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슬프고 비참한 얘기죠. 하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장르 소설을 찾는 수많은 독자들은 자본주의가 유도하는 경쟁적인 삶에 지쳤죠.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는 눈이 아프며 핸드폰 화면은 쥐꼬리만합니다. 그리고 장르 소설을 찾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힘든 삶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힐링’ 혹은 ‘일탈’을 원합니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이 장르 소설은 ‘대리만족’이라는 단어 하나로 표현하죠. 독자들도 장르 문학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찾지 않으며 작가들도 별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은 드래곤 라자 이후로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죠. 철학적 성찰을 대리만족으로 느낄 독자들은 나날이 줄어가니까요.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들을 다음화로 넘어가게 만드려면, 쉽고 간편하고 빠르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줄 수밖에 없습니다.
소설이란 매체의 가장 큰 장점은 작중 인물에 대한 독자들의 감정이입입니다. 아무래도 3인칭 시점이 될수밖에 없는 영화나 애니메이션, 만화 등에 비해 소설 매체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이죠.
즉, 감정이입이란 소설의 강점을 잘 살려 대리만족을 가장 잘 시켜주는 게 장르 문학 독자들이 원하는 방향성이란 뜻입니다.
1. 감정이입이 잘된다.
작중 인물이 현실의 나와 비슷해야 합니다. 독자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죠.
사회 규모가 커지고 익명화될수록 선에 대한 리턴은 줄어드는데 악행의 리턴은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행으로 천천히 명성을 쌓아가는 건 농경사회에서나 유행하던 방식이죠. 그 시대엔 모두가 땅에 얽매여 있었고, 가장 큰 형벌은 사형 또는 유형이었습니다. 추방당하는 것만 해도 엄청난 형벌이 되었죠. 그래서 명예란 가치가 엄청나게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인천에서 추방당한다고 딱히 살기 곤란한 사람이 많을까요? 내가 알던 인간관계를 다 끊는다 해도 수백억의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신사 노릇을 하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더욱 잘 맺어갈수도 있는 세상입니다.
지금 뉴스에 나오는 닭고기를 예를 들어 보죠. (안 들킨 다면) 1년 지난 닭고기를 써서 치킨을 만드는 게 비용이 저렴하다면 다 그렇게 할 겁니다. 이건 악의를 가지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그저 더욱 싼 가격에 많은 소비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아주 좋은 의도로 저렴한 재료를 찾다보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즉, 인천에서 사기로 한탕해먹고 서울에서 잘 먹고 잘 산다면 그걸로 땡인 세상이란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악한 인물들이 더욱 쉽게 공감받죠. 그게 더 리얼하거든요. 사기와 상행위의 차이는 법이 그걸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차이일뿐입니다. 그리고 법은 분명 엄격하지만, 돈 있는 자들은 법을 어느 정도 마음대로 이용 가능합니다. 적어도 가난한 자들 보단 훨씬 쉽게 이용할 수 있습니다. 변호인단을 꾸려 버리면 되니까요. 혼자 연구하는 거랑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더욱 많이 준비한 자가 이기는 곳이 법정이거든요. 복잡한 민사소송에서 실체적 진실을 구별해내긴 정말 어렵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이득을 향해 나아갑니다. 누구나 악행을 저지르고 싶어하는 시대입니다. 그게 더 이득이 되니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선 선행에 대한 리턴이 아주 적습니다.
“윤리교육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대학 잘 가는 게 중요합니까?”
남의 아들들은 윤리 교육을 받는게 좋지만, 내 아들은 대학 잘 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게 정답이고요. 권선징악보다 권악징선이 흥하는 이유가 이겁니다. 요즘 사회 자체가 예전 소설들처럼 착하게만 살아서 이득볼 수 있는 구조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권선징악 소설이 나오면 영 감정이입이 안되죠. 개연성도 없어 보이고. 비현실적인 거 같고요.
2. 대리만족이 잘된다.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작중 인물의 욕망이 아주 커야 합니다.
욕망은 결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인물의 욕망을 크게 만드는 법은 아래로 내려가는 법과 위로 올라가는 법이 있겠죠. 소설 내의 적들이 끊임없이 주인공을 괴롭혀서 욕망이 커지는 것이나 아니면 주인공이 끊임없이 위로 상승해서 세상을 다 때려부수고 우주를 부수고 신을 죽이는 방식이 있습니다.
전자는 너무 심하게 쓰다간 독자를 지루하고 짜증나게 만들 우려가 있고 후자는 끊임없이 강한 적들을 창조해야 하며, 결국 신을 죽인 후에 더 이상 욕망할 이유가 없어진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죠.
둘째는 작중 인물의 욕망이 쉽고 빠르게 배출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위에서 밝혔듯이 모니터는 눈이 아프고 삶은 고단-몰라요. 제 삶만 그런 건지는 모르겠습니다-합니다. 학문적인 연구는 학자들에게 맡겨두는게 좋습니다. 대리만족이 쉽고 빠르지 않다면 차라리 TV나 영화를 보겠죠. 뭐하러 지루한 글자를 읽겠습니까? 욕망의 배출이 20장 이상 넘어가도록 해결되지 않는다면 독자들은 지루해하기 시작합니다.
즉, 종합하면 악인의 주인공이 큰 욕망을 쉽게 빠르게 배출하는 소설이 인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선징악을 찾는다면... 선작이 낮고 인기가 없는 글들에서 찾아보면 될 것입니다.
혹은 먼치킨의 이야기를 찾으면 됩니다. 주인공이 인간적인 문제에서 초탈해있다면, 위에 적은 예시들은 무효화될 테니까요. 얼마든지 선행을 할 수 있죠. 1人 국가이니 뭘 해도 되니까요. 이런 글들의 경우 먼치킨임에도 감성적인 면에서 독자들과 소통하여 감정이입을 성공시키려 할 것입니다. 대신 개연성을 그만큼 희생해야 하죠. 그걸 참고 본다면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간간히 착한 인물의 성공기도 흥행에 성공합니다. 윤리를 믿는, 믿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패턴이니까요. 또 특정 집단에서 쉽게 공감받을 수 있기도 하죠. 왜냐하면 사회의 모든 분야가 모두 익명적이고 집단 규모가 크진 않으니까요. 선행이 악행보다 이득이 되는 소규모 인간 관계를 이루고 생활하시는 분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물론 모두 그렇게 쓰라는 게 아닙니다. 인기 있는 상품을 만들고 싶으면 대리만족과 감정이입을 기억하라는 의미죠. 반면, 상품이 아닌 작품을 추구하는 작가분들은 흘려 들으시면 됩니다.
* 선작수, 추천 등이 높게 나오는 상품을 만들고 싶은 분인데 문학적 요소를 추구하는 분들도 꽤 있더군요. 반면 문학 작품을 추구하면서 선작수가 어떻니 추천이 어떻니 하시는 분들도 있고.
작품이든 상품이든 둘 중 무엇을 추구하든 그건 작가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추구하는 지 정확하게 알고 사용하면 글쓴이든 독자든 더욱 행복하지 않을까요? 그런 의도에서 적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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