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Project.P

욕망 시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판타지

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264 회
조회수 :
83,168
추천수 :
3,417
글자수 :
1,991,941

작성
22.09.05 16:10
조회
265
추천
12
글자
19쪽

블러디드(8) - 짐승들의 대제(大帝)

DUMMY

#1


거대한 쇳덩어리와 지상의 충돌.

그 여파는 원래대로라면 상당히 파격적인 결과를 낳았을 테지만, 어째선지 무미건조한 기계음과 젖은 지면의 물이 살짝 튀는 정도로 그쳤다.


그림자는 거대한 한 쌍의 뿔을 접었다. 뿔이 구부러지는 걸 보고 나서야 산은 저것이 뿔이 아니라 날개라는 걸 깨달았다.


깃털이 수북한 날개는 곧 사라졌다. 마치 종이가 구겨지는 것처럼 쪼그라들어 등으로 들어갔고 날개보다 조금 늦게 바닥을 훑던 털이 수북한 꼬리도 빨려 들어갔다.


3m는 족히 되어 보이는 키와 떡 벌어진 어깨. 구부정하게 굽힌 허리와 축 늘어진 두 팔. 지면을 딛고 선 두 다리까지.

그 모든 것을 뒤덮은 강철의 슈트는 열선이나 공업용 파이프, 배터리로 추정되는 박스나 전지판 등 온갖 조잡한 장치가 달려있었다.


얼굴을 전부 가린 헬멧의 정면으로 검붉은 빛이 번쩍이며 들어오자 슈트 안쪽으로 기계가 움직이는 쇳소리가 났다.

마침내 구부정한 허리를 곧게 편 그것은 뒤늦게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를 낚아챘다. 새빨갛고 커다란 망토였다.


붉은 망토를 강철의 슈트 위로 둘러 조이고 나서야 헬멧은 이리저리 좌우를 훑었다.


“이건 또 뭐야?”


산의 첫 마디였다. 그러자 움직이던 헬멧이 산에게 시선을 고정하더니 살짝 기울어졌다.

검붉은 빛이 헬멧 정중앙으로 모이며 그 안쪽으로 여러 기계가 점등했다. 헬멧의 앞부분은 이제 보니 투명한 유리처럼 안쪽을 모두 비추고 있었다.

물론, 얼굴이라 불릴만한 건 보이지 않았다. 안쪽을 가득 메운 건 붉은 전자광을 흘리는 기계들뿐이었다.


‘레베스타 깡통인가?’


슈트의 생김새만 보면 레베스타에나 있는 고철 덩어리나, 특수 슈트를 입고 활동하는 레베스타 용병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확연하게 달랐다. 섬뜩하게 날 선 공기를 느낀 산은 나이프를 길게 늘렸다.


“흠. 칼잡이인가?”


마침내 헬멧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기계음이 섞인 남자의 것이었다. 산은 카르마 나이프를 비틀며 눈썹을 까딱였다.


“기사나 전사는 아니로군. 자객?”

“...”

“자객이라면 이름을 물을 필요도 없겠지. 내 목을 노리고 왔느냐?”

“..그쪽이 왔잖아.”


헬멧을 톡톡 두드리던 거대한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랬지. 하지만 내가 발을 디뎠으니 여긴 내 땅이다. 내 땅에 있던 자객이니 그 추잡한 칼날을 집어넣지 않는다면 큰 벌을 받게 될 거다.”

“그쪽이 누군지부터 말하지?”

“난 정복자다.”


산이 눈살을 찌푸리자 헬멧 안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어린 것부터 늙은 것까지. 태어나지 않은 것부터 죽은 것까지. 티끌부터 만물을 벗어난 것까지.”


끼릭. 끼릭.

마찰음. 마치 녹슨 톱니바퀴가 뻑뻑하게 돌아가는 듯한 그런 기분 나쁜 소음이 슈트 안쪽에서 점점 커졌다.


“이 몸은 그 전부를 정복하기 위해 붉은 망토를 두른 바르네오스의 성인(聖人)이되,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는 칠흑창의 순례자이며, 하늘의 뜻을 받고 내려온 달의 사도이니라.”

“뭐라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라. 이 몸은 대제(大帝) 크루아틀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산은 헤이카를 낚아채 호텔 쪽으로 훌쩍 거리를 벌렸다.

그 재빠른 판단은 정답이었다. 그의 슈트에서 뜨거운 열기가 한 번에 뿜어져 나오며 주변 공기를 바짝 달궜다.


나자빠져있던 이반을 짐짝처럼 들어 올려 뒤로 빠진 건 오코넬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포위하던 콥스 바탈리온조차 오코넬에게 신경 쓰기보단 거리를 벌리는 걸 우선시했다.


“전원 전투 준비.”


자리만의 신호에 흩어져 있던 콥스 바탈리온이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수십 개의 시커먼 총구가 크루아틀을 겨누었다. 일렁거리는 아지랑이 너머 헬멧이 자리만 콥스의 바이저 헬멧과 마주쳤다.


{ 총 내려. }


통신기 속 목소리는 헤이카였다. 다음 신호를 보내려던 자리만은 곤란한 신음을 흘리며 대원들의 총을 내리게 했다.


“산. 너도 칼 내리고.”


헤이카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녀의 바로 곁에 붙어 있던 산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못마땅한 얼굴로 카르마 나이프를 접었다.


‘크루아틀이면 사도잖아?’


월교와 정면으로 충돌하던 공업이다. 여기서 갑자기 난입한 또 다른 사도는 적의 증원이라고 밖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산이 기억하기로 사도 크루아틀은 지금 이곳이 아니라 훨씬 위쪽인 피스칼이란 나라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보에 저건 없었잖아요. 바렉인가 하는 놈만 있던 거 아닙니까?”

“아베스타의 관측 정보가 맞다면 조금 전에 아시리아 북쪽 국경을 넘어온 게 있었어. 5분쯤 전에.”

“국경을 넘어와요? 5분 전?”


침착해보이던 헤이카의 턱선을 타고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저 괴물이 뛰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뜻이야..”

“그게 말이 되는..”

“여기선 일단 교섭으로 가자.”


헤이카가 걸음을 내디뎠다. 기껏 거리를 벌렸건만, 되려 그 거리를 좁히기 시작한 헤이카의 행동에 산은 혀를 찼다.


하지만 헤이카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거리를 벌린다고 해도 크루아틀을 상대론 의미가 없는 셈이었다.

하는 수 없이 산은 언제든지 나이프를 펼칠 수 있도록 나이프 핸들을 쥔 채 헤이카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헬멧의 빛이 번쩍거리며 헤이카를 향했다. 헤이카는 적당히 목소리가 들릴만한 거리에서 멈췄다.


“만나서 반가워요. 사도 크루아틀. 내가 누군진 알죠?”


헤이카의 목소리에 슈트가 조악한 기계음을 내며 움직였다. 크루아틀이 헤이카와 산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리고 선 것이다.

정면에서 마주한 크루아틀의 위압감에 산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슈트 안쪽의 뻑뻑한 쇠의 마찰음은 이젠 귀에 거슬릴 정도로 심해져 있었다.


“헤이카 미켈런. 이클립스의 머리. 잘 알고 있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을까요? 전쟁 준비로 바쁘실 텐데.”

“마녀가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급히 왔지.”


헤이카의 눈가가 움찔했다. 크루아틀은 헬멧과 목의 접합부 틈새로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모타벨은 어디에 있지? 혹시 이미 사냥을 마쳤나?”

“..아니요. 아직.”

“그렇다면 사냥의 도중이로군. 늦지 않게 도착한 모양이야.”

“교섭을 원해요.”

“좋다. 말해봐라.”


크루아틀이 팔짱을 꼈다. 헤이카는 한 차례 심호흡한 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모타벨은 그냥 놓아줄 테니, 저희도 놓아줄래요? 아시리아에 퍼진 죄화에는 손대지 않..”

“마음에 안 든다.”


크루아틀이 주먹을 쥐어 올렸다. 재빠르게 산이 헤이카의 앞을 가로막고 나이프를 펼쳤다. 그런 산을 빤히 내려다보던 크루아틀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자객이 나서는 거지?”

“자객이 아니라 경호원이거든.”

“경호원으로 자객을 쓰나? 별난 취향이야.”


크루아틀의 헬멧의 불빛이 점멸했다.


“그런데 내 말이 우습게 들린 모양이군.”

“...?”

“그 추잡한 칼날을 집어넣지 않는다면 큰 벌을 받게 될 거라고 했을 텐데.”


크루아틀이 주먹을 펼치자 끝에서 검붉은빛이 모여들었다.


빛은 모여 형태를 이루었고, 그것은 다섯 자루의 검이 되어 크루아틀의 손가락 끝에 고정되었다.

그렇게 손톱이라 부를만한 형태를 갖춘 칼날이 섬광을 뿜으며 움직였다.


빛의 칼날은 길게 뻗어 나갔다. 빛이 만들어낸 궤적이 형태를 갖추고 전진하며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날아간 빛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갈랐다.


예리한 칼날로 베어 잘라내는 것이 아닌 응축된 빛의 초고열로 태워 끊어버리는 방식.

날붙이엔 날붙이로 부딪친다는 상식적인 개념이 통하지 않는 빛의 칼날은 지나간 자리에 새까맣게 그을려 타들어 가는 흉터를 남겼다.


심지어 그 모든 과정은 크루아틀의 헬멧에 점멸하는 불빛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것보다 빨랐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크루아틀이 무엇을 했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피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빛의 칼날이 훑고 지나간 곳에 산은 없었다.


“...”


크루아틀의 헬멧이 비스듬히 움직였다. 또다시 멀찌감치 거리를 벌린 산과 헤이카가 호텔의 불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2


‘돌겠네.’


등 뒤를 확인한 난 아연실색했다. 높은 호텔 건물에 다섯 갈래의 커다란 상흔이 남아있었다.

마치 짐승의 발톱으로 할퀸 것만 같은 흔적이지만 지글지글 타들어가는 호텔의 상처는 단순한 발톱이라 부를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섯 자루의 빛의 칼날은 여전히 발톱처럼 크루아틀의 손가락 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걸 노려보던 난 슬쩍 왼손에 쥐고 있던 카르마 나이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망할..”


길게 늘렸던 카르마 나이프의 칼날이 깔끔하게 절단되어있었다.

트럭이 밟고 지나가도 부러지지 않는다는 특수 소재. 단단한 강철 벽도 종잇장처럼 찢는 초진동 칼날의 카르마 나이프가 부러졌다.


정확히는 끊어졌다는 표현에 가까웠다. 지면이랑 호텔 벽이 그랬던 것처럼, 카르마 나이프의 절단면이 새까맣게 그을려 지글거리고 있었다.


‘위험한데.’


빛으로 된 칼날을 막아보려던 게 실수였다. 설마 믿고 있던 무기가 그렇게 썩둑 썰려버릴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다행히 나이프가 잘리는 걸 인지한 순간, 곧바로 대표님을 낚아채 멀리 뛴 게 옳은 판단이었다. 조금만 늦게 반응했어도 나이프가 아니라 팔 하나는 날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표님. 어떡하죠? 이거 잘렸는데.”

“헤헤..”


대표님은 잘려나간 카르마 나이프를 보더니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난 어이가 없다는 시선으로 대표님을 마주 보았다.


“혹시 정신 놓은 건 아니죠?”

“아니야. 신기해서. 카르마 나이프까지 잘라버리다니. 설마 영화에서나 나오던 라이트세이버를 월교가 드디어 만들어낸 건가?”

“뭔지 모르겠고 감탄할 여유가 있으면 생각 좀 해봐요. 저놈 어떡합니까?”


크루아틀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거구에다가 쇳덩어리 슈트. 당연히 느리겠지 싶던 내 생각은 방금의 일격으로 모두 집어치웠다.

저놈은 빠르다. 어쩌면 나조차도 반응하는 게 어려울 정도로 빠를지도 모른다. 마음만 먹었다면 내빼는 날 쫓아와 저 살벌한 손톱을 몇 번 더 휘둘렀을 수도 있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전혀요. 사람을 상대하는 거면 몰라도 저런 괴물은 안 됩니다.”


난 멍청하게 실력만 믿고 나대는 놈들이랑 다르다. 시라비아에서 그렇게 나대던 놈들 대가리가 뎅겅 썰려나가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던 탓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난 세상에서 내 목숨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느낌이 쌔할 땐 안 싸우는 게 정답이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도 그런 직감대로 판단한 덕분이다. 그리고 저 크루아틀이란 놈이 딱 그렇다. 어떻게 비벼볼까 하는 생각조차 안 든다.


“음..”

“애매하면 역시 머스칼이나 부르죠?”

“머스칼은 안 돼. 저건 머스칼의 천적이거든.”

“천적도 있었나..”

“저 사도한테는 머스칼이 힘을 못 써. 역시 교섭뿐이야.”


그렇게 말한 대표님은 또다시 당당하게 나아갔다. 조금 전에 그 망할 교섭을 하려다 동강 날 뻔했는데?


“뭐, 뭘 내려고요? 또 마음에 안 든다고 칼질하면 어쩌려고..”

“크루아틀은 짐승들의 왕이야. 정복 외엔 어떤 관심도 없는 전쟁광이고, 저 깡통 안에 있는 건 사람 말을 배운 털북숭이 짐승이지.”

“그래서요..?”

“마음에 드는 걸 주면 돼. 짐승은 단순하니까.”


마침내 우린 다시 크루아틀의 앞에 섰다. 크루아틀의 헬멧이 삐걱거리며 붉은 빛이 들어왔다.


“또 내 앞에 서는가.”

“다시 교섭하죠.”

“용기가 가상하군. 좋다. 하지만 세 번은 없다.”


크루아틀은 붉은 망토를 거추장스럽게 쳐내며 말했다. 펄럭거리는 망토 탓에 뜨거운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여전히 손가락 끝에 달린 빛나는 손톱이 ‘웅웅’ 거리는 소리를 냈다. 만약 이번 교섭의 내용이 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 칼날은 이번에야말로 우릴 갈라버릴 것이다.


대표님은 숨을 크게 들이켰다.


“정복이랍시고 약해빠진 놈들이나 짓밟는 겁쟁이!”


그리고 소리쳤다.


“블라다카의 가축 같은 놈! 멍청하고 무식한 짐승!”


아주 적나라한 비판을 쏘아붙였다.


잠깐이나마 대표님의 외침에 뭔가 숨겨진 암호라도 있는 건가 고민했지만, 애초에 암호를 저딴 식으로 전달할 리가 없다는 걸 인정했다.

대표님은 정면으로 크루아틀을 도발한 것이다.


크루아틀이 손톱을 휘두르기 전에 선수를 쳐야겠다고 생각한 난 부러진 카르마 나이프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빛의 칼날은 불이 꺼지듯 갑자기 사라졌다.


뒤이어 뭔지 모를 기계음과 함께 크루아틀의 몸을 뒤덮은 쇳덩어리가 조금씩 벌어졌다.

헬멧 안면부의 하관 이음새가 벌어지며 뿌연 입김과 함께 짐승의 이빨이 드러났고, 등에선 날개가 솟았으며 그 아래론 아까 보았던 털이 수북한 꼬리가 삐져나왔다.


강철의 슈트 안에 있는 건 대표님의 말대로 진짜 짐승이었다. 사람의 말을 배우고, 사람처럼 선 짐승.

숨 막히는 짐승 특유의 구린 냄새와 피비린내, 그리고 생선 비린내 같은 것이 뒤섞여 흘러나왔다.

구역질을 겨우 참으며 대표님의 어깨를 붙잡았다.


“괜찮아. 아마도.”


여차하면 뒤로 뛸 생각이었는데, 대표님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게 괜찮은 상황인가? 아무리 봐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 같은데?


“내가 겁쟁이라고?”


짐승의 목구멍에서 조악하게 흉내 내는 사람의 언어는 기계음이 아닌 생생한 육성이었다.

하관의 틈새로 빠져나온 짐승의 툭 튀어나온 주둥이엔 하얀 털이 덮여있었다.


“그래. 겁쟁이. 사자가 개미집을 짓밟으면서 그걸 정복이라고 떠벌리고 있잖아? 강자 앞에선 꼬리를 말고. 이걸 겁쟁이가 아니면 뭐라고 해?”

“...”

“정복자가 되고 싶으면 보다 거대하고 강한 걸 굴복시켜.”


대표님은 하늘을 가리켰다.


“사람은 하늘을 빼앗겼어. 말도 못하는 추잡한 괴물들한테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잘난 정복자께선 하늘이 아니라 지상을 정복하려는 거지?”

“...”

“심지어 마녀의 도움 없이는 지상을 정복하는 것도 못 하는 거야? 그게 정복자라고? 크루아틀이 그것밖에 안 되는 짐승이었어?”


크루아틀이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벌어진 헬멧 아래로 번들거리는 짐승의 눈동자가 엿보였다.


“하늘이 두려워? 그놈의 위대하신 교주께서 하늘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겠지? 그래서 못 건드리는 거야?”

“...”

“크루아틀! 네 지배욕을 충족시키려면 그런 속박에서 먼저 벗어나! 그럼 자연스럽게 세상은 널 우러러볼 테고, 정복자 크루아틀의 이름은 하늘 아래 모르는 사람이 없어지겠지. 안 그래?!”


고개를 내린 크루아틀의 주둥이에서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질질 흐르는 침이 지면에 뚝뚝 떨어졌다. 몸 이곳저곳에서 벌어진 슈트의 이음매로 수북한 털과 짐승의 육체가 점점 더 드러났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젠 정말 한계였다.


‘위험해.’


대표님이 뭐라고 하든, 데리고 튀어야 한다.

이 포악한 짐승이 눈에 뵈는 게 없어지기 전에.. 마지막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기 전에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게 발을 떼려는 순간, 크루아틀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 ― !!!! ”



일그러진 짐승의 노호(怒號).


공기가 찢어지고 지면이 으스러지며 도시가 진동한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 포효에 숨이 턱 막히고 몸이 굳어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것은 비로소 이 짐승이 누구인가를 단번에 깨닫게 만들었다.


짐승들의 대제(大帝). 정복자 크루아틀.


마하카리타에서 봤던 살벌한 짐승들의 고삐를 쥐고 휘두르며 그 정상에 선 황성 최강의 생물체.

내 전의는 완전히 꺾였고 백지처럼 하얘진 머리에 이곳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포효는 어느 순간 뚝 끊겼다.


거칠고 과격한 잡음을 내며 벌어졌던 크루아틀의 슈트가 다시 이음매를 메꿨다.

구석구석 드러났던 짐승의 몸은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망토 아래로 튀어나왔던 날개와 꼬리도 어느새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하관의 이음새가 닫히며 소름 끼치던 짐승의 주둥이도 보이지 않게 되자 크루아틀의 헬멧이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마음에 들었다.”


헬멧 안쪽에서 기계음으로 뒤덮인 크루아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줄곧 채워지지 않던 내 공허함의 정체를 단번에 짚어내다니.”


쿵!

몸을 숙여 네 발로 딛은 크루아틀은 헬멧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이클립스의 머리. 너는 이제부터 뭘 할 셈이지?”

“우선 하늘을 되찾을 거예요.”

“날 이용할 셈인가?”

“지상이 그렇듯, 하늘도 지배자는 둘이나 필요 없죠. 중요한 건 이거예요. 누가 먼저 하늘을 정복하느냐.”


크루아틀의 헬멧 중앙의 불빛이 빠르게 점멸했다. 또다시 빛의 칼날이 튀어나오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며 난 손안에서 부러진 카르마 나이프를 만지작거렸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크루아틀은 헬멧 너머로 걸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조건이라면 여기서 승부를 내도 될 텐데?”

“물론 여기서 절 토막 내면 그쪽이 이기겠죠. 경쟁도 없이 손쉽게 정복할 테니까. 하지만 알죠? 그렇게 하는 건..”

“겁쟁이의 방식이지.”


크루아틀은 다시 두 발로 섰다. 그는 붉은 망토를 크게 쳐내며 펄럭였다.


“좋다. 어디 한번 해봐라. 하지만 만약 내가 먼저 하늘을 정복한다면..”


크루아틀의 헬멧 불빛이 점멸을 멈추고 짙게 빛났다. 검붉은 빛이 대표님의 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비췄다.


“이클립스는 내게 무릎 꿇어야 할 것이다.”


대표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크루아틀은 망토를 벗어 하늘 높이 집어던졌다.


순식간에 던진 망토를 거대한 새가 낚아채 어디론가 날아갔다. 지난번에 케르베로스 열차포를 마하카리타에서 낚아채 날아갔던 그 새였다.


조악한 기계음과 함께 크루아틀의 등이 벌어지며 날개가 튀어나왔다. 날개를 한 번 털자 몸이 뒤로 밀려날 정도로 큰바람이 일었다.


곧, 크루아틀은 날아올랐다.

저 거구와 묵직한 쇳덩어리 슈트를 온몸에 두르고도 가볍게 날아오르는 광경에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욕망 시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5 잿빛의 고향(5) - 플뤼테 +1 22.10.05 224 11 13쪽
114 잿빛의 고향(4) - 거지 노인 +1 22.10.04 233 9 14쪽
113 잿빛의 고향(3) - 은밀한 제안 +1 22.10.03 236 11 16쪽
112 잿빛의 고향(2) - 시라비아 +1 22.09.30 260 10 17쪽
111 잿빛의 고향(1) - 장례식 +1 22.09.29 254 10 15쪽
110 첫 비행 +1 22.09.28 246 12 13쪽
109 채린 +1 22.09.27 240 11 19쪽
108 난입 +2 22.09.26 249 9 21쪽
107 학살자 +1 22.09.23 245 13 19쪽
106 선제 타격 +1 22.09.22 263 11 21쪽
105 지옥을 향해 +1 22.09.21 242 13 17쪽
104 도망자 +1 22.09.20 254 13 23쪽
103 이변(異變) +1 22.09.19 255 12 25쪽
102 이중 계약 +2 22.09.16 249 12 17쪽
101 스칼라 헤이즈 +1 22.09.15 249 9 14쪽
100 명검파 +1 22.09.14 264 12 21쪽
99 미나 +1 22.09.13 273 13 20쪽
98 숙취 +2 22.09.12 240 11 13쪽
97 죽은 도시 +2 22.09.09 272 10 21쪽
96 욕망의 씨앗 +2 22.09.08 290 13 18쪽
95 세계 연합 니로퍼 +1 22.09.07 284 13 17쪽
94 새로운 태양은 뜨고 +1 22.09.06 275 13 17쪽
» 블러디드(8) - 짐승들의 대제(大帝) +1 22.09.05 266 12 19쪽
92 블러디드(7) - 고욕(苦辱) 키아룬 모타벨 +1 22.09.02 291 9 18쪽
91 블러디드(6) - 격차 +1 22.09.01 291 13 17쪽
90 블러디드(5) - 학살의 대가 +1 22.08.31 249 13 11쪽
89 블러디드(4) - 괴물 +1 22.08.30 264 12 17쪽
88 블러디드(3) - 길을 벗어난 자들 +1 22.08.29 281 13 18쪽
87 블러디드(2) - 충돌 +1 22.08.26 301 12 19쪽
86 블러디드(1) - 세상에 미움받는 것 +1 22.08.25 278 13 18쪽
85 문제 +1 22.08.24 290 13 13쪽
84 대균열(大龜裂) +2 22.08.23 293 11 16쪽
83 축복의 아이 +1 22.08.22 260 12 20쪽
82 심장을 먹는 마법사 +1 22.08.19 260 13 14쪽
81 연회 +1 22.08.18 278 12 19쪽
80 아시리아(7) - 충고 +1 22.08.17 257 12 15쪽
79 아시리아(6) - 레니드 금융가 +1 22.08.16 269 13 16쪽
78 아시리아(5) - 쿠스카 +1 22.08.15 269 12 19쪽
77 아시리아(4) - 뜻밖의 원군 +2 22.08.12 310 10 19쪽
76 아시리아(3) - 초대 +1 22.08.11 290 12 18쪽
75 아시리아(2) - 바닷물 +1 22.08.10 280 10 22쪽
74 아시리아(1) - 급습 +1 22.08.09 331 12 16쪽
73 첫 번째 계획 +1 22.08.08 298 14 18쪽
72 무대를 옮기며 +1 22.08.05 299 13 13쪽
71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7) - 그렘린 +1 22.08.04 490 14 17쪽
70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6) - 짐승들의 축제 +1 22.08.03 303 14 15쪽
69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5) - 은총(恩寵) +1 22.08.02 292 14 14쪽
68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4) - 밤의 거리 +1 22.08.01 294 11 16쪽
67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3) - 짐승 +1 22.07.29 303 15 16쪽
66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2) - 계획 +1 22.07.28 554 13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