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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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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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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새로운 태양은 뜨고

DUMMY

#1


“고단한 삶에 한 줄기의 단비를. 오, 그 이름 메러렐. 메러렐. 아름다운 그대여.”


뜬끔없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만은 바이저 뚜껑을 벌컥 열었다. 그리곤 은색 수통에 든 무언가를 꿀떡꿀떡 넘기기 시작했다.


저게 술이라는 건 알고 있다. 얼마 전부터 나한테도 몇 번 권한 적 있었으니까. 레베스타에서 나오는 술이라는데, 살짝 맛보곤 바로 수통을 돌려줬다.

독해도 너무 독한 술이었다. 애당초 난 술을 그다지 즐기는 편도 아니었다. 인생도 씁쓸한데 그 쓰디쓴 물을 뭐하러 마시나 싶었다.


물론, 이딴 소릴 하면 아직도 애송이라면서 놀리는 놈들이 있지만, 맛없는 걸 강제로 마셔댈 정도로 난 술에 의지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자리만이 술을 마시는 건 심심찮게 볼 수 있어서 지금까진 아무 말도 안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잠자코 있기엔 상황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자리만. 지금은 정신 말짱한 게 좋을 것 같은데.”

“응?”


나는 턱으로 옆에 있는 기차의 화물칸을 가리켰다. 자리만의 콥스 대원들이 총을 들고 화물칸을 뺑 둘러 경계를 서고 있었다.


지금 저 안에는 괴물이 있다.

아니, 괴물보단 마법사라고 해야 하나.


“취했다가 모타벨이 정신 차리고 날뛰기라도 하면 큰일 나거든.”


아시리아의 카리카 외곽에 위치한 기차역.

코렌까지 직행으로 가는 이클립스 소유의 기차 화물칸엔 월교의 사도인 키아룬 모타벨이 실려 있다.


언제 기차를 불태우고 거대한 지네의 모습으로 변신할지 모를 위험인물.

원래대로라면 모타벨은 머스칼의 손에 처리될 운명이었지만 어째선지 머스칼은 모타벨을 단단히 포박해 산 채로 잡아왔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머스칼이 그러고 싶다고 했다던가. 대표님도 아시리아에서 영향력이 크던 모타벨을 그냥 처리해버리는 것보단 어떻게든 써먹을 생각을 했는지, 머스칼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모타벨은 지금 저 화물칸 안에 있다. 단단한 줄에 묶이고, 수갑을 채우고, 입을 틀어막고, 수상쩍은 약을 잔뜩 주사한 상태로 말이다.


약에 취해 해롱거리는 상태라곤 해도 상대는 월교의 사도다. 식인 도시의 알산나, 그리고 얼마 전 크루아틀까지 조우했던 나로선 사도라는 놈들이 얼마나 상식에서 벗어난 놈들인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걱정 마라. 형제. 한 번 힘을 거하게 쓴 마법사는 한동안 아무것도 못 하거든.”

“어째 나만 빼고 다들 마법사가 상식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그건 이 시대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러니 부끄러울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마법사의 존재를 인지한 우리가 이상한 거지. 인류는 우물 안 개구리, 새장 안의 새, 생에 갇힌 인간으로 사는 편이 훨씬 좋아.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자리만은 자기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확실히 이런 세상의 뒷면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이야기들은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근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모타벨은 유명인이잖아? 이렇게 막 납치하면 당연히 우리부터 의심받을 것 같은데.”

“이미 온 세상의 눈이 공업을 향하고 있으니 이제 와서 거리낄 건 없겠지. 세계 연합이 에이전트를 소집했으니, 곧 사냥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사냥?”

“날 사냥한다는 소리야.”


다른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더니 머스칼이 서 있었다.


“머스칼..”

“신경 쓰지 마. 흔한 일이니까. 그보다 헤이카가 찾고 있으니 가봐. 경계는 내가 서지.”


그렇게 말하며 머스칼은 기차 화물칸 벽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잡아올 때도 본인이 직접 잡아왔으니, 만약 모타벨이 다시 날뛰더라도 머스칼 선에서 정리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딱히 걱정할 것도 없다. 난 느릿한 걸음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안에 고객은 없었다. 정확히는 우리를 제외한 고객이 없다는 뜻이다.


“...”


그 중엔 혼자서 좌석 두 개를 차지한 야차도 있었다. 코를 드르렁 골면서 자고 있었는데, 몸 이곳저곳엔 붕대를 감아둔 상태였다.

아무래도 시라비아 마피아들로부터 벗어나려고 시카가 마구잡이로 폭탄을 깠다는 모양이다.

그리고 야차는 마피아 놈들을 곤봉으로 두들겨 패다가 그 파편을 뒤집어썼단다. 워낙 튼튼한 놈인데다가 많이 다친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일단 쉬도록 했다.


고개를 돌리자 창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시카가 있었다. 야차한테 한소리들은 탓인지 시카는 야차와 최대한 멀찌감치 떨어진 좌석에 있었다.


“흠..”


둘 다 무사히 돌아오긴 했다만, 야차와 시카가 호흡이 맞지 않다는 건 이걸로 확실하게 알았다.

앞으로 둘을 붙여서 움직이는 건 되도록 피해야겠다.


그렇게 칸을 하나 더 넘어가자 마침내 대표님이 보였다. 대표님은 승무원인지, 공업 직원인지 모를 작은 안경을 쓴 여자로부터 온갖 서류를 건네받아 확인하고 있었다.


“대표님. 저 찾으셨어요?”

“아, 왔구나. 닐라. 이 정도면 됐어.”

“네. 박사님.”


‘닐라’ 라고 불린 여자는 대표님께 고개를 꾸벅 숙이곤, 내게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도 대충 고개를 까딱이자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앞쪽 칸으로 넘어갔다.


“저 사람도 직원이에요?”

“응. 내 비서야. 처리할 일이 갑자기 많아져서 기차 타고 같이 오라고 했어.”

“비서도 있었어요?”

“그럼 없겠어?”


생각해보면 이클립스의 회장에게 비서가 없을 리가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비서의 얼굴도 본 적 없던 게 더 이상했다. 카시라트에서 일없이 놀고 있을 때도 사내에선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닐라는 본사에서 나 대신 내 일을 처리해주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본사가 아니라 카시라트 지부에 있을 수 있던 거지.”

“음.. 그럴 거면 카시라트 지부를 그냥 본사로 지정하면 안 돼요?”

“그럼 내 일이 더 많아져. 솔직히 말하면 일을 피해서 카시라트 지부로 도망친 것도 있거든.”


하긴 세상에 일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대기업 회장에게도 그건 똑같은 거겠지.


“그래서 전 왜 찾았대요?”

“음.. 일단 여기 앉아.”


난 시키는 대로 비어있던 대표님의 옆좌석에 앉았다.

하지만 대표님은 그 뒤론 입을 꾹 다물고 서류에만 집중하며 팬을 끄적거렸다.

그러길 오 분 쯤 지났을까, 드디어 대표님은 입을 열었다.


“혹시 월급 안 주면 나 버릴 거야?”

“예.”


고민할 필요도 없는 즉답. 대표님은 피식 웃었다.


“많이 주면 끝까지 붙어 있을 거고?”

“뭐.. 그렇겠죠.”

“일이 힘들더라도 돈만 주면 상관없어?”

“그건 좀 애매하네요. 아무리 많이 번다고 해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은 좀 그렇죠.”


이미 노페이스 팀에 있다는 것부터가 그런 상황이지만, 그래도 나름 할 만한 일이니까 붙어있는 거다.

만약 거액을 내밀면서 한다는 소리가 그 크루아틀이란 놈의 모가지를 따오라는 거라면 돈이고 뭐고 일단 내빼야겠지.


돈이 급한 것도 아니고, 목숨 걸고 한탕 뛸 바엔 안전하고 꾸준하게 벌어들이는 편이 당연히 좋으니까.


“그런 상황만 아니라면.. 끝까지 내 편이라는 거지?”

“예.”

“배신하지 않을 거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믿고 따라와 주는 거 맞지?”

“..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펜을 내려놓은 대표님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창가를 등지고 앉은 대표님이었기에, 때마침 떠오르기 시작한 아침의 햇빛이 꽤나 볼만하게 배경을 장식했다.


문득, 필라드에서 대표님이 노을을 등지고 날 바라보던 그때가 생각났다.

전쟁이 터지고, 마운틴 클리너로 연방 함대를 날려버리고, 뜬금없이 내 과거를 들추던 여자에게 정신이 없던 와중에도 난 그 모습에 한 차례 넋을 잃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비슷했다.

그 날처럼 깊은 금빛의 눈동자가 햇빛을 받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이번엔 저무는 노을이 아닌 떠오르는 태양이지만.

어쨌든,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번에도 난 넋을 잃고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림 속 여자는 말했다.

이제부터 우린 지옥으로 갈 거라고.



#2


“...”


움푹 팬 바닥. 으스러진 지면. 커다랗게 남은 다섯 갈래의 바싹 탄 흉터.

그 외에도 자잘하게 남은 수많은 흔적들을 세심하게 훑으며 오코넬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제 막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햇빛에 그 전투의 흔적들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오코넬의 하나뿐인 눈은 그중에서도 다섯 갈래의 상흔을 쭉 따라갔다.

호텔 건물까지 이어진 흉흉한 상처는 이젠 새까맣게 타고 남은 절단면에서 미세하게 탄내를 뿌리고 있었다.


그렇게 흔적을 살피던 오코넬은 등 뒤의 발소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떠오르기 시작하는 해를 등지고 쿠스카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야. 그래도 이 정도면 크게 충돌한 건 아닌 것 같네요.”


쿠스카는 긴 정장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고 비틀거렸다. 그가 다가오자 오코넬은 옅은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설마 아시리아에 크루아틀이 나타날 줄이야. 전혀 예상 못 했어요. 그렇죠?”

“그렇군요.”


오코넬이 짧게 대답했다. 쿠스카는 그런 오코넬을 향해 물끄러미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데 그 난장판 속에서 우리 처형인들은 전원 무사하네요. 대단한 실력이에요.”

“...”

“음. 아니면 누군가 추잡하게 목숨 구걸을 해서 살았으려나?”

“처형인들은 귀중한 인재입니다. 쿠스카.”


오코넬의 날카로운 눈빛에 쿠스카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아! 맞죠! 맞아요. 처형인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애들이 아니니까요.”

“죽었으면 했습니까?”

“으응?”


쿠스카는 미소를 지웠다. 오코넬의 살벌한 눈은 이젠 숨기지 않고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형인들의 대부라 불리며, 세월이 지나도 아직까지 시라비아에선 최고의 처형인으로 인정받는 남자다.

그런 처형인에게 원한을 사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시라비아에선 코흘리개도 아는 사실이다. 쿠스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이제 갓 처형인이 된 어리숙한 놈들. 이제야 자리를 잡기 시작한 놈들. 그리고 아직까지 살아남아 기둥이 된 녀석들까지.”


담배 연기가 움직이며 오코넬은 쿠스카를 향해 정면으로 마주 섰다. 전에 없던 살기 어린 분위기가 오코넬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 죽일 작정이었습니까? 쿠스카.”


그를 향해 허울 없이 농담을 건네던 쿠스카도 이번만큼은 말을 아꼈다. 쿠스카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설마요. 하하.”

“모르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산은 제가 키운 놈이 아닙니다.”

“어라? 처형인은 모두 오코넬을 거친다고 알고 있는데요?”

“산은 에콰가 먼저 날카롭게 갈아둔 검이었습니다. 제가 한 거라곤 그 칼날에 검집을 씌우는 법을 알려준 것뿐입니다.”


쿠스카는 그 비유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칼을 뽑고, 적의 목을 베어야 할 처형인에게 되려 칼을 거두는 방법을 알려줄 필요가 있는가?

처형인을 단순히 실력 좋은 칼잡이라고만 생각하는 쿠스카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요? 제 판단이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예. 전부 죽을 뻔했습니다. 그래서 막은 겁니다. 제 자존심까지 내다 버리면서.”


쿠스카는 헛기침을 하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 반대로 오코넬은 그런 쿠스카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오코넬의 그림자가 쿠스카를 덮었다.


“처형인들이 에콰의 영역인 미다스에 몰려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건 미다스가 그만큼 성가신 곳이라 그럴 뿐, 처형인들이 결코 에콰의 세력에 속해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의미죠?”

“윗분들의 세력 다툼에 처형인을 끌어들이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쿠스카의 눈썹이 움찔했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쩝. 미안하게 됐습니다. 오코넬.”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침내 오코넬의 그림자가 쿠스카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쿠스카는 혀를 차며 곧장 돌아섰다.


“배가 고파서 뭐 좀 먹으러 가야겠습니다.”

“예.”


다시 코트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은 쿠스카는 이 광경을 지켜보던 노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풍채가 좋은 노인은 쿠스카와 눈이 마주치자 히죽 웃었다.


“..쯧.”


쿠스카는 신경질적인 발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그제야 노인은 홀로 남은 오코넬을 향해 다가왔다.

노인의 곁에는 머리를 빡빡 민 남자가 함께였다. 오코넬은 그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남의 앞마당에서 잘들 노는구먼. 여기가 마피아들의 놀이터였나?”

“..쟈토 어르신.”


오코넬은 작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디까지나 윗사람을 향해 예를 갖춘 정도였지만, 처형인들의 대부라 불리는 그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쉽사리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를 마주 보며 끄덕인 쟈토는 어느새 오코넬의 옆에 섰다.


“예나 지금이나 윗사람한테 대드는 걸 보니 성깔 하난 여전하군. 오코넬.”

“필요한 말을 하는 것뿐입니다.”

“예전에도 그렇게 변명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나쁘진 않아.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않겠나.”

“예.”

“그보다 저것 좀 보게. 우습지 않나?”


쟈토가 물었다. 멍하니 있던 오코넬은 고개를 기울여 쟈토를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쟈토의 시선은 자기 호텔에 난 다섯 갈래의 흉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득바득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쓰던 인생이었네. 이제야 좀 자리를 잡는가 싶었더니, 눈앞에 저런 괴물들이 나타나 버렸어.”

“...”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시라비아에선 최고의 처형인으로 통하는 오코넬이라도 고작 저런 사이비 놈들의 괴물 앞에선 한낮 인간에 불과해. 부조리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렇게 생각 안 하나?”


오코넬은 담배를 까딱거리다 코웃음 쳤다.


“그래도 저런 괴물로 살아가는 것보단 사람으로 사는 게 낫습니다.”

“그거야 당연하지.”


탁. 쟈토의 지팡이가 가볍게 바닥을 두드리자 그의 곁에 있던 창이 고개를 숙였다. 그는 곧 쟈토를 두고 혼자서 호텔을 향해 걸어갔다.


“제 앞에서 경호원을 떼어놓다니, 너무 방심하시는 것 아닙니까?”

“경호원이 몇 명이든 자네가 상대면 무슨 소용이겠나.”

“저도 이젠 나이를 먹어서 말입니다. 예전 같지 않더군요.”

“그런 것 같더군. 쓸데없는 정이나 붙이고.”


오코넬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쟈토는 그런 오코넬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처형인들은 마피아의 도구일세. 자네가 길렀다고 해서 자네의 자식이 아니야.”

“...”

“쓰다 버리는 소모품. 사람 목이나 베는 조직의 단두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네. 사람 취급조차 받지 못해. 그건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


오코넬은 대답 대신 담뱃재를 털었다. 그의 그런 반응에 입맛을 다신 쟈토는 고개를 저었다.


“후.. 세상이 격변하고 있네. 곧 급류가 쏟아져 올 거야.”

“예상하고 계셨습니까?”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곤 생각했지. 힘 있는 미치광이들이 줄곧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까.”


오코넬은 그 미치광이들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았다. 어렵지 않게 몇몇 거대한 세력들이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짚은 오코넬은 쟈토를 향해 물었다.


“시라비아의 최고 간부였던 어르신께서 왜 이클립스를 도우시는 겁니까?”


쟈토의 눈에 아주 잠깐이지만 시퍼런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빠르게 평온을 되찾았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계집이 절망하는 얼굴을 보고 싶었네.”

“...어르신. 생각보다 질이 나쁘셨군요.”

“허허.”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쟈토는 천천히 호텔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그를 따라갈까 고민하던 오코넬은 그만두기로 했다.


시라비아 마피아의 옛 최고 간부였던 쟈토는 이젠 조직을 떠난 몸이다.

배신자를 결코 살려두지 않는다는 조직의 규율에서 산보다 먼저 ‘예외’ 를 만들어 낸 저 노인과 엮여서 좋을 건 없었다. 대신 오코넬은 쟈토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세계 연합이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이번 아시리아 사건을 트집 잡아 델라리온 머스칼을 어떻게든 하려고 들겠지.”

“영향이 있겠습니까?”

“없지는 않을 걸세. 게다가 하필이면 크루아틀에게 선전포고를 한 직후니까. 공업이 성급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높아.”


오코넬은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발로 밟아 껐다.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이유는?”

“시라비아도 안전하진 않을 테니까. 자네도 슬슬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올 거거든.”

“..결단?”

“노망난 노인네 헛소리일 수도 있지.”


그렇게 쟈토는 멀어졌다. 그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오코넬은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섰다.


이젠 완전히 떠오른 아침의 햇살이 카리카를 비추고 있었다. 어젯밤에 벌어진 온갖 재앙이 마치 한밤중의 꿈이었다는 듯, 이렇게 새로운 하루가 또다시 시작됐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줄지어 서 있는 소년, 소녀들이 있었다.

살기로 점칠 된 눈동자. 굳은 표정. 기계처럼 명령대로 움직이는 조직의 처형인들.


그들을 쭉 훑어보던 오코넬은 또다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물곤 불을 붙였다.


“결단이라..”


중얼거린 오코넬은 담배 연기를 흘리며 나아갔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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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7) - 그렘린 +1 22.08.04 490 14 17쪽
70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6) - 짐승들의 축제 +1 22.08.03 303 14 15쪽
69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5) - 은총(恩寵) +1 22.08.02 292 14 14쪽
68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4) - 밤의 거리 +1 22.08.01 294 11 16쪽
67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3) - 짐승 +1 22.07.29 303 15 16쪽
66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2) - 계획 +1 22.07.28 554 13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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