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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로의 서재입니다.

오디션(Audition) 2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일반소설

완결

진사로
작품등록일 :
2020.03.15 00:30
최근연재일 :
2021.09.08 01:39
연재수 :
5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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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659,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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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4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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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Abyss. 눈물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때

DUMMY

다음 날.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의 지하 식당은 어제와 달리 북적북적했다. 숙소 생활을 하는 뮤지컬 배우들이 스케줄이 없는데다가 직원들도 전부 출근했기 때문이다.

도진까지 출근함으로써 <C-POP Artist season 5>에서 뮤컬트에 캐스팅된 팀원들도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공연하느라 나중에 영상으로 봤는데, 두 분 정말 멋있더라고요.”

“뭘.”

“어제도 저한테 두 분에 대해서 물어보더라고요. 혹시 대학가에서 공연할 생각은 없으세요?”


도진의 말에 은별이 서희의 눈치를 보다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서희는 휴게실로 갔고, 은별은 조금 더 지나서 왔다.


“언니 오늘 안 좋아 보여요.”

“방송 본 뒤로 기분이 이상해. 넌 괜찮아?”

“전 기분은 괜찮았는데 집에 가기가 좀 두렵더라고요. 어차피 안 갈 생각이었지만요.”


서희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정완의 전화는 어제까지 꺼져 있었는데 오늘은 아예 없는 번호라고 안내되었다.

서희는 안내를 들으며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기분을 느꼈다. 정완은 그렇게 여우비의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여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렸다.


그때 여원이 다른 팀원들과 함께 휴게실에 들어왔다.


“여우비 여기 있었네?”

“선생님 안녕하세요.”

“방송으로 보니까 더 멋있던데? 축하해.”

“감사합니다.”

“너희들 다 출근했다길래 왔어. 내일 하려던 얘기가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게 좋지. 연습실 가 있어.”


여원이 팀원들에게 전달할 내용은 세 가지로, 첫째는 트레이닝 체계에 대한 것이었다.


“트레이너 중에는 당연히 내가 총괄책임자지만, 트레이닝은 반후성, 주성락 두 트레이너가 주로 할 거야. 걔들이 너희들 개별 프로그램 만드는 중이야.”

“네.”

“그리고 그거랑 별개로 멘토들이 있어. 멘토들은 씨팝 출신 가수고 주로 자기들 경험을 알려줄 건데, 너희들은 걔들한테 음악 관련된 얘기면 아무거나 막 해도 돼. 노래 들어달라면 들어줄 거고, 작사 어떻게 하는지 물어보면 얘기해줄 거야. 걔들은 스케줄 없을 때 회사에 있을 거니까 스케줄표 참고하고.”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전에도 <C-POP Artist> 출신 선배 가수가 새로운 팀원의 멘토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이것은 거기에 강제성을 조금 더 입힌 것에 불과하지만, 팀원들의 소속감을 높인다는 점에 모두의 의견이 모아졌다.

도진이 물었다.


“멘토는 누굽니까?”

“순정남녀의 매아리, 한미연사의 제이미랑 명유경, ‘큐걸즈(Q-Girls)’의 한미은, 글래드의 박혁민이랑 김소정, 그리고 조예미야.”

“와아! 네.”

“아무거나 물어도 되지만 멘토들한테도 전문분야 있는 건 알 거야. 설마 제이미한테 가사 어떻게 쓰냐고 묻는 애는 없겠지?”

“까르르!”

“걔는 절대 모른단 말 안 하고 아무렇게나 대답할 거야. 故 김광석님에 대한 건 걔가 독보적이긴 한데, 그거 물어보고 싶으면 그날 집에 못 갈 각오부터 하고. 알았니?”

“네!”


두 번째는 4라운드 사전대결, 즉 회사 대표 경연에 대한 것이었다.

2차 예선을 정규 방송으로 편성함에 따라 본선 방송의 일정이 조정되었는데, 그 결과 첫 생방송 경연은 내년 1월 27일부터 시작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다른 경연의 녹화 일정도 모두 바뀌었다.


“4라운드 녹화는 12월 1일로 확정됐어. 이번엔 첫방이 일찍 시작했고 생방송은 밀렸으니까, 내가 시간 좀 넉넉하게 달라고 했거든.”

“네.”

“감사합니다.”


여원은 다른 회사에 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려면 팀원들의 단점을 어떻게든 보완해야 하기에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다. 물론 다른 회사들도 가만있진 않을 것이다.

팀원들의 눈이 빛났다.


“사전대결은 11월 3일이야. 나는 10일이 좋다고 얘기했는데 그날은 방송사 사정 때문에 안 된다더라고.”

“예.”

“이번엔 고민 많이 했어. 후보 둘을 뽑았는데 그 중에 정하기도 어려웠고, 그것 때문에 너희들 사이에서 뒷말이 나올까봐.”


여원은 한참 골똘히 생각하다 무겁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할게. 너희들은 전부 내 캐스팅 리스트에 있었어. 근데 생방송 진출할 잠재력을 기준으로 뽑았더니 대표로 나가기에는 다 조금씩 모자란 부분이 있고, 그걸 고치기에 3주는 너무 짧아.”

“···!”

“너희들 수준이 상향평준화됐단 얘기기도 하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독보적인 팀도 없단 뜻이야.”


서희와 은별이 깜짝 놀란 것은 이틀 전 학원에서 남긴 정완의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난 대표 뽑을 때 항상 탄탄한 기본기랑 실수하지 않는 안정성, 두 가지를 먼저 봤어.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우리 대표가 1등을 못해도 내 판단이 틀려서지 걔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야. 내 선택이 마음에 안 들어도 잘 따라줬음 좋겠어. 알았지?”

“네.”


여원은 팀원 중 막내를 지목했다.


“예린아.”

“네?”

“네가 대표야. 잘할 수 있지?”

“···!”


여원의 말에 지목당한 예린뿐 아니라 다른 팀원들의 눈이 모두 커졌는데, 유독 서희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여원의 시선이 그녀에게 갔다.


“서희야.”

“네, 선생님.”

“너희들은 수첩에 애들 심사평 다 쓰던데, 예린이가 지적받았던 내용도 알아?”

“네. 감성의 깊이가 얕다고···.”

“그래.”


여원은 서희의 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사전대결에선 모든 노래가 다 가능해. 그래서 이번엔 아예 예린이 감성에 맞을 만한 노래를 만들기로 했어. 최헌규라는 작곡가가 소울 노래를 잘 만들어서 얘기했더니 우진이랑 공동 작업하겠대. 예린이는 내일 저녁쯤에 헌규랑 미팅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네.”

“마지막으로 너희들 4라운드 미션인데 이건 목요일에 알려줄게. 그때 씨팝 제작진이 카메라 들고 와서 녹화하면서 미션 전달할 거고, 그거 보고 자리에서 인터뷰하면 돼. 그리고 올해는 송년특집 녹화를 12월 29일에 하는데 그건 4라운드 녹화 끝나고 생각하자. 경연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말고. 알았지?”

“네!”

“트레이너랑 멘토들 있으니까 아예 오리엔테이션을 하자. 있는 애들 다 불러올 테니까 기다려.”


뮤컬트 팀원들은 반후성, 주성락 트레이너와 대면하고 앞으로의 트레이닝 계획을 들었다.

팀원들은 이 자리에서 각자의 과제를 전달받았다. 서희는 고음을 때리는 방법과 음을 길고 일정하게 내기 위한 연습에 들어가고, 은별은 자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노래하는 연습에 집중할 것이다.


“감성이 들쭉날쭉한 거 얘기할 줄 알았는데.”

“그건 자세부터 고치고 하지 않을까?”

“그렇겠네요.”


트레이너들이 나가자 이번에는 아리와 제이미, 혁민이 들어와 멘토들의 역할에 대해 설명했다.

멘토들은 팀원들의 기량을 수시로 점검하고 그들이 원하는 질문에 답해주거나 필요한 부분에 대해 조언할 것이다.


앞으로 팀원들은 매주 화요일에 과제곡을 받고 토요일 오후 3시에 있을 미팅에서 프로듀서와 트레이너, 멘토들 앞에서 노래할 예정이며, 이 결과 및 트레이닝 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데이터를 쌓게 된다. 이 데이터는 전속계약을 맺을 때 기준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서는 팀원들의 태도와 열정, 직원들 사이에서의 평판까지 평가요소에 포함하기로 정했지만, 아리는 그것은 말하지 않았다.


“일단 생방송에 올라가면 우리 회사랑 전속계약을 할 가능성이 80퍼센트쯤은 돼.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가능성은 높아지겠지. 다만 이 평가 때문에 계약을 못할 수도 있어. 반대로 생방송에 못 올라가도 평가에 따라서 전속계약을 할 수도 있고.”

“아.”

“냉정한 처사지만 이해할 거야. CBC 지원이 끝나는 순간부터 회사는 너희들을 저울에 올려놓고 계산기를 두드리거든. 선생님이 너희들한테 기대하는 잠재력은 트레이너님들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저절로 나올 거고, 너희들은 할 수 있으니까 뽑힌 거야.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지만 조금만 더 힘내자. 알았지?”

“네!”


멘토들과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미란은 혁민에게 갔고, 은별은 다른 팀원들과 함께 아리를 따라갔다. 그래서 연습실에는 서희와 제이미만 남았다.

제이미는 나가는 사람들을 한참 바라보다 서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누나?”

“네, 제이미 씨. 안녕하세요.”


서희의 정중한 말에 제이미가 양손을 휘휘 내저었다.


“반말 쓰세요.”

“어, 그래도 돼, 요?”

“네.”

“그래. 그럼 그럴게.”


제이미가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나는 안 나가요?”

“어?”

“작년에도 나한테는 안 왔어요. 붙은 사람한테 멘토링해야지 떨어진 사람한테 하면 안 되죠.”

“시즌 3 때는 다들 쟁쟁했잖아.”

“그럼 우리가 더 쟁쟁했어야죠.”


재미교포 3세인 포크 뮤지션 제이미 킴과 소울 보컬리스트 명유경은 <C-POP Artist season 3>에 솔로로 각각 참가하여 뮤컬트 엔터테인먼트에 캐스팅되었다가 4라운드에서 떨어졌다.

이후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 특별공연 앙코르 무대에서 함께 노래하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울면서 안아주는 사고를 쳤고, 이때 관객들의 눈물을 빼며 드러난 듀엣 능력으로 한 팀이 되어 전속계약을 맺었다.


이 팀은 우진이 붙인 ‘한미연합사고’라는 이름으로 작년까지 활동하다가 팀 이름이 길고 다소 우스워 보인다는 의견에 따라 ‘한미연사’로 바꾸었다.


“근데 유경 씨는 안 왔어?”

“집에 있어요. 경이는 월요일에 쉬어야 돼요.”

“왜?”

“우린 주말에 스케줄 많아서 경이가 어어, 뭐였더라···. exhausted.”

“헐. 걱정되겠다.”

“지금은 괜찮대요.”

“그럼 유경 씨는 내일 와?”

“네. 그리고 경이한테도 반말 쓰세요. 누난 아리 누나랑 동갑이죠? 경이도 여우비 언니들이라고 하던데.”

“그런 건 직접 얘기해야지.”


제이미가 입을 내밀고 고개를 이리저리 젓다 물었다.


“근데 경이는 왜요?”

“노래 가사 얘기하려고.”

“가사는 아리 누나랑 Glad 혁민이가···.”

“난 유경 씨가 쓴 가사 좋아.”

“아! 그래요? 내가 얘기해 놓을게요.”

“제이미, 앞으로 은별이랑 나 많이 도와줘.”

“Yes!”


제이미의 천진한 미소에 서희 역시 조그맣게 미소 지었다.



***



<비 오는 아침>은 <C-POP Artist season 5>에서 처음 방송된 후 같은 날 <순정남녀의 편안한 밤>에도 나왔고, 다음 날 CBC 월화드라마 <달이 진 달동네>에도 삽입되었다.

특히 아리는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에서 원주 예선 후 노래에 반하여 서희와 친구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 노래는 음원 차트 1위에 오름으로써 <C-POP Artist>의 새로운 역사가 되었다.

예선에서 불렀던 자작곡이 차트에 오른 것도, <C-POP Artist> 방송 첫 주에 나온 곡이 1위에 오른 것도 모두 처음이다.


시청자들은 이 노래를 들으며 첫사랑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고 말했고, 상투적인 이야기였지만 빗소리 같은 곡이 붙여져 아련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비 오는 아침에 이 노래를 꼭 들어야겠다는 댓글도 많은 공감을 얻었다.

특히 방송을 통해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음원으로 들을 때보다 방송을 볼 때 더 가슴 아팠다고 이야기했는데, 이에 대해 한 시청자는 ‘예쁜 여자들이 아픈 노래를 부르니까 더 아프게 느껴진 거’라고 정리했다.


이처럼 여우비와 관련된 시청자 게시판 글이나 기사 댓글에는 노래에 대한 평가와 함께 두 사람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늘 따라다녔다.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사랑합니다’라는 댓글에 붙은 공감 개수가 천 개를 넘어설 정도였다.

일부 시청자가 성형수술 의혹을 제기하자 어떤 네티즌들이 서희와 은별의 중고등학교 졸업 앨범의 사진을 올린 후 잠잠해지는 일도 있었다.


어쨌든 이러한 일을 계기로 여우비는 자작곡과 가창력, 외모까지 두루 갖춘 싱어송라이터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었다.


“노래 좋으면 잘 들음 되지 하여튼 꼭 얼평을 해야 속이 시원해?”

“너도 원주에서 이분들 얼평했잖아.”

“그거랑 다르거든?”

“근데 아티스트가 아름다우면 프로듀서 입장에선 좋아. 쓸 수 있는 전략이 많아지잖아.”

“아아. 그래! 그러니까 너도 여자애들 볼 때마다 얼평하겠다는 거지 지금?”

“얘기가 왜 그렇게 튀냐? ···앉아 있어.”


첫 트레이닝 다음 날 점심. 서희와 은별은 회사 근처에 위치한 아리 부부의 신혼집에 왔다.

아리는 음식을 나르는 우진을 째려보다 말했다.


“아주버님도 그러셨어?”

“어?”

“너희들 얼평하셨냐고.”

“어어. 한 번 있긴 했는데 그런 것도 얼평이라고 할 수 있나···.”


난데없는 호칭에 서희가 깜짝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이 정완을 형으로 생각하고 있고 아리 역시 그것을 인정했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서희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을 냈다.


“내가 제시 노래 불렀을 때 그러셨어. 외모는 제시보다 좋다고.”

“언니 왜 중요한 말을 빼요? ‘월등히’ 좋다고 그랬잖아요. 풋!”

“야.”


은별이 덧붙인 말에 아리의 눈이 꿈틀했다. 아무리 오래 전에 헤어졌다고 해도 전 여자친구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은별은 이걸 제 입으로 말해놓고 환히 웃고 있지 않은가.


아리는 정완과 은별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모두 정리하고 편한 관계로 남았음을 알았다.

서희가 말했다.


“사람 외모 갖고 말하는 건 싫은데, 프로듀서는 아티스트의 장점을 모조리 끄집어내서 멋지게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아. 그래서 너희들을 무대에서 멋지게 표현해주셨구나?”

“응.”


우진이 식탁 한가운데에 된장찌개를 놓으며 말했다.


“형은 얼평이 아니라 아예 비교를 했구먼. 월등하게.”

“그러게. 너랑 전생에 진짜 형제였나?”

“PD가 왜 PD인데. 피보다 디이입(deep)하게 통하는 게 있어서 PD야.”

“풉!”


우진의 돼먹지 않은 말에 은별이 웃자 아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웃어주지 마. 자꾸 웃어주면 저 인간은 재미있는 줄 알거든?”

“조금 재미있었어요. 조금.”

“아유! 이게 뭐가 웃기다고. 친구였을 때는 몰랐는데 결혼하고 보니까 코드가 영 안 맞아.”

“코드?”


우진은 콘센트에 꽂힌 냉장고 전원 플러그와 코드를 물끄러미 보다가 농담을 생각해냈지만, 아내 친구 앞에서 할 소리가 아니라 말을 참고 주방으로 갔다.

서희가 아리에게 말했다.


“너 그 인간 소리 좀 안할 수 없어? 진짜 여원쌤 같아.”

“저 인간이 그 소리 안 나오게 해야 안 하지.”

“헐.”


아리는 서희와 은별과 함께 근처 마트에서 쇼핑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진과 아리가 이 아파트에 산다는 사실은 인근 주민들이 모두 아는 데다가, 서희와 은별도 이제는 알아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따라서 세 사람이 이 근처에서 함께 나타나는 순간 아직 알려지면 안 되는 여러 가지 사실이 바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서희는 아리와 친구사이라고 붙어 다니면 팀원들 사이에서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리가 서희와 은별을 집으로 불러 점심을 먹기로 한 것이다.


“언니. 정말 맛있어요.”

“다행이네. 많이 먹어.”

“이것도 먹어 봐요. 제가 구웠어요.”

“어? 15년 동안 멀리했던 고등어네요?”

“아. 싱글앨범 노래도 아세요?”

“그럼요. 순정남녀 음원은 다 있어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친 후 우진은 설거지라도 하겠다는 서희를 뜯어말리고 자신이 고무장갑을 꼈다.


“어떻게 손님한테 시킵니까. 이건 제가 해야죠.”

“쉬세요. 음식 준비하느라 아침부터 힘들었을 텐데.”

“안방 들어가요. 아리가 두 분한테 뭐 하나 보여줄 거예요.”

“네?”

“커피 끓여 갈게요.”


서희와 은별이 의아한 표정으로 안방으로 들어가자 아리가 두 사람을 마주 앉히고 말했다.


“오해할까봐 미리 얘기할게.”

“뭘?”

“원주에서부터 너희들은 내 친구였어. 이거 때문이 아니라.”

“···!”


서희와 은별의 눈이 커졌다. 아리가 꺼낸 것은 정완이 전했던 편지였다.

아리는 잠깐 뜸을 들이다 말했다.


“쟤가 고민하더라고. 자기 생각엔 너희들한테 이걸 보여주는 게 맞을 것 같은데, 그래도 되나 해서.”

“···.”

“지금 아주버님이랑 연락 안 되지?”

“네.”

“전화도 해지했어.”


은별과 서희의 말에 아리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아주버님이 지난주에 수길 씨 만나서 당분간 연락 안 될 거라고 하면서 노래 주셨대. 수길 씨가 전부터 노래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 쟤한테도 노래 주셨고.”

“그래?”

“이러고 연락을 끊으니까 수길 씨도 미안하고 답답하고 그런가봐.”

“응.”

“쟤가 고민할 때 내가 그랬어. 아주버님에 대해서라면 너희들도 쟤만큼은 알아야 하니까 이거 보여줘야 한다고.”


서희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가 정완의 편지를 꺼내 그녀에게 주었다.

편지에는 정완이 우진의 부탁을 거절한 이유와 아리가 그를 아주버님이라고 부른 이유가 있었다.


은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정완의 어머니가 백화점 붕괴 사고로 돌아가신 건 알고 있었지만 왜 거기서 식당일을 하셨는지에 대한 사연은 들은 적이 없었다.

정완은 불공정한 세상에서 행복한 적 없었던 일을 하며 남은 힘마저 소진해버린 상태였다. 자신은 그런 사람에게 트레이닝을 강요했고, 그 사람은 힘겨워하면서도 임무를 마친 것으로도 모자라 서희와 자신이 평생 음악을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사람을 아리 부부에게 맡긴 것이다.

은별에게 음악은 행복을 주는 것이었던 반면 정완은 음악을 정말로 싫어했다. 은별은 그것을 여러 번 들었지만 그가 자신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대는 핑계로만 생각했고, 그가 떠난 후에야 진심을 알았기에 지금 마음이 더 아팠다.


서희는 정완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사연을 읽자마자 눈물을 삼켰다. 정완은 음악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음악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존경할만한 분을 못 만났다던 정완이 우진에게 존경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부탁을 거절했다는 건 그만큼 음악에 대해 환멸을 느꼈다는 뜻이리라.

<C-POP Artist> 참가신청 영상을 보았던 날 자신이 정완에게 연락하지 않았다면 지금 전화할 수 있었을까. 그 전화 한 통으로 인해 그의 삶과 자신의 마음이 모조리 달라져 버렸다는 생각에 가슴이 미어졌다.

더불어 서희는 정완과의 마지막 날 그가 말했던 ‘인수인계는 다른 사람들한테 했고’의 뜻을 이제야 깨달았다. 정완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떠났다.

무엇보다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그의 글씨마다 담긴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그 외로움이 꼭 제 탓인 것만 같았다.


“원주에서 쟤가 결혼식 초대장에 자기 전화번호 써놓고, 같이 일하고 싶으니까 전화 부탁한다고 썼어. 형님으로 모시고 싶다고도 했고.”

“응.”

“근데 우리가 이 편지 읽기 전부터 너희들은 내 친구였어. 진심이야.”

“···.”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회사에서 내가 막 잘해주지 못해도 내 마음이 그래서 그런 거 아니니까 이해해 줘. 알았지?”


아리의 말에 서희와 은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새 우진이 아리의 옆에 앉아 있었다.


“저는 지금도 가끔 생각해요. 만약 제가 이 사람이랑 함께하지 못했으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

“형의 과거가 저보다 더 지독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형을 잡고 싶었는데 안 되겠죠. 제가 잡는다고 잡힐 리도 없겠지만요.”

“하아아.”

“형이 마음을 다 정리할 만큼 시간이 지나면 그때 만나려고 해요.”


서희는 한참 고개를 끄덕이다 우진에게 말했다.


“전에 PD님이 저한테 그러셨어요. 자기는 아직 존경할만한 분을 못 만났다고요.”

“그래요?”

“이 편지 정말 무거운 마음으로 쓰셨네요.”

“잘 알겠습니다. 명심할게요.”


서희와 은별은 우진이 끓인 커피를 반도 마시지 못하고 신혼집을 나섰다.


“미안해. 밥 잘 먹고 분위기 싸하게 만들어서.”

“아니야. 이걸 회사에서 보여줄 수는 없잖아. 덕분에 우리도 간만에 제대로 밥해먹었어.”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 고마워.”

“뭘.”

“오늘 스케줄 있어?”

“아니. 회사 가야지. 이따 보자.”

“응. 우진 씨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기 시작한 후에야 은별이 말했다.


“제가 싫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정말로 음악이 싫어서일 줄은 몰랐어요. 예전엔 음악에 대해 자신감이 대단했으니까···. 어머님 돌아가신 이유를 알았으면 저도 안 그랬을 텐데.”

“하아.”

“근데 음악이 싫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말이 돼.”


은별의 말에 서희가 단호하게 대꾸한 후 말을 이었다.


“PD님한테는 음악이 취미가 아니라 생계였어. 배운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걸로 사셔야 했겠지. 우리로 따지면 커피 같은 거.”

“커피요?”

“카페 알바는 꼭 커피를 좋아해야 할 수 있을까?”

“···.”

“난 지금까지 커피 마시면서 커피농장에서 착취당하는 어린이 노동자를 생각했던 적이 없어. 우리한테 음악이 커피를 마시는 거랑 같다면 PD님한테 음악은 어린이 노동자들의 일 같은 거였겠지.”

“하아.”

“PD님은 그 일로 밥을 먹어야 했고,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건 노래하는 거랑은 다르겠지. 나도 가사 한 단어 때문에 힘들었는데 PD님은 오죽하셨겠어.”


극단적인 비유였지만 은별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내가 PD님한테 저 편지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그때 그러셨어. 당연히 거절했다고, 근데 우진 씨한테 미안하다고 그러시더라. 존경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는 심정이 오죽했을까.”

“하아.”

“그런 분한테 나는 트레이닝 해달라고 매달렸지.”

“저는 강요했죠. 꿈이야 못 이루면 그만인 걸, 그게 뭐라고 그렇게 했는지.”

“그것 때문에 우리한테 죄책감이 있으셨다잖아. 우리가 잘 풀렸으니 됐다고 생각하자.”


은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의말

일요일입니다. 하나 올려요..


요새는 글을 쓰려고 컴 앞에 앉아도 영 진행이 안됩니다. 정신이 없어서인데요...

<100일간의 이야기>를 2015년에 완결하며 약속했던 작품인 <전장의 철검>도 비슷한 이유로 못 쓰고 있습니다.


쓰다 엎어버린 장편이 많아서 이제 100만 자 이상의 장편은 엄두가 안 납니다.

우선 이 작품과 <마지막 선물> 잘 마무리하고 다시 <전장의 철검>으로 돌아가야겠죠..


독자님들의 댓글이 큰 힘이 됩니다.

시간 되시면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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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v.99 욱일302
    작성일
    20.05.24 02:47
    No. 1

    정완은 다시 음악을 할수있게 잘 만들어 주세요 너무 답답하네요 사이다가 필요합니다 건필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5.24 02:54
    No. 2

    설마 남주인데 안 나오겠습니까...
    저 역시 욱일302님 말씀대로 가고 싶습니다. 다만 이 작품은 호흡이 상당히 길어요.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or***
    작성일
    20.07.02 15:54
    No. 3

    좋은 작품 항상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0.07.05 03:59
    No. 4

    oroi9님! 감사합니다.
    앞부분 읽고 계신 것 같은데 조만간 따라잡히겠네요. ㅠ
    열심히 쓰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6 k4******..
    작성일
    21.10.29 21:33
    No. 5

    잘읽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0 진사로
    작성일
    21.10.30 23:37
    No. 6

    k4673_yb..님! 감사합니다.
    완결된 작품이니 끝까지 읽어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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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Audition) 2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5 Aphrodite. 풀밭, 꽃, 그리고 꿀 20.06.16 168 10 21쪽
24 Round 4. 너를 잊지 않았듯 +2 20.06.14 153 9 24쪽
23 Burden. 그대에게 옮은 감기 20.06.09 164 9 27쪽
22 Clue. 또 다른 오디션 +4 20.06.04 166 10 25쪽
21 Slough. 그녀의 취미 20.05.31 162 6 31쪽
20 Tears. 한계가 아닌 줄 알았는데 +6 20.05.28 181 11 23쪽
» Abyss. 눈물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때 +6 20.05.24 178 9 22쪽
18 Restart. 욕심이 되어버린 밤 +2 20.05.21 193 9 27쪽
17 Separation. 신데렐라처럼 +4 20.05.17 184 11 24쪽
16 Friendship. 내일 일어날 일 +4 20.05.14 193 8 23쪽
15 Limitation. 임무를 마친 자의 여유 +2 20.05.10 190 11 21쪽
14 Round 3. 자신과의 싸움 +4 20.05.07 199 11 23쪽
13 Preparation. 조금 덜 치열해도 괜찮은 곳 20.04.30 209 10 29쪽
12 Wedding. 순정남녀가 순정부부로 20.04.23 225 9 29쪽
11 Goodness. 이럴 줄 알았으면 +2 20.04.21 223 8 23쪽
10 Round 2. 치열하게 따분한 날 +2 20.04.12 201 8 23쪽
9 Deeper. 녹음이 잘 되지 않는 이유 +8 20.04.09 237 11 22쪽
8 Fangs. 그녀의 실수 +8 20.04.07 233 12 28쪽
7 Round 1. 화살은 누가 쏜 걸까 +4 20.04.02 225 11 29쪽
6 Reoccurrence. 묻고 싶었던 말 +4 20.03.31 242 11 31쪽
5 Suggest. 좋은 제안이지만 +2 20.03.29 239 13 29쪽
4 Preliminary 2. 비 오는 아침 +2 20.03.24 266 11 29쪽
3 Preliminary 1. 저 사람들 또 +2 20.03.22 267 10 30쪽
2 Making. 만들어야 할 게 노래만은 아닌 팀 +4 20.03.15 353 13 28쪽
1 Prologue. 오래 전 약속 +4 20.03.15 714 16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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