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살아야겠다 (1)
얼굴은 반반하다.
그럴 만도 하다. 어찌 되었든 배우의 마스크니까.
"아, 아. 음······ 목소리도 좋고."
한 번쯤은 이런 외모에 목소리를 가져보고 싶다 생각하기는 했다.
그걸 이런 형태로 갖게 될 줄은 몰랐지만.
처음에는 이 배우에게 빙의라도 한 건 줄 알았다. 정답은 비슷했지만 달랐다.
배우가 아니라 배역이다.
그의 누이가 쓴 드라마, '유별난 그녀'에 등장하는 악역, 한준수.
당장 지금도 이 배역이 지니고 있던 수많은 기억들이 그의 머릿속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그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준수는 지금 배우의 몸에 빙의된 게 아니라, 그의 누이, 소연이 쓴 드라마 속 캐릭터가 되어버렸다는 걸.
누군가는 썩 나쁘지 않은 일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일개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 한순간에 재벌 2세급 금수저가 되었으니까.
근사한 비쥬얼은 덤이고.
문제는 이 캐릭터가 맞게 될 최후였다.
—꽤나 비참한 데드씬을 준비해뒀지.
소연이 감사하게도 이 캐릭터에 전남친에 대한 증오를 잔뜩 담아준 덕분에, 그에게는 죽음이 약속되어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비참한 죽음이.
'골 때리네.'
머리가 지끈거렸다. 빙의야 그렇다 쳐도, 갑자기 이렇게 생존에 대해 걱정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상황이 어딘가 재밌게 느껴진다면 이상한 걸까.
빙의. 현실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작품에서는 흔한 클리셰다. 그래서 사실 준수는 지금 그렇게까지 패닉 상태도 아니었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어찌 됐든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은 빠른 적응이었다.
'기억도 있겠다, 적응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진 않고······.'
나름 드라마 작가로서 여러 작품들을 접해보고 준비해본 만큼, 준수는 사태 판단을 빠르게 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상황은 드라마적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드문 이야기는 아니다.
현실에서 멀쩡하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이세계에 떨어진다는 건 이미 케케묵은 장르가 되어버린지 오래였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고민하는 것도 의미가 없고, 어떻게 나갈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웬만한 이야기에서 이런 건 전개가 되다 보면 알아서 풀리기 마련이었다. 그가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데드 플래그.
'비참한 죽음이랬지.'
한준수는 악역이다. 그 말인즉슨 악연 또한 많다는 이야기다. 한준수를 죽이고 싶어할 사람은 많았다.
당장 여주인공 '유별’도 한준수라는 이름이 나오면 바로 이를 가는 이였고.
'이미 한준수랑 사이가 나빠진 후인가?'
유별과 한준수의 악연은 간단하다.
KM엔터테인먼트의 대표, 한강만의 아들에 전략기획본부장이라는 지위. 이를 바탕으로 한준수는 유별에게 그가 속해있는 최상류층 자제들의 모임, '티탄 클럽’의 리더 강지섭과의 술자리에 나갈 걸 권유했다. 강지섭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탓이었다.
권유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그의 위치를 생각하면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일개 연습생이 본부장의 말을 거스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유별은 기껏 들어온 KM엔터테인먼트로부터 나갈 생각까지 하게 된다.
준수는 그의 머릿속에 깃들어있는 준수의 조각난 기억들을 들여다봤다. 유별과 관련된 기억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미 지났네. 젠장.'
이미 월말평가에서 유별에게 대놓고 면박을 준 기억들이 비교적 생생하게 남아있다.
부당한 평가였다. 유별은 다른 연습생들에 비해 훨씬 기량이 괜찮은 편이었다.
월말평가의 결과에 따라 데뷔 시기가 늦춰질 수 있는 것은 물론 심할 경우 연습생 지위조차 위태로워질 있다는 걸 감안했을 때, 그는 유별의 목줄을 쥐고 흔든 셈이었다.
비열하고, 거칠게.
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출근부터 해야 했다. 몸에 배인 습관대로 현관 앞 선반 위로 손을 뻗은 그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손에 벤틀리 차키가 들려있다.
'······이 삶, 역시 재밌을 것 같기도 한데?'
#
재밌을 것 같다는 말은 취소.
출근을 하자마자, 준수는 악역의 삶이라는 게 대충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그를 마주치는 직원들이 누구 하나 제외할 것 없이 살살 눈을 피하거나 과하게 가식적인 미소로 허리를 굽혀보이는 것이다. 마치 그가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먼 발치에서라도 그가 보인다 싶으면 직원들이 재빠르게 어딘가로 사라지는 게 마치 그가 역병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렇게 그를 두려워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당장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여자만 해도 그랬고.
유별.
이 작품, '유별난 그녀'의 여주인공.
"본부장님, 저는 진짜 이해할 수 없어요."
문제는 그녀가 꽤나 화가 난 눈치라는 거지만.
그 와중에도 준수는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쌍꺼풀 없는 눈, 떡진 머리를 대충 누른 모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질감이 들 정도로 너무나 노골적인 아름다움.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괜히 웃음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그 여자가 본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면 어떨까.
"왜 제가 B 팀으로 내려가게 된 거에요?"
"월말평가 때문에."
"그러니까, 그 월말평가에서 왜 제가 낙제점을 받은 건데요! 말이 안 되잖아요!"
원래라면 그런 부당 대우를 받았다고 바로 본부장에게 와서 따지는 연습생이 더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에서 그런 현실성을 기대하는 것도 어리석다. 준수는 턱을 매만졌다.
'이걸 어쩔까.'
유별과의 갈등은 이미 시작되어버렸다. 드라마로 치면 대충 3화 근처인가. 1편과 2편이 유별의 어머니가 나오는 과거 시점이란 걸 감안하면 사실상 극초반에 해당했다.
'사과를 할 수도 있긴 한데.'
물론 지금이라도 진솔하게 사과를 한다면 유별은 그를 용서해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캐릭터니까.
드라마 주인공 특유의 비현실적인 순수함과 정의감을 동시에 가진 캐릭터.
소연이 말한대로 대중이 상상이 현실로 되는 걸 갈구한다면,
그녀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그들의 갈증을 채워주겠지.
유별은 어른이 되면서 그들이 버릴 수밖에 없던 낭만과 이상 그 자체였으니까.
문제는 과연 사과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냐는 거였다.
유별의 용서를 지금 이 시점에 얻어내는 것이 과연 가장 현명한 길일까.
아니, 그건 너무 즉흥적인 선택이다. 드라마 작가의 시선에서 봤을 때, 이런 관계는 오히려 장기적으로 보다가 한순간에 반전시키는 게 나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떡해야 할까.
당장 관계를 회복할 게 아니라면, 여전히 유별이 그를 오해하게 남겨둬야 한다는 것인데······.
막장 드라마, '유별난 그녀'의 특성을 활용할 만한 전개는 뭐가 있을까.
—막장은 별 거 없어.
문득 소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래도 돼? 싶은 걸 그냥 하면 돼.
그런 게 있을까.
······생각해보니 아주 많긴 하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건 그가 자랑하는 재능 중 하나였으니까.
머릿속 선택지들을 더듬던 준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촉이 왔다.
"왜 말이 안 되지?"
"뭐, 뭐라고요?"
"네가 너 자신에게 자신감을 갖는 건 좋아. 근데 심사위원들도 네가 생각하는 대로 널 평가해야 된다, 이거냐?"
그럴 듯하게 들릴진 몰라도, 헛소리다.
설정상 유별은 아이돌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 싶을 정도로 모든 능력치가 극에 달해있는 캐릭터였다.
외모, 춤, 연기, 예능감.
어느 것 하나 떨어지는 게 없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존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그걸 무시할 수 있기에 악역이고,
그렇기에 막장이다.
"건방 떨지 마라. 세상에 너보다 잘난 사람 많고 많아. 네가 가진 가능성은 부정 안 하겠다만, 네 준비가 끝났냐 물으면 이야기는 달라."
"그런 식으로 둘러대지 마세요! 그런 이유가 아니잖아요!"
"그런 이유가 아니면?"
무슨 이유인지 사실 알고 있는데 가슴이 뜨끔거리지도 않는다.
한준수라는 캐릭터가 원래 갖고 있던 뻔뻔스럽고 염치 없는 성정 탓일까. 소연은 한준수를 전남친 경석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준수가 기억하는 경석은 소연의 수많은 전남친 중에서도 손에 꼽게 재수 없는 놈이었다.
"무슨 이유인데?"
"······그걸 제 입으로 말하라고요?"
"말해. 듣고 있잖아. 왜 못하는데?"
준수는 말하면서도 새삼 느꼈다.
유별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예뻤다. 그가 이렇게까지 동요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으으······!"
그리고 그 때였다. 유별이 준수의 앞에 놓여있던 물컵을 움켜쥐었다. 준수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에이, 설마, 아무리 막장이라고 해도 저걸 던지겠어?
다행히 유별은 그걸 던지는 대신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컵이 깨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테이블 위에 강하게 내려찍었다.
"좋아요. 이번에는 그 말이 맞다고 치죠. 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식으로 넘어가실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넘어가준 건 나지."
준수는 무표정하게 유별을 바라보았다.
"그런 태도, 다시는 어디 가서 보이지 마라. 일이 원하는 대로 안 풀린다고 떼 쓸 나이는 지났어. 경고로 끝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아들었냐?"
"우······!"
떼를 쓴다는 말이 억울한 건지, 유별은 뭐라 대답하는 대신 분을 참는 소리만 냈다. 한순간에 잘못한 사람과 책하는 사람의 입장이 뒤바뀌었으니 어이 없을 만도 했다.
그래서 준수는 저도 모르게 순간 웃고 말았다가, 빠르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나가봐."
컨셉은 유지해야지.
"다음에 올 때는 예의가 뭔지 공부 좀 해서 오고."
"······두고봐요. 진짜."
유별은 마지막까지 그를 째려보고서는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그제서야 준수는 비로소 마음껏 킥킥대며 웃었다.
그의 누나가, 소연이 쓴 드라마에는 보통 늘 패턴이 있었다.
악역이 그녀의 전남친에게서 엿보이던 얄미운 점들을 죄다 갖고 있었다면, 여주인공은 늘 그녀가 어릴 적 가진 성격을 그대로 쏙 빼닮았다.
고집스럽고, 자신만만하고, 감정에 충실한······
정의의 꼬맹이.
'유별은 어린 누나의 페르소나다······ 이거지.'
그 말인즉슨 유별의 행동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힌다는 이야기였다.
소연은 어렸을 적에 조금, 아니 굉장히 폭력적인 누나였고, 그녀에게 맞지 않기 위해서라도 준수는 늘 그녀의 심리를 읽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원작에서 한준수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준수가 여러 악업을 쌓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 악업으로 인한 철퇴를 맞는다는 게 가장 합당한 추리일 것이다.
막장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같은 드라마 작가로서 준수는 이 이야기의 전개가 어떻게 흘러갈지 대충 감이 잡혔다.
그 말인즉슨, 그가 앞으로의 이야기를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작가처럼.
'······막장 드라마는 절대 쓸 일 없다 생각했는데.'
어쩔 수 없다. 촬영은 이미 시작되었고, 카메라 밖으로 나갈 방법은 없는 듯하니······
써야겠다. 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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