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이안페이드2: 해삼위발 입찰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퓨전, 대체역사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13.11.15 15:04
최근연재일 :
2013.12.11 22:23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35,839
추천수 :
736
글자수 :
150,275

작성
13.12.09 23:16
조회
1,162
추천
36
글자
20쪽

Chapter. (17)

DUMMY

시베리아의 광산 저 깊숙한 곳에서

의연히 견디어주게

참혹한 그대들의 노동도

드높은 사색의 노력도 헛되지 않을 것이네


불우하지만 지조 높은 애인도

어두운 지하에 숨어 있는 희망도

용기와 기쁨을 일깨우나니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은 오게 될 것이네


-푸시킨 [시베리아에 보낸다] 中-



(17)


개선문 광장까지 가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막혀 있는 바리케이트도, 그의 앞을 가로막는 군인들도 없었다. 자욱한 화약냄새가 진동하며 그을음이 바람을 타고 아침 햇살에 반짝이며 날고 있을 뿐이었다. 건물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넘어져 있었다. 어젯밤 체코군의 막사에서 본 듯한 병사도 있었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다니다가 변을 당한 듯한 러시아인들도 있었다. 노파는 보도에 웅크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 쥔 채 미동도 없이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있었고 그 앞에서 한 여인이 죽은 지아비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었다. 이안은 말없이 주변의 광경을 살피며 길거리를 걸어갔다.


아이리쉬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밤을 꼬박 새운 대다 어깨의 자상은 이제 악화될 데로 악화된 상태였다. 온 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팠다. 조금만 더 몸을 밀어붙이면 한계가 다가오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하지만 밤을 꼬박 새우며 총탄 사이를 뚫고 나왔어도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앞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저기 쓰러진 군인들의 시체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태반은 러시아인들의 숫자였지만 그중에는 카우보이도 있었고, 조금이나마 미군들의 주검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군의 숫자는 갈수록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이안은 건물의 모서리에 주저앉아 자신의 팔에 붕대를 두르고 있는 미군을 쳐다보았다. 미군이 흘끗 이안을 쳐다보았다. 아예 총을 겨누지도 않는 병사의 얼굴은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밥 코왈스키 상사를 찾아왔소.”

병사는 이안을 쳐다보더니 낯이 익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상사님은 지금 최전선에 있습니다. 그렇게 빈 몸으로 가면 위험할 거요,”

이안이 슬쩍 코트 뒤의 권총을 보이자 병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앞에 볼셰비키들이 모여 있습니다. 보시는 바대로 거의 다 진압했지만 아직 거세게 저항하는군요. 두목이 여간내기가 아닙니다.”


“그나저나 왜 미군들이 주둔지를 벗어난 거요?”

이안의 물음에 미군의 눈에 분노의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야밤에 우리 쪽으로 기습을 시도했습니다. 모든 연합군을 다 습격한 것 같더군요. 하여간 연합군은 모두 러시아에서 나가라 어쩌고 하면서 들이닥쳤습니다. 저야 러시아 말을 모르지만 하여간 그랬다더군요.”

미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이안을 쳐다보았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었지요. 진압은 모든 연합군이 같이 시작했을 겁니다.”


이안은 끄덕이고는 병사의 어깨를 두들기고 앞으로 다시 전진했다. 거리의 여기저기에 상자들과 마차를 얽어 놓은 엄폐물과 바리케이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미군과 볼셰비키, 그리고 국적 불명의 병사들이 보였다. 카우보이들의 시체도 여기저기 보이는 걸로 봐서 막판에 카우보이들은 볼셰비키를 토벌하러 왔던 게 틀림없었다. 아니, 애초에 일본군과 연합을 했던 자들이니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안은 좁은 골목을 지나 다시 대로변으로 길을 틀었다. 거기는 지금까지 지나 온 것보다 훨씬 많은 엄페물이 놓여 있었고, 훨씬 많은 병사의 주검이 놓여 있었다. 여기저기 건물 벽에 생겨난 총탄자국과 깨진 유리창이 격전의 중심지라는 것을 말없이 증언했다. 이안은 상체를 숙이고 엄폐물 사이를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앞으로 다가섰다. 대로의 끝에는 높은 탑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나 있었고, 그 아래 상자들을 쌓아놓은 바리케이트 뒤에 일단의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미군이었다. 그들 중 거구의 코왈스키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밥, 네가 왔네.”

어깨를 툭 치자 코왈스키는 인상을 찌푸렸다.


“굿 나잇 앤 굿 모닝이라고 해 줄까? 이안, 일은 다 끝난 것 아닌가? 설마 내가 걱정되어 온 건 아니겠지?”


“러시아인에게 볼일이 있어. 앞에 있는 게 미스터 아랄킨 맞나? 유리 아랄킨.”

밥 코왈스키는 땅에 침을 뱉았다.


“저 탑 위에 있는 모양이야. 망할 마약쟁이 녀석.”

이안은 슬쩍 뒤의 유리창에 비친 탑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4층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건물들이 모두 낮은지라 개활지의 감시탑마냥 주변 모든 것을 관찰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설상가상, 탑까지 가는 도로는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군인들의 시체 말고는.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밥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약쟁이치고는 대단한 저격수야. 도저히 앞으로 한 발짝도 못 나가겠더군. 여기서 30분 넘게 묶여 있네.”


“라인강 동쪽에서는 최고의 사수라더군.”


“러시아인다운 허풍이군, 하지만 아주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 우리 애들이 많이 다쳤거든. 그나저나 저 녀석이 마지막 같은데 곤란해.”

이안이 슬쩍 상자의 틈 사이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 상황에서는 권총이 닿을 사거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유리는 만나야만 했다. 나타샤의 행방을 아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안이 밥 코왈스키를 돌아보았다.


“내가 가겠어.”

밥이 이안의 어깨를 잡았다. 미쳤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러시아에 무덤을 쓰러 여기까지 넘어왔나? 이안, 일어서자마자 개죽음이야. 길까지 내닫지도 못한다고.”


“엄호해주게.”


“나더러 대신 죽으라고?”


“죽지 말게.”

밥은 멍청한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타강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메아리쳤다. 누군가의 신음이 들려왔고 분노에 찬 병사들의 고함이 다시금 들렸다. 밥의 이가 짐승처럼 드러났다.


“망할 놈의 러시안! 우리 애들을 다 넘겨버릴 작정이군!”


“엄호하게.”


“죽겠다고?”


“여자를 구해야 해. 인질을 잡고 있네. 봤나?”


“빌어먹을, 몇 년 만에 만나서 한다는 짓거리가 칼 맞고 총싸움에 여자타령이냐? 이 멍청한 아일랜드 친구야!”


“뛰는 것과 동시에 쏘는 거야.”

아이리쉬의 차가운 눈이 폴란드인의 동그란 눈과 마주쳤다. 이윽고 폴란드 친구의 눈에 조금씩 화염이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분노로 드러났던 밥의 이가 슬쩍 옆으로 벌어지며 웃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미치광이 아이리쉬, 여자가 미인이기를 바라. 그리고 내가 여기서 자네의 뼈를 고향으로 가져가지 않기도 바라고.”


“정신나간 폴리쉬, 내 등이나 쏘지 말게.”


“성모님께 기도나 드려. 엉덩이를 노릴 테니까.”

두 사내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성호를 그었다. 두 사내는 조용히 마차 뒤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작은 작대기 하나가 창문에 나타났다.


“4층 오른쪽 두 번째 창문!”


“좋아!”

부서진 마차를 앞에 두고 이안이 사냥개처럼 튀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밥 코왈스키가 재빨리 4층을 향해 스프링필드 라이플을 겨누었다. 쾅하는 소리가 이안의 뒤에서 울렸다. 동시에 건물의 창가에 흰 연기가 풀썩 피어올랐다. 잠시 뒤 총구가 번쩍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안은 재빨리 옆으로 구르다시피 하면서 자리를 피했다. 팍 하는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울렸다. 유리는 이안을 노리고 있는 게 확실했다. 이안은 자세를 낮추고 다시금 결사적으로 뛰었다. 뒤에서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전력질주! 이안은 다시금 몸을 세우고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뛰었다. 가로등이 눈 앞에 다가왔다. 성모님 제발! 재빨리 이안이 머리를 가로등에 붙이는 것과 동시에 탱 하는 굉음이 가로등을 흔들었다.


‘빌어먹을 러시안, 머리를 노리는군.’

쾅 하는 스프링필드의 굉음이 지축을 흔들자 다시 이안은 앞을 향해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미 저격하는 건물이 커다랗게 육안에 들어왔다. 유리가 먼지가 흩날리는 창문 앞으로 아예 몸을 내 놓고 총을 겨누었다. 자신이 총을 맞을 것을 도외시한 몸짓이었다. 이안을 끝장내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러시아인의 몸을 확인하자마자 이안은 반사적으로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타강하는 소리가 이제는 바로 앞에서 울렸다. 동시에 이안의 다리 사이로 돌파편이 튀면서 뒤로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간발의 차이! 이런 식으로는 한계가 자명했다. 이안은 체력의 한계를 느꼈다. 다리가 천근처럼 무거웠다.


‘스프링필드는 다섯 발, 러시아인은 몇 발이지?’

총성으로 짐작하건대 그가 코날의 기관차에서 썼던 그 총과 같은 종류일 것이다. 몇 발이나 장탄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다섯 발? 여섯 발? 명중율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단점이라고는 단 한 가지, 무지막지한 반동이었다. 아무리 노련한 저격수라도 조준에 일정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 찰나의 시간이 이안의 생명줄이었다.

순간 쾅 쾅 하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밥 코왈스키가 연사 하는 소리였다. 맙소사. 저 친구도 몸을 드러내고 사격을 한 건가? 이안은 재빨리 몸을 피하면서 다시금 앞으로 뛰어나갔다. 쓰러진 병사의 시신이 앞에 보였다. 재빨리 시체를 타고 넘으며 앞으로 구르는 사이 퍽 하는 소리가 앞에서 들렸다. 쓰러진 병사가 들썩였다. 자신의 목 바로 옆으로 총탄이 박힌 것이다. 이안은 구르면서 건물을 향해 돌진했다. 이제 모든 것은 천운이다. 성 패트릭이여 굽어살피소서!

이안은 순식간에 건물 앞으로 쇄도했다. 탕탕거리는 소리가 몇 번 울렸지만 모두 그의 발걸음보다 한참 먼 곳에 떨어졌다. 권총탄! 라이플의 탄창이 다 했다는 소리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안은 재빨리 건물 1층 입구로 몸을 날렸다. 천운이었다. 거의 100미터가 되는 길을 상처 하나 없이 질주해 온 것이다.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뛰어온 마차 쪽에서도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코왈스키.”

마차 뒤의 인기척은 없었다. 이안은 눈을 부릅뜨고 건물의 계단을 노려보았다. 4층, 건물 위쪽엔 유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올라오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오른쪽 어깨의 통증이 그제야 찡하며 울려퍼졌다. 가슴이 두망방이질을 쳤다. 토악질이 밀려 올라왔다. 조금씩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누른 채 이안은 왼손으로 총을 빼들었다. 왼손이나 오른손이나 이안에게 있어서 사격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왼손의 감각이 오른손보다 날카로울 때가 많았다.

‘모두 지옥의 문턱에 발을 올려 놓은 건 마찬가지야.’

이안은 결심한 듯 계단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총으로 위층을 겨누며 한발 한발 마비된 발을 옮기듯 천천히 계단을 디뎠다. 2층을 올라갔을 때 이안은 십 년은 계단에서 지샌듯한 기분이 들었다. 끝없이 위로 연결된 계단이 마치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인 양 두렵고 신성하게 보였다. 이안은 떨리는 오른팔로 성호를 그으며 다시 3층 계단으로, 4층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총구가 시선보다 먼저 공간을 점했다. 아무것도 걸리는 것은 없었다. 이 건물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유리와 이안 두 사내뿐이었다. 총소리도 온데간데없었다. 사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4층의 계단참에 발을 디디는 순간까지도 이안은 고요함 속에 온전히 몸을 맡기고,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아 사격을 거행한 두 번째 창문을 향해 움직였다. 이안의 생각대로 유리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명사수에 바보도 아니지. 하지만 이런 싸움은 바보짓이야.’


유리의 흔적을 찾아 이안은 총구를 돌리며 고양이과 짐승처럼 앞으로 허리를 굽히고 발을 뻗었다. 긴 복도가 유리창을 따라 나 있는 가운데 방들이 뒤쪽으로 붙어 있는 작은 건물이었다. 아마 이 방 가운데 한 곳에 있을 터였다. 어쩌면 한 층 더 위로 올라갔을지도 몰랐다. 건물 어딘가에서 그 강력한 라이플에 방아쇠를 걸어놓은 채 이안이 시선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사냥꾼은 움직이지 않아. 움직이는 건 야수지.’


이안은 숨을 죽였다. 스산한 바람소리만이 깨진 창문 사이로 들려왔다. 이안은 부서진 창문 가까이 몸을 붙였다. 코왈스키의 응사도 꽤나 만만치 않았던 듯, 창문의 테두리는 아예 날아가 버린 뒤였고 회벽은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었다. 코왈스키의 사격은 명중은 안 되었더라도 집탄 능력은 대단했다. 거의 벽 한 곳을 박살을 내놓은 상태였다. 산산이 부서진 회벽의 고운 가루들이 복도에 자욱이 깔린 것이 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그 가루들은 무언가에 쓸려서 긴 자국을 만들고 있었고 그 자국은 복도 끝의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안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방을 향해 전진했다. 끝에서 두 번째 있는 작은 방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안의 뺨으로 땀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아마도 이 벽 뒤에 웅크리고 있을 친구도 땀을 흘리고 있을 터였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 건물 안을 휘감았다. 부서진 횟가루가 볼셰비키의 삐라와 함께 바닥에서 낮게 떠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의미를 잃은 종이가 의미 없는 싸움터 가운데에서 돌아다녔다. 시간이 정지한 상황이었다.

마치 영원의 가운데 존재하는 신의 성소에서, 무한한 침묵의 세례를 받으며 가만히 무릎을 꿇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 발의 탄피가 바닥에 떨어지는 작은 소리.

탄피가 튕기는 소리가 이안의 귀에 성당의 종소리처럼 울렸다. 본능적으로 이안의 피스메이커가 그 쪽을 겨누었고, 이안은 몸을 낮게 숙이며 방을 향해 미끄러지듯 뛰어들었다. 사내 한 명이 웅크리고 있는 듯한 형상, 이안의 손가락은 이성의 통제를 받기 전 이미 방아쇠를 당겼고, 왼손의 피스메이커가 상대를 겨눌 때 오른손이 내려와 해머를 긁어댔다. 패닝(fanning)과 동시에 여섯 번의 천둥과 번개가 동시에 총구에서 빠져나갔다. 신의 심판처럼 좁은 방 안에 벼락이 떨어지며 사방을 울리고 벽을 울리고 사람을 짓이기며 단죄하였다. 흐릿한 사내의 잔영이 순식간에 강철의 세례를 받고 뒤로 튀어 올랐다. 공중에 뜬 유리는 마치 날개 돋친 천사인양 우아하고 천천히 공중에서 맴을 돌고 있었다.


이안은 몸을 일으키며 코트를 털었다. 대자로 뻗은 유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쿨럭거리며 피를 토하는 러시아 청년은 이내 떨궈진 권총을 주우려 노력했지만 곧 부질없다는 듯 손을 거두고는 천장을 보며 웃었다. 폐에 맞은 듯 쿨럭일 때마다 가슴과 입의 피가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죽는 건 처음인데 생각보다 훨씬……지독하군.”


“나타샤는 어디있나.”


“하……이거야 원.”

유리의 파란 눈동자가 슬쩍 곁눈질하며 이안을 쳐다보았다. 사내의 붉은 입술에 슬쩍 미소가 흘렀다.


“난 내가 기사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 용(龍)이더군. 기사는 따로 있었어.”


“어디 있나. 머레이 앤 햇필드인가?”


“5층에 있네. 열쇠는 내 주머니에 있지. 내가……왜……그런 놈들에게 나타샤를……”

유리의 기침이 심해졌다. 러시아인의 얼굴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사나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자부심인지, 죽음을 자각하지 못함인지 알 수 없었다. 이안은 사내의 옆에 앉았다. 유리가 이안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말했다.


“상하이 최고의 명사수, 대단하군.”


“자네도.”


“재미있었어.”

이안의 머리 위로 바람이 불어왔고, 유리의 머리카락도 같이 흩날렸다. 주어진 시간이 별로 많지 않음을 사내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안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왜 그 때 나를 도왔나? 아니, 왜 이런 일을 한 건가.”


“키에프에서 벗어났을 때……수많은 외국인이 러시아로 뛰어들었다. 우린 그들을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어. 백군(白軍)의 친구거나 적군(赤軍)의 친구거나……죽는 건 러시아인들뿐이었다.”

유리의 목이 꿀럭 울리자 피가 입에서 새어나왔다.


“난 말이네. 내 민족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 일본군이던 미군이건…….하다 못해 백군이나 적군 같은 동족에게 죽는 걸 더는 보고 싶지 않았지.”

입술 아래로 붉은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는 멍하니 천정을 쳐다본 채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영국 무기상인에게 의탁한 거야. 마약을 팔면 돈을 주겠다더군. 군자금을 만들어 주겠다는 거야. 그래서 그들과 함께했어. 조선인들을 방해했어야 했고.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 나도……마약은……싫거든.”


“왜 조선인들을 카우보이들이 막은 건가?”


“조선인들이 무장하면……마약루트에 방해물이 생기니까. 북만주에.”

그제야 이안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셈이었다. 왜 머레이 앤 햇필드가 조선인들의 계획을 지속적으로 방해를 계속 했는지 해답을 얻은 것이다. 더불어 이안은 머레이 앤 햇필드의 계략에도 한숨을 쉬었다. 유리 역시 장기판의 말이었다. 군자금 같은 건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총을 쓰는 러시아인들이 조금 필요했던 것일 뿐.


“이제 끝날 것 같군. 인민들의 천국이 보이네.”

유리가 히죽 웃으면서 농담을 해댔다. 아마 사내의 얼굴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자넨 황제파 아닌가.”


“여전히 황제파야.”


“하지만 볼셰비키로 살았잖은가.”

이안의 물음에 빤히 유리는 아이리쉬를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인가 미소는 사라진 채, 형형한 눈빛만이 남아 준엄하게 이안을 올려보고 있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사내의 입에서 명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라면……어떻게 하겠나 아이리쉬?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묵묵히 러시아인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유리는 손을 내밀었다. 이안 역시 손을 내밀어 유리의 손을 잡았다. 유리의 입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이 사내는 무기가 필요했다. 볼셰비키를 위해서. 두 가지 생각이 이안의 머릿속을 지나갔을 때, 이안은 마지막에 생각한 문구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볼셰비키가 아니라 황제파가 이곳에 있었어도 이 사내는 열강에게 대항했겠지. 자네라면 어떻게 하겠나? 러시아인의 물음이 가라앉지 않는 반향으로 이안의 가슴에 다시 메아리쳤다. 아이리쉬, 아이리쉬.


“타샤에게 미안하다 전해주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러시아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이안은 뒤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은 뒤 사내의 손을 가슴팍에 모아주고 열쇠를 꺼내 들었다. 열쇠를 들고 방을 빠져나가며 이안은 깨진 창문 바깥으로 교차로를 바라보았다. 멀리 목재 마차가 보였다. 이안의 얼굴이 창문으로 보이자 소총 하나가 마차의 뒤에서 흔들거렸다. 코왈스키는 무사했다. 그나마 그 사실 하나가 이안의 가슴에 맺힌 두꺼운 사슬 하나를 풀어주었다.


5층의 방문을 열자, 검은 코트를 걸친 나타샤가 해쓱한 얼굴로 말없이 걸어나왔다. 여인은 잠시 건물 위에서 시내의 정경을 살펴보았다. 눈을 쉴새 없이 깜박이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포격소리가 마치 장단을 맞추듯 일정한 박자로 땅을 울렸다. 이안은 나타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고, 나타샤 역시 사내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유리는 아래에 있나요?”

조국의 날씨만큼이나 황량한 목소리였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타샤 역시 짧게 고개를 움직였다. 여인의 눈매가 붉어졌다.


“끝난 거죠?”


“미안하다고 전하라 했소.”

여인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둑을 타고 넘듯 주르르 흘러내렸다. 굳게 다문 턱이 바르르 떨리며 눈물이 아래로 가서 맺히는 것이 아이리쉬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그제야 자신의 할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자각했다. 모든 일의 끝에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블라디보스톡에서 처리해야 할 마지막 사명이.


“마무리를 짓고 오리다.”


나타샤는 아무 말없이 건물 밖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내는 뒤 돌아보지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이안페이드2: 해삼위발 입찰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이안페이드 : 상하이행 특송 (1부 이야기입니다)이 E-book으로 전환됩니다. +2 13.11.23 2,115 0 -
22 Epilogue (完) +18 13.12.11 1,814 38 13쪽
21 Chapter. (18) +3 13.12.11 1,317 29 13쪽
» Chapter. (17) +3 13.12.09 1,163 36 20쪽
19 Chapter. (16) - 2 +4 13.12.08 1,150 28 11쪽
18 Chapter. (16) - 1 +1 13.12.08 940 25 16쪽
17 Chapter. (15) +2 13.12.05 1,208 32 17쪽
16 Chapter. (14) +4 13.12.04 1,216 37 18쪽
15 Chapter. (13) +3 13.12.02 1,372 25 12쪽
14 Chapter. (12) +3 13.12.01 1,573 30 15쪽
13 Chapter. (11) +3 13.11.29 1,139 24 18쪽
12 Chapter. (10) +1 13.11.28 1,088 33 17쪽
11 Chapter. (9) +2 13.11.27 1,320 32 14쪽
10 Chapter. (8) +1 13.11.26 1,351 27 15쪽
9 Chapter. (7) +1 13.11.24 1,709 34 16쪽
8 Chapter. (6) +2 13.11.23 1,685 26 17쪽
7 Chapter. (5) +1 13.11.23 1,323 34 13쪽
6 Chapter. (4) +2 13.11.21 1,348 36 16쪽
5 Chapter. (3) +1 13.11.20 1,498 31 19쪽
4 Chapter. (2) +3 13.11.18 1,478 32 13쪽
3 Chapter. (1) - 2 +3 13.11.16 2,441 51 14쪽
2 Chapter. (1) - 1 +2 13.11.16 2,429 39 12쪽
1 1. Prologue +9 13.11.15 4,149 57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