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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올힘법사
작품등록일 :
2023.10.23 13:25
최근연재일 :
2024.03.04 08:10
연재수 :
13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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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0
추천수 :
277
글자수 :
784,850

작성
23.11.14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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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정의

DUMMY

띵-


전방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나는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악셀을 내리밟았다.

그런 뒤 우회전 깜빡이를 넣고, 좌측에서 직진하는 차량들을 주시하며 천천히 우회전을 시작했다.


그런데.


"쟤는 또 뭐야?"


정지신호 때문에 1차선에 멈춰섰던 모뉭이 갑자기 슬금슬금 앞으로 나가더니, 신호를 무시하고 가버렸다.

모뉭이 시야에서 사라진 순간, 전방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7094."


일단 해당 차량의 번호는 외워두었다. 마력덩어리는 아직 느껴지지 않았기에, 급할 건 없었다. 정 안 되면 나중에 벌금이라도 날려주든 하면 되니까.


부우웅-


어린이보호구역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는 천천히 속력을 높였다.


"여기서 좌회전."


좌측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에 오는 차량이나 오토바이, 혹은 자전거나 행인이 없는지 확인한 후, 좌측 깜빡이를 넣고 1차선으로 이동했다.

여긴 신호가 없는 비보호 좌회전 차선이라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잘못하면 나만 억울해지는 곳, 그곳이 비보호 좌회전이다.


"이야, 주차장이 참~ 넓네, 넓어."


카페 자체는 작지 않았지만, 주차장은 협소하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로 작다면 제비 부부도 박씨 따윈 물어다 주지 않고 그냥 집 짓기를 포기하고 다른 나라로 도망갈 것이다.


쯧. 서울 카페 주차장이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하나.


"자리가 있나 확인을 해볼까."


하지만 나는 문제없다.

내 차는 경차다.

그러니 서울에서 주차하기와 같은 미션같은 건.


"그렇지. 하나 있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운 걸.

어? 저 카니볼 주차자리 못 찾고 나가네. 그래, 잘 가라! 나는 주차한다!


*

*

*


"드디어 유X브 채널 이름을 정했습니다 형님!"


한동안 얼굴을 못 봤던 정중재가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카페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가 앉은 자리는 가장 좋은 자리, 다시 말해 사람들이 덜 지나가는 구석 자리였다.

그러니 우리 둘의 대화는 잘 들리지 않을 터.


"채널 이름이 뭔데? 뭐로 정했어?"

"전지적 블랙박스 시점입니다!"

"오호."


이름이 나쁘지 않은데? 채널 취지와도 잘 맞고. 이름만 들어도 어떤 방송을 할지 딱 감이 오는 이름이야.

근데 내가 지어준 게 더 낫지 않나?


"잘 지었네. 그럼 방송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야?"

"그건 확정되지 않았습니다만, 우선 어떤 식으로 방송을 진행할지, 라이브방송의 경우 어떤 식으로 하게 될지, 시청자와의 소통은 어떻게 할지, 또 편집방향은 어떻게 정해야 할지 등등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생각보다 할 게 더 많은 일이군.


"아직 저는 편집자를 따로 구할 정도로 돈을 벌지 못했으니까요. 편집이든 구상이든 뭐든 제가 다 알아서 해야 합니다."

"힘들겠는데."

"그래도 해 봐야죠. 기왕 하기로 한 거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정중재가 주변을 살피더니, 겨우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여신님과 사제님 덕분에 은혜를 입었는데, 그만큼 저도 열심히 살아야죠."


그래. 좋은 생각이다. 아주 건실한 가치관이야.


"일단 저는 기존에 있던 구독자분들의 제보로 다양한 사례를 모은 상태입니다. 기존 구독자분들께는 새로운 채널을 판다고 말씀드렸었거든요."

"기존 구독자?"

"네. 지금은 좀 망한 채널이긴 한데... 얼마 전까지 동영상 하나 올릴 때마다 조회수가 적게는 8,9천 정도에서 많게는 겨우겨우 5만 정도 나오거든요. 겨우 이런 조회수로는 돈을 벌기 쉽지 않죠."


하긴, 원래 유X브라는 건 구독자보다 조회수 싸움이라고 했지.


"그래도 제 고정 팬분들이 나름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께 도움도 많이 받았고요. 일단 오늘 집에 들어가면 밤새워서 편집해봐야죠."

"라이브방송 같은 것도 하는 건가?"

"네. 하지만 우선 어느정도 사람들이 모이면, 그때 해볼 생각입니다. 아직은 너무 이르고요."


사실 좀 속으로 걱정했는데, 나름 착실하게 준비하는 모양이다. 이 녀석, 운동시작하더니 조금씩 자신감도 붙고 사람이 밝아졌는데.


"그러고보니까, 저번에 나한테 연락했던데? 이제는 3km까지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다고? 아주 그냥 입에서 쇠맛이 날 정도로 달린 모양이던데."

"아, 헤헤. 그거요."

"나랑 같이 해도 되는데 말이야. 날 부르지 그랬어?"

"에이, 형님께서 이렇게까지 이끌어주셨는데 언제까지고 신세만 질 수는 없죠. 운동같은 건 혼자서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기특하구만.

사제로서 디케교 신자가 이렇게 발전해가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즐겁고 뿌듯한 일이다. 디케여신님께서도 분명 좋아하시겠지.


"그래. 안 그래도 너 살이 빠진 것 같더라. 슬슬 턱에 라인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정말입니까 형님?"

"그래."

"그럼 저도 빅벵의 티오피처럼?"

"......그건 좀 어렵고."


걔는 살 쪘을 때도 이목구비가 뚜렷하더라. 미안하지만 중재야, 너는 조금 힘들 것 같다.


"좋아, 오늘은 내가 산다. 여기 카페에서 유명한 거 뭐 있냐? 시켜봐."

"저, 정말입니까 형님? 저, 오늘 아침에도 삶은 감자랑 닭가슴살 한 덩이 먹고 왔는데요!"

"그 정도로 빠졌으면 하루 정돈 괜찮아. 대신 오늘 저녁을 간단히 먹음 되니까. 야, 빨리. 뭐 먹을래?"

"그럼...... 저는...... 일단 가볍게 마늘빵이랑 머쉬룸 크림수프,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랑 아라비아따......"

"잠깐 중지."


아나- 이 새끼 이거.

정도라는 걸 모르네, 정도!

다시 또 찌고 싶냐?


*

*

*


"형님 차를 오랜만에 타는 것 같습니다."


카페를 나온 후, 정중재와 나는 차에 올라탔다. 녀석을 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 형님. 혹시 여기 가실 수 있습니까?"

"어디?"

"빵집입니다 형님. 외곽에 있어서 좀 가야 하긴 하는데."

"빵집은 왜? 너 방금 전에 빠네 먹었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겁니다 형님."

"안 돼. 하루에 빵을 몇 개나 먹어대는 거야?"

"내일 먹을 겁니다 형님! 이제 저 먹을 거 잘 조절해요!"

"식욕 잘 조절한다는 놈이 먹고 싶은 거 시키라고 하니까 열 댓개를 시키려고 해?"


어쨌든 우린 정중재가 알려준 빵집으로 이동했다. 녀석이 빵집에 대해 소개해주었는데, 괜히 궁금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니까.


"진짜 구석에 있구나."

"네."


녀석 말대로 빵집은 외곽에 있었다. 그것도 엄청 구석에. 가는 길은 왕복 1차선 도로였다.


붕붕-


내 차 앞에는 두 대, 아니 세 대의 차량이 줄지어 가고 있었다. 제일 앞에는 아주 거대한 화물차가, 그 뒤에는 검은색 승용차가, 그리고 그 뒤에는 국내 K사의 하얀색 KK5가 있었다.

나는 제일 꼴찌였다.


"정말 천천히 가네요 형님."

"그러게 말이다."


화물차는 마치 굼벵이와 같았다. 아니, 조금 과장해서 굼벵이랑 달리기 시합하면 화물차가 질 정도였다.

화물차가 쌩쌩 달려봐야 위험하기만 할 뿐이기에, 나 역시 속도를 맞추며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중앙선 침범해서 추월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잠시 접어두었다. 앞에 있는 저 두 대의 차량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타이밍을 잘못 맞춰서 한 번에 세 대의 차가 화물차를 추월하게 된다면? 만약 반대 차선에서 차가 온다면? 이거 골치 아파 지는 거다.


그러니 이건 도로 위의 눈치게임이나 다름 없다.


끼이이-


전방 차량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나 역시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알고보니 화물차 바로 뒤에 있는 하얀승용차, 즉 SX3가 초보운전이었는데, 참지 못하겠는지 결국 화물차를 추월하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멀리서 보니 핸들은 돌린 것 같은데, 반대 차선에서 차량들이 계속 오니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초보운전 딱지가 붙은 걸 보니, 약간 겁을 먹은 게 아닐까 싶다.


"저 차, 이제 슬슬 넘어가도 될 텐데요. 왜 안 가죠?"

"초보잖아, 초보. 이해해 줘야지."

"그렇게 따지면 형님도 초봅니다."

"초보라고 다 같은 초보냐."


저 초보운전이 언제쯤 화물차를 추월할까, 지구가 멸망하고 나면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을 즈음, SX3가 드디어 중앙선을 넘고 화물차를 추월했다.


그래.

이제 내 앞에 있는 이 KK5가 가고나면 나도 슬슬 가야지.


끼이이이익-


"엥? 형님, 저 새끼 차에서 내리는데요?"


KK5가 차를 멈춰세웠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차에서 40대로 추정되는 한 남자가 내렸다.


탁!


운전석 문이 닫힌다.

남자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니, 갑자기 뭐야? 왜 멈춰? 형님, 저 새끼 왜 저러는 겁니까?"


그러게.

왜 갑자기 잘 가다가 멈추냐, 너는?


*

*

*


KK5차주는 걸쭉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니 저 조상 뒈진 미친놈이! 어디 어길 법이 없어서 중앙선을 침범해?"


차주의 앞에서 잘만 가던 SX3가 중앙선을 넘고 화물차를 추월했기 때문이다.


"저런 놈들이 도로 위에 굴러다니니까 허구한 날 대한민국에 사고가 끊이질 않는거야."


끼이이익- 탁!


차주는 차를 멈춰세웠다. 그리고 씨부렁거리며 차에서 내렸다.


"못 참는다, 못 참아."


띠리리리-


차주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112였다.


"여보세요? 네. 신고 좀 하려고 합니다! 네, 중앙선 침범으로 위협운전을 한 운전자가 있습니다! 번호는 45우, 57XX...."


위협운전이라.

아마도 KK5차주는 위협운전의 정의를 모르는 모양이다.


"예. 지금 우회전해서 빠져나갔습니다. 제가 따라잡겠습니다. 네. 빨리 와주세요. 지금 가고 있습니다."


차주가 다시 차에 올라탔다.


"예, 예. 아마 음주운전일 겁니다. 비틀거리면서 운전했으니까요. 이러다가 무고한 사람 죽일 수도 있습니다. 네. 가고 있습니다! 빨리 와주십시오!"


차주의 가슴이 뜨겁게 타오른다.

열을 받아 축축해진 차주의 신발이 거칠게 악셀을 밟는다.

화물차는 이미 저 멀리 간 상태. 차주는 거칠게 차를 몰더니 SX3가 사라졌던 길을 따라 재빠르게 이동했다.


"저런 건 잡아야 해."


차주는 중얼거렸다.


"운전학원에서 배워먹은 게 없으니 운전을 저따위로 하지."


차주의 가슴은 정의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이전에도 그는 SX3처럼 법을 위반한 차들에게 신고를 먹이곤 했었다.

예전에 어떤 60대 아줌마는 인도로 가지 않고 도로위를 한적하게 지나다니는 느린 전동휠체어 때문에 중앙선을 침범한 후 이동했었는데, 차주는 그 아줌마를 신고해버렸다. 법을 위반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아니,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사람을 쳐? 어? 사람 치고 가?

- 아줌마, 법이 왜 있습니까? 예? 법이 왜 있겠느냐고요?

- 아저씨는 융통성이 없어? 그 상황에서 그럼 어떡해? 내가 중앙선 안 넘고 그냥 가면 뒤에 차량 다 밀리는데!

- 법을 위반하면 안 되는 겁니다, 예? 아줌마! 그 따위로 운전할 거면 면허 반납하라고!


저 멀리 SX3가 보인다.


"너는 내가 무조건 벌금 먹인다. 새끼야. 초보운전 새끼가 벌써부터 그러면 되나. 싹수가 노랗네, 노래."


너는 내가 잡는다.

나는 어지러운 이 무법의 시대를 바로잡는 정의로운 사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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