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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시간 님의 서재입니다.

불을 사랑한 사제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무서운시간
작품등록일 :
2020.05.11 10:03
최근연재일 :
2021.05.29 10:11
연재수 :
114 회
조회수 :
25,276
추천수 :
1,750
글자수 :
729,328

작성
21.01.29 20:28
조회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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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글자
26쪽

KILLING GINGERMAN (16)

DUMMY

[ ··· 오늘은 누가 죽었나요? ]


············


[ 그렇게나 많이? ]


············


[ 아니에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책임은 전부 나에게 있는 걸요. ]


············


✣✣✣✣


서로를 향해 말을 달려 속도를 높이는 와중에 탄이 위로 솟구쳐 날아올랐다.


환한 햇살 아래 빠짐없이 드러낸 몰골은, 심신이 약한 자들은 정신을 잃을 만큼 끔직한 모습이었다.


날개달린 파충류의 몸통, 촉수로 이루어진 대가리와 개구리알마냥 가득 박힌 눈알, 귀를 찢는 울음소리.


어디를 공격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생명체가 붉은 군대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게 바로 그 소문의 괴물이구나.


발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속도를 높였다.


그녀를 따르는 병사들도 덩달아 박차를 가했다.


‘ 날 보고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고? ’


탄은 속으로 감탄했다.


붉은 군대는 경로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여전히 돌격하고 있었다.


가운데 땅에서 도망쳤던 그 수비군과는 눈빛부터 다른 종자들이다.


그리하여 탄은 다른 수를 썼다.


촉수를 걷어내자 뻥 뚫린 검은 구멍이 드러났다.


그 검은 것들이 온통 우글거리는 까만 지네들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통통하고 딱딱한 지네들이 후두둑 붉은 군대 위로 떨어졌다.


“ 악! ”

“ 신경 쓰지 말고 앞만 봐! 속도를 잃지 마라! ”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얼굴에 붙은 지네를 털어내려던 몇 명에게 부관이 소리쳤다.


그러나 그 명령은 놀란 말들이 자기 주인을 떨어내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발카는 말갈기에 붙은 지네를 잡아 한 손으로 터뜨렸다.


끈적거리는 점액질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 달리 그것들은 마치 재처럼 파사삭 부서졌다.


무슨 꿍꿍이지?


거대한 몸뚱이를 가진 괴물의 공격치고는 허접하기 짝이 없다.


왜 당장 우리를 짓이기지 않는 걸까?


쌔애액 - 거대한 몸체가 내리꽂힐 듯 돌진해오자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거대한 발톱이 아슬아슬하게 머리통을 스쳐지나갔다.


방금 공격도 마찬가지.


겁만 주는 정도지 생명을 앗아가지는 않는다.


발카는 의뭉스럽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누가 창조해낸 건지 모르겠지만 참 취향 독특하다.


✣✣✣✣


[ ··· 책임은 전부 나에게 있는 걸요. ]


눈앞에 말갈기가 부드럽게 흔들린다.


돌이 튀어 오르고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난다.


귀가 먹먹하고 뇌는 징징 울린다.


자, 셋을 세면 저 붉은 눈을 가진 지휘관과 만나게 될 거야.


저 여자가 내 창자를 꿰뚫어서 이 모든 걸 다 끝내줄 거야.


마침내 기다리던 그 시간이야.


하나




셋 -


✣✣✣✣


붉은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하지 않았다.


페르디의 배신으로 성문이 열린 탓에 급히 후퇴해야 했던 플레어의 수비군을 흡수했어도, 붉은 군대의 병력은 아군과 비슷한 정도였다.


문제는 그 지휘관이었다.


지휘관, 유다 발카의 존재감이 단순한 숫자를 의미 없게 만들어 버렸다.


그건 결의나 용기를 압도하여 사람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비이성적인 무언가다.


사람을 써는 데 주저함이 없는 그녀가 어쩌면 지금은 탄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빛은 오직 하슬라를 꿰뚫을 듯 바라보고 있었다.


감히 가운데 땅 사제 노릇 하던 녀석이, 자기 주제도 모르고 덤비다니.


발카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 손을 고삐에서 떼어 등에 멘 창을 움켜쥐는 것을 하슬라는 똑똑히 보았다.


앞으로 셋을 세면 그녀와 조우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창이 자신을 꿰뚫을지 아닐지 결판날 것이다.


마침내 기다리던 그 시간이다.


하나, 둘, 셋 -


✣✣✣✣


[ ··· 책임은 전부 나에게 있는 걸요. ]


······


입에 흙이 가득하다.


언제 들어간 건지도 모르겠다.


손 안은 피와 땀이 섞여 끈적끈적하다.


누구의 피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숨이 붙어있고,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


나는 일어나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여기는 누워있기에 절대 좋은 장소가 아니다.


이곳에 누워있는 자들은 전부 죽은 자들뿐이다.


갓 태어난 송아지마냥 다리가 후들거린다.


자꾸 풀리려는 손아귀에 억지로 힘을 쏟아본다.


“ 당 ··· 잘못 ··· 신 ··· 탓 ······ ! ”


어디선가 들리는 새된 목소리에 나는 낙타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어디야? 어디에 있는 거야?


아, 찾았다.


플레어와 클리페오가 서로에게 검을 겨누고 있다.


한때는 최고의 신랑이자 신부였던 둘은 과거의 영광을 잃었다.


네 나라를 붙들어 맨 평화의 맹세도 깨지는 판에, 개인이 맺은 평생의 약속쯤이야 우습지.


그래서인지 둘의 표정은 절망적이다.


나는 둘에게로 다급하게 뛰어갔다.


내 여동생과 나의 아군, 둘 다 다치게 하기는 싫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예외다.


파토스의 공주, 루세르바의 왕자.


전쟁에서는 나처럼 맛있는 먹잇감이다.


발카도 맛있는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내가 뛰어오는 것을 본 그녀도 이쪽으로 뛰어온다.


그녀의 머리 뒤에는 후광처럼 지스크라의 환영이 일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 이곳에는 왜 왔냐고 물었잖아요? ”


플레어가 소리친다.


“ 날 또 괴롭게 하려고요? 예전의 일로는 모자란 가요? ”


“ 아니야, 아니에요. ”


“ 어서 공격해요. 검을 들라고요. ”


“ 그게 아니에요. 난 당신이랑 싸우려고 온 게 아니에요. ”


“ 그럼요? 뭘 원하는데요! ”


“ 용서를 ······ 용서를 빌고 싶었어요. ”


클리페오는 플레어의 상처받은 눈을 마주본다.


그녀는 아름답다.


“ 내 잘못이라는 걸 알아요. 이 모든 일이 전부 내 탓이라는 걸 ··· 그동안 부정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어요. 도망치는 것도 여기까지야. ”


왕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 상처 줘서 미안해요. 당신과 맺은 신성한 약속을 깨트려서 미안해요. 당신은 그런 일을 겪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어요. 당신은 훌륭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나처럼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과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았어요. 용서는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내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 내가 잘못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


“ 후회? ”


플레어는 마구 고개를 내젓는다.


“ 이제 와서 어쩌자고 그런 말을 해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데. 왜 지금 용서를 구하는 거예요? 왜? ”


“ 클리페오! ”


내가 소리치자 플레어가 움찔 떤다.


“ 가요. 마주치지 말아요, 클리페오. 나한테 용서를 구하지도 말아요. 이제 우린 용서할 필요도 없는 사이에요. 이미 끝난 일, 잊어버려요. ”


“ 플레어! ”


“ 다음에 만났을 때는 주저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 말도 듣지 않을 거예요! ”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친다.


“ 클리페오, 앞을 봐! ”


클리페오는 그제야 자신에게 달려오는 발카를 발견한다.


“ 잠깐! ”


플레어가 소리쳤다.


“ 유다! 잠깐 기다려! ”


발카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공주가 주저하는 이유는 그녀와 아무상관 없다.


달려가면 늦는다.


나는 땅에 꽂힌 창을 뽑아든다.


뒤로 두 세 걸음 물러났다가 앞으로 두 세 발짝 크게 뛰며 발카를 향해 투창을 던진다.


거의 클리페오에게 근접해있던 발카의 말 대가리가 투창에 맞아 박살이 난다.


그녀가 땅으로 구르자, 나는 겁에 질려 넘어진 클리페오에게 뛰어간다.


“ 너 죽으려고 왔어? ”


그를 보자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솟구치는 화를 억누르고 겨우 한 마디 한다.


“ 괜찮아? ”


클리페오의 표정에는 아무 감정도 나타나있지 않다.


너무 겁에 질리면 그럴 수도 있지.


“ 네가 왜 참전했나 했다. 플레어를 만나려고 그랬던 거냐? ”


“ 그래. ”


그의 목소리는 여상하다.


“ 이 멍청한 자식. 어서 일어나. 일어나서 싸워. 싸워서 살아나가라고! ”


“ 내가 어떻게 일어나? ”


클리페오는 정말로 이상하단 표정으로 날 본다.


“ 나는 이미 죽었는걸. ”


이런 대화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몇 바퀴를 구르던 발카는 어느새 일어나 서 있다.


“ 넘어지면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어서 일어나 ··· ”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클리페오의 배를 쳐다본다.


믿기지가 않아서, 오래도록 쳐다본다.


클리페오는 고저가 없는 평이한 어조로 말하고 있다.


“ 난 이미 죽었어, 하슬라. 넌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발카의 창에 꿰뚫리는 게 좀 더 빨랐지. ”


“ 무슨 소리야. 내가 방금 널 구했는데. 이럴 리가 없어. 말이 안 돼. ”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배를 눌러보았다.


그의 옷 위로 서서히 배어들다가 종국에는 울컥 솟구쳐 나오는 그건 틀림없이 피였다.


“ 이게 내가 바라던 결말이야. 더 이상 비난받지 않아도 돼.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없어. 드디어 이제 평화로워질 수 있어. 레도를 볼 수 있어. 아아, 레도 당신. ”


그는 내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어.


나는 소름이 끼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


속이 울렁거려서 토할 것 같다.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된다.


나는 설명을 구하기 위해 절박하게 주변을 둘러본다.


방금 전까지 곁에 있던 플레어와 발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다.


어디로 간 거지?


“ 당 ··· 잘못 ··· 신 ··· 탓 ······ ! ”


또 다른 새된 목소리가 들린다.


이번엔 무하의 목소리다.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다.


나는 다시 그쪽으로 뛰어간다.


✣✣✣✣


전투는 며칠 째 이어지고 있었다.


“ 저 괴물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한다! ”


그리고 결국 발카가 눈치 챘다.


“ 두려워하지 마라! 맞서 싸워라! ”


이제는 탄을 활용할 수가 없다.


붉은 군대의 기세가 더욱 거세어졌다.


무하도 질세라 있는 힘껏 소리쳤다.


“ 죽을힘을 다해 싸워라! 우리가 이길 것이다! ”


탄은 쭈욱 힘이 빠졌다.


욕심을 부려서 큰 몸이 되었는데, 이제 이 놈들은 자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배도 고파 죽겠다.


저 유다 발카라는 녀석이 제일 심하다.


옛날 같았으면 이미 자신에게 납작해져 있을 녀석이 건방지게 ···


피육 - 구멍이 난 풍선처럼 탄은 쭈글쭈글해지기 시작했다.


“ 으으! ”


탄은 울먹이며 무하를 찾았다.


저 아래 피 튀기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황금 눈의 여자가 보였다.


이제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정말 한계였다.


탄은 검은 울새로 변해 그녀의 어깨 위에 착지했다.


“ 고생했다. 이제 쉬어. ”


“ 무하, 나 재를 먹어야 해. 너무 힘들어. ”


배고픔에 괴로워하는 탄이 걱정되어 무하는 눈을 찌푸렸다.


허기는 탄이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당장 어디서 재를 구한단 말인가?


탄은 미친 듯이 몸체를 바꾸고 있었다.


울새에서 개구리로, 올챙이에서 개미로 그는 점점 더 작아지고 있었다.


이러다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어 완전히 소멸해버린다면 ······


설상가상으로 무하는 탄이 떨어지는 궤적을 쫓아온 발카의 부관과 마주치고 말았다.


한 잿사람이 지휘관을 보호하기 위해 날아왔지만, 공격을 간신히 피한 부관에게 옆구리를 크게 베였다.


“ 아악! ”


잿사람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철썩 곤두박질쳤다.


파토스의 병사가 쓰러진 그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었다.


“ 당신들은 상대하기가 너무 까다로워. ”


부관은 숨을 몰아쉬며 무하에게 다가갔다.


“ 루세르바 방패병들을 상대하다 보면 어느새 샤롯의 병사들이 불쑥 튀어나오고. 걔네들을 상대하다 보면 내 머리를 베어가려고 잿사람이 쫓아오고. 방금 내가 아끼는 병사는 사제들 뿔피리에 눈이 찔려서 죽었어. 당신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


“ 평화의 맹세를 어긴 건 파토스야. 너흰 그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거다! ”


무하는 크게 외치며 부관에게 달려들었다.


“ 워! ”


부관은 놀라서 재빨리 그녀의 검을 막아냈다.


그러나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그의 왼쪽 볼에 박혔고,


“ 아아! ”


무하는 힘이 빠진 부관의 팔을 밀쳐내고 목을 깔끔하게 베어버렸다.


그가 꿈꾸었던 평화로운 미래가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연인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목도한 발카가 울부짖었다.


“ 안 돼애애애애! ”


처절한 울부짖음에 사람들이 모두 목을 움츠렸다.


“ 내 사랑이 죽다니이이이! 감히 내 사랑을 ··· 감히 내 사람을! 시바아아아아알! ”


그녀는 분노와 슬픔으로 이성을 잃었다.


살아있는 것들을 전부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 그 중에서도 룩스 무하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그녀를 휘감았다.


“ 네 머리를 통째로 씹어 먹어주마! ”


달려오는 발카는 흡사 괴물 같았다.


탄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역겨운 공포가 다시 무하의 발밑에서 기어 올라왔다.


벌써 발카와 그녀의 거리는 몇 발짝으로 좁혀져 있었다.


“ 죽어! ”


머뭇거림도 없이 정확하게 빈틈을 찔러오는 공격.


그녀의 검 끝은 당연히 상대를 찌를 수 있다는 자신감과 반드시 찌르겠다는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하는 겨우 공격을 흘려보냈다.


단 한 번의 합인데도, 목덜미에 차가운 땀이 흘렀다.


검을 맞대어보면 알 수 있었다.


소문은 과장된 게 아니었다.


그녀는 감히 흉내 낼 수조차 없는 몰입도로 싸움에 임하는 대단한 전사였다.


“ 조심해. ”


탄이 힘없이 개미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하슬라가 널 도와주러 오고 있어. 조금만 버텨! ”


✣✣✣✣


[ ··· 책임은 전부 나에게 있는 걸요. ]


······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유다 발카가 언제 저렇게 멀리까지 갔지?


자꾸 머릿속이 빙그르르 도는 것 같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무하 지휘관님이 발카와 싸우고 있어.


빨리 가야 해. 빨리 가서 도와줘야 해.


낮과 밤이 계속 바뀌고 있다.


하늘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반복하니까 눈이 아프다.


“ 으아아아아아! ”


악을 쓰는 발카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른다.


그녀의 연인이었던 부관의 목은 제자리에서 계속 팽이처럼 돌아가고 있다.


나는 어떻게든 둘에게 도달하기 위해 애를 쓴다.


바닥에 누워있던 사람들이 내 발목을 한 번씩 세게 움켜쥐는 바람에 속도를 낼 수가 없다.


놓아줘. 놓아줘.


나는 계속 중얼거리면서 뛰어가려고 한다.


부탁이야. 부탁이야.


무하의 검이 저 멀리 날아간다.


이제 그녀에겐 방어 수단이 없다.


발카는 그녀의 멱살을 잡고 땅에 내동댕이친다.


그녀의 심장에 검이 꽂히기 직전이다.


“ 멈춰! ”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는 순간, 검은 연기가 발카의 시야를 가린다.


“ 이건 뭐야. 이건 뭐냐고! ”


발카는 당황하여 마구 검을 휘두르지만 연기는 계속 짙어진다.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탄이 용사님을 보호하고 있어.


“ 탄, 안 돼, 그만해! 죽이면 안 돼! ”


찢어지는 소리에 나는 몸이 굳는다.


무하 님이 애처롭게 애원하고 있다.


“ 불의 맹세를 잊었어? 너도 죽는다고! ”


검은 연기가 몽글몽글 뭉치더니 점차 사람의 형상을 띄어간다.


머리에 뿔이 난 검은 인간은 발카의 머리를 쥐고 옆으로 돌린다.


그녀의 머리 뒤에 떠 있던 지스크라의 얼굴이 심하게 일렁거린다.


우두둑 - 목이 부러진다.


인간 중에서 가장 강했던 발카의 몸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탄은 잿더미로 변해 바닥에 주저앉는다.


악명 높았던 괴물의 잔해는 땅 위의 다른 쓰레기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보잘것없다.


무하는 무릎을 꿇고 잿더미를 쓸어 모은다.


쓸고 또 쓸어 모아도 탄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 탄. ”


그녀는 속삭인다.


“ 탄.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귀신처럼 우뚝 서서 죽은 발카를 내려다보던 지스크라는 나를 쏘아본다.


“ 운명처럼 되었군. 그렇지? ”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아, 운명. 내가 널 죽일 거라는 그 예언?


나는 거칠게 항변한다.


“ 운명이고 뭐고 네가 여기 있을 리가 없어. 넌 지금 왕궁에 있잖아. ”


“ 발카는 곧 나야. 내가 곧 발카고. 그런데 네가 날 죽였잖아. ”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나는 뒷걸음질 친다.


안 되겠어. 후퇴 명령을 내려야겠어. 적의 지휘관이 죽었잖아. 우리가 이긴 거나 마찬가지야. 본진으로 돌아가자. 그 다음엔 수도까지 진군하는 거야.


나는 뿔나팔을 불기 위해 품속에 손을 넣는다.


어라.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런데 아무리 손을 깊숙이 넣어도 잡히는 게 없다.


“ 뿔나팔이 없어? ”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손에 사제의 뿔피리를 들고 서 있다.


꿈에 그리던, 내가 사랑하는 아그리나.


“ 이거라도 빌려줄까? ”


“ 아그리나, 돌아왔구나, 너! ”


나는 반갑게 그녀를 안으러 양 팔을 내민다.


그녀는 빙긋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


아름다운 아그리나.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아그리나.


“ 쟝 하슬라. ”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달콤하다.


“ 죗값을 치러야지. ”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


나는 크게 눈을 뜬다.


그녀가 뿔피리를 불고 있어.


불의 심판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나는 아그리나로부터 도망친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다.


심장 부근이 뜨겁다.


“ 괴로워! ”


나는 가슴을 쥐어뜯는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날 좀 데려가줘.


“ 야힐 사제님. 헤이든 사제님. 다들 어디 있어요? ”


나의 비명에 야힐과 헤이든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 응? 우린 여기 없어. ”


“ 네가 우리를 루세르바로 보냈잖아. ”


“ 방패병들과 잿사람들을 이끌고 산을 넘어서, ”


“ 왕궁을 탈환했지. ”


“ 내가 좀 다쳤기는 했지만 뭐 어때. 네가 이겼다는 게 중요한 거지. ”


“ 근데 왜 이렇게 죽상이야? 얼굴 좀 펴. ”


루세르바? 여기에 없다고?


그럼 날 도와줄 사람은 없어?


내가 죽어가고 있는데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


나는 결국 땅에 처박힌다.


뒤집힌 벌레처럼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눈이 위로 뒤집히는 와중에 하늘이 보인다.


낮과 밤을 반복하던 하늘은 멈추고 이제 완전한 빛 속에 잠겨있다.


비둘기 한 마리가 그 속을 날아가고 있다.


그것의 부리에는 누군가가 보낸 간절한 편지가 물려있다.


나는 비둘기를 향해 손을 뻗는다.


구구구 - 정겨운 소리에 눈물이 차오른다.


그것은 내 손 위로 편지를 떨어뜨리고 저 멀리 허공을 향해 날아간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는다.


✣✣✣✣


“ 으으으 - ”


신음소리에 야힐이 벌떡 일어났다.


“ 하슬라? ”


“ 무 ······ ”


“ 뭐? ”


“ 물 ······ ”


“ 물? 알았어, 알았어. ”


야힐은 하슬라의 고개를 살짝 일으킨 다음, 잔을 입에 가져다대었다.


그의 목울대가 바삐 울렁거리는 걸 보는 야힐의 표정은 기쁨에 차 있었다.


“ 정신 차려서 다행이야. 우리 전부 네가 꼼짝없이 이 침대에서 죽는 줄 알았어. 천천히 마셔. ”


하아! 극심한 갈증에서 벗어난 하슬라는 숨을 토해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과할 정도로 불을 세게 지펴놓은 벽난로와 두꺼운 초록색 커튼, 낡은 이불보와 이 장소에 참 어울리지 않는 야힐 사제가 보였다.


“ 여긴 어디에요? ”


“ 보테야의 병원이야. ”


야힐은 그를 흥분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의사가 환자가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며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


“ 네가 창에 찔린 후에 여기로 급하게 옮겼어. 치료는 잘 됐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렸던 탓인지 도통 깨어나질 않더라. ”


“ 그럼 전투는 ······ ”


“ 우리가 이겼어. ”


야힐은 손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는 그를 다시 눕혔다.


“ 일단 누워있어. 장장 일주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웠잖아. 너도 쉬어야 하지만, 우리도 쉬어야 해. 나 진짜 동상 걸릴 뻔했잖아. ”


하슬라는 붕대가 칭칭 감긴 자신의 옆구리를 내려다보았다.


유다 발카의 죽음을 목격한 다음, 무하를 보호하다 파토스 병사들에게 당한 상처였다.


지휘관님의 복수를 외치면서 자신에게 창을 찔러 넣던 병사의 우는 얼굴이 생생히 떠올랐다.


“ 다른 사람들은요? ”


“ 무하 지휘관님이랑 같이 수도 근처까지 진격해서 거기 머물고 있어. 싸울 수 없는 부상자들은 여기 병원에 있고, 시신은 수습해서 가족에게 보냈어. 탄의 시체는 ··· 재를 모아서 병에 담았어. 그것밖에 남은 게 없더라고. 그리고 아이기스 왕이 자기 나라를 위해 싸워줘서 정말 고맙다고 전해 달랬어. 루세르바를 안정시키면 왕자의 국상을 치룰 거라더라. 또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 ”


“ 이게 저한테서 나는 악취에요? ”


“ 맞아. 지금 나 입으로만 숨 쉬고 있잖아. ”


야힐은 아이처럼 웃었다.


방금 전 뒤죽박죽 섞여 끔찍했던 악몽은 그의 웃음소리를 듣자 아득한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 잔상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하슬라의 심장 부근은 뜨거웠다.


“ 일단 넌 뭘 좀 먹어야 해. 잠만 자니까 이렇게 야위지. 기다려봐. ”


야힐은 침대 밑으로 허리를 숙여 바구니를 뒤적거렸다.


그의 손이 침대 위로 올라올 때마다 이불 위에 먹을 것들이 하나 둘씩 쌓였다.


둥근 흰 빵, 까맣게 탄 빵(이건 왜 갖고 온 걸까?), 소시지 몇 조각, 육포 몇 점, 종이봉투로 싼 치즈 덩어리, 포도주를 속에 넣은 사탕, 포장지부터 앙증맞은 고급 과자들.


“ 이게 다 뭐에요? ”


“ 네가 아프다니까 여기 사람들이 조금씩 나눠준 거야. 네가 살인마를 잡아줬던 걸 기억하고 있더라고. 이래서 착하게 살아야 한다니까. ”


“ 설마 코트빈 사제관에서도 온 건 아니죠? ”


“ 맞는데. ”


야힐은 사탕을 입에 털어 넣더니 창백해진 하슬라의 얼굴을 보고 축 눈썹을 늘어뜨렸다.


내가 또 말실수를 ···


“ 아, 도두보 사제님 때문에 그러는구나. ”


“ 그분들, 절 원망했을 텐데요. 저주의 말은 퍼붓지 않으셨나요? ”


“ 원망 안하던걸. 저주도 없었고. 물론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지. 하지만 그건 그 사제님의 선택이었잖아? 음 ··· 일단 음식에 독은 없는 것 같아. ”


음식에 손도 대지 않는 하슬라를 보고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상체를 기울였다.


“ 하슬라, 내 말 잘 들어. 없는 말 지어내는 거 아니야. 코트빈 사제님들도 도두보 사제님이 전투에 나가는 걸 극구 말렸대. 그런데도 기어코 전쟁에 나가면서 자기들한테 그랬다더라. 파토스 1급 사제로서 의무를 지켜야 하니까 한번만 더 자길 말리면 머리를 다 깨버리겠다고. 하지만 너희는 하슬라와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라고. 자기가 어떻게 되든지, 자신의 책임이니 너희는 상관 말라고. ”


하슬라는 머리를 깨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도두보의 모습을 떠올렸다.


야힐의 손은 따뜻했고, 조곤조곤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 네가 왜 이렇게 불안해하는지 난 잘 몰라. 요 조그만 머리통에 뭐가 들어있을지, 감도 안 오고.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진 일에 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그리고 이 음식도 다 먹었으면 좋겠고. 응? ”


“ ······ ”


“ 응? ”


반짝거리는 그의 눈빛에 하슬라는 과자를 집어 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잘했어. ”


야힐은 흡족하게 웃으며 치즈를 한 입 크기로 쪼갰다.


그는 우물거리며 행복해했다.


“ 네가 이제 왕이 된다니, 믿기지가 않아. 하긴 진작 네가 됐어야 하는 거지만. 치즈 맛있다. 자, 빵에 올려서 먹어봐. ”


“ 사제님, 고마워요. ”


“ 일일이 감사인사 할 거 없어. 우리 사이에 참. ”


“ 부탁이 하나 있어요. ”


“ 야 ··· 나 좀 쉬자니까. ”


“ 편지 한 장만, 가운데 땅으로 보내도 되나요? ”


“ 웬 편지? 지금? ”


어리둥절한 그에게 하슬라는 미소 지었다.


“ 일단 먹고요. ”


“ 그래, 그래. 일단 먹고 봐. 이제 수도에 가면 지스크라를 만날 수 있겠네. 그리고 아그리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애한테 꼭 듣도록 해. 이 녀석이 우리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지스크라 옆에서 뭐하고 있는 거야? 어디 다치거나 갇혀있는 건 아니겠지, 혹시? 뭐 당하고만 있을 애는 아니다만 걱정 되는 건 어쩔 수 없네. ········· ”


[ 이번엔 널 찔러 죽일 거야. 옛날에도 그랬던 것처럼 ]

- 쟝 하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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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KILLING GINGERMAN (13) +2 21.01.23 82 4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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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KILLING GINGERMAN (11) +2 21.01.20 52 5 19쪽
104 KILLING GINGERMAN (10) +6 21.01.15 69 5 18쪽
103 KILLING GINGERMAN (9) +2 21.01.14 89 6 17쪽
102 KILLING GINGERMAN (8) +4 21.01.11 52 5 14쪽
101 KILLING GINGERMAN (7) +2 21.01.10 89 4 19쪽
100 KILLING GINGERMAN (6) +6 21.01.08 59 4 12쪽
99 KILLING GINGERMAN (5) +4 21.01.06 84 4 12쪽
98 KILLING GINGERMAN (4) +4 21.01.04 68 5 14쪽
97 KILLING GINGERMAN (3) +6 21.01.01 85 5 18쪽
96 KILLING GINGERMAN (2) +6 20.12.10 85 4 17쪽
95 KILLING GINGERMAN (1) +2 20.11.27 110 4 16쪽
94 비극의 절정 +6 20.11.21 80 5 12쪽
93 불행은 아득히 (2) +6 20.11.14 120 5 16쪽
92 불행은 아득히(1) +4 20.10.24 84 5 14쪽
91 비극 (3) +6 20.10.15 82 5 11쪽
90 비극 (2) +4 20.10.13 80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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