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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벤 님의 서재입니다.

밤의 왕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헤르벤
그림/삽화
@L280_V6ER1
작품등록일 :
2019.04.02 00:09
최근연재일 :
2020.05.11 17:29
연재수 :
1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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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2
추천수 :
56
글자수 :
581,379

작성
20.05.11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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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그 악마의 과거(11)

DUMMY

카블은 고개를 돌려도 비껴진 카타리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알았구나, 너?”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고 카블의 얼굴을 굳었다. 그러다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외면하듯 시선을 돌린다.


“난 바보가 아니야. 넌 갑자기 날······”


사랑이란 말이 목구멍에 걸린다. 그렇다면 그들의 관계는 무엇이었는가? 호감? 질투? 호기심? 혹은 낮이면 식어버리는 정열? 어쨌든 그가 가졌던 그 감정의 덩어리들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게 아니었고, 그래서 우스운 것이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쌓은 사랑이라는 게, 그녀를 위한 와인잔에 제 피를 부어준 일과 같았다.


“너, 정말 볼수록 질린다.”


그녀는 고고한 미소가 어울리는 그 얼굴로 가장 끔찍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무언가 무너졌다. 무너지기 전에는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던 무언가, 사랑이라기엔 너무도 쉽사리 쓰러져 허무하기보다는 우스운 것이 건조한 더미 위에 날렸다


“넌 나를 사랑, 아니 애초에 진심이었던 적도 없어. 너한테 난 심심풀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잖아. 네가 밤마다 씹고 버린 그 수많은 사내에 대해 나라고 몰랐을까? 제국의 귀족이라면 애도 아는 건데. 그래, 나도 그중 하나겠지. 이젠 그마저도 질린 거고. 너한테 사랑은 더 넓은 성, 더 큰 영지로 가기 위한 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잖아. 넌 나랑 몸을 섞던 밤도 꿈에선 백마 탄 왕자를 만났겠지. 오늘은 헤프게 살겠지만, 내일은 정숙한 귀부인이 되려는 게 딱 너잖아.”


그녀의 눈동자가 약간은 흔들렸다. 파데히에게 비난을 받았을 때처럼 수치심이라도 느끼는 것 같았다. 그의 어머니에게 끈질기게 따라붙었던 얘기들을 이런 식으로 꺼내 든 자신이 역겨웠다. 어차피 끝났잖아. 그녀를 그냥 놓아줄 순 없었어?


그녀가 울지도 모르겠다고 걱정도 했지만, 싸늘한 얼굴을 한 여인은 그에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이제 그를 상종한 가치도 없는 놈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카블은 이제 확실하게 과거의 다른 사내들과 함께 동일 선상에 서게 된 것이다.


“왜 그 말을 안 하나 했어, 역시 이렇게 끝내긴 아쉽지? 차라리 창부라고 매도를 하지그래? 왜? 넌 그런 말을 입에 담기엔 스스로 너무 점잖다고 생각하나 보지?”


고개를 저으며 그의 가슴팍에 시선을 맞추던 그녀는 풀어헤쳐 진 그의 넥타이를 조였다.


“똑같이 놀아난 주제, 참 웃겨.”


그녀가 입술 끝에 칼날을 문 듯 찢어진 미소를 지었다. 넥타이 끝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녀의 비아냥이 다시 시발점이 되진 않았다. 재가 된 공상이 허무하게 나부꼈다.


-


카블은 그녀와의 일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려고 노력했고, 그가 테라스를 나왔을 때 그 일을 반은 성공했다. 다른 생각을 하면 그것을 향해 카타리나가 손을 뻗어왔기에 잠결에도 돌아가던 머리 회전을 꽉 비틀어 잡았다. 더 꼴사나운 짓을 하기 전에 집으로, 라반의 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무사히 귀환을 바라기에 그는 너무도 큰 거물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 거물이란 제 아들처럼 오만하고 음탕한 노인이었지만, 어쨌든 그가 공작인 이상 귀찮은 일에 휘말린 건 확실했다.


언제부터 따라왔는지 알 수 없는 파데히의 시동은 공작이 그를 곧장 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전했다.


‘성격 급한 노친네 같으니! 사과를 안 받곤 밤잠도 설치겠나 보지?’


하지만 카블은 그에게 사과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그를 다시 보게 될 때 제 호전적인 기질이 그의 얼굴에 다시 주먹을 꽂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창피한 줄도 모르나 보지. 쯧.’


이번 일을 따지게 되면 명예에 치명적인 피해를 보는 건 공작 쪽이었다. 그가 손녀 또래의 황녀에게 치근덕거린 일이 황좌에까지 흘러들었다간 공작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카타리나가 사생아고 신전에서 인정을 받진 못했지만, 그녀는 황제가 데려온 황실의 일원이었으니 그녀를 건드리는 건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또 그런 추문이 없더라도 직계의 피가 흐르는 파데히 공작 가는 언제 멸문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일이 커지면 카타리나 역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테니 카블은 기왕이면 그와 평화적으로 타협해 나갈 작정이었다. 리나는 데이트 중에 파데히 공작을 종종 언급하곤 했다. 그녀를 냉대하는 다른 보수귀족과 달리 그는 언제나 소녀에게 상냥했다고 한다. 그의 호의 덕에 리나는 어릴 적부터 공작 가에 자주 초대받아 파데히 공자와도 친밀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를 제 대부나 미래의 시아버지로 생각했으니, 이번 일이 그녀에겐 상처가 됐을 것이다.


황성의 응접실에서 그를 만났을 때 굽은 등이 빗줄기가 내려치는 창문을 가리고 서 있었다. 카블을 안내해주던 시종이 곧장 방을 나오자 그 공간에는 접점을 찾아볼 수 없는 두 사내가 덩그러니 남겨졌다. 공작을 다시 보면 무작정 화부터 날 줄 알았는데, 한쪽 뺨이 부은 그 얼굴은 카블에게 동정심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렇다고 제 과오에 대해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모습은 몇 시간 전과 비교하면 훨씬 왜소해 보였고 어딘가 불안한 느낌까지 줬다.


“자네가 후작 영애와 교제 중이라고 들었네. 하필, 그렌더 녀석과 비밀리에 약혼한 영애와 말이네.”


그는 반쪽 얼굴은 푸른 멍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는 그 상처는 자신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는 듯 얘기를 이어갔다.


“자네는 한번에 두 여인을 사랑할 수 있나 보지?”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그의 비아냥은 카블의 여성 편력에 감히 훈계를 둔다기보다는 한쪽이 가짜라는 걸 전부 알고 그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약혼식을 조용히 치른다고 치렀지만, 역시 그들의 눈을 피해 갈 순 없는 모양이야.”


공작은 습관적으로 안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잘랐다. 대화는 점점 카블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고, 그는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노인의 중얼거림이 그에게도 닿자 긴장의 끈이 그의 전신을 조여왔는데, 순간 마력 라이터를 꽁초에 대는 공작 손이 떨리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 의뢰를 받았나?”


‘후작 영애.’ 공작의 혼잣말만 아니라면, 그녀와의 약손이 별로 진지하지 않은 카블은 배후를 털어놓고 그 사기극에서 손을 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 그가 말하는 ‘그들’의 존재가 카블은 궁금했다. 감시자의 정보를 통해 그가 이미 칼럼의 종들과 접촉을 했던 인물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가 언급한 ‘그들’이 시종이었던 그와 황녀를 이어줬던 오작교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의 첫째 바니스탄에 관한 얘기도 어렴풋이 의식 위로 떠올랐다.


“그래, 난 자네 같은 부류를 잘 알고 있다네. 사람들은 자네들의 존재를 유령과 다를 바 없다고 여기지만, 내게 자네들은 현실이지. 자네들은 수면 아래에서 손을 뻗어 그분을 위한 스케치를 하고 세상에 색을 입히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카블은 그가 결국은 담배에 불을 붙이는 일을 포기해버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시한부 환자에게서 볼 법한 마지막 희망,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위협적이기까지 한 염원이 담겨있었다.


“자네는 제국의 손, 감시자지?”


‘그래, 역시 그랬군. 황녀의 연애담에 손을 쓸 만큼 남아도는 잉여 인력은 신전에서 감시자뿐인가 보지?’


약간 씁쓸함과 동시에 카블은 제 예비 며느리와 스캔들이 났다는 이유로, 그가 황실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자신을 감시자로 싸잡아가는 공작의 경솔함에 기가 막혔다. 물론 그의 말이 맞았지만, 그는 아들을 빼앗긴 이후로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살거나 치매가 와 감시자들과 접촉했던 과거와 현실을 혼동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에게 더는 얻어낼 정보가 없다고 단정한 카블은 대충 제 정체를 잡아떼 이 무의미한 대화를 끝낼 작정으로 입술을 뗐다. 공작은 또 그의 발언권을 가져갔다.


“자네는 아직 젊고 강하지. 자네의 아버지는 내가 알기로는 무척 정의로운 위인이셨고 말이네. 자네는 도대체 왜 감시자로 일하는 건가? 그들은 자네에게 뭘 약속했지?”


카블이 건성으로 얼굴을 찌푸리자 공작은 그의 옷자락을 잡으려 손을 뻗다가 멈췄다.


“나는 자네에게 그들이 약속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줄 수 있네!”

“당신이 내게 왜 그렇게 해주는데?”


악마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어디선가 AA-89의 호통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카블은 귀를 막기로 했다. 어차피 그는 이미 감시자에 관해 알지 않는가? 어쩌면 그에게 자신을 감시자라고 소개한 인물이 AA-89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나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자꾸 허공에서 흩어졌다. 시가를 치운 두 손이 둥근 공모양을 했다가 오므라들려 그의 심장처럼 펌프질했다.


“나에게는 자네의 친구인 그렌더 말고, 자네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아들이 하나 ‘있다’네.”


그렌더와 친구였던 것은 없었지만, 카블은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공자를 향한 제 증오심을 따지고 든다면 그날 밤을 노인과 함께 지새워도 공작이 말을 할 차례를 오지 않을 것이었다. 또 어렵게 시작된 파데히의 말을 가로채기에는, 그가 쏟아내는 말이 흥미롭기도 했다.


노인은 혼자 지옥의 재판장에 도달한 듯 제 과오에 대해 횡설수설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양팔로 제 머리를 감쌌다. 그의 양팔이 만들어낸 그 공간에는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내게 너무도 사랑했던 여자와의 아이였다네. 나 역시 처음부터 그를 미워했던 건 아니네. 그 아이 때문에 킬레나가 죽었을 때도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지는 않았지, 그 아이가 얼마나 킬레나를 닮았었는데 내가 어떻게 그를 외면할 수 있었겠나! 물론 과거의 바보 같은 거래 때문에 그 아이를 신전에 넘겨주긴 했지. 자네는 내가 어린 황녀를 배필로 맞았던 것을 아는가? 지금의 안사람이 들어오기 전에는 내 곁에 황족이 서 있던 시절이 있었다네.”


카블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과연 내 분에는 차고 넘치는, 아니 ‘그들’이 다가오기 전까지는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여자였지. 그들은 자신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내가 그녀와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했지. 대가로 그녀가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면 그 아이를 넘기라는 조건을 내걸고 말이네. 아이를 낳다가 죽는 일은 황가의 여인들조차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 하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파데히의 아이를 가진다는 건 시한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네. 오죽했으면 멀쩡한 귀족 부인을 두고도 씨받이를 따로 두는 게 파데히의 가율이었을까. 물론 내 조부의 대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해도 나는 그녀를 포기하지 못했을 거네. 그래, 다시 과거로 돌아간 대도 나는 그때와 똑같은 선택을 할 거란 말이네. 그럼에도 내 욕심 때문에 끔찍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재물이 내 아이였다는 사실에 내가 어떤 고통의 나날을 보냈는지 자네는 알 수 없을 거네. 나는 새부인도 들이지 않고 매일을 죄책감에서 허우적댔지.”


노인의 얘기에 진심이 실릴수록 카블은 그 작은 몸에서 그렌더를 찾을 수 있었다.


“바니스탄이 다시 영지로 돌아왔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 아이를 반기며 그 아이에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줄 작정이었네. 이제라도 그 아이와 정상적이고도 좋은 부자 관계가 될 수 있으며 십 년이 넘었던 공백의 시간 역시 채워줄 수 있으리라 다짐했지. 하지만, 하지만······.”


그는 다시 제 몸을 말뚝으로 박을 듯 몸을 움츠렸다. 다음 대목에서 그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바니스탄의 몸에 흐르는 초록색 피를 보았을 때 내가 그 아이를 내 아들로, 같은 인간을 받아들일 수 있었겠나?”


그의 얘기가 다소 지루해지던 찰나 카블은 초록색 피가 흘렀다는 얘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젠 그 아이의 여린 속을 알지만, 자라온 환경 탓에 아이는 조용했고, 나는 어리석었다네. 나는 당시 바니스탄이 불쌍하기보단 두려웠다네. 아이를 성의 지하실에 꽁꽁 숨겨두고, 스스로 죽었으면 하는 바람에 위험한 출정에 아이를 내보냈지. 아이는 죽었고, 나는 황실에서 거액의 위로금을 받았지. 가문의 위치를 더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백작가의 여식을 후처로 들였지. 겉으로는 내색한 적이 없지만, 그렇게 평온한 시기에도 나는 계속 악몽을 꿨다네. 더 흉측하게 변한 바니스탄이 내 목을 천장에 매달았고 숨이 넘어갈 즘에서야 나는 꿈에서 깰 수 있었지. 그 아이가 유령이 돼서 내게 복수하는 거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 정도 원망은 들어줄 수 있었어,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그 아이는 결국 내 자식이었으니까. 그러다 몇 년 후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쯤 바니스탄이 돌아왔지. 품에는 제 사생아라는 웬 갓난쟁이를 데리고. 그는 자신이 살아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는 걸 원치 않았고 내게 위로금 일부를 요구하더군. 갑자기 ‘부르벡’으로 노예 사업을 하겠다고 말이네.”


카블이 인상을 찡그리자 그는 변명하듯 덧붙이고는 얘기를 이어갔다.


“그때는 지금처럼 부르벡이 희귀종도 아니었다네. 당연히 노예사업을 해도 법에 걸리는 부분이 없었지. 하지만 그의 목적은 사실 사업이 아니었다네. 그는 어린 부르벡들로 실험을 진행하며 무언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지. 이에 대해선 나도 정확히 모르네. 그는 내가 마련해준 외딴 탑의 실험실에서 주로 지내 나와 마주칠 일이 없었으며, 가끔 밖에 나온다고 해도 계모가 제 아들과 함께 기꺼이 키워주겠다고 약속한 제 딸을 만나기 위해 부인의 방만 왕래했지. 내가 저를 꺼리는 만큼 그도 날 꺼렸지. 물론 연구 자료를 살펴본다면 내가 그의 실험들에 관해 이해 못할 리가 없지만, 그 모든 것은 부르벡의 폭주와 함께 전부 소실됐다네. 그 일을 계기로 그의 행적 역시 묘연해졌지. 하지만 나는 그가 여전히 살아있다고 확신하고 있다네. 그 사건 이후로 20년째 신전에서는 우리 가문에 지원금을 보내오고 있다네. 이게 무얼 의미하겠나? 그가 제 미운 아비와 그래도 피가 섞인 이복동생을 위해서 수년을 신전에 충성했다는 얘기겠지. 나는 그를 위해서라도 위로금과 지원금을 허투루 쓴 적이 없다네. 전부 가문의 부흥과 이익을 위해 투자하고 모아왔지. 하지만 이제는 바니스탄이 그 모든 족쇄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워지길 원한다네.”


파데히 공작은 그리 말하며 양팔을 크게 벌렸다. 한쪽 손에 지팡이를 쥐어 들어 그 동작이 훨씬 크게 보였다.


“보다시피 나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네. 나는 내가 죽기 전에 그를 풀어주는 게 아버지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하네.”


카블의 마음을 자신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고 확신한 그는 청년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며 간청했다.


“자네가 나를 위해 그 아이를 찾아준다면, 내 마지막 소원은 멍청한 망상이 아니게 될 거네. 나를 위해 기꺼이 그를 찾아주게. 카를레 군.”


아들을 찾으려면 감시자보다는 도굴꾼에게 의뢰를 하는게 더 현실적일 것 같았지만, 그의 괴상한 논리대로 아들이 살아있대도 칼럼의 기사는 감시자의 영역을 벗어났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대답이었다.


“유감이지만, 제 능력 밖입니다. 공작님.”


-


“다이안은 요런 고 모태. 자기가 고기 쫌 썰어줘.”


‘씨발.’


“자기, 요거 먹을 꼬야? 자기 요것도 먹을 꼬야?”


‘씨발.’


다이애나가 에이든의 접시에 담긴 음식을 포크로 집어줄 때마다 에이든은 아기 새처럼 그걸 받아먹었다. 그들의 맞은 편에 앉아 식사하는 카블은 턱을 괸 채 그 꼴이 불만이라는 듯 커플을 노려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실연당한 동료 앞에서 그렇게 콩닥거리고 싶니?”

“그러게 왜 남의 데이트에 끼어, 눈치 없는 새끼야.”


잘랐던 혀를 도로 붙인 다이안은 팔짱을 낀 채로 카블을 쏘아봤고, 상대편도 지지 않았다.


“뭐 데이트? 내가 먼저 에이든이랑 약속 잡았고 끼어든 건 너겠지.”


카블이 삿대질을 하자 늘 그렇듯 에이든이 끼어들었다.


“워, 워. 잘못은 약속을 두 번 잡은 나한테 있으니까 둘 다 그만해.”


에이든의 만류에 그들은 분을 시키는 듯했지만, 여자 쪽이 중얼댔다.

“빠져줄 눈치도 없는 새끼.”

그러자 적수도 받아쳤다.

“길가에서 만났으면서 약속은 개뿔이나.”


마녀가 그를 위아래로 내리누르며 비아냥댔다.


“잘생기면 뭐해, 나잇살 처먹고 아직도 첫사랑 때문에 질질 짜는데.”

“골렘 같은 게 사람 말도 하네.”


그들의 얘기를 농담으로 여기는 건 에이든 뿐이었다. 그들이 다투면 중간에서 곤란한 에이든이 먼저 화제를 돌렸다.


“참, 파데히 공작이 자살했다는 얘기 들었어? 그 망나니가 곧 공작 위를 받는다는 건데.”

‘그 노망난 노친네 결국 갔구만.’


에이든은 슬쩍 카블의 눈치를 보며 말했고 다이애나가 애인의 얘기를 이어갔다.


“아, 나도 그 얘기 알아. 하필 내 친구 중 하나가 그날 그 지역 담당이어서 자세히 들었거든. 공작이 저택에서 목을 맸는데, 그게 자살이라고 보기엔 구타당한 흔적들이 있어서 말이 많았어.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다이안은 잠시 머뭇대며 아직 이른 저녁이라 테이블이 비어있는 내부를 둘러보다 말했다.


“단순히 구타가 아니라 손가락도 몇 개 없었대. 근데 그게 칼이나 일반 마력에 의한 것도 아니고 식인 벌레들이 갉아 먹은 것처럼 여기저기 썩고 손상이 많이 된 상태였나 보더라고.”


-


며칠 전까지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 죽어서일까. 카블은 그들에게 공작의 얘기를 전해 들은 뒤로 영 찝찝했다.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을 카타리나도 걱정되기도 하고, 이 일을 계기로 그녀에게 다시 연락해볼까 고민했지만, 바보 같은 짓이라며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그가 에이든이 값을 치르는 술과 음식까지 마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날은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갈 작정으로 술집을 나왔다.


그는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피해 좁은 샛길을 따라 걸었고, 그날은 달이 유독 맑아 아름다운 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고 본능적으로 마력구속 팔찌를 다른 손으로 꼭 쥐었다.


‘방금 그건 블랙홀이었어.’


카블은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시선은 빽빽하게 늘어선 건물 벽들에 막혔고 그 주위에는 길고양이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특이한 마력을 착각한 걸까 헷갈릴 때쯤 그것은 그에게 따른 속도로 다가왔고 더 선명하게 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있는지를 의심할 새도 없이 그는 본능에 충실한 초식동물처럼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 도망쳤다. 비를 맞은 듯 온몸이 식은땀에 젖었고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죽을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사람이 있는 곳, 제기랄 도움을 청해야 해.’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선술집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열기가 처음으로 반가웠다. 그는 아직도 떨리는 두 다리로 힘겹게 스탠드 테이블로 걸어가 빈자리에 앉았다. 탁상에 몸을 기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망상에 빠졌었는지 생각하며 싱겁게 웃었다.


‘칼이 내게 빚 말고 과대망상까지 물려준 게 분명해.’


쓸데없는 불안감을 달랠 겸 그가 주문하기 위해 종업원을 부르는데 옆자리의 사내가 술을 한잔 건넸다. 그는 더러운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가게가 어두웠던 탓인지 술잔을 쥔 그의 손은 시체의 것처럼 생기가 없었다. 기이하게 비틀린 그의 검은 입술이 망토 사이로 언뜻 보였다.


“너, 잘 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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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그 악마의 과거(9) 20.02.19 54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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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그 악마의 과거(5) 19.12.22 60 0 12쪽
97 그 악마의 과거(4) 19.12.01 69 0 12쪽
96 그 악마의 과거(3) 19.11.23 63 0 13쪽
95 그 악마의 과거(2) 19.08.21 72 0 17쪽
94 그 악마의 과거(1) 19.08.14 73 0 16쪽
93 마법사와 주술사(6) 19.08.05 112 0 10쪽
92 마법사와 주술사(5) 19.08.02 61 0 8쪽
91 마법사와 주술사(4) 19.07.30 66 0 7쪽
90 마법사와 주술사(3) 19.07.26 78 0 10쪽
89 마법사와 주술사(2) 19.07.23 73 0 7쪽
88 마법사와 주술사(1) 19.07.19 97 0 10쪽
87 저놈 죽이고 천국가겠습니다.(2) 19.07.16 138 0 11쪽
86 저놈 죽이고 천국가겠습니다.(1) 19.07.13 128 0 9쪽
85 이방인(4) 19.07.09 87 0 7쪽
84 이방인(3) 19.07.05 87 0 8쪽
83 이방인(2) 19.07.02 65 0 8쪽
82 이방인(1) 19.06.29 84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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