온이 어머니를 아들잡이로 여겨 출가 후에도 계속 친정에 머물러 살도록 하였으므로, 사임당도 외가에서 생활하면서 어머니에게 여범(女範)과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婦德)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났다.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는 아버지와는 16년간 떨어져 살았고, 그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다. 19세에 덕수이씨(德水李氏) 원수(元秀)와 결혼하였다. 사임당은 그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였으므로 남편의 동의를 얻어 시집에 가지 않고 친정에 머물렀다. 결혼 몇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친정에서 3년 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하였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이따금 친정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도 하였으며, 셋째아들 이이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아주 서울로 떠나왔으며, 수진방(壽進坊 : 지금의 壽松洞과 清進洞)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다. 이해 여름 남편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 갔을 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사임당이 지향한 최고의 여성상은 태임으로 그녀를 본받는다는 뜻으로 당호를 지었는데, 사임당을 평한 사람들 중에는 그의 온아한 천품과 예술적 자질조차도 모두 태임의 덕을 배우고 본뜬 데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이와 같은 대정치가요 대학자를 길러낸 훌륭한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평가한 때문이다. 그러나 사임당은 완전한 예술인으로서의 생활 속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성숙시켰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북돋아준 좋은 환경이 있었다. 그의 재능은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私淑)하였던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그녀는 통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나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녀 예술가로서 대성할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거문고 타는 소리를 듣고 감회가 일어나 눈물 지었다든지 또는 강릉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 등은 그녀의 섬세한 감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의 그림 · 글씨 · 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림은 풀벌레 · 포도 · 화조 · 어죽(魚竹) · 매화 · 난초 ·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畫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산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 · 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爨頭]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담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을 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조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것은 셋째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우(瑀)와 큰딸 매창(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작품으로는 자리도(紫鯉圖)·산수도(山水圖)·초충도(草蟲圖)·노안도(蘆雁圖)·연로도(蓮鷺圖)·요안조압도(寥岸鳥鴨圖)와 6폭초서병풍 등이 있다.

사친(思親)한시(漢詩). 사임당이 서울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친정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여 읊은 것으로, 이이(李珥)의 《가승(家乘)》에 실려 있다. 원문과 풀이는 다음과 같다. 「千里家山萬疊峰 歸心長在夢魂中 寒松亭畔孤輪月鏡浦臺前一陣風 沙上白鷗恒聚散 海門漁艇任西東 何時重踏臨瀛路 更着斑藤下縫〉(산첩첩 내 고향 천리건마는, 자나깨나 꿈 속에서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 모이락,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꼬.)」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한시(漢詩). 사임당이 38세 때 대관령을 넘으면서 마루턱에 앉아 쓴 시로 이이(李珥)의 《선비행장(先妣行狀)》에 실려있다. 원문과 풀이는 다음과 같다. 「慈親鶴髮在臨瀛 身向長安獨去情 回首北村時一望 白雲飛下暮山青(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네이버지식백과발췌.

 

許蘭雪軒.

1589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본명은 초희(楚姬)이며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1563(명종 18)년에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남. 봉(篈)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임.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 사이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으로 칭송되었음.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함.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고 함.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음. 친정집에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 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램. 23세(1585, 선조17)에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 「몽유광상산」을 지음. 1589(선조21)년 27세의 나이로 별세함.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혔음.

1590(선조23)년 11월 남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음. 1598(선조31)년 해 봄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 편을 보여줌. 이 시가 『조선시선』, 『열조시선』등에 실림. 동생 허균이 1606(선조 39)년 3월 27일 중국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모아서 전해주어 줌.

1607(선조 40)년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고, 발문은 태안 피향당에서 지음.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하여 『난설헌집』이 간행되고 애송됨. 1606(선조 39)년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주고, 그녀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중국에서 출간되어 격찬을 받았음.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 수나 됨.

[시]

『난설헌집(蘭雪軒集)』, 1590, 시집.

「감우(感遇)」, 『난설헌집(蘭雪軒集)』, 1590, 한시.

「견흥(遣興)」 5수, 난설헌집(蘭雪軒集), 1590, 한시.

「빈녀음(貧女吟)」, 『난설헌집(蘭雪軒集)』, 1590, 한시.

「기부강사독서(寄夫江舍讀書)」, 『난설헌집(蘭雪軒集)』, 1590, 한시.

「채련곡(採蓮曲)」, 『난설헌집(蘭雪軒集)』, 1590, 한시.

「사시사(四時詞)」, 『난설헌집(蘭雪軒集)』, 1590, 한시.

「곡자(哭子)」, 『난설헌집(蘭雪軒集)』, 1590, 한시.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 『난설헌집(蘭雪軒集)』, 1585, 한시.

*네이버지식백과발췌.

 

 

두 여인의 삶의 방향이 굳이 시집살이와 친정살이로 인해 달라졌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당시의 상황이 결혼제도의 개혁이 시작된 후이고, 두 여인의 삶이 워낙 대조적인지라 예를 들어보았다.

이 글을 통해 시집살이와 친정살이 중 어느 것이 좋고, 옳다는 것을 피력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가 아는 이른바, ‘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라는 말이 그다지 오래된 속담은 아니며, 장가를 간다는 말이 시집간다는 말보다 오래 전부터, 더욱 오랜 기간 써왔던 말임을 돌아보기 위해서 굳이 예를 들어보았다. 세종의 결혼제도 개혁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크게 변했다는 것만은 분명하기에 잠깐 두 여인을 비교해본 것이다.


댓글 2

  • 001. Lv.52 K.S

    13.02.08 17:35

    눈이..어지럽다..

  • 002. Lv.4 추락천사

    13.03.09 15:55

    우웈 장가 시집에 눈이 +ㅇ+ 되서 봤는데 ... 어렵네용. 그 간단한 단어들에 이러한 유래가 있었다니.. 엄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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