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실패한 용사
아델라이데는 보지 않아도 자신의 배에 깊은 상처가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상처를 움켜쥔 손 사이로 피가 그칠 줄 모르고 흐르고 있을 것이란 것을 말이다.
“여기까지인가.”
웃음이 나왔다. 즐거워서가 아니라 허탈해서였다. 단순히 생명이 다하는 것이 아쉬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인생이 전부 부정당한 것 같아서 허탈했다.
‘10살에 기사에 뜻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살아왔지.’
타고난 외모를 더욱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도,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와 결혼하는 것도, 자신을 닮은 딸과 남편을 닮은 아이를 가지는 것도, 세간에서 여자의 기쁨이라 여기는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지금껏 살았다. 그런 삶에 후회는 없었다. 덕분에 세상을 마족의 침략에서 지키는 최전선에 서고, 모두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까지 갑옷을 입고 붉은 수정검을 든 삶을 든 모습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럼에도 죽음을 앞둔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결국 실패했네.”
마족의 침략으로부터 제국과 인간을 지키는 사명은 결국 실패했다. 기사단이 그토록 막고자 했던 마왕의 출현은 막지 못했고,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전쟁을 정석적으로 이길 방법이 없어지자, 그나마 지금껏 남은 강자들을 모아서 마왕을 처단하기 위한 특공대를 조직했다. 용사, 세상의 마지막 희망이란 칭송을 들으며 마왕의 거처까지 잠입했지만, 결국 이렇게 실패했다.
“지금 너의 모습과 감정이 너무나 달콤하구나. 너희들이 만드는 그 어떤 미주도 지금 너에게서 풍기는 절망보다 향기롭진 않으리라.”
눈앞에는 젊고 잘생긴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잘생겼지만 피부는 창백했고, 눈은 눈동자뿐만 아니라 흰자위까지, 머리칼도, 모조리 새까맸다.
피부는 하얗고 입술도 붉었지만, 기이하게도 그 모든 것들이 검게 느껴졌다. 검은 옷 때문이 아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심연이 이성을 얻은 것만 같다.
그렇기에 마왕이라 불리는 존재일 것이다.
마왕은 기뻐하고 있었다. 마족은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사는 존재였고, 그녀처럼 굳은 의지와 신념을 지닌 사람일수록 감정의 낙차 또한 큰 법이었다.
지금 그녀, 그리고 이미 명을 달리한 동료들이 죽어가며 느끼는 좌절과 고통이 마왕에게는 그 무엇보다 감미로웠다.
그가 직접 좋은 술에 비유했듯이.
아델라이데의 무릎이 꺾였다. 출혈이 심해서 정신이 가물거렸다. 그녀는 체념했다.
“······죽이라고 해 봐야 듣지 않겠지?”
“어이, 구걸해 보라고. 혹시 내 마음이 바뀔지 알아? 아니면 그대로 나의 종으로 삼아 줄 수도 있고.”
역시나 사악하다. 긍정도 안 하고, 끝까지 희망을 갖게 하려 한다. 희망을 가질수록 절망도 커지니.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이미 생을 달리한 동료들이 느낀 좌절의 감정 덕분에 마왕은 전투 시작 때보다 더욱 힘이 넘쳤다. 반면 아델라이데는 이미 중상을 입었다.
그 순간, 그녀는 웃었다.
조금 전까지의 허탈한 웃음과는 달랐다.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래, 어찌 보면 이제야 내 업보를 갚는지도 모르지.”
마왕은 그 아델라이데가 이런 말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죽어가는 상대가 보이는 감정이 지나치게 거슬렸다. 그에게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마왕이 낫을 휘두르고, 그녀의 한쪽 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팔이 잘리는 격통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죽였던 한 소녀를 떠올렸다.
마왕은 다른 마족과 달리 인간으로 태어난다. 성자가 되어서 인간들을 번영으로 이끌거나, 마왕이 되어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양면의 운명을 타고.
그런 아이를 운명의 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마왕으로 각성했을 때의 위험이 너무 크기에, 색출하면 죽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델라이데는 젊은 시절 그 운명의 아이를 색출해서 죽인 적이 있다. 이 마왕 직전에 출현했던 운명의 아이다.
이미 이십여 년이 지나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지금 그 소녀의 얼굴이 생각나는 것일까.
“미안해.”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이제 정신도 가물가물하고 고통마저도 흐리다. 마지막 정신을 잡아 사과했다. 지키지 못한 모든 인간에게, 의미 없이 요절하고 만 운명의 아이에게.
그와 동시에 초연하게 마왕과 얼굴을 마주보았다.
“재미없군.”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마왕은 더 이상 그가 흡수할 만한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 아델라이데를 괴롭히지 않았다. 대신 단칼에 그녀의 목을 쳤다.
마지막 순간 목과 팔이 사라진 스스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 순간, 그녀는 그간 무수한 생명을 베며 가졌던 사소한 궁금증 하나를 풀 수 있었다.
목이 떨어진 상대가 죽음을 느낄까? 그 궁금증의 답 말이다.
마지막에 든 생각이 겨우 그런 거라니, 생을 다하는 찰나의 순간에도 참 우스웠다. 기사인 이상 맹세를 못 지킨 점을 애통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목이 잘리는 고통은 짧았다. 그녀의 삶은 마흔 둘에, 그렇게 비참하게 끝을 맺었다.
- 작가의말
우주 게임 속 용병이 되었다를 완결시킨 후 판타지 배경으로 빙의자끼리 배틀로얄 벌이는 것을 쓰고 있었는데, 머리 식히려고 쓴 이 소설이 더 잘 써지더라고요. 분위기가 가벼워서 그런가...
장르를 굳이 따지면 유혈 코미디 육아 및 학원물? 그 정도 될 거 같긴 합니다.
그럼 초보 엄마의, 실패하면 세상이 멸망하는 육아 시작합니다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