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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론의 고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함치비
작품등록일 :
2024.01.19 17:22
최근연재일 :
2024.02.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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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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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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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첫 번째 응답 (2)

DUMMY


인간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볼 때, 지키는 것은 아마 인간일 것이다.

‘아마 나를 피해 남하한 짐승들에게서 인간들을 지키는 거겠지.’

어째서 짐승인 그가 인간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그들을 지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쓸모없는 짐승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라도 하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저승에 가서 안부라도 전해주지 그래?”

“네놈이 먼저 말이지!”

칼라이스는 손바닥에 응축시킨 바람을 휘두르며 라스를 떨쳐냈다.

라스는 재빨리 검으로 막아냈지만, 한계에 다다른 검이 그만 부서지고 말았다.

짐승의 폭발적인 힘 앞에 라스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이제 체력이···.’

버틸 수 있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이제는 정말 전신에서 힘이 완전히 고갈되었다.

지금까지 버텨왔던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불기둥을 태울 연료로 모든 힘을 내어준 라스는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바람을 다스리는 너라면 알 것이다. 바람은 다른 바람을 집어삼켜 강해지고, 이 땅에 약한 것들을 쓸어버려 그곳에 머물 자격이 있는 것들을 남긴다.”

약육강식. 그것이 칼라이스의 바람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쓰러지는 넌 내게 흡수될 운명이었던 거다.”

“틀렸어, 바람의 역할은 그런 게 아니야.”

라스는 짧은 말로 짐승의 말을 부정했다.


“바람은 그저 전하는 거야. 따뜻한 햇살의 자취를···.”

라스는 태양에도 가려지지 않았던 카데넬의 마지막 미소를 잊지 못했다. 그 미소가 라스를 벼랑 끝에서 구원했다.


“구름을 몰아 굳어버린 땅에 단비를.”

짐승들에게 파여 갈라진 땅의 상처에 수인대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떨어졌다.


“누군가가 흘린 눈물이 헛되지 않았단 사실을.”

고통 속에서 단 하나의 이정표만을 바라보고 견뎌온 카데론의 후예들은 틀리지 않았다.

뺨을 어루만지듯 불어온 바람으로 인해 요슈아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흩날렸다.


“그리고 아직 겪어 본 적 없는 빛나는 미래를···!”

라스에게는 카데넬을 대신하여, 낙망(落望)한 일족에게 자신이 받은 희망을 건네줄 의무가 있었다.


“바람은 그저 전달자야. 험한 산 앞에 산산이 부서져도 바람은 전해야만 해.”

이 모든 건 라스가 전해 받았으며, 전해야 할 것.

그러니 자신으로부터 흘러가, 다시 한번 미래로 이어지도록 길을 열어야 했다.


“같잖군, 네놈의 말이 옳다는 걸 증명하려면 적어도 나를 꺾었어야 했다. 네놈은 스스로가 말한 바람의 역할을 수행할 자격이 없다!”


칼라이스의 양손에서 몰아치는 태풍이 라스를 덮쳤다. 굉음과 함께 먼지가 터져 나와 라스의 형체가 가려졌다.

일격을 맞은 라스의 기척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라스!”

요슈아의 외침이 자욱한 먼지 속에 갇혀 외로이 울렸다.

횡횡하는 바람의 잔재들은 소년의 끝을 고하는 것 같았다.


“삼백 년 넘게 이어온 일족의 최후가 이렇게 허망하단 말인가···.”

의식을 붙들고 버티고 있던 일족에게도 라스의 침묵은 절망적이었다.

일족은 무거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길고 긴 시간이었다! 놈의 힘만 흡수한다면 나는 왕좌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칼라이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먼 방계이기에 라제딘의 아들들에게 당한 치욕을 설욕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이제 그 아들들이 아니라 설령 라제딘이라 할지라도 나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칼라이스는 이미 라스의 힘을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미래를 그려나갔다.


“그래, 내게 자격은 없지.”


“이 목소리는···?”

천둥이 울리는 듯한 범상치 않은 음성을 듣고 칼라이스는 아주 오래전, 영혼에 새겨진 어렴풋한 두려움을 떠올렸다.

아무리 기억 속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려 해도 공포란 감정만 떠오를 뿐, 공포의 정체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때, 먼지 사이에서 섬광 한 줄기가 날아와 먼지와 함께 칼라이스의 팔을 날려버렸다.


끄아아아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짐승의 괴성이 귀를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단말마의 비명.

짐승의 소름 끼치는 절규는 깨어 있는 자들의 의식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일족은 두 귀를 막았음에도 파고드는 괴성으로 인해 피를 토할 것처럼 괴로웠다.


“감히, 내 팔을! 그냥 죽이지 않을 것이다! 산 채로 간을 끄집어내 먹고, 갈기갈기 찢어 버리겠다!”

여느 때와 달리 짐승의 팔을 재생되지 않았다.

잘린 팔의 신경으로부터 고통이 팽창했다. 괴수는 욱신거리는 팔을 붙잡고 괴로워하며 핏대가 선 눈으로 라스를 노려봤다.

사라진 팔로 인해 힘의 차이가 생각나지도 않을 만큼, 분노가 괴물의 눈에 서렸다.


“분노해라, 오만한 짐승이여. 허나 내 분노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말투.

라스는 지독하리만큼 살기 짙은 분노를 표출했다.


방금까지 라스를 죽여버리리라 분노를 토하던 칼라이스였지만 라스의 분노에 역으로 삼켜져 몸이 위축되고 말았다.


“대체, 그토록 나를 증오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칼라이스는 자신을 향한 끝없는 증오와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짐승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라스는 이미 놈의 흔적을 이 땅에서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비록 두 번 다시 없을 찰나의 안식일지라도,

누구도 초원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절대로, 그날의 일들이 반복되게 놔두지는 않겠다!’

라스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자, 그의 고리가 또다시 샛별처럼 초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무한하게 흘러나오는 힘의 파동 탓에 라스의 머리카락이 솟구쳐 올랐다.


“···!”

끝없는 대해(大海)같은 힘이 라스로부터 발산되었다.

일족은 그 힘의 주인이 라스인 것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칼라이스는 어느새 그의 손에서 빛나는 한 자루의 창을 보게 되었다.


초원의 어둠을 밝히는 광명의 창.

그것을 본 괴수는 짐승들이 아직 온전한 ‘하나’였을 적의 일을 떠올렸다.


불타는 성읍과 낭자한 피의 연못 위에서 만찬을 즐기던 자신을 분쇄한 존재.

저 빛은 큰 뱀이었던 자신을 조각낸 ‘그’의 의지였다.

괴물의 눈앞에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악몽이 되살아났다.


“네놈은 누구냐···! 대체 어떻게 왕의 힘을···.”

옛 공포의 정체를 떠올린 짐승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아무리 반신을 분쇄 당한 뒤 기억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 불분명할지라도, 분노에 찬 카데넬의 얼굴을 잊을 리 없었다. 짐승의 기억 속에서 카데넬은 분명 이런 소년의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도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그의 힘이 보잘것없는 소년의 손에서 펼쳐졌다.


“그렇군,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네 녀석에게는 미약하게 보였을 테지.”

라스는 무기력했던 자신의 비참한 과거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흘러간 과거를 움켜쥐려 하며, 여전히 현재가 아닌 과거를 살아갔다.


“상관없다. 의식과 그날의 기억을 가진 너를 죽인다면, 죽은 카데닌들을 위한 첫 복수가 될 테니.”

“설마, 네놈은···! 제길, 아직도 살아있는 카데닌이 있었다니!”

라스의 정체를 알아챈 짐승의 복수심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칼라이스는 잘린 앞발을 신경도 쓰지 않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로소, 일족은 짐승의 입을 통하여 라스가 카데닌인 것을 알게 되었다.

요슈아는 그의 말을 통해 정체가 사실로서 확인되니 벅차오르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디스 일족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격정(激情)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들의 눈가에는 그들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낱 전설로만 여겨지던 조상의 존재가 고난의 시간을 버텨온 일족을 위로하는 것 같았다.


“카데닌이 있는 줄 알았다면, 이딴 곳은 오지도 않았을 텐데! 빌어먹을 사제 년에게 속다니···!”

자신이 쫓기는 신세가 될 거라고 칼라이스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뱀의 피를 뒤집어쓴 카데닌이라면 뱀의 기운이 그토록 강하게 느껴졌던 것도 당연했다.


‘석연치 않은 떨림의 정체가 공포였어.’

삼백 년 동안 잊었기에 떨림으로 찾아온 공포란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잘려 나간 앞발과 흘린 피로 인해 터무니 없이 많은 힘을 잃었다.

그로 인해 양쪽의 균형이 맞지 않아 비행하는 것도 어려웠다.


불기둥을 처음 봤을 때, 도망쳤더라면 이곳에서 팔을 잃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는 결국, 따라잡혀 죽임당할 게 분명했다.


‘그래도 벗어나야 한다. 날개를 잃고 땅을 기더라도 도망가야 한다.’

멈추는 순간 또다시 그 창에 전신이 분쇄될 것 같았다.

짐승은 혼신의 힘을 다해 그저 앞만 보고 도망쳤다.


한순간도 날개가 쉬지 않은 탓에, 심장이 뜯겨 나갈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이 도망에는 정해진 기약이 없었다.

도망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달아나던 칼라이스는 어느 순간, 빛의 기운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벌어진 것을 알았다.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인가, 이렇게도 쉽게?’

의심을 거두지 못한 칼라이스는 두려워서 뒤를 돌아볼 수 없었으나 실낱같은 기대를 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안도감이라는 쾌락은 더없이 달콤했다.


칼라이스가 긴장을 풀고 안심한 순간,

찬란한 기적의 빛이 괴물의 위로 떠올랐다.


그 빛으로 인해, 괴수에게도 활공하는 자신의 그림자가 땅에 보일 정도였다. 크기는 작지만 태양과도 같이 강렬한 빛이었다.


그리고, 하늘을 가르는 듯한 외침이 들렸다.

“니샤르드의 파편들이여!”

그 목소리에는 파괴당한 카데론의 응어리진 울분이 가득했다.


칼라이스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의지와 상관없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곳에 차원을 뚫고 온 라스가 깨진 유리 같은 하늘의 파편과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라스의 붉은 머리는 어느새 저주받기 이전처럼 영광스러운 은빛으로 빛났다.


그의 손에서 짐승을 멸할 준비를 마친 광명의 창이 빛을 발했다.

창의 형태대로 가두어 둔 빛 앞에서 달빛조차 희미해졌다. 투박한 외형의 창은 그 무엇보다도 찬란했다.


“이곳에 카데론의 마지막 칼날이, 예오딘의 분노가 내려왔노라!”

뇌성(雷聲) 같은 라스의 목소리가 초원의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그것은 칼라이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짐승에게 고하는 소리였다.


일순간 창을 든 라스의 모습에서 니샤르드의 눈으로 보았던 ‘그’의 분노가 겹쳐 보였다.

짐승은 옛 공포가 다시 실현됨을 직감했다.


“이제 너희 눈으로 직접, 목도하여라!”

마침내, 초원의 어둠을 몰아낼 징벌의 창이 라스 예오딘의 손끝을 떠났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칼라이스의 절규가 창과 맞닥뜨렸다.

울부짖는 짐승이 남은 한 팔로 바람을 날리며 창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의 일격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선으로 빠르게 내리꽂히는 창은 일순간에 괴수의 팔을 뚫은 뒤 심장마저 꿰뚫었다.


창이 박힌 짐승의 몸이 빠르게 타들어 가며 유성처럼 떨어졌다.

그 몸의 조각들이 하늘에 수많은 재의 잔해를 남기며 짐승의 정신과 아득히 멀어져갔다.


몸이 점점 사라져가며 칼라이스는 여사제의 말을 떠올렸다.


-유성우가 내리는 만월의 밤에, 오래된 힘의 단편이 내려올 것이다. 정녕 힘을 원한다면 네 손으로 거머쥐거라.


‘사제는 왕의 힘에 대한 언급은 일절 하지 않았었다. 니샤르드의 피를 이은 짐승이 왕의 힘을 어떻게 쟁취하란 말이냐!’

사제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사지로 몰아넣었단 사실을 깨달은 칼라이스는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날 속이다니···!”

이곳에 온 선택을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무자비한 빛의 창이 땅에 꽂히자, 응축된 빛이 터지며 폭발이 일어났다.

이디스 일족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리었지만, 눈을 멀게 할 듯한 빛의 강렬함을 가리기엔 무리였다.


그 빛의 폭발을 머나먼 남부, 퓌오른도 보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작은 운석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 고스란히 초원을 덮쳤다.


땅이 뒤흔들리며 요동쳤고 폭발의 후폭풍이 초원의 모든 곳에 영향을 미쳤다.

아무도 초원 위에 발을 붙이고 서 있을 수 없었다.


충격파와 함께, 생명의 흔적들을 모두 덮으려는 먼지 폭풍이 초원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일족은 전승으로만 듣던 카데닌의 힘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서둘러 몸을 낮추고 두 눈을 감아라!”

바라크의 말이 후폭풍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일족은 입 모양을 보고 짐작하였다.

바라크가 엎드리자, 의식이 남아있는 이디스인들은 그를 보고 따라 하려 했다.


하지만 바라크의 말에 따라 엎드리기 시작했을 땐 이미 먼지 폭풍이 들이닥친 뒤였다.


“크으으⋯.”

일족은 진원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순식간에 퍼져가는 먼지 폭풍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한참 뒤, 빛은 그 분노를 완전히 쏟아낸 후에야 잦아들었다.


라스는 빛의 창이 박혔던 거대한 구덩이에서 짐승의 머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끄러지듯 구덩이의 벽을 타고 내려간 그는 한발씩, 칼라이스를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짐승은 도저히 살아있는 상태로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생명의 기운이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여우 같은 년에게 속아 목숨을 잃다니···. 어처구니없는 최후로군.”

칼라이스는 몸이 바스러져 가면서도 한을 표출했다.


라스는 그 말을 듣고 칼라이스의 초원 침공을 부추긴 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이라도 짐승을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아직 짐승에게는 물을 것이 남아 있었다.


“말해라, 너를 초원으로 보낸 자의 이름을.”

라스는 한 손으로 칼라이스의 머리를 들어 올렸다.


뇌리에 한 가지 계책을 떠올린 짐승은 비열하게 웃음 지었다.


“못 해줄 것도 없지. 네놈이 복수해 준다면, 조금은 덜 억울한 죽음이 될 터⋯.”

칼라이스는 입이 사라져가면서도 원흉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

그 입 모양은 배후가 누구인지 정확히 가리켰다.

짐승의 입을 통해, 배후의 정체를 들은 라스는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 한을 쏟아낸 칼라이스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 흩날리는 바람에 사라졌다.


“···”

짐승의 복수를 할 마음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복수가 되고 말 것이다.

자연스레 라스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괜한 걱정이어야만 한다. 바라크에게 말해줘야 하나···.’

자신의 예감이 빗나가길 바랐다.

그저 뼈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 미래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라스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하아···.”

모든 힘을 소진한 라스는 처량하게 무릎 꿇었다.

은빛으로 빛나던 그의 머리가 과거의 추억을 뒤로한 채 다시 붉게 물들어 갔다.


본래라면 카데넬의 빛은 지금의 라스로서는 사용할 수 없는 힘.

그렇다고 한들, 힘을 사용한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라스는 자신의 존재가 안에서부터 무너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카데닌의 후예들을 지키기 위해서, 한계에 봉착한 라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을 희생하는 일뿐이었다.


다만, 초원의 멸망을 막았다는 한 가지 사실에 위로를 얻으며 이디스의 선조는 비로소 안도했다.


이 땅의 모든 짐승에게 보내는 메시지.

‘초원의 땅을 넘지 말라.’

그것을 전하기 위해 라스는 불완전한 고리로 무리하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무리가 말을 타고 구덩이를 내려오고 있었다.

바라크를 필두로 요슈아와 아리마 형제를 포함한 수인대의 일부였다.


잠시 후 라스 앞에 다다른 바라크와 일족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더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카데론의 후예를 멸족의 위기에서 구해낸 카데닌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곳곳이 너덜너덜해지고 피 묻은 옷이 보여주듯 그들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이것은 모든 카데닌을 대신하여, 일족에게 짐을 떠안긴 자의 속죄일 뿐입니다. 그러니 감사는 괜찮아요.”

“···”

억지로 내비친 라스의 애잔한 웃음이 일족에게는 아련하게 느껴졌다.


결국 일족의 모두가 라스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이제 그에겐 해명의 의무가 남았으나 안타깝게도 당장은 그럴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라스는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아리마, 히스아.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무엇이든 하명하십시오, 카데닌이시여.”

라스의 정체를 알게된 아리마와 히스아가 부담스럽게 예를 갖추었다.


“불기둥이 사라져서 지금쯤 당황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가서 사람들에게 전투가 끝났다고 알려주세요.”


칼라이스와의 전투 중반부터는 모든 힘을 소진한 라스였다.

아마 불기둥도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장막의 사람들은 초원에 한 마리의 짐승도 남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들을 보호하던 불이 사라졌으니 어쩌면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스는 아이들에게 직접 가고 싶었지만,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카데닌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아리마와 히스아는 그 즉시 말을 타고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들 역시 몸이 정상은 아니었지만, 카데닌의 명이기에 기꺼이 따랐다.


“그리고 바라크.”

“말씀하십시오. 카데닌이시여.”

바라크는 모든 게 사실로 판명된 이상, 더는 라스를 단순히 손님으로 대할 수 없었다.


“바라크에게도 부탁 하나 드릴게요.”

라스에게는 사실 말을 이어 나가는 자체가 버거웠다.


“생각보다 꽤 무리해서 오래 쓰러져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있는 장막에 아무나 못 들어오게 해주세요.”


라스는 회복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직감했다.

그에게는 방해받지 않고 온전히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처소로 모시겠습니다.”

바라크는 라스를 곧장 자신의 말 뒤에 태워, 일족의 장막으로 향했다.


몸의 긴장이 풀리며, 서서히 라스의 눈이 감겨갔다.

‘그래도 이번에는 지켰네···.’


무거운 눈꺼풀 사이 지평선 너머로 동이 트는 것이 보였다.

희미한 햇빛 한줄기가 길고 길었던 밤이 끝났음을 알려왔다.


라스는 바라크 등에 완전히 기대어,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달리 라스의 표정은 밝았다.


오랜만에 후련한 아침을 선물 받았기 때문일까.

어느 때보다도 마음만은 평온했다.


작가의말

흐름을 고려하다보니 내용이 엄청 길어졌네요.

그래도 다음화로 결말을 넘기는 것보다는 낫죠.

후우··· 분할하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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