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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P

욕망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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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굴P
작품등록일 :
2022.05.11 10:32
최근연재일 :
2023.05.08 18:0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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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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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5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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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아시리아(5) - 쿠스카

DUMMY

#1


시라비아의 땅덩어리는 넓다.

그렇다고 연방이나 레베스타 수준은 아니지만 황성 이전, 유럽이라 불리던 지역의 반 이상이 현재 '시라비아' 라는 이름 아래 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나라. 다양한 것들이 흘러들어 모인 땅.

그런 넓은 땅덩어리를 집어삼킨 시라비아 마피아들은 그곳을 관리하기 위해 마치 국가 정부와도 같이 체계적이고 세밀한 수직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 수직 구조 안에서 사실상 시라비아의 실권을 쥐고 흔드는 건 최고 간부들이다.


“움.. 음...”


지금 내 앞에서 다람쥐처럼 볼이 불룩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무언가를 쑤셔 넣고 우물거리는 남자도 그 중 하나다.


테이블 위에 있는 음식만 해도 어찌나 많은지, 테이블 다리가 걱정될 정도인데 이 많은 걸 혼자 다 쓸어 먹고도 모자라 주문한 음식이 또 나오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이쪽 테이블로 향했다.

이렇게 많이 먹는 게 신기하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피투성이 여자를 옆에 앉혀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계속하는 상황 자체를 이상하게 보기 때문일 것이다.


“안 먹어요?”

“...”

“아시리아 음식 먹어봤어요?”

“...”

“꽤 맛있어요. 솔직히 지금까진 편견을 좀 갖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그 편견이 완전히 깨졌지 뭐예요. 아시리아는 맛있는 음식이 많은 나라였어요. 맞죠? 오코넬?”


남자의 시선은 이젠 내가 아니라 내 옆에 앉은, 무시무시한 양반에게 향했다.


“그렇군요.”


오코넬이 대답했다. 물론, 대답과는 달리 오코넬은 아까부터 음식엔 입도 대지 않았다.

바로 옆에 날 앉혀두고 옆구리에 칼을 대고 있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도련님을 만나게 될 줄은 진짜 몰랐어요. 우연도 참 별난 우연이 다 있네. 안 그래요?”


도련님이라니.

참 오랜만에 듣는다. 하지만 저렇게 불려서 기분이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쿠스카.’


미다스, 콜레타, 베르몬드, 라가토니아.

마피아 놈들이 지배하는 시라비아의 땅은 이렇게 네 곳으로 나뉘어있다.


그 중에서도 콜레타를 주무르는 시라비아 마피아의 최고 간부 중 하나. 그게 바로 이 쿠스카라는 남자다.


동그란 안경에 헤실헤실 웃는 얼굴은 이리 봐도 저리 봐도 멍청해 보이고, 좋게 말하면 착하게 생겼다.

하지만 이 남자가 저렇게 얼빠진 얼굴과 헤실 거리는 표정으로 해온 일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필 쿠스카라니.’


시라비아에 있을 때도 쿠스카는 꽤 껄끄러운 상대였다.


유별나게 내게 친근하게 굴기도 했지만, 그 친근함 뒤에 숨은 소름 끼치는 속내는 가히 광기라고 생각한다.

제정신이 아닌 걸로 따지면 조직 내에서도 항상 으뜸인 놈이다.


그래서 시라비아에 있을 땐 쿠스카를 마주칠 때마다 말도 섞지 않고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처럼 자리를 피할 수도 없었다.

그 여자.. 에콰를 마주친 게 아니라는 건 그나마 다행이지만, 상대가 쿠스카라면 애당초 누가 더 나은가를 따지는 건 의미도 없었다.


“도련님이라 부르는 건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왜요?”

“전 이제..”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서?”


입을 다물고 잠시 망설였다.


쿠스카는 예측 불허다. 여기서 내 대답에 따라 당장 저놈이 쥐고 있던 포크가 날아와 내 눈을 찌를지도 모르고, 어쩌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지도 모른다.


“예. 이제 전 시라비아 마피아가 아니니까요.”


고민 끝에 난 직구로 대답했다.

포크든, 나이프든, 뭐가 날아들어도 담담하게 받아치겠노라 생각하면서.


“흠..”


다행히 쿠스카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식사를 이어갔다.

대체 뭔지도 모를 음식을 푹 찍어 입안에 쑤셔 넣고 우물거리는 모습은 조직의 최고 간부 중 하나라기엔 경박한 모습이다.


“우음.. 쩝.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에콰의 아드님을 이름으로 부르기엔 좀.. 허물없는 사이로 지내고 싶은 건 맞아요. 하지만 이름으로 불렀다가 에콰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고. 역시 도련님이 편하네요.”


그와중에도 새로 나온 음식에 쿠스카는 음식을 쉴 새 없이 흡입했다.

저 호리호리한 체형에 어떻게 저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지.. 대식가로 알려진 쿠스카였지만 오랜만에 봐도 여전했다.


“왜 날 안 죽이죠?”


사실 호칭에 대한 건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난 이 상황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묻기로 했다.


시라비아 마피아는 배신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코넬이 그 골목에서 날 마주친 순간, 참수도는 내 목을 떨궜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나와 시카는 붙잡혀 있을 뿐, 멀쩡하게 머리가 붙어있다.

비록 내 옆엔 오코넬이 앉아 살벌한 나이프를 옆구리에 들이대고 있었고 쿠스카는 옆에 시카를 앉혀놔 완전히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지만.


‘시카의 폭탄은 쓸 수 없어.’


폭탄은 날 포함해 주변에 잔뜩 몰린 사람들을 전부 휩쓸 것이다.

시카가 아직 쥐잡이 시절이라면 모를까, 공업 직원의 신분인 이상 거리낌 없이 폭탄을 터뜨릴 수 있는 건 내 지시가 있을 때뿐이다.


‘그리고 나도 아무것도 못 하지.’


바로 옆에 오코넬을 앉혀놓고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이미 수십 가지 시뮬레이션을 머릿속으로 돌려봤다. 물론, 전부 내 목이 날아가는 엔딩이었다.


정면으로 각 잡고 싸워도 모자랄 판에 이런 구도로 싸우면 순식간에 끝난다. 개죽음은 피하고 싶다.


“아깝잖아요.”

“뭐가요?”

“시라비아 역사상 최연소로 처형인이 된 소년. 올드 아일랜드와의 전쟁에서도 수많은 기사의 목을 자르고 살아 돌아왔고, 처형인으로 일하며 가져온 머리만 해도 우리 조직에선 오코넬 다음으로 많았죠.”

“...다 옛날 얘깁니다. 이제 전 처형인이 아니거든요.”

“처형인이 아니라고요? 이상하네. 내가 보기에 도련님은 여전히 시라비아의 처형인인데요.”


쿠스카는 미소 지으며 접시 위에 있던 구워진 오리인지 닭인지 모를 음식의 모가지를 포크로 내리찍었다.


“처형인이 아니라면 아직도 목을 자르고 다닐 리가 없잖아요.”

“전 이클립스 공업의 신입 팀장입니다.”

“그래서요? 처형인의 신분으로 칼을 쓰는 게 아니니 괜찮다? 농담도 참.”


쿠스카는 자른 모가지를 통째로 입 안에 넣더니 우적우적 뼈까지 씹어댔다. 어금니가 뼈를 으스러뜨리는 소리가 맛있다기보단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쿠스카는 그것들을 꿀꺽 넘긴 뒤에야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아깝다고 말한 것도 있지만, 지금 도련님 머리를 자르지 않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에콰가 ‘대가’ 를 지불했기 때문이죠.”

“대가?”

“뭐야? 대가가 뭔지 몰라요? 대신 내는 거 있잖아요.”

“뭐를..?”

“도련님 목숨 값을 에콰가 대신 냈다고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면서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 여자가 내 목숨 값을 대신 냈다고? 뭐로? 왜? 보스는 그걸 받아들였다? 어째서?


시라비아 마피아는 배신자를 절대 살려두지 않는다.

그건 내가 처형인으로 일하며 깨달은 절대적인 한 가지였다. 그런데 저 말이 사실이라면 처음으로 그 룰이 깨져버린 것이다.


“에콰가 자기 목을 내놨나요?”


난 물었다. 그러자 쿠스카는 한쪽 눈썹을 꼬아대며 나를 향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바본가?”

“뭐, 뭐라고요..?”

“에콰가 자기 목을 내놨을 리 없잖아요. 그걸 보스가 받아들일 리도 없고. 에콰가 없어지면 그 성가신 미다스를 누가 맡아요?”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네 쪽으로 갈라진 시라비아. 그중에서도 가장 거대하고 가장 위험하며, 가장 썩어빠진 ‘미다스’ 지역을 관리하며 문제 한 번 일으키지 않던 여자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건 마피아 놈들도 바라지 않을 거다.


“보스에게 뭘 대가로 냈을지 궁금하면 본인이 가서 물어봐요. 자기 어머니 일이니까 걱정되긴 하나 보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뭘.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 뭘 대가로 냈을까요? 눈? 팔? 손? 다리? 아니면 장기를 끄집어냈나?”

“...”

“그 표정! 역시 도련님이야. 시라비아 때도 그런 얼굴이었잖아요. 그게 어울려요. 조금 전처럼 얼빠진 얼굴은 도련님답지 않아요. ‘모르스 웅골라’ 는 항상 독기를 품어야죠.”


신경질이 났지만, 꼼짝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에 더 화가 났다. 그럴수록 쿠스카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어댔다.


“..그러니까 에콰가 목숨 값의 대가를 지불했으니 이제 이 모가지는 필요 없다 이거죠?”

“그런 셈이죠.”

“그럼 왜 잡아놓는 겁니까? 전 지금 공업 신분인데요.”

“헤이카 미켈런의 그림자에 숨으면 우리가 못 건드릴 것 같았어요? 물론, 델라리온 머스칼이 무섭긴 하죠. 하지만 그 괴물도 시라비아에선 힘을 못 쓰거든요. 델라리온 머스칼이 없는 헤이카 박사는.. 흐흐.”

“...”


머스칼이 시라비아에서 힘을 못 쓴다고? 그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영역을 벗어났다.’


마하카리타에서 머스칼은 분명 그런 얘길 하며 열차포를 끝내 놓쳤다. 설마 머스칼의 능력엔 어떤 제한이 있는 건가?


‘시라비아에선 머스칼이 힘을 쓸 수 없다..’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라면?

공업과 헤이카 미켈런을 세상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만든 델라리온 머스칼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면?


“참고로 이 아시리아에서도 머스칼은 제대로 힘을 못 써요. 혹시 몰랐어요? 도련님. 공업의 신입 팀장이라면서 정작 자기 팀원한테 너무 관심이 없는 거 아닌가?”

“...”

“이야, 표정 보니 진짜 몰랐나 보네? 그 괴물이 힘을 쓸 수 있었다면 도련님이 우리한테 잡힌 시점에서 구하러 왔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 머스칼은 대표님 곁을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이쪽 상황을 알지 못한다. 단지 그것뿐이다.


“일부러 오지 말라 했거든요.”

“흐음. 역시 헤이카 미켈런은 지금 다른 곳에 있죠? 왜 도련님이랑 이 어여쁜 아가씨만 둘이서 카리카의 밤거리를 어슬렁거렸을까?”


쿠스카는 옆에 앉아 있던 시카를 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시카는 무표정하게 쿠스카에겐 시선도 주지 않았다.


“...사정이 있었거든요.”

“혹시 둘이 뭐 있는 사이예요? 축제의 밤. 단둘이 남녀가 밤거리로 나오다니.. 궁금해지는데.”

“그런 거 아닙니다.”

“음. 하긴. 그랬다면 쥐잡이나 잡고 있었을 리가 없죠. 역시 모타벨한테 끌려왔나?”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 게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쿠스카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댔다.


“키아룬 모타벨. 월교 내에서는 ‘고욕(苦辱)의 사도’ 로 알려져 있죠. 그 여자한테 찍히면 골치 아파요. 도련님. 죽을 때까지 쫓아다닐 걸요?”

“그쪽이 신경 쓸 일도 아닌 것 같은데요.”

“신경을 어떻게 안 쓰겠어요. 만약 내가 여기서 도련님을 만나고, 도련님이 모타벨에게 망가져 죽은 걸 에콰가 알게 되면 그 여자는 날 잘근잘근 씹어먹을 거예요.”


접시 위 마지막 고기 조각을 먹어치우며 말한 쿠스카의 포크가 날 겨눴다. 안경 너머 지저분한 오물을 머금은 듯한 쿠스카의 눈동자가 반짝거렸고 입가엔 위험한 미소가 떠올랐다.


“도련님. 시라비아로 돌아오지 않을래요? 내 자리 줄게요. 아니면..”

“싫습니다.”

“에이. 그럼 어쩔 수 없고.”


쿠스카는 가볍게 웃었다. 마치 비웃음처럼 들려 노려보자 쿠스카의 미소는 더 크게 번졌다.

이 빌어먹을 놈은 예전부터 이랬다. 행동 하나하나가 짜증이 나는 놈이다. 오코넬만 아니었다면 벌써 저 거지 같은 주둥이부터 찢어버렸을 텐데.


“말은 그렇게 해도 결국 돌아오게 될 거예요. 아무리 방황해도 사람은 결국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법이니까.”

“실컷 떠들어 보시죠. 누가 돌아가나.”


쿠스카는 또 한 번 오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마치 날 바보 취급하는 시선이 영 꺼림칙하면서도, 왜 여기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이내 쿠스카는 의자를 드르륵 밀며 일어났다.


“아~ 좋네요. 배도 부르고. 날씨도 좋고. 밤도 깊어지고. 아시리아에서 맞이하는 첫날밤이니 뭔가 재밌는 게 있으면 좋겠다 했는데.. 도련님이 떡하니 나타났으니. 하하.”

“...”


내 목숨 값은 그 여자가 지불했다.

그렇다면 시라비아 놈들이 당장 날 해코지 할 이유는 없다.


‘확 질러버려?’


내 목이 날아갈 걸 고민하던 건 내가 조직의 배신자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가는 늘 목숨이었고 그건 한 번도 깨진 적 없는 룰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룰이 깨졌고 지금 난 살아있다.

심지어 공업의 신분으로 이곳에 와 있는 이상 쿠스카가 내게 손을 대면 공업과의 전면전으로 번질 게 뻔하다.


시라비아에서 머스칼이 힘을 못 쓴다는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머스칼이 아니더라도 이클립스엔 어마어마한 전력이 있다.


“음? 설마 에콰가 목숨 값을 지불했다고 우리가 못 죽일 거라 생각하는 거 아니죠? 우리 조직이 그렇게 물렁물렁하지 않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

“걱정 마세요. 놓아 드리죠. 대신 조건이 있어요.”


드르륵.

다른 곳에서도 의자를 밀며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도 동시에.. 주변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일어선 남자들은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이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역시 깔아놨구만.’


이미 인파에 섞여 주변에 시라비아 놈들이 쫙 깔렸던 것이다.

어째서 그 많던 모타벨의 쥐잡이들이 우릴 노리러 달려들지 않나 했는데, 아무래도 이놈들 때문인 모양이다.

적에게 역으로 보호 받다니. 참 우스운 꼴이다.


“너랑 너. 그리고 너.”


쿠스카는 일어선 녀석 중 세 명을 지목했다. 다들 아직 앳돼 보이는 놈들이었다.


“이 친구들은 이번에 새로 처형인이 된 친구들이에요. 어.. 그러니까 도련님의 먼 후임? 후배? 그런 게 되겠네요. 자, 다들 인사해야지. 대선배님이 계시는데.”


내 앞에 선 세 녀석이 일제히 나이프를 꺼내 쥐었다.


인사. 그래, 저게 시라비아에선 인사법이지.

아주 잘 배운 녀석들이다.


“뭐 어쩌자고요?”

“도련님 놓아 드릴 테니, 대신 얘네 한 번 봐줘요. 써먹을 수 있는 놈들인지. 아닌지.”

“...”

“도련님은 이기면 해방. 이 친구들은 지더라도 도련님 솜씨를 눈앞에서 보고 배울 기회니 서로서로 좋죠. 안 그래요?”


이미 주변의 시선은 모두 이쪽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한복판에서 칼질을 하라고?


“하아..”


하지만 지금은 저 어이없는 요구를 들어주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조건 두 가지만 더 걸죠.”

“오? 좋아요. 재밌네.”

“일단 거기 있는 제 팀원 돌려주시고.”


쿠스카는 시카를 슬쩍 보더니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까먹을 뻔했네. 네. 그럼요. 다음은?”

“이 근방에 우리 잡으려고 깔린 쥐잡이 새끼들 다 치워버려요.”

“그 쥐잡이들이 누가 고용한 건진 알고 있죠?”

“설마 월교가 무서워서 최고 간부인 쿠스카가 꼬리를 내리는 겁니까?”


쿠스카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흐. 그렇게 나오실 줄이야. 좋습니다. 그것도 해드리죠. 거슬리긴 했으니까.”

“예. 그럼 그걸로.”

“좋습니다. 그럼..”


조직에 들어오고 혹독한 훈련을 받아 이제 갓 처형인이 된 녀석들.


이 녀석들은 원해서 사람 목이나 썰어대는 처형인이 된 게 아니다.

시라비아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죽기 직전까지 굶주리다 결국 마피아 놈들의 도구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운명이다.


난 카르마가 아닌 폴딩 나이프를 꺼내 펼쳤다.


“시작!”


쿠스카의 신호에 맞춰 세 놈이 동시에 움직였다.


오코넬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몸을 혹사하며 때려 박은 움직임이 눈에 보인다.

칼을 쥐는 법. 휘두르는 법. 상대의 움직임을 읽고 어떻게 반응하고 어디를 노려야 하는지.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할 정도로 눌러담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처형인의 움직임은 이제 갓 처형인이 된 햇병아리들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불쌍한 녀석들이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처형인으로 살아가야 할 녀석들.

죽는 날까지 자신을 꽃피우지 못하고 자유롭지도 못할 녀석들을 난 진심으로 동정한다.


구해주고 싶을 정도로.



#2


“어?”


덜덜 떨다 나무토막처럼 굳은 채 바닥에 나자빠지는 세 명의 처형인을 보며 쿠스카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산의 칼놀림은 눈을 깜빡이는 것보다 빨랐다.

세 번의 날카로운 바람 소리. 뒤늦게 목에서 피를 쏟아내는 처형인들이 쓰러지기도 전에 산은 이미 나이프의 피를 털어내고 있었다.


“으아악!”

“꺄악!!”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비명에도 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저 평소처럼, 지독한 독기를 머금은 눈으로 뚜벅뚜벅 걸어가 시카의 손목을 잡아 끌어낼 뿐이었다.


“갑니다. 쿠스카. 약속 지켜요.”

“..도련님? 전부 죽이라곤..”


쿠스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은 인파 속으로 섞여 없어진 뒤였다.

그는 흥건하게 고이는 피 웅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저 정도로 빨랐나?’


쿠스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배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배우고 따라 할 것조차 아니었다.


어떻게 나이프를 휘둘렀고, 어떻게 찔렀는지.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코넬. 보였어요?”

“...”

“오코넬?”


오코넬을 돌아본 쿠스카는 얼굴을 굳혔다.

그는 하나 남은 눈을 부릅뜬 채, 바닥에서 식어가는 어린 처형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코넬??”

“..아니요. 안 보였습니다. 산의 속도는 저도 못 따라가니까요.”


한 박자 늦게, 오코넬은 표정을 풀고 쿠스카를 향해 대답했다. 쿠스카는 입맛을 다시며 끄덕였다.


“흠. 좋습니다. 전 먼저 들어갈게요. 약속은 지켜야 하니.. 모타벨 쪽 쥐잡이들은 알아서. 부탁합니다?”

“그러죠.”


그렇게 쿠스카는 소란스러운 사람들을 헤치고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


쿠스카가 떠나고, 여전히 죽은 처형인들 앞에 남아있던 오코넬은 몸을 낮췄다.


“...”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자신이 왜 죽음을 맞이했는지조차 모른 채 싸늘한 시체가 된 앳된 처형인들.

그들의 눈을 손수 감겨주는 오코넬의 입에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길고 긴, 슬픔에 젖은 한숨이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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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축복의 아이 +1 22.08.22 260 12 20쪽
82 심장을 먹는 마법사 +1 22.08.19 260 13 14쪽
81 연회 +1 22.08.18 278 12 19쪽
80 아시리아(7) - 충고 +1 22.08.17 257 12 15쪽
79 아시리아(6) - 레니드 금융가 +1 22.08.16 269 13 16쪽
» 아시리아(5) - 쿠스카 +1 22.08.15 269 12 19쪽
77 아시리아(4) - 뜻밖의 원군 +2 22.08.12 310 10 19쪽
76 아시리아(3) - 초대 +1 22.08.11 290 12 18쪽
75 아시리아(2) - 바닷물 +1 22.08.10 280 10 22쪽
74 아시리아(1) - 급습 +1 22.08.09 331 12 16쪽
73 첫 번째 계획 +1 22.08.08 298 14 18쪽
72 무대를 옮기며 +1 22.08.05 299 13 13쪽
71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7) - 그렘린 +1 22.08.04 490 14 17쪽
70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6) - 짐승들의 축제 +1 22.08.03 303 14 15쪽
69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5) - 은총(恩寵) +1 22.08.02 292 14 14쪽
68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4) - 밤의 거리 +1 22.08.01 294 11 16쪽
67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3) - 짐승 +1 22.07.29 303 15 16쪽
66 무법 도시 마하카리타(2) - 계획 +1 22.07.28 554 13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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