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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일 님의 서재입니다.

우사인 볼트 씹어먹는 괴물 육상천재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스포츠, 드라마

공모전참가작

정하일
작품등록일 :
2024.05.08 11:43
최근연재일 :
2024.06.15 08:30
연재수 :
42 회
조회수 :
22,002
추천수 :
522
글자수 :
281,222

작성
24.05.08 15:05
조회
1,064
추천
23
글자
18쪽

EP1. 육상천재가 회귀했다.

DUMMY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이 말이 누구 입에서 나온 건지 모르면,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봐도 무방할 거다.


적이 자신의 죽음을 알면 그들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우위를 점하려 들 터이니 지금은 애도할 때가 아니라는, 당장의 전투에 집중하라던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한 말.


하나, 딱히 내 좌우명이나 인생의 모토는 아니다.


그런 내가 문득 이 철혈의 문구를 떠올린 이유는, 지금 떡하니 그를 표상하는 동상이 내 눈앞에 있어서다.


아주아주 낯익은 동상이다.

부릅뜬 이순신 장군의 눈빛이 마치 날 내려다보는 것만 같다.


그것은 서울 광화문 일대의 중추를 세워 주는 이순신 장군 동상도 아니었고,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비범한 신당에 있는 동상 따위도 아니었다.


그냥, 아주 그냥 모양만 이순신 외형으로 해 놓은 주철 조형물에 불과했다.


그니까 내 말은, 초등학교가 가꾸는 작은 정원에 있을 법한 그런 동상 말이다.


그리고.

정말 영락없는 초등학교가 맞았다.


도로 위에 널브러져 올려다본 까만 밤하늘 다음으로 본 풍경은 믿기지 않게도 그것이었다.





EP1. 육상천재가 회귀했다.





“음?”


다시금 눈을 떴을 땐, 서늘한 아침 공기가 콧구멍에 가득 들이닥쳤다.


이전의 밤하늘과 빗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구름 사이로 따사한 햇볕이 비추는 중이다.


맑고 화창하긴 한데 오묘하게 덥다.

내가 서 있는 곳 주변의 나무엔 새순이 솟았다.


감각적으로 봄임을 느꼈다.


“어······?”


그래.

사고, 차 사고.

나 죽었던 거 아니었나?


뭐야, 꿈이라기엔 너무도 현실적이다.

나의 오감이 이 공간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습득하고 깨우쳤다.


선 채로 눈을 뜬 곳은 학교 운동장.

모래알만 가득한 그 허허벌판 한가운데였다.


그런데 그 학교로 추정되는 공간이 불편하리만치 익숙했다.

마치 어제도 이곳에 온 것 같은 기시감은 덤이었다.


‘설마.’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기에 앞서, 구체적인 해답은 아니었지만 짜리몽땅해진 내 팔다리로 대강 알 수 있었다.


내가 어디에 있고, 내 처지가 지금 어떠한지를.


너무 짧아진 내 팔다리.

그리고 무엇보다 낮아진 내 시선.

키가 줄어든 거다.


그런 와중에서 삼삼오오 작디작은 아이들이 꺄르륵 웃어 대며 교문을 들어선다.


‘······초등학생?’


그렇게 몇 초간 뭐라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손바닥만 바라보고 있을 때.


곧이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가 영락없는 이 학교의 학생임을 다시 알려 줬다.


“야, 길!”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보니 두 아이가 날 향해 달려오고 있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동안 둘의 손에는 신발주머니가 힘없이 흩날린다.


“왜 여기 서 있냐? 교실 안 가? 혹시 우릴 기다린 건가!”


아, 아.

목소리부터 얼굴까지 모조리 익숙한데, 당장에 이 녀석의 이름이 기억나질 않는다.


그리고 그 옆에는 덩치 큰 아이가 뒤늦게 도착했다.

한 손에는 주스를 들고 달리기가 서툰지 그 짧은 거리를 달리고서도 숨을 허덕인다.


“헉, 헉. 아침부터 뛰지 좀 마, 용제야.”


아, 맞다. 용제다. 그럼 이른 아침부터 입에 무언갈 넣고 있는 저 녀석은.


“야, 뭐 얼마나 뛰었다고. 너 그거 진짜 소아비만 돼! 길아, 네가 보기엔 호동이 위험하지 않냐?”


그래.

용제, 호동 그리고 나.

우린 4학년이었다.


아침부터 시큰하게 말로 얻어맞은 호동이가 인상을 팍 찌푸린다.


“먹을 거 가지고 뭐라 하는 게 제일 나빠!”

“야, 나중에 고맙다고나 하지 마라.”


그렇게 만 10살짜리들의 실랑이 끝에 지나가던 여자애 한 명이 우릴 불렀다.


“야! 안 와? 또 늦는다?”


아, 설마.


삼도 수군통제사 옆에 놓인 시계탑이 곧 9시가 임박했음을 알려 줬다.



* * *



생을 마감했다는 그 저릿한 감각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난 새로이 얻은 요상한 2회차 삶을 받아들이기 바빴다.


이 공간과 시간이 예전 그날과 비슷하다 못해 똑같았다.


마치 전지전능한 자가 내 생의 시계태엽을 역방향으로 감아 놓은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강제로 시작된 학교생활에 당연히 난 적응하기 힘들었고.


아니, 애당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건 누구나 그럴 터였다.

내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순리가 뭔가 크게 뒤바뀐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간은 언제나 순방향이니까. 아무에게도 기다려 주거나 되돌아가지 않으니까. 그래서 공평한 건, ‘시간’뿐이니까 말이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자들에게도 시간은 같은 속도, 같은 방향으로 흘러갈 뿐. 그렇게 난 20대 초중반이 되었고, 사고사를 당했다.


내세에 대해서 모르긴 몰라도 내가 가야 할 곳이 사후 세계여야 한다는 건 딱히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터. 이렇게 버젓이 청쾌한 여름 아침의 초등학교일 순 없는 노릇이다.


두리번거리며 몇 번이고 교실 내부를 확인해도, 그날 그 모습 그대로였다.


계단과 복도, 교실 뒤 게시판에 정렬된 우리 미술 작품들.

옆자리 친구들, 칠판, 내 서랍에 고이 놓인 교과서들까지.


혹시라도 여기가 내 자리가 아닐까 싶어 교과서 뒤표지를 보니, 서툰 글씨로 써진 내 이름 두 자가 보인다.


- 한 길.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그래서 바로 옆자리인 용제에게 한사코 물음만 던질 뿐이었다.

그게 그나마 내가 면학 분위기를 읽고서 눈치 있게 움직인 거였다.


“야, 나 11살이야?”


“이런 미친?”


“맞냐고.”


“그럼 네가 왜 여기 있는데?”


용제가 복도 쪽 창문으로 비쳐 보이는 팻말을 손가락으로 확인 시켜 줬다.


-4학년 2반.


아침 독서 시간.

나로 인해 시작된 이 잡담이 성가셨는지 옆 아이들이 곁눈질로 눈치를 주기 시작한다.

닥치라는 듯 신경질적인 아이도 있다.

아, 맞다 쟤가 반장이었다.


반장은 패션 테러범을 방불케 하는 분홍색 뿔테 안경을 매섭게 고쳐 썼다.


이내 날 향해 쓴소리했다.


“야, 한길, 김용제 조용하지?”


“나 왜 학교에 와야 하는 건데?”


“뭐? 그게 할 소리야?”


반장과 더불어 몇몇 아이들이 어이없이 날 쳐다본다.


“반장 미안한데, 나도 피해자거든?”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한 용제였다.

그러다 용제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실로 내 정신 상태가 걱정되는지 역력한 얼굴이다.


“야, 길. 뭐 잘못 먹었음?”


“아니, 이게 맞냐고······.”


“잘못 먹은 건 저 호동이 새끼인데, 근데 왜 한길 네가 이러냐?”


아침에 먹으면서 달리느라 그새 급체했는지, 호동이가 벌써 두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린다.

급기야 호동이는 책을 엎어 놓고 머리를 박은 채로 신음을 삼킬 뿐이었다.


길지 않은 독서 시간이 지나고, 담임이 교실 문 앞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뺀질이 반장이 뭔가 적은 쪽지를 재빠르게 담임에게 건넸다.


그 쪽지를 읽은 담임은 고갤 내저으며 적힌 이름을 불렀다.


“한길, 김용제······. 벌써 몇 번째니. 오늘은 저번 약속대로 교실 청소야.”


미칠 노릇일 용제였다.


“아니요, 저기요 선생님. 억울합니다. 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근데, 한길 이놈이 오늘따라 저한테······.”


“김용제, 차라리 무시를 했어야지 그럼.”


“친구를 어떻게 무시합니까······.”


“그 말이 아니잖아.”


그때도 난 담임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오늘 방과 후에 교실 청소가 점지 되었음에도 차마 반기를 들거나 불평을 늘어놓을 재간이 없었다.


확실한 건.


‘11살이라니.’


내 인생이 리셋되었음을 온몸으로 자각했고, 어떤 불가항력의 존재는 내가 거기에 적응하고,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가차 없다는 것이었다.



* * *



“하······.”


체육 시간, 운동장.


시원하긴 하지만 유독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바람이 불어온다.

눈을 꽉 감은 채로 하늘만 턱을 치켜들고 쳐다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더얼!”


대한민국 초등학생은 바쁘다.


수업 시간에는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인 채 수업을 내리 들어야 했으며,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체육 시간조차 마음껏 뛰노는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것 또한 제약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전부였다.


예전엔 체육이라 하면 그저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었을 텐데, 어찌 내가 지금 그러겠는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힘든 것으로도 모자라 단전에서부터 헛구역질이 연신 올라온다.


“한길, 어디 아파?”


그런 날 용케 발견한 체육 선생님이 내게 다가섰고.


“······그냥 몸이 좀 좋지 않습니다.”


“흠, 그냥 쉬는 게 어떠냐 그럼.”


내 메소드 연기가 통했는지 아니면 아픈 애를 데리고 무리하게 수업을 진행했다는 여파가 염려됐는지는 모를 일이다.

다행히도 체육 선생님은 쉽게 보건실 재가를 내줬다.


그래, 보건실은 그나마 여기서 가장 조용할 테니 배드에 누워서 생각이나 좀 정리하자.


‘보건실이 여기였었나······.’


퍼즐 같은 기억을 재조합 해 천천히 1층 복도를 나아갔다.


맞네.

1층 교무실 바로 옆이 보건실이다.


그렇게 교무실을 지나칠 때, 갑자기 교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내 심리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뭔가 안에서부터 신경질적으로 문이 열린 느낌이었다.


“-그게 그 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의 덩치 큰 남자가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나선다.

우리 초등학교에 이런 풍채의 남자가 있었는지 내가 갸우뚱할 때, 그의 뒤에선 정장을 빼입은 인심 좋은 인상의 할아버지가 따라나섰다.


어, 저 사람은-


“뭘 또 그렇게까지 받아들입니까, 모두 다 사정이란 게 있는데.”


“교감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상의도 없이 체육부 예산도 줄이시고, 심지어 체육부에선 저한테 이런 얘기는 일절 없는 게 좀 그렇네요.”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해야 하지 않습니까, 부원도 줄어, 성적도 안 나와 심지어 해당 부서에 대한 큰 변화의 여지도 없다면야 당연지사-”


“늘 느꼈지만은 좀 섭섭합니다, 이런 처사는!”


교감의 말을 대차게 끊어 내는 남자였다.

하나, 교감에겐 전혀 영향력 없는 인물의 영양가 없는 괴성 따위에 지나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교감은 눈썹을 살짝 올려 뜨며 귀만 긁을 뿐이었다.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육상부에 대한 인식까지 넘어갈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많은 걸 내려놓고 얘기하는 거예요. 아닌 말로 지금 육상부원 중에 진짜 육상부원이 몇 명 있습니까?!”


그 말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얼굴만 슬슬 붉힐 뿐이었다.


보건실로 향하던 내 발걸음은 일찍이 그 두 어른의 언쟁으로 멈췄고, 교감은 그런 날 잠깐 슬쩍 흘기더니 말을 이었다.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요량이다.


“아시잖아요, 예전에도 운동했던 사람이면? 운동도 할 만큼 한 사람이······ 아니 된 말로 사람 없고, 실적까지 안 나오면 기관 측에서도 별 방도가 없는 겁니다. 이게 무슨 체육 동아리도 아니고 명색이 육상부인데 우리도 따질 건 따져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어린애처럼 떼쓴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여기 보는 눈도 있으니-”


“아니 무슨 육상부가 공장입니까? 실적이니 뭐니, 그렇게 애들 막 찍어서 상품처럼 상 타오게?! 기록이 그렇게 쉽게쉽게 찍어 내듯 나오냐고요!”


점차 언성이 높아진다.

그러다 남자는 감히 학교 2인자 앞에서 고갤 홱 틀었다.


“하, 가보겠습니다.”


이미 인심 좋은 할아버지 인상을 집어던진 교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둘의 앙금이 꽤나 오래전부터 있었단 건 확실했다.


“이홍섭 코치! 말씀 가려서 하세요! 이제껏 내가 커버한 것도 모르고-”


“커버는 개뿔이 커법니까? 육상부에 한 푼이라도 제대로 보태 주시고 말씀하시죠.”


그렇게 돌아선 이홍섭이란 남자는 짙은 한숨만 내뱉은 채 복도 반대쪽으로 나아갔다.


그 뒤엔 복도에 교감과 나.

우리 둘만 남은 채 불편한 기류만 맴돌았다.


“음, 어, 안녕하세요.”


그래도 학습된 듯 학교 어르신에게 인사를 건넸으나.


아직 11살로 보이는 꼬마인 내게 돌아온 건, 교감의 짜증 서린 눈빛과-


쾅-!


‘뭘 이걸 끝까지 듣고 앉았어?’라는 듯한 차가운 문소리였다.


교무실 문 앞에서 뒤늦게 정신을 차릴 땐 이미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난 뒤였다.



* * *



잔존하는 기억에 이끌리듯 학교생활을 어영부영 마무리하고서.


정말 그나마 다행이라 할 점은, 수업 내용이 유치하리만치 너무도 쉬웠다는 것 정도.

솔직히 그래서 더 힘겨웠다.


뻔히 아는 내용을 40분 내리 들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난 이 상황에 대한 이해에만 더 골똘히 몰두했다.


이젠 ‘전생’과 ‘이번 생’이란 표현까지 할 정도였으니······.


전생의 난 육상 선수였다.

나름 대한민국 육상계의 별이라고 칭할 정도로 유망주였고, 마지막 전국체전에서 큰 부상으로 트랙에서 멀어지게 됐다.

그렇게 심연의 늪에서 출렁일 적에 하늘이 가엾게 여겼는지 그 생을 그만 거둬 줬고-

이렇게 이번 생으로 떨어졌다.

이게, 새 생의 기회를 얻은 건지 단순히 되돌아온 건지는 알 방도가 묘연했다.


하나, 이게 어렴풋한 내 결론이었다.


이것 말고는 어떤 과학적인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정의한 단위, 시간으로는 ‘역행’이란 개념이 없으니까.

뭔가 이 우주에 어떤 큰바람이 불었고, 그 첨예한 애로사항의 곁가지는 나비효과가 되어 수순대로 진입해야 할 사후 세계가 아닌, ‘회귀’라는 바람으로 내게 불었다는 것.


그게 과학의 문외한인 내가 정의 내린 이 현상의 해석이었다.


“야 길! 청소 끝나고 알지?”


뭘 또 알아야 해.


용제가 청소 도구함에 빗자루와 밀대를 아무렇게나 밀어 넣으며 묻는다.


얼타는 내 표정이 이젠 지겨웠는지 복도에 선생님이 없는 걸 확인하고 고성을 질러 댄다.


“이런 제길! 한길! 오늘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도 미치겠다고오오!”


질러 대는 내 목소리마저도 앙칼진 걸 확인하고서 더 암울해졌다.

내 기억과 정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어려졌다.


머릿속의 나는 24살, 국가대표를 노렸던 육상 선수지만 몸뚱이는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일 따름이다.


도대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꼬라지냔 말- 음?


그때 무언가 강렬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내 머릿속 말고 모든 것이 되돌아왔다?’


자연스레 내 두 다리를 향해 내려다봤다.


새로운 삶을 찾았다는 건,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는 거고.


그건······.

전생에 못다 한 꿈을 이룰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는 거다.

그것도 내게만 말이다.


지난날, 고꾸라져 추락한 회한 짙은 트랙에 다시 한 번 도전할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점차 뭔가 몽글하면서 뜨거운 감정이 솟구쳤다.


단순한 불안과는 감정의 결이 달랐다.


“나 먼저 운동장 가 있을 테니까, 길아 정리하고 나와 알았지?!”


용제가 운동장 쪽 창문을 힐끗 확인하더니 부리나케 튀어 나간다.


홀로 남은 교실에서 난 말 없이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다리가 펴진다.

그것도 일직선으로.

쫘악 펴기만 해도 처참하게 떨리던 경련이 지금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매끈하게 펴질 뿐 아니라 탄탄하게 다시 수축한다.


그래, 내겐 열망하던 꿈이 있었다.


트랙 위에서 달리는 자들의 순리 같은 꿈 말이다.


‘육상 국가대표.’


전생에도 지친 날 늘 트랙에 발을 다시금 디디게 했던 횃불 같은 꿈이었다.


내 인생의 지표이자 방향이었다.


누구도 날 감히 깎아내리지 못할 만큼 객관적인 기록으로 우뚝 서리라.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도 난 이카루스의 날개를 달고 작열하는 태양에 녹아 버릴 날개일지언정 트랙 위에서 명예롭게 타 죽으리라.


입에 핏기가 돌 만큼 몇 번이고 다짐하고 다짐했던 그것이었다.


그러다 교실 기둥에 달린 거울에 내가 비쳐 보였다.


11살의 어린 나.


아직 어떠한 기록도, 행적도 없고 내가 회귀한 줄도 모르는 이 세상.


오직 나만이 던져진 이 세상에서, 난 다시 그 역사를 쓸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얻었는지 얻어걸렸는지 그 자격을 잘못 주었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렇게 살려 놓질 말던가.


다시금 뛸 수 있다는 기시감 서린 열망은 내게 이 몽글한 감정의 이름을 알려 줬다.


‘확신.’


이번 생은 어느 하나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완벽하게 그 길을 감내하고 완주하겠다는 확신이었다.


“기필코 해낸다.”



* * *



뒷정리만 한 뒤 용제가 말한 대로 운동장을 나섰지만, 어째 분위기가 묘했다.


아이들끼리 방과 후에 아무 제약 없이 뛰노는 그런 한산하고도 역동적인 느낌은 온데간데없었고, 흡사 전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우리 반으로 추정되는 여자애 하나와 남자애 둘.


그 남자애 둘은 용제와 호동이었다.

나머지 애 하나는, 음······.

오늘 우리 반 교실에서 본 적이 있긴 한데.


“내놔! 내놓으라고오!”


목소리가 앙칼졌지만 매우 앳된 것으로 보아, 조미연이다.


아무래도 제 발에 걸려 넘어진 모양새였다.

앞머리와 코에 모래가 잔뜩 묻어서 그런지 더 불쌍해 보였다.


“으아아앙!”


넘어지는 와중에도 미연이는 처절하게 손을 뻗었고 나는 손이 뻗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보다 키가 큰 홀쭉한 남자애.

그 남자애의 손에는 과연 그놈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핑크색 공주님 가방이 들려 있었다.

녀석은 길지도 않은 혓바닥을 내보이며 엎어진 미연이를 조롱했다.


“베에- 븅신 뛰지도 못한데요~”


“흑흑, 돌려줘어어!”


정황상 두 가지의 정보가 빠르게 추려졌다.


저 핑크색 가방은 괴성에 가까운 외마디를 질러 대는 미연이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미연이는 더는 뛸 상태가 아니란 점.


“나 잡아서 직접 가져가세요~, 베에-”


‘흠, 그렇단 말이지.’


날 되돌린 신은 회귀 첫날부터 내가 뛰지 않고 못 배기는 상황을 선사했다.


종아리와 허벅지에 살짝 힘을 실었다.


더할 나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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