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평범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1.01.16 11:18
최근연재일 :
2011.01.16 11:18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156,389
추천수 :
1,382
글자수 :
816,019

작성
10.11.07 03:01
조회
550
추천
8
글자
10쪽

평범 (75)

DUMMY

" 뭘 사내가 질질 짤고있는거에요? "


가볍게 타박하는 목소리에 안쓰러움이 배어있다. 누군가 했더니 리디아였다. 실로 타당한 구박이다. 조각같은 미남은 울어도 멋지지만 우리네 평범한 사내새끼들이 질질짜고 있으면 추하고 궁상맞을 뿐이니 까. 그래서 구석으로 도망쳤는데 여기까지 따라와버렸으니 어쩌겠나. 지금이라도 이 추한 모습을 가려야지.


' 뭐, 지금은 슬프기보단 황당하지만... '


황당함이 조각난 마음을 얊은 막으로 덮어버린다. 속은 산산조각이지만 짙은 색의 막으로 덮어버리니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졌다. 나는 어린애처럼 주먹으로 얼굴을 닦았다.


" 아, 미안. 눈에 먼지가 들어갔어. "


고전적이다못해 매립지에서 분해되어야 마땅할 고인돌 유행하던 시절의 변명을 하면서 일어났다. 좀전까지 울고 있었던 탓에 얼굴은 눈물자국 투성이었지만 뒤이은 사건 덕에 어느정도 슬픔이 희석되었다는걸 부정할 순 없었다.


' 악마한테 고마워해야하나? '


그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중요한건 마음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는 것이니까. 슬픔이 약간 걷히자 머리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동시에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


질문을 하면서도 스스로 답을 유추해나간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질질 짜고있을 거라는걸 어떻게 알았을까? 답은 간단했다. 어디선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참 기막힌 일이지만, 아침부터 몸을 씻니 뭐니 법석을 떨었으니 리디아가 눈치 못챌것도 없었다.


" 여행할땐 일주일도 안씻고 다니던 사람이 아침부터 몸을 씻어대니 이상해서 따라와봤어요. "


예상 적중... 은 좋은데 아침부터 목욕한게 특별한 일이 될만큼 옅어진 내 위생관념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니, 지금 중요한건 이게 아니잖아!


" 봤어? "


내 인생 최초의 고백이자 최초로 차인 꼬라지를.


" 봤어요. "


리디아는 약간 화난 듯이, 어찌보면 약간 들뜬 듯이 말했다. 뭐, 그렇겠지. 봤으니까 이렇게 따라왔을테니. 첫 고백을, 게다가 결국 차여버린 모습을 남에게 보여줬다는건 참 떨떠름한 일이었다. 화를 내기도 애매하고 가만 참기도 애매하고... 쯧, 하긴 그게 뭐 별일이겠냐. 조금 쪽팔리긴 했지만 그뿐이다. 애초에 숨기고 자시고 할 일도 아닌 것이다.


" 그래, 고맙다. "


그걸 보고 따라왔다면 위로해주러 온 것이겠지. 설마하니 리디아가 날 놀려먹진 않을테니까. 내 생각이 맞는지 리디아는 가볍게 웃었다.


" 다행이에요. "


" 뭐가? "


" 생각보다 괜찮아보여서요. 아, 이건 어떤의미로 충격인가? 사랑에 실패한 남자, 고작 10분도 안되어 부활! 흐음, 역시 느낌이 좀 그렇죠? 그런 이유로 계속 슬퍼해주세요. "


..... 그건 확실히 좀 그렇네. 어차피 농담이니 무시해도 상관없지만 변명해두는게 좋을까. 머릿속에서 대충 조잡한 변명을 짜맞춰 지껄였다.


" 아냐, 이건 그러니까... 그렇지, 난 벌써 머리칼처럼 속이 시꺼매서 이제와서 숯칠 한번 한다고 야단떨진 않는거야. 그래, 그거라고. "


" 네헤? 잠깐만요. 여자한테 차인 경험이 그렇게 많아요!? "


어라, 그게 그렇게 되나?


리디아가 많이 놀랐는지 발음까지 틀렸다. 그리고 왠지 기분나쁜 것을 보는 눈으로 날 보기 시작했다. 애휴, 가만있으면 중간은 갈텐데 괜한 오해만 만들다니, 내가 하는일이 다 그렇지만...


" 그럴리가 있냐. 그만해두자. 생각할수록 속 쓰리다. "


말하다보니 차이던 장면이 다시 떠올라 씁쓸해졌다. 그래도 한번 당해본 덕일까. 생생한 기억에도 입맛이 조금 씁쓸해졌을 뿐이다. 스스로에게 정떨어질만큼 감정의 수습이 너무 빨랐다. 힘든 세상에서 살아가야하기 때문일까. 입맛이 한결 썼다.


' 그런가, 이젠 움직여야할 때구나... '


첫사랑은 씁쓸한 추억으로 결정났으니 이제 떠날 시간이다. 되든말든 시간을 벌기위해 일찍 고백한것 아니었나. 어차피 이렇게 되고나니 에이미의 얼굴을 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 가자. 어머니도 말하셨지. 일찍가서 기다리는게 늦게가는 것보다 낫다고.


" 가자. 내 뒤를 캐는걸 보니 몸은 괜찮겠지? "


" 네! "


리디아의 환한 목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우리들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언젠가 도착할 안식처를 찾아서. 아니, 살아가기 위한 새로운 전장을 향해서. 물론, 그 전에 짐도 챙겨야하고 숙박비 계산도 해야겠지만.




" 있잖아요. "


" 응? "


" 언니에게 말했어요. 오빠의 일. "


" 그래... "


사흘간 머물렀던 마을을 뒤로하며 리디아가 말했다. 그녀는 내 눈치를 보느라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 에이미 언니는 계속 오빠를 기다렸데요. 지난 6년간 계속. "


아, 과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건 리디아네 오빠의 이야기였나. 그렇다는건, 벌써 죽어버린 사람에게 밀려 차였단 소리냐. 사정을 알고나니 에이미의 마음에 감탄하면서도 비참해진다.


" 어릴적 약속을 지금껏 믿고 있다니, 바보같지 않아요? "


리디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씁쓸하게 웃었다.


" 대단한 것 아냐? 사람이 몇년이나 변함없이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는건 굉장하다고 생각하는데. "


특히나 이런 세상에서는, 하고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그러나 리디아는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 결국 시간만 날렸지만요. "


문득 에이미와 처음 만난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나무 밑에서 그날도 리디아의 오빠를 기다렸을테지. 옛날 이야기였다면 그녀의 기다림은 보답받고 행복을 거머쥐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나타난 건 이름모를 이방인. 이야기의 절정에서 주인공 대신 엑스트라가 나타난 꼴이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엑스트라는 결국 그 동안의 기다림이 모두 헛된 것이었다는 진실을 알려주고 퇴장한다. 현실은 잔인하다. 정말로 잔인했다.


" 차라리 말하지 않는 쪽이 나았을까. "


" 아뇨, 바보같은 우리 오빠 때문에 6년이나 날렸으면 됐어요. 그것만 해도 미안해 죽겠다구요. "


무심코 입 밖으로 흘러나온 한마디에 리디아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일축한다. 동시에 우수에 찬 에이미의 환상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고작 사흘간의 사랑도 실패하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던데 6년간 믿어왔던 희망이 산산히 깨어진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까.


" 슬퍼할텐데. 굉장히... "




"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이야!!!!!! "


에이미는 방 안에 틀어박혀 현실을 부정했다. 리디아의 말을 필사적으로 부정해보지만 이미 신앙의 위치로 올라섰던 믿음은 산산히 깨어진 뒤다. 테오가 세상에 없다는 진실은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부서진 마음의 파편에 아름다운 추억이 비친다. 이제 테오는 없어. 파편에 비친 추억의 색이 바란다. 에이미의 완전히 풀려버린 눈은 원래부터 이런 기관이라는 양, 끊임없이 눈물만을 흘려보냈다.




" 아프겠죠. 그렇지만 오빠는 실제로 죽어버렸잖아요? 살아있다면 머리를 쥐어박아서라도 데려오겠지만 정말 죽어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그러니까 아무리 아파도 진실을 알고 또 받아들여야죠. 그래야 에이미 언니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언제까지나 오지않을 사람을 기다릴 순 없잖아요? "


" 그래... "


리디아의 말이 옳다. 진실을 외면하면 지금 당장은 지나가겠지만 굳센 믿음을 지닌 에이미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기다릴 것이다. 그러느니 설령 죽을만치 아프더라도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하지만...


" 괜찮을까. "


너무 아파서 주저앉아버리진 않을까. 아프고 아프고 너무 아파서, 과거의 추억속으로 도망친 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건 아닐까.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 언제나 같이 있자고 말해줬었지... '


에이미는 테오와의 추억을 떠올렸다. 하나하나 생생히 떠오르는 동시에 빛이 바란다. 그녀는 여기에 있었지만 테오는 이제 없다. 언제까지고 함께하자던 두사람은 이제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 위에 서 있었다.


" 싫어... "


마침내 모든 추억의 빛이 바랬을때, 에이미는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 너를 잊어버리고 사는건 싫어! "


과거의 기록 속에 그를 묻어버리고, 앞으로 계속 나아갈 뿐인 인생.



" 괜찮아요. 당신도 말했지만 몇년이나 기약없는 약속을 믿으며 기다리는거, 보통 사람은 못하니까요. 에이미 언니는 강해요. "


리디아는 확신하며 웃었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녀는 강하다.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못할 만큼 굳센 마음을 가졌으니까. 지금은 아프더라도 반드시 일어설 것이다.


" 그래, 그렇겠지. "



그런 삶은 필요없다.


" 기다려 테오. 내가 곧 갈테니까. "


에이미는 의자에 올라 침대 위에 깔린 얇은 침대보를 말아 천장에 걸고 고리를 만들어 묶었다. 힘껏 당겨도 세번이나 묶인 침대보는 끄떡없었다. 만족한 그녀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리에 목을 걸고는...



" 틀림없이 이겨낼거야. "



의자를 박찼다.



=====================================================================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평범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82 평범? (82) +3 10.11.17 556 8 12쪽
81 평범? (81) +1 10.11.15 512 7 12쪽
80 평범? (80) 10.11.12 536 5 18쪽
79 평범? (79) 10.11.12 560 7 9쪽
78 평범? (78) +1 10.11.10 558 7 17쪽
77 평범? (77) +1 10.11.08 582 8 13쪽
76 평범 (76) 비, 기다림, 첫사랑 (에필로그) +2 10.11.07 599 9 8쪽
» 평범 (75) +1 10.11.07 551 8 10쪽
74 평범 (74) 10.11.04 593 8 11쪽
73 평범 (73) 비, 기다림, 첫사랑 (세번째 날) +1 10.11.02 593 6 12쪽
72 평범 (72) 비, 기다림, 첫사랑 (두번째 날) +4 10.10.14 756 8 46쪽
71 평범 (71) 비. 기다림. 첫사랑 (첫번째 날) +3 10.09.16 880 9 53쪽
70 평범 (70) +7 10.09.12 760 10 35쪽
69 평범 (69) +3 10.09.06 710 14 13쪽
68 평범 (68) +2 10.09.06 717 7 8쪽
67 평범 (67) +4 10.09.05 706 10 14쪽
66 평범 (66) +1 10.09.05 731 8 17쪽
65 평범 (65) +3 10.09.03 782 10 13쪽
64 평범 (64) +7 10.09.02 803 10 16쪽
63 평범 (63) +8 10.08.31 819 8 12쪽
62 평범 (62) +2 10.08.30 755 8 13쪽
61 평범 (61) +4 10.08.30 791 8 14쪽
60 평범 (60) - 또 번외 +4 10.08.30 792 6 22쪽
59 평범 (59) +1 10.08.29 812 11 13쪽
58 평범 (58) +4 10.08.27 780 9 18쪽
57 평범 (57) +1 10.08.26 829 8 12쪽
56 평범 (56) +2 10.08.25 911 8 11쪽
55 평범 (55) +4 10.08.23 891 8 18쪽
54 평범 (54) +4 10.08.22 904 9 7쪽
53 평범 (53) +2 10.08.21 890 8 1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