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비명
제16장. 비명
인기척을 느낀 민우가 흘낏 뒤돌아보자,
“저, 저기요...선생님들!”
역시 낮은 목소리로 말을 뺀다.
“선생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
“저기, 저 슈퍼 주인 되는 사람입니다.”
어디선가 숨어서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중키에 40대 중반, 팔자 눈썹 밑 조그마한 눈에는 지혜로운 빛이 있다.
그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그래서요?”
민우가 묻자,
“으, 은인들을 어찌 이대로 보낼 수가...”
이때 길 건너 백양나무 밑에 있던 문철과 수지가 다가온다.
그중 문철이 반색을 한다.
“은인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을 가지고...”
‘이 양반이 또 '의인' 클리쉐를...’
“그, 그래도...내려오신 것을 보면 뭐 필요한 게 있어서 오셨을 텐데.
부담가지지 마시고 말씀만 하십시오. 필요한 것들, 제가 뭐든 다 드리겠습니다!“
문철은 그래도 주저주저한다.
보다 못한 민우가,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생수 2리터 짜리 10통. 가스버너 3개, 부탄가스 100통, 쌀 20kg, 롤 화장지 30개, 라면 4박스, 김치 30kg, 육포 100개, 스팸 100통, 칼로리 바 100개, 오뚜기 자른 미역 100개, 자일(등반용 로프) 20미터...(중략)..... 치약10개. 이상입니다.”
“아, 아니, 그 많은 걸 다 가지고 가실 수...”
하다가 새삼스럽게 민우와 준후의 체격을 보고는,
“그, 그러실 만도 하겠군요. 그럼 요구하신 분량에 최대한 맞추어 보겠습니다.
그, 그런데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좀 머리가 나빠서...“
꽁지 빠진 닭처럼 숱이 많이 빠진 뒷머리를 긁는다.
민우는 다시 한 번 필요한 생필품들을 말해 주었고 주인은 주문 받는 여종업원처럼 꼼꼼히 이를 메모지에 적는다.
다 적었을 때 민우는 수지를 흘끔 보고는 슈퍼주인에게 다가가서 귓속말로,
속닥속닥...
여성용품도 좀 같이 넣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네, 네, 잘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면서 슈퍼주인은 주위를 살핀다.
아주 중요한 얘기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이 얘기를 할까말까 망설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마음을 굳힌 듯,
꿀꺽.
“저기...그, 그런데...선생님들...제가 선생님들이기 때문에 특별히...말씀해 드리는 건데요...”
무슨 큰 비밀이라도 공유하는 양 뜸을 들이다가,
“사실은 저는 프레퍼입니다. 아시죠? 지구의 대재앙에 미리 대비하는.
그런데 아, 아무래도...돌아가는 상황이...심상치가 않습니다.“
이 지역 내 프레퍼 동호인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하였다.
왜 그렇게 빨리 가게 셔터문을 굳게 닫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순간 민우는 이 자의 볼록한 오른쪽 점퍼 주머니에 권총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쟈칼을 가지고 있는 수지는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과 멀찍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스캔을 시킬 수가 없다.
만약 저 볼록한 것이 권총이 맞다면,
조만간 이 마을에서는 유혈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자신들의 생필품을 지키려는 프레퍼 네트워크와 아까 그놈들처럼 이를 빼앗으려는 약탈자들.
상관할 바 없었다.
그런데...
“.... 정전이 되었기 때문에 TV가 안 나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이렇게 핸드폰이 안 되는 것도 이해가 되는데, 라디오도 안 나옵니다!”
하면서 제 스마트폰을 꺼내어 든다.
버젓이 켜져 있다.
“어? 그 핸드폰 고장 안 났네요?”
“아, 예...”
어리둥절해 하는 눈치다.
이때 문철이 끼어든다.
“가, 가만요. 그럼 이곳에 있는 핸드폰들은 고장 나지 않았다는 건가요?”
“물...론이죠?”
여전히 의아해하는 눈초리다.
“그래요? 저희들 건 아예 켜지지도 않던데. 그래서 저희는 EMP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했는데요?”
“EMP가 터진 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통신이 안 됩니다.”
단호하게 말한다.
“EMP는 그 통신기기를 고장낼 뿐 이렇게 지속적인 통신장애를 일으키지 않지 않습니까?”
역시 프레퍼라 잘 알고 있었다.
EMP는 마치 폭탄 같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폭탄이 터지듯 부욱~ 이렇게 확장되면서 왔다가 가 버린다.
단 2, 3초만에 끝나 버린다.
그리고 페러데이 케이지 등을 통해 이 2, 3초를 견딘 전자제품들은 여전히 작동이 된다.
(*페러데이 케이지(faraday cage) : EMP 차폐기능이 있는 박스)
“그런데 어디 계셨는데 그런 일이? 이 펜션촌에서 한 번도 못 보던 분들인 것 같은데...”
슈퍼주인, 김수한은 이런 사람들이라면 단 한 번을 봤어도 분명히 기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저 위 펜션, ‘소나무가 있는 언덕’(수지네 펜션 이름)이라고.”
이 말을 들은 김수한이 눈을 빛낸다.
“아, 거기 주인 양반도 프레퍼십니다. 물론 저희 네트워크 가족이고요.”
“아, 그런가요?...”
“그런데 연락이 안 됩니다. 서울, 처갓집에 가셨는지...”
그건 알 바 아니지만,
‘왜 유독 그 펜션에만 EMP가?....’
역시 자신이 기절할 때 쳤던 그 번갯불 때문인 것 같았다.
핸드폰이 타버리진 않았지만 현실의 변수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혹시나 자신의 실신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싶어,
‘쟈칼, 잘 있냐?’
-네, 잘 있습니다.
‘너도 지금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쟈칼은 민우와 감각을 공유하므로 민우가 들은 것은 쟈칼도 들을 수 있다.
‘너 똑바로 말해. 너 땜에 EMP가 발생한 거지, 니가 내 몸에 달라붙으면서.’
-그건 절대 아닙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마스터께서 깨어나신 후 ‘알 수 없는 도우미’란 형태로 마스터를 찾아왔단 걸.
그래서 제 메모리엔 그전의 정보가 전혀 입력되어 있지 않습니다.
저는 기계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특히 저의 주인이신 마스터께는.
시침을 뚝 뗀다.
‘음....’
그 사이 슈퍼주인 김수한은 한 발 더 나가고 있었다.
“......일단 저희들이 보유한 햄(ham) 통신이 안 됩니다. 이 지역만 가능할 뿐."
"그래요? 그건 진짜 이상하군요..."
민우는 다시 대화에 발을 들여 놓는다.
햄 통신조차 안되는 상황은 상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프레퍼들이 달리 그 구닥다리 햄 통신을 기본으로 갖추는 것이 아니다.
특히 오늘처럼 기상조건이 양호한 날에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도 햄통신이 가능하다.
“조금 더 자세히요.”
부연설명을 요구한다.
“네, EMP 등으로 인한 통신혼란에 대비해서 저희 네트워크 가족들 각자가 보유하고 있는 햄 라디오 같은 경우에도,
이 강릉시와 그 주변 약 반경 5킬로 정도 지역의 전파만 잡힐 뿐 그 외부의 전파는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저희 전담요원들이 안테나를 강릉 인근 높은 봉우리 어디에 설치를 해도.“
하고는 침을 꿀꺽 삼킨다.
“그,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저희 네트워크 가족 중 몇 명은 어제 사태 발생 당시 그걸 외부로 알리기 위해,
강릉 외부에 있는 지인들과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일시에 모두 통신이 끊겼다는 겁니다.
그것까진 뭐, 기지국 사정일 수도 있으니까 괜찮은데 문제는...
그 중 몇 명의 통화자는 통화가 끊기는 순간 통화 상대방의 비명을 들었다는 겁니다.
어어~~억! 하면서 말이죠. 마치 단말마같은.
또는 쾅! 하면서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은 굉음...“
“그래요? 몇 명 중에 몇 명이나요.”
“정확히 11명 중에 5명이요.”
“더 구체적으로?...”
“네. 그 5명 중 3명은 비명, 2명은 폭음.”
“허~!”
일행 사이에 경악과 탄식이 흘렀다.
“그래요? 그 정도면 의미 있는 수치인데요...심각하네... 이거...”
하면서 식구들의 눈치를 슬쩍 본다.
모두들 얼굴빛이 백납처럼 하얗게 되어 있었다.
“그럼 아까 슈퍼문을 부수려던 그 패거리들도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단 소릴까요?
그래서 그런 무리수를 둔 걸까요?“
민우의 물음에,
“아...마도요... 이, 이건 제 생각인데요. 아마도 그놈들도 저희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즉, 그놈들도 인원수가 많잖아요.
또 그놈들이 묵고 있는 민박촌은 이 동네에서 가장 큰 민박촌입니다.
이 민박촌에 묵고 있는 사람들끼리 이미 모종의 정보교환과 의기투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음... 그러니까 사장님 네트워크처럼, 재앙발생 당시에 타 지역에 있는 지인과 핸드폰 통화를 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고, 그들 모두 다 일시에 통신이 끊겼다?”
“그렇죠. 그리고 아마도 저희 경우처럼, 그 중 몇 명은 비명 또는 폭음과 함께...“
놀라운 소식이었다.
이곳 강릉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에 모종의 대재앙이 닥쳤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말.
특히 비명, 이 말이 식구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푹 박힌다.
제 각각의 지인들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선지 수지와 미후는 이 대화를 듣는 내내 두 손을 올려 제 입을 꾹 틀어막고 있었다.
잠시 후.
5인은 막 마을 어귀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민우와 준후는 길 나선 보부상처럼 커다란 등짐을 지고 있다.
터벅터벅.
그런데 이때,
“어이~! 이봐요! 이봐요!”
이번에는 자전거를 타고 오며 뒤에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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