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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데론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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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치비
작품등록일 :
2024.01.19 17:22
최근연재일 :
2024.02.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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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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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넘어 전해야 하는 것 (3)

DUMMY


“약 삼백 년 전, 용서받지 못할 ‘큰 뱀’이 파멸의 상처를 우리 조상에게 안겨 주었을 때, 전승에 따르면 카데넬께서 그 짐승의 반신을 분쇄하셨다고 전해지지.”

바라크는 라스도 경험하여 알고 있는 이야기로 서두를 떼었다.


그날, 카데론의 주인에게 니샤르드는 단 한 번의 일격으로 반신이 분쇄되었다.

지금 여기 있는 누구보다 그날의 일을 잘 아는 자가 라스였다.


“그러나 뱀은 카데넬께 반신을 잃었음에도, 죽지 않고 결국 도망치는 데 성공했네.”

니샤르드는 살아남은 카데닌들을 인질로 잡고서 가까스로 카데넬에게서 벗어났다.


그것이 바로 재앙의 시작이었다.


“놈이 도망치면서 이 땅에 떨어뜨린 피와 살점들이 변하여, 이 땅에서 짐승의 형상을 갖추었어. 그렇기에 뱀의 기억을 공유하며 자신이라는 개체를 확립한 살점과 피 하나하나가 큰 뱀의 의지를 이은 분신이라 할 수 있지.”

요슈아에게서는 마저 들을 수 없었던 이유.

이 땅에 니샤르드의 분신들이 발생하게 된 비화를 알게 되자 라스는 분노가 차올랐다.


“그렇게 땅에 떨어진 짐승들은 이 세상에 먼저 거류하던 인간들의 생명을 집어삼키거나, 동족상잔을 벌여 힘을 키웠다네.”

“···”

바라크에게 라스의 움켜쥔 주먹이 보였다.


“그러던 중, 추방당한 카데닌 가운데 유일하게 고리의 조각을 지니고 있던, 우리의 시조 브레가흐가 살아남은 카데닌들을 규합해, 이 초원에 도달하였네.”


‘초원 일족의 정체가 브레가흐의 후손이었다니···!’

요슈아가 스승을 닮은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브레가흐와 함께 낯선 이 땅에 처음 도달한 카데닌들은 반세기 동안 방랑하였어. 뱀의 저주는 한때 축복받은 자들이었던 카데닌의 육체까지 붕괴시키지는 못했지만, 이 땅이 그들의 저주를 감당하는 건 역부족이었다네.”

“이 땅도 저주받은 겁니까?”

라스는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그렇네, 카데닌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주변의 생물들이 생명을 잃을 정도로 지독한 저주가 스며들었어···.”

저주는 끝없는 증오를 내비치며 살아있는 생명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날 ‘큰 뱀’이 카데닌에게 안겨준 저주로 인해, 모든 카데닌의 고리가 부서졌다.

영광스러운 은발은 그들의 죄처럼 붉게 물들어 그 빛을 잃었다.


저주는 영원히 계승되는 족쇄이자, 회복되지 않는 영혼의 상처.

그리고 뱀의 피이자 카데닌 스스로 자멸하기를 바라는 니샤르드의 의지였다.


“초목이 말라가고, 짐승들이 피해 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이 땅의 원주민들은 우리 조상들을 죽음을 몰고 다니는 자라고 불렀네.”


그렇다고 해서 이 땅의 민족들은 이방인들을 홀대하고 무시하지 못했다.

이 땅에서 짐승들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카데닌뿐이었다.


자신들에게 찾아온 재앙을 물리쳐 주는 대가로 카데닌들에게 식량을 공급했다.

그것이 어떤 동기로 인한 것이었든지, 카데닌들은 자신들을 선대(善待)한 자들을 위해 짐승들과 싸웠다.


“카데닌에게 뱀의 분신들 역시 고향의 원수나 다름이 없었으니, 그것들을 죽여서 복수하고자 했다네.”

이 땅에서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게 하는 것. 살아남은 카데닌들은 그것이 카데넬께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사람들이 터전을 잃고 도망치는 상황 속에서, 카데론의 모습을 떠올린 카데닌들은 짐승들의 악행을 잠자코 지켜보기 힘들었다.


설령 고리가 부서져 고리의 힘을 거의 잃었다 할지라도 짐승에 맞서 나아갔다.


브레가흐 역시 고리 조각이 일부밖에 남지 않은 탓에, 카데론에서와 같이 강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거의 모든 짐승을 압도했다.


“그렇게 짐승들을 몰아내고 오랜 방랑 끝에 첫 땅, 초원에 정착한 브레가흐는 이 땅에서 두 아들을 두었지. 바로 이디스의 조상, 초대 바라크인 장자 아크나드와, 퓌오른 왕국의 국조(國朝), 아이센이네.”

“어째서 카데닌의 후예들이 둘로 갈라지게 된 거죠?”

라스의 짐작으로는 그 이유가 왠지 좋은 이유는 아닐 것 같았다.


“···욕심 때문이네.”

“욕심이요?”

“시간이 흘러 카데론에서와 다르게 영원할 줄 알았던 생명이 끊어지면서, 브레가흐는 죽기 직전, 자신의 부서진 고리를 두 개로 나누어 각각 두 아들에게 남겼네. 하지만 유산을 넘겨받은 아이센은 의무를 저버렸어···.”


아이센은 받은 고리 조각에 철을 섞어, 새로운 고리를 만든 후 왕의 증표로 삼은 후, 자신의 의무는 여기까지라고 선언하며 상당수의 카데닌을 이끌고, 초원을 떠났다.


그리고 초원 남부에 정착하여, 자신의 야욕대로 지금의 퓌오른 왕국을 건설했다.


“현재 퓌오른의 고리가 왕의 것을 제외하면, 그저 왕의 인을 새겨넣은 모조품이자 시민권일 뿐이지.”

의무를 저버린 자에게 고리는 더 이상 응답하지 않았다.

아이센이 가진 고리는 그저 왕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라스는 어떻게 브레가흐에게서 그런 자식이 태어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아비의 유지는 외면한 채, 유산만 받고 달아난 자식을 용서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아크나드는 아이센과 다르게, 장자로서 아버지의 유훈을 끝까지 지키고 싶어 했지. 그는 아버지의 혈과 육을 이은 자로서, 그의 복수와 속죄의 의무 또한 함께 계승했다고 생각했네.”

바라크는 조상의 선택을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여태껏 보였던 것과 격이 다른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반쪽짜리 카데닌이었으며 완전한 고리를 계승 받지도 못했지.”

부서진 고리로도 짐승들과 맞서던 아버지와 달리, 아크나드가 가진 힘은 너무나도 부족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의 유지를 잇고 싶었던 아크나드는, 아이센처럼 아버지에게 받은 고리 조각을 녹인 후 철을 섞어 길게 연성했다.


하지만 아이센과 달리,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닌 자신에게 남은 무리를 이끌기 위함이었다.

아크나드는 그 철을 무리와 가족의 수대로 나누어 고리를 만들어 주었다.


고리의 힘을 사용하게 된 사람이 많아지자, 남은 자들은 이전에 상대할 수 없던 짐승들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되었다.

비로소 아크나드는 짐승에게 맞설 군대를 얻게 된 것이다.


“그 뒤 일족은 저주를 정화할 수 있게 되었네. 물론 은빛 머리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저주가 땅과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게 되었지.”


라스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자신은 주변에 저주를 퍼뜨리지 않는 것인가.

다른 카데닌과 같은 저주를 뒤집어썼음에도 그는 주변의 생명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가 탓던 말이 저주에 내성을 갖고 있을 리도 없었다.


‘아니면 저주가 발현되지 않은 것인가?’

하지만 그럴 리 없다.

이미 저주는 머리 색을 바꾸어 놓았으니까.


“저주는 어떻게 정화할 수 있습니까?”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지금은 저주가 멈춰있을지라도, 그의 저주는 다른 카데닌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이 땅과 생명에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라스는 저주를 정화하는 법을 알아야만 했다.


일족의 모든 전승과 정보를 손에 쥔 바라크라면,

다른 일족과 다르게 저주가 옅어진 바라크라면 그 방법을 알지도 모른다.


“원하는 답은 모든 이야기 끝에는 줄 수 있을 것 같군. 우선은 우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겠나?”

“알겠습니다···.”

“그 이후, 아크나드는 금주(禁酒)의 맹세로 자신의 기쁨마저 포기하였다네.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인생을 오롯이 원수인 짐승으로부터 이 땅을 지키는 데에 바쳤어.”

바라크의 목소리가 오래된 감정에 물들어 갔다.


“아크나드 사후에도 일족은 세대를 거듭해 고리 나누기를 반복하며 그의 의무를 계승했네.”

아크나드의 의지는 결단코 끊어지지 않았다.

일족이 여전히 짐승과의 사투로 인생을 바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일족은 저주받을 짐승과의 전쟁에 일생을 바치고 있다.


어쩌면 이 의무와 가르침이 고된 짐이자, 일족을 옭아매는 속박일지도 모른다.

퓌오른이 선택한 길이 옳았다.

그렇게 생각했던 날들도 바라크에게 있었다.


“비록, 퓌오른의 일부에서는 우리를 과거에 사로잡힌 망령이라 부르지만 말이지. 하하하!”

바라크는 일족을 향한 모욕을 남의 일인 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들 눈에는 짐승의 털 옷을 입고 초원에서 사는 우리가, 인생을 조상의 의무를 따르는 것에만 쏟는 우리가, 그들 눈에는 미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후회했던 날 또한 먼 과거의 얘기일 뿐, 바라크는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상관없다고 말하였다.


과연 바라크가 스스로 자부심을 느낄만했다.


하지만, 형제인 퓌오른조차 알아주지 않는 그들만의 자부심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 고행을 묵묵히 이어 온 일족에게, 라스는 깊은 존경심이 들었다.


거듭 반복해 온 짐승들과의 전쟁에서, 일족과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이 했을 노력.

또 일족을 잃은 슬픔.

그리고 일평생 짐을 나누지도 못하고, 모든 걸 속으로 감내했어야 할 일족.


그들의 인생은 과연, 그 고뇌와 처절한 저항 끝에 그 이상을 보답받았을까.

라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카데닌은 이디스 일족에게 너무 큰 짐을 떠안기고 말았다.


미안함과 죄책감.

지금 느끼는 복잡한 감정 중, 편치 않은 긴 세월을 보냈을 일족에게 가장 전하고 싶은 감정이었다.


“혹시, ‘큰 뱀’에 대해선 더 들으신 것이 있으십니까?”

“전승으로도 들은 것이 없네. 그 이후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다고 전해지지만 큰 뱀이 죽었다고는 생각지 않네.”


‘그놈이 그리 쉽게 죽었을 리 없다. 카데넬께 반신이 사라지고서도 도망친 놈이다.’

라스도 니샤르드가 살아있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하는 뱀의 흔적을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나도 질문을 하나 하지.”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나도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퓌오른의 많은 이들을 접하기도 했네만, 사실 자네는 퓌오른 사람이라기보단⋯.”

바라크는 뜸을 들이며 말하기를 주저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의 정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 탓이었다.


“⋯그래, 꼭 우리 조상들과 같네.”

바라크가 망설임 끝에 힘겹게 말했다.


“일족의 수인대가 쓰러진 자네를 처음 발견했을 때, 자네는 짙은 저주를 품고 있었어.”

“⋯”

“하지만 저주는 이내 고리가 빛나면서 잠잠해졌어.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화된 것이었지.”


저주를 정화하는 열쇠는 고리의 힘이었다.


‘생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때 눈치챘어야 했어.’

저주가 이미 정화되었단 사실을 몰라 라스는 그만 정체를 드러내는 언행을 하고 말았다.


바라크는 결코 라스의 특이한 고리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제야 바라크가 식사의 순서를 바꾼 것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잘 속여 넘긴 줄 알았는데···.’

실상은 라스의 어설픈 거짓말을 바라크가 모른 척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라스는 정체를 들키기 전에, 복수와 속죄를 위해 이곳을 곧 떠나려 했다.

과거의 망령은 이디스 일족이 아니라 모든 걸 잃고도 여전히 살아 있는 자신.

이곳에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다행인 것은 아직 라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이 바라크 한 명뿐이라는 것이었다.


아리마 형제 또한 라스가 무언가 다름을 감지했지만, 바라크처럼 확실하게 라스의 정체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골치 아프게 됐네···.’

라스는 자신의 정체를 추궁당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가? 자네가 보기엔 계승된 죄로 인해 조상의 유훈을 지키며, 짐승들과 싸우는 일족이 미련해 보이는가?”


뜻밖의 질문이었다.

언젠가 라스에게서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바라크는 라스가 그의 정체를 직접 말해줄 때까지 기다릴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바라크의 배려가 고마워, 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물론 그에 대한 라스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선조께서 보셔도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하하핫, 그렇단 말이지.”

다른 말은 들을 필요도 없이, 그 대답 하나로 바라크는 만족했다.


일족이 바쳐온 세월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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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넘어 전해야 하는 것 (3) 24.01.28 2 0 12쪽
6 시간을 넘어 전해야 하는 것 (2) 24.01.25 4 0 13쪽
5 시간을 넘어 전해야 하는 것 (1) 24.01.21 6 0 16쪽
4 카데론의 마지막 유산 (4) 24.01.21 5 0 15쪽
3 카데론의 마지막 유산 (3) 24.01.19 5 0 16쪽
2 카데론의 마지막 유산 (2) 24.01.19 13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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