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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벤 님의 서재입니다.

밤의 왕자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헤르벤
그림/삽화
@L280_V6ER1
작품등록일 :
2019.04.02 00:09
최근연재일 :
2020.05.11 17:29
연재수 :
104 회
조회수 :
6,830
추천수 :
56
글자수 :
581,379

작성
19.07.05 20:48
조회
86
추천
0
글자
8쪽

이방인(3)

DUMMY

“사람을 해치기 위해 다진 검이 아니었다고?”


가슴팍과 노끈으로 팔과 다리가 칭칭 감긴 남자는 쇠창살 너머로 시선을 돌린 채 비아냥대다가 웃고,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자네는 살인마야! 제 어미까지 죽인 살인마!”


그러다가 남자는 다시 껄껄 웃었고 회반죽으로 된 벽면에 등을 기댄 채로 앉아있던 베이즌은 검게 가라앉은 눈을 반쯤 떴다.


“지키겠다면 자국민들을 넌 네 입으로 잡아먹었고, 셰이프를 지키려던 병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지. 그 검사 손에 죽지 않았다면 넌 그 극악무도한 학살을 계속했겠지. 네가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계속에서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녀처럼 넌 그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네 나라를 사랑했을 테고, 그 나라에는 남아나는 게 없었겠지.”


베이즌은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다시 뜬 그의 눈동자는 은회색으로 변해 있었다.


“자네도 그걸 알았기에, 악마의 손을 잡고 셰이프를 떠난 거겠지. 네 존재는 구세주나 기인 따위가 아니야. 그런 것과는 판이하지. 너는 어둠이 불러낸 더 짙은 것이고, 제국의 오류이지, 죽음만이 진리인 피의 사도이지. 너는 열차에서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어. 네 무모함 때문에, 애꿎은 사람 한 명이 다쳤다고 자책하면서. 근데 그게 진짜 이유일까? 아니, 너 스스로 좀 더 솔직해지라고. 그 한 명 덕에 수십이 살았는데, 무슨. 네놈 본성은 피를 불러, 늘 피를 원하고 있지. 이 가슴 깊은 곳에서 너는 살육에 대한 갈망과 갈증을 느끼지. 그게 네 실체야, 네 본질이고.”


베이즌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넌 안단카이의 사람이었어. 영특한 머리 덕에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제국의 사람으로 일했는데, 너는 진심으로 그들의 신념을 사랑했고, 다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네 일에 언제나 확신이 있었지. 근데 그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막상 네가 겪으니 엿 같았던 거지. 제국에서 네가 개발한 저 ‘물질’로.”


베이즌은 턱짓으로 빼앗긴 물건들이 널려진 테이블을 가리켰다.


“작은 마을에 실험했는데, 하필 그 마을이 네 고향이었고,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던 너는 네 가족과 친구들, 약혼자를 잃었지. 네 마음은 큰 실의에 빠졌지만 넌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제국을 향해 침을 뱉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어. 그랬다간 네 삶 전부가, 네 평생의 노력이, 네 평생의 연구가 부정당하는 것이었을 테니.....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겠지.”


그제야 몸을 돌려 베이즌을 정면으로 보게 된 남자는 히죽 웃었다.


“자넨 날 구원하고 싶은가?”


남자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은 채 베이즌은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당신은 제국에서 보관 중이던 환각 마물을 통해 그와 관련된 기억이라도 지우려고 했지만 결국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당신이 실험을 위해 처음 퀘트락을 공급받았던 마을에 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화풀이를 하는 거지.”


“이건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네, 대의를 위한 진보이지.”


남자는 사나운 눈빛으로 베이즌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아니, 화풀이야! 당신이 바꿔야 했던 건, 당신이 진정으로 분노해야 했던 대상은-!”

“꺄아아악!”


멀리서 소녀의 비명이 들려오며 베이즌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다른 칸이야!”


유리조각을 한쪽 손에 쥐고 있었던 베이즌은 이미 제 몸을 결속하던 밧줄을 잘라낸 상태였고, 그는 남자에게 쇠창살에서 떨어지라며 손짓했다. 쇠 자물쇠로 잠긴 문은 베이즌이 몸을 몇 번 부닥쳐도 약간 흔들리지만 할 뿐 끄떡도 하지 않았다.


“눈 좀 감아봐!”


베이즌의 요구에 남자가 눈을 감자 몇 번의 요란한 굉음이 잇따라 나다가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가 겨우 눈을 뜨자 그의 시야로 완전히 구겨진 쇠창살이 들어왔고, 그새 밖으로 나간 베이즌은 제 검을 뽑아들어 남자에게 곧장 휘둘렀다. 가슴을 압박하던 노끈이 느슨해져 남자가 눈을 떴을 때 베이즌은 벽에 걸린 감시자의 열쇠를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갈색 막대기를 쥔 채 그것을 남자에게 내밀었다.


“서두르자고!”


잠시 어안이 벙벙하던 남자는 엉겁결에 그 열쇠를 받아든 채로, 베이즌을 따라갔다. 빈 칸막이들을 지나쳐 복도의 끝에 도달했을 때쯤, 베이즌은 걸음을 멈췄다. 이미 괴물처럼 변한 수인족이 은색 촉수를 뻗어 마주 본 칸에 있던 모녀를 위협하고 있었고, 그것이 있는 칸에는 심장 부근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채로 누워있는 즉사한 시신이 있었다. 쇠창살에 걸쳐진 놈의 촉수를 잘라낸 베이즌은 신속히 문을 따고 그것이 있는 칸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을 향해 뽑아 나오는 촉수들을 베어내며 놈에게 다가가던 베이즌이 외쳤다.


“카이신(남자의 본명)! 어서!”


베이즌은 놈을 끌어안은 채로 바닥으로 고꾸라졌고, 갈색 막대기를 쥔 채 선뜻 들어오지 못하는 남자는 망설임이 가득한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어서!”


베이즌의 살결을 촉수들이 관통해 나왔고 그 은빛 실타래들이 그의 팔과 다리를 칭칭 동여매다가 그의 온몸을 감싸왔다.


“세상에는 끊임없이 너 같은 돌연변이가 태어나는데, 어째서 제국이 몇백 년 동안 그 권세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나?”

“카이신, 어서!”


남자가 막대의 어떤 버튼을 누르면서 그것의 끝에서 보라색 마력들이 찌직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그들은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았는데, 어떻게 너 같은 게 세상을 활보하고 다녔던 걸까?”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몸에서 푸른 마력을 뿜어내며 버티던 베이즌도 슬슬 한계였다. 그때 남자는 그 막대기를 베이즌의 어깨에 박았다.


“널 제물로 바치면 난 복귀할 수 있을 거야.”


혈관 마디를 따라 익숙하지 않은 힘이 다량으로 흐르더니, 그의 몸에 있던 마력들이 응고해 검게 응어리진 피처럼 굳어버린다. 마비가 온 듯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 몸은 무거웠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마지막으로 본 남자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안도에 찬 미소를 지었다.


“넌 그들이 귀히 여기는 ‘창조’니까.”

“바꿀 수는 없었던 거야?”


베이즌의 입으로 놈의 촉수가 파고 들어가며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잘못됐다면, 세상을 바꿀 수는.........’


그의 몸 구석구석에 은색 촉수들이 꼬챙이처럼 박히고 안 그래도 흐리멍덩했던 시야가 두 눈이 촉수에 꿰뚫리면서 빛을 잃는다. 어딘가에서 총소리가 났다. 연발하는 총소리에 맞춰 그의 시야는 더 까마득한 어둠으로, 어둠으로 빠져들었다.




-밤의 왕자와 처음 만났을 때, 전 푸른 눈에 갈색 머리 소녀였어요........그는 절 기억할 거예요. 제 눈이 이젠 붉게 물들었어도 제 눈을 기억할 거예요.


기억해. 어린 시절의 너를, 네 푸른 눈동자와 주근깨가 가득했던 그 심술궂은 얼굴에 곱슬거리던 다정한 머리카락을.


잔상이 스친다.


저와 눈이 마주치고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치던 사내와, 저를 태양의 신이라 부르던 노인과, 제 입에 먹히던 이름 모를 사내와 아낙네들의 얼굴과, 그들의 마지막 눈과, 그 표정들이 스쳐 지나간다. 제가 죽인 그들을 기억한다. 성에서 떨어진 그녀를 붙잡던 그 순간만큼이나 생생하게. 이젠 꺼져버린 그들의 숨소리와 그때의 풀 소리, 그때의 바람 소리를, 혹은 그 적막까지도 그는 기억했다. 단지 외면해 왔을 뿐.


작가의말

 다음주부터는 새로운 에피소드로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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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그 악마의 과거(9) 20.02.19 54 0 17쪽
101 그 악마의 과거(8) 20.02.05 50 0 16쪽
100 그 악마의 과거(7) 20.01.20 61 0 13쪽
99 그 악마의 과거(6) 20.01.04 62 0 13쪽
98 그 악마의 과거(5) 19.12.22 60 0 12쪽
97 그 악마의 과거(4) 19.12.01 69 0 12쪽
96 그 악마의 과거(3) 19.11.23 63 0 13쪽
95 그 악마의 과거(2) 19.08.21 72 0 17쪽
94 그 악마의 과거(1) 19.08.14 73 0 16쪽
93 마법사와 주술사(6) 19.08.05 112 0 10쪽
92 마법사와 주술사(5) 19.08.02 61 0 8쪽
91 마법사와 주술사(4) 19.07.30 66 0 7쪽
90 마법사와 주술사(3) 19.07.26 78 0 10쪽
89 마법사와 주술사(2) 19.07.23 73 0 7쪽
88 마법사와 주술사(1) 19.07.19 97 0 10쪽
87 저놈 죽이고 천국가겠습니다.(2) 19.07.16 138 0 11쪽
86 저놈 죽이고 천국가겠습니다.(1) 19.07.13 128 0 9쪽
85 이방인(4) 19.07.09 87 0 7쪽
» 이방인(3) 19.07.05 87 0 8쪽
83 이방인(2) 19.07.02 65 0 8쪽
82 이방인(1) 19.06.29 84 0 8쪽
81 마녀의 숲(5) 19.06.25 81 0 9쪽
80 마녀의 숲(4) 19.06.23 67 0 11쪽
79 마녀의 숲(3) 19.06.01 77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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