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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884 님의 서재입니다.

평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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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d3884
작품등록일 :
2011.01.16 11:18
최근연재일 :
2011.01.16 11:18
연재수 :
1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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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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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816,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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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16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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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53쪽

평범 (71) 비. 기다림. 첫사랑 (첫번째 날)

DUMMY

어느덧 풍요롭던 가을이 가고 겨울이 찾아왔다.


기분좋던 가을 바람은 날카롭게 날을 세워 불어오고,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여름의 뜨거움이 그리워지는 계절. 사람들은 가을에 체워넣은 창고에 의지하고 올해의 추억을 늘어놓으며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 한잔 술에 취한다.


가을의 수확제로 들떠있던 사람들은 이제 가는 해를 배웅하고 오는 해를 맞아들이는 축제 준비에 한창이다. 인간이란 참 축제를 좋아한다. 조그마한 일만 있으면 떠들썩하게 놀고 싶어 안달이다. 모두들 즐겁게들 웃으며 축제에 대한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운다. 나만이 그 흥분에서 한발 물러서있다. 마치 나와는 상관없다는 양 구경꾼의 자세로 주저앉아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나는 이 시시한 축제들이 하나도 즐겁지 않다.


마을 한복판에 선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시선을 위로 올린다. 어릴적에는 이것보다 훨씬 커다랗고 나이많은 나무 밑에서 놀았었다. 그것은 너무나 먼 옛날의 기억. 생각만해도 가슴 한켠이 따뜻해지고 쓸쓸함이 솟아오르는 추억. 나는 아련히 떠오르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며 나무둥치에 기대앉았다. 내가 그렇듯, 그도 이젠 어린아이가 아닐 것이다. 멋진 남자가 되어 있겠지. 어린아이의 치기로 했을 약속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그날의 약속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다. 나도, 그도. 이제 약속의 장소에서 기다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마음속 어딘가에선 인정하고 있다. 그는 찾아오지 않는다. 영원히. 어릴적의 약속을 붙잡고 있는건 바보짓이라고 깨닫고 있다. 그래도, 그래도 사실은...


날 찾아줬으면 좋겠다아...


" 아. "


하늘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마치 한여름의 그것처럼 갑작스러운 소나기. 구름이 계절을 착각해버린 걸까? 겨울인데 눈이 아니라 비라니. 왠지 손해본 기분이다. 추적추적 내리를 비를 보고있자니 가슴이 아려온다. 현실이 목덜미를 잡고 확 잡아당긴 것처럼 추억이 잊혀져간다. 빗방울이 얼굴까지 흘러내린다. 아, 몹쓸 나무다. 이 정도 가벼운 비는 막아주면 좋을텐데. 고향의 그 나무가 그립다...


기억하고 있는건 나 뿐인걸까.


아냐, 얼빠진 녀석인걸.


분명 지금쯤 날 찾아서 해매다 어딘가서 울고있지 않을까.


그래도 항상 숨어있는 날 찾아냈으니까. 이번에도 찾아낼거야.


응. 언젠가...






" 곤란하네. "


세포토란을 나선지도 벌써 몇일째. 갑자기 비가 내렸다. 공교롭게도 어디 피할 곳도 없는 허허벌판에서였다. 비는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걸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이 세계에 온 뒤로 부모님이 튼튼하게 낳아준 덕분인지 건강 호흡법 덕분인지는 몰라도 잔병치례 한번 해본 적 없는 나지만 겨울철 뼈까지 얼려버릴 기세의 차가운 비로 샤워한 뒤 그냥 걷고 있어도 사람을 얼음동상으로 만들어버릴것 같은 겨울바람에 노출 되어도 멀쩡할지 묻는다면 자신없다고 대답해야할 것이다. 하물며 리디아는 말할 것도 없는 일.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겠지만 우선 망토라도 씌워주려다가 그랬다간 배낭이 젖는다는걸 깨닫고 당황했다. 배낭 안에는 젖으면 곤란한 식량이 많다.


" 이러면 당신은 다 젖잖아요. 이렇게 옆으로 돌려서 같이써요. "


망토는 이런 경우도 상정하고 만든 것인지 의외로 방수능력이 뛰어나 머리위에 펼쳐두고 있으면 그럭저럭 우산의 역할을 해냈다. 길이도 저 정도면... 음, 그럭저럭 괜찮겠다.


" 그럴까? "


나는 땅에 끌리는 망토 한켠을 집어들고 머리위를 가렸다. 그냥 맨몸으로 맞는 것보다는 좀 낫나. 시야를 가리지 않는게 참 좋다. 머리위로 들어올린 팔이 조금 아프겠지만 그 정도 페널티는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응? 리디아의 얼굴이 좀 빨갛다. 혹시 감기라도 온건가?


" 엣!? "


흐음, 이마를 대보니 열은 괜찮은데. 아차, 리디아가 많이 놀랐나보다. 말도없이 갑자기 이마를 들이대면 보통 놀라겠지. 나는 사과와 함께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 아, 미안. 놀랬구나. 그냥 열이 있나싶어서. "


" 괘, 괜찮아요... "


왠지 어딘가 소극적인데... 천방지축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얌전한 반응은 의외다. 나는 그런 시시한 생각을 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망토가 조금 짧은가? 리디아가 너무 가까이 달라붙어 걷는게 힘들었다. 그녀에게서 전해져오는 따스한 체온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갈수록 걷기가 힘들어진다. 바닥이 질척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이상하게 땅은 그대론데 갈수록 더 힘들다. 어라? 왜 이러지? 옆을 돌아보니 리디아가 거의 안기다시피 내 허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망토 자락을 쥐고있던 팔은 어느새 내려와 내가 들고있는 망토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어째 힘들더라.


" 리디아. 그렇게 붙으면 걷기 힘들... "


말을 하면서 이상한 것을 느꼈다. 얘, 왠지 눈에 초점이 없다. 이마를 만져보니 데일 듯이 뜨겁다. 그 짧은 시간에...


' 젠장, 일났네! '


주변엔 마을은 커녕 인적도 없었다. 의약품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런 고열이라니. 당황스러웠지만 이대로 허둥지둥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럴때는 단순한게 오히려 먹힌다. 심플 이즈 베스트를 믿어보는거야. 나는 리디아를 들쳐업고 무작정 달리려다 몇일 전에 내용물을 대거 보충한 배낭을 상기하고 주저했다. 리디아를 업어버리면 배낭을 들 수가 없다. 그렇다고 버리고 갈수도 없고... 나는 고민 끝에 조금 힘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소위 공주님 안기로 리디아를 안아들고 달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진창이라 달리기 힘들었다. 몇번이나 다리가 떨어지지 않아 넘어질 뻔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식량을 지키겠답시고 리디아는 비에 맞게 내버려두고 배낭을 망토로 덮는 나 자신에게 쓴웃음이 나왔다. 등 뒤에서 짐승이 킬킬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아아, 정말 짜증나. 그래. 진짜 짜증난다. 정말 최악의 기분이잖아.


비, 정말 싫다.



천만다행으로 얼마 뛰지않아 허허벌판이 끝나고 야트막한 언덕이 나를 맞아주었다. 별로 높지도 않은 언덕을 넘자 마을이 보였다. 눈짐작으로 300가구 정도 되는 제법 큰 마을이다. 다행이다. 저 정도 규모라면 민박집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치료사도 한명쯤 있을지 모른다. 골이 눈앞에 보이자 리디아를 안고 있는 팔이 저렸다. 허리는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고 심장은 작작좀 하라고 쿵쾅거리며 투덜대고 다리는 한걸음만 더 걸었다간 부서져내릴 듯 아팠다.


이를 악물고 달린다. 다리가 끊어져도, 팔이 떨어져나가도, 심장이 터져버려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 아이를 위해 때려박기로 한 인생이다. 아까울 것 없잖아. 나는 경고신호를 끊임없이 보내는 신체에게 엿이나 처먹으라고 마음속으로 외쳐준 뒤 마을로 접어들었다.


아무도 지키지 않는 마을 입구를 지나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달리며 주변을 살폈다. 민박이나 치료사의 집을 찾는 것이다. 그런 집들은 특유의 간판이 있어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디 여관이라도 알아보려는 찰나, 마을 어귀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가 눈에 띄었다. 그곳을 보는 순간, 나는 넋을 잃었다. 지금까지 뭘 하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리디아를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게 넋이 나갔다.


그곳에는 너무나 슬픈 표정으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으로 얼굴을 흠뻑적신 소녀가 있었다. 피부는 새하얗다. 속은 어떨지 몰라도 겉에 보이는 부분엔 그 흔한 여드름조차 없었다. 몸은 가녀리고 성장기에 적절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것인지 키는 보통은 되었지만 볼륨은 시원찮다.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묶은 금발머리도 내 취향은 아니다. 그러나 그 가녀린 얼굴이 모든것을 커버했다. 어째서일까. 가슴이 아플만큼 슬픈 표정인데, 나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넋을 놓고 있는 나를 발견했는지 그녀는 나무에 기댄 등을 때고 다가왔다. 그 표정은 살짝 기뻐보였다가, 이내 실망의 색으로 물들여진다. 어째서? 나는 무의식중에 머리칼을 매만지려다가 내 양손에 들려있는 리디아를 발견하고 그제야 당황했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 어디 치료사의 집이라도 물어보려던 찰나, 그녀가 먼저 미소지으며 말했다.


" 여행자이신가요? "


" 아? 아... 네. "


멍청하게도 나는 그렇게밖에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어 다른 말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 나직하고 침착한 목소리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내 취향이었다.


" 묵을 곳을 찾고 계신 것 같네요. "


" 네. "


나는 고개를 몇번이나 끄덕거렸다. 목소리도 얼이 빠져있다. 그게 한심하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보나마나 내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있을 것이다.


" 저희 '약속의 장소'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손님. "


그녀가 가르키는 손끝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훌륭한 간판을 달고있는 여관이 있었다. 그녀는 - 아마 영업용 스마일인 -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위해 치료사를 불러주겠다고 말하곤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갑자기 바보가 되버린 기분이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미소는 어딘가 허무감이 묻어있다는, 그런 시시한 생각을 했다.





여관은 알지 못하는 언어로 적은 멋들어진 간판을 지니고 있었다. 상당히 세련된 간판이다. 크기도 저번에 봤던 여관보다 훨씬 크고 이층도 있었다. 고작 300가구 남짓한 조그마한 마을에서 어떻게 이만한 여관이 유지가 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나는 시골뜨기처럼 멍청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왁자지껄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으며 경고신호가 머릿속에 울려퍼진다. 그제야 마비되었던 이성이 돌아오고 상황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그곳은 술집이었다. 마을 사람들인지 여행자인지 모르겠지만 족히 스무명은 되는 사람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싸구려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 객실은 2층이에요. 식사는 올려보내드릴까요? "


" 아, 예에... 되도록 치료사도 빨리 부탁합니다. "


아아, 왜 이 사람한테는 제대로 말을 못하는걸까. 그녀는 카운터의 여자에게 다가가 무어라 말을 했다. 서로 모녀관계인 듯, 그녀는 조용조용히 말했지만 카운터의 중년 여인은 신경질을 내며 언성을 높혔다.


" 얘, 에이미! 너 또 밖에 나갔구나? 애가 어떻게 비오는 날만 골라서 나가니. 감기걸리기 전에 당장 씻어라. 그리고... "


그 뒤는 이성을 찾았는지 언성이 낮아졌기에 1층의 소란스러운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하긴, 귀에 들렸더라도 머리는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뇌는 에이미라고 하는구나, 하는 얼빠진 생각을 하느라고 다른 정보를 죄다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 ...님... 손님! "


내가 현실로 돌아온건 신경질적인 중년 여자가 언성을 높인 덕이었다. 그녀는 심술궃은 성격을 자랑이라도 하듯, 언제라도 한판 붙을 기세로 눈을 부라렸다. 눈도 밉살스럽고 코도 마녀같은 매부리코에 뚱뚱하게 배까지 나왔다. 그 혐오스러운 모습이 역으로 냉정을 되찾게 해주었다. 나는 지금의 급박한 상황을 깨닫고 그제야 다급히 말했다.


" 방을 빨리 내주십시오. 일행이 많이 아파요. 치료사도 얼른... "


" 안그래도 치료사 부르러 우리애가 갔어요. 빈 방도 있구요. 이제 당신이 반 로덴만 낸다면 모든것이 완벽하단 말이에요. 혹 좋은 방을 쓰고 싶으시다면, 3로덴만 내세요. 이 여관 최고의 방을 준비해드리죠. "


그러고는 옆에서 소란을 피워대는 남정내들에게 스스럼없이 소리를 꽥 질러 조용히 시켰다. 그러나, 술이 들어간 남정내들이 소리 좀 질렀다고 조용해질 리는 없어서 바다에 돌 하나 던져넣은 것처럼 금새 소음에 묻히고 말았다.


이런 여자가 손님이라고 곱게 대하는건 아마 내가 입고있는 옷이 좋은 축에 들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에게 반 로덴을 주었고 그녀는 탐욕스러운 눈을 반짝이며 돈을 받고 2층으로 안내해주었다. 2층 객실은 내 생각 이상으로 훌륭했다. 저번에 봤던 칸막이 방과 달리 제대로 된 방이었고 침대도 있었다. 애석하게도 하나뿐이었지만.


나는 급하게 리디아를 눕히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주인여자가 문을 닫으며 곧 식사를 올려보내겠다고 말하는게 들렸던 것도 같다.그제야 내가 저지른 짓들과 이 세계의 무정함을 깨닫고 놀랐다. 나는 쓰러진 사람을 생각하지도 않고 대체 뭘 그렇게 느긋하게 굴었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침착한걸까. 내가 리디아를 안고있는걸 뻔히 봤으면서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황하기는 커녕 서두르지도 않았다. 멍청하게 서 있었던 나도 맛이 갔었지만...


나는 배낭을 내려놓았다. 망토로 덮어둔 덕인지 배낭은 그다지 젖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번에는 리디아의 열을 쟀다. 생각보다 훨씬 열이 높았다. 하긴, 밖에서 한참이나 비를 두들겨 맞았으니 열이 오르는게 당연하지. 혹시 위험한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지만 애써 그런 마음을 찍어 눌렀다. 한참을 기다려도 치료사는 오지 않는다. 뭐하는거야 대체. 나는 초조한 마음에 문을 열고 항의하러 계단을 내려가려다 막 비 맞은 생쥐꼴로 짐을 잔뜩 지고 계단을 올라오는 중년의 사내를 발견하곤 머쓱해져서 미리 마중나온 척 연기를 했다.


" 치료사 분이십니까? "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맞소. 급한 환자가 있다고 해서 달려왔는데 환자는 어디있소? "


" 이쪽입니다. "


제대로 급하다고 말해줬구나. 나는 이 여관에 대한 평가를 수정하며 그를 방으로 인도했다. 치료사는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누워있는 리디아를 발견하고 한참동안 리디아의 곁에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물었다.


" 혹시 지난 한달 사이에 쓰러졌던 적이 있습니까? "


" 네? 네... 과로로 한번. "


" 그때도 치료사가 약을 썼나요? "


" 네. "


그의 뜬금없는 물음에 혹시 큰 병인가 싶어 불안해진 나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치료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 혹시 그때 썼던 약재들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


" 아뇨, 전혀. 그냥 기운나게해주는 약이라고만 들었습니다. "


그러자 치료사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 크게 곤란한 병은 아니고 감기 몸살이 좀 심한 것 뿐입니다만, 예전에 썼던 약을 모르면 약을 쓰기가 좀 곤란합니다. 피로회복용으로 쓰이는 약재들은 효과가 한달을 넘기는게 많아서 말입니다. 혹시 그것과 충돌하는 약재를 썼다간 괜히 일을 키울 수 있습니다. "


" 그럼... "


아무리 감기 몸살이라도 당장 애가 불덩이같은데 손을 쓸 수 없단 말인가? 나는 다급한 마음에 그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물으려다 치료사가 선수를 치는 바람에 힘을 뺐다.


" 우선 따뜻한 물을 먹이고 신관을 부르는게 낫겠습니다. 특별히 큰 병은 아니니까 신성력으로 본인의 체력을 보해주면 무난하게 이겨낼겁니다. "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고 그에게 진료비에 팁을 얹어 반 로덴을 주었다. 실질적으로 그는 진단만 해주고 치료는 전혀 하지 않았으므로 반로덴은 짭짤한 보수였다. 그는 기분이 좋은지 자청해서 신관을 불러주겠다며 방을 나섰다. 나는 그 사이 여관주인에게 시켜 따뜻한 물을 시키고 꿀물이 생각나 꿀도 시키려다 기존의 약효와 충돌할까봐 그만뒀다.


리디아는 한참이 지나도록 일어날 줄을 몰랐다. 열도 높고, 가끔씩 토해내는 가쁜 숨은 마치 마지막을 앞둔 환자 같아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저 그녀가 무사히 깨어나기만을 바라며 손을 꼭 잡아줄 뿐이었다.


" 실례합니다. "


덜컥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쁜짓을 하다 걸린 것처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돌아보니 아까 시켰던 따뜻한 물을 가지고 온 점원이었다. 에이미다. 그녀는 그 사이 씻었던 것인지 비를 맞아 엉망이었던 머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옷도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머리카락은 드라이어가 없는 탓에 잘 닦았지만 아직 물기가 남아 촉촉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 꼴을 돌아보았다. 아까 치료사가 물에 빠진 생쥐꼴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내가 더 꼴사나웠다. 신발은 엉망진창에 발목까지 진흙투성이였고 머리는 푹 젖어 꼴사납게 늘어졌다. 옷을 바꾸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비맞은 거지새끼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전등이 없는 이 세계에 찬사를 보냈다.


" 고맙습니다. "


애써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었지만 떨림을 완전히 숨길 순 없었다. 연기를 배웠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부질없는 한탄을 해본다. 그녀는 가볍게 미소지으며 쟁반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 천만에요, 일인걸요. "


그리고는 지나가는 눈으로 리디아를 한번 훝어보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는지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는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나는 혹시 발진이라도 일어났나 싶어 벌떡 일어나 다가가는데 놀란 듯한 중얼거림을 들었다.


" 리디아...? "


그녀는 놀란 기색이었지만 나보다 놀라지는 못했을 것이다. 너무나도 의외의 상황에 말을 잊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리디아가 여기에 온 이상, 리디아를 아는 사람이 여기에 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나는 가까스로 머릿속을 정리하고 무난하게 물었다.


" 아십니까? "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네, 어릴적 아는 동생이에요. 틀림없어요. "


많이 자랐지만 여기는 예전 그대로라는 둥, 여기도 변하지 않았다는 둥 끊임없이 말하는 그녀는 어딘가 들떠 보였다. 뭘까? 저 흥분은. 옛날에 그렇게 친했던 걸까? 하긴, 궁금한게 많을 것이다. 리디아가 왜 여기에 있는거라던가 나라던가...


" 호, 혹시... "


" 네? "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지구의 소음과 작별한 덕인지 청각이 꽤 좋아진 나는 어렵잖게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흠칫하더니 곧 가슴에 손을 모았다. 뭔가 긴장하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이 왠지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 리디아의 가족들. 아니, 오빠... 테오는 어디에 있나요? "


아?


물아봐야 할게 그게 아닌 것 같은데... 어쩄거나 곤란한 질문이다. 으흠... 리디아의 오빠는 테오라고 하는구나. 이름도 오늘 처음 알았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테오는 말렉의 화살에 맞고 죽었다. 어디에 있냐면, 그야 하늘나라에 있다고밖엔 할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 열의에 찬 눈을 실망시킬 용기는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일은 내가 마음대로 누설할 내용이 아니다. 나는 일단 얼버무리고 리디아에게 뒤를 맡기기로 했다.


" 글쌔요, 여행을 떠나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거짓말은 아니지. 그는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다고 믿어지지만 죽은 사람이 어디로 여행을 떠나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그녀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 그래요... 그런데 왜 여기에? 다른 가족분들은 어디에 계시죠? "


이제야 거기에 생각이 미친 것일까. 나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눈치다. 하긴, 그게 정상이겠지. 그나마 그녀가 무어라 나쁜 소리를 하지 않는건 내가 리디아를 대하는 모습을 보아서일 것이다.


내가 어떻게 얼버무리나 생각하고 있을 무렵, 신관이 도착했다. 신전이 꽤 멀었는지 그는 비를 잔뜩 얻어맞아 꼴사나운 모습이 되어 있었다.


" 환자는 어디 있습니까? "


오자마자 환자를 찾는 그 모습이 헌신적인 의사를 보는 듯하여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재빨리 리디아의 곁으로 그를 인도했다. 동시에 신관과 함께 들어온 여관주인이 에이미를 보고 화를 냈다.


" 일이 이렇게 밀려있는데 대체 뭘 하는거니? 어서 내려와라. "


그녀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 입을 우물거렸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나가버리려고 하자, 나는 무심코 말했다.


" 잠깐만. "


여관주인이 표정을 찌뿌리고 물었다.


" 무슨 일이요? "


나는 즉석에서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나 생각해 말했다.


" 간병인이 한명 필요합니다. 일행이 움직일 수 있을때까지 잠시 데리고 있으려하는데 괜찮습니까? 물론 돈은 내겠습니다. "


여관주인의 눈이 셀쭉해졌다. 그녀는 나와 에이미를 번갈아보더니 흥, 하고 코웃음을 치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 오, 고상하신 여행자씨. 데리고 다니는 창녀가 뻗어서 아랫도리가 허전하신 모양인데, 우리 딸은 당신이 숱하게 안아온 창녀새끼가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돈 몇푼에 옷을 벗어던지는 짐승새끼가 아니란 말이야. 응? 이젠 알았겠지. 정 원한다면 내가 한년 알아봐줄 수는 있죠. 암, 물론이지. 천박한 창녀새끼 하나쯤 알아봐줄 수는 있지. 그러나 우리 딸애를. 흥, 당신같은 근본도 모르는 놈팽이에게 돈 몇푼에 팔 수는 없단 말이야. "


이 아줌마는 무슨 턱도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거야...


나는 한숨을 쉬고 머리를 긁적였다.


" 이봐요, 마침 신관님도 계셔서 하는 말인데, 난 저 아가씨에게 털끝만큼도 흑심이 없단 말입니다. 그저 말 몇마디 나눠보니 아가씨 마음이 퍽 곱고 섬세해서 여동생을 잘 돌봐주겠다 싶어서 한 말입니다. 정 못믿는면 이 자리에서 정식 계약서를 써도 좋아요. "


로만에게 당했던 일을 상기하며 신관을 들먹였다. 신관의 공증은 상당한 효력을 갖는 모양이었으니 저쪽도 나름대로 안심하지 않을까 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 그리 봐주니 고맙죠. 하지만 우리 애는 일이 많아서. 보수를 준다면야 내가 다른 간병인을 알아봐주지요. "


그래서야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여기서 거절하면 내 속내가 이상하게 보일게 뻔한지라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보수는 하루에 30시클로 말해두었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돈이 귀한 이곳에서는 상당히 괜찮은 보수다. 여관주인은 미소를 띈 체 에이미를 데리고 나갔다. 그러는 사이 신관도 신성력으로 리디아의 치료를 끝마쳤기에 나는 그에게 반 로덴을 주었다. 그러나 신관은 별일 아니었다며 정중하게 사양하고는 이틀 정도면 일어날 거라고 하면서 간병인은 그다지 필요없을 거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의 호의에 감사하며 고개숙여 인사했다. 이 빗속에 환자가 있다는 한마디에 달려왔으면서 보수도 원치않는 사람은 드물다. 신관을 배웅하고 나니 정적이 찾아왔다. 그것이 견디기 힘들어 리디아의 상세를 살폈다. 신성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열이 조금 내렸고 잠든 숨소리가 새근새근 편안해졌다. 마치 피곤해서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그녀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물론 문단속을 확실히 하는걸 잊지 않았다. 이 세상에는 별의별 싸이코새끼가 돌아다니니 만큼 여관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여관주인이 건내준 열쇠로 밖에서 문을 잠그고는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아랫층은 여전히 왁자지껄했다. 하긴, 비가 내려 한밤중처럼 캄캄하지만 이제야 겨우 오후가 지났을 뿐이다. 밤이 다가올수록 화려해지는 술집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었다. 나는 카운터로 다가가 위로 올려주기로 했던 식사를 취소하고 아래에서 먹기로 했다. 그러면서 에이미를 찾아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상한 마음을 먹고 있는걸로 착각해 일부러 피하는건지 아니면 간병인을 구하러 나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 에이미를 찾나요? "


주인 아줌마가 눈을 셀쭉하게 뜨고 물었다. 정답이었지만 이 아줌마의 눈초리를 봐서 별로 좋은 대답은 돌아올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는 말이 없으면 가는 말도 없다. 나는 조용히 비어있는 테이블을 하나 잡고 식사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식사는 금방 왔다. 딱히 메뉴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알아서 가져오는데 내용물이 참 실망스럽다. 주먹만한 하얀 빵 하나, 이름모를 풀로 만든 셀러드 하나, 그리고 감자와 겉은 닮았는데 맛과 감촉은 다른 음식을 삶아서 으껜 요리가 나왔다.


먹다보니 맛은 크게 불만은 없었지만 받는 돈에 비해 식사가 영 허술하다 느껴졌다. 그렇다고 새로운 요리를 시키는데 돈을 낭비할 입장도 아니었기에 불만을 꾹 눌러참고 식사를 했다. 양이 약간 모자랐지만 그럭저럭 배를 체울 정도는 되었다.


배가 차자 약간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그제서야 목욕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비에 흠뻑 젖어 추레한 몰골을 하고있지 않은가. 저번에는 여분의 옷이 없었지만 지금은 있다. 나는 여관주인에게 목욕을 할 수 있냐고 물었다. 분명히 그녀, 에이미는 목욕을 하고 왔었다. 예상대로 여관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몰라 가만히 있자니 여관주인은 답답하다는 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 5시클. 목욕은 요금이 따로에요. "


세상에 돈 없으면 목욕도 못하는가보다. 전문 목욕탕도 아닌데 요금을 따로받을줄은 생각도 못했지만 급한놈이 우물판다고 홀딱 젖은 마당에 어쩌겠는가? 그때, 퍼뜩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잘 생각해보니 젖은건 나 뿐만이 아닌 것 같은...!?


' 아차, 리디아! '


여관으로 옮겨놓은건 좋은데 그녀는 여전히 젖은 체다! 왜 여지껏 몰랐지?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거야!? 나는 허둥대며 여관주인에게 말했다.


" 내 일행은 아직 젖은 쳅니다. 젠장,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거요!? 그대로 놔두면 곤란해요. 그 애를 씻겨주십시요. 갈아입을 옷은 가지고 있습니다. 요금은 물론 내지요. "


여관주인은 탐탁치 않은 듯 흐음, 하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 우리네야 시키지도 않은 일은 하지 않는 법이죠. 뭐, 좋아요. 요금만 내신다면야 그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 사람을 쓰겠다면 20시클만 내시죠. "


나는 던지듯이 20 시클을 빌어먹을 카운터 앞에 던져버리고 빨리 사람을 보내라고 재촉하고는 2층으로 올라왔다. 대체 왜 그런 중요한걸 잊고 있었지? 치료사도 신관도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제기랄, 침대 시트도 담요도 보나마나 푹 젖었을 테니 새것으로 갈아야한다. 뒤늦게 그걸 깨닫고 기껏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이 빌어먹을 종자들은 제놈들이 지껄인 것마냥 시키지 않은 일은 설사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더라도 절대 하지 않는 놈들이니 말이다.



리디아를 씻기는데는 사람이 두명이나 필요했다. 리디아는 자력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고 사람은 의식을 잃으면 훨씬 무거워진다. 여자 둘이서는 버거운 일이라 목욕탕까지는 내가 리디아를 들어주고 뒤는 맡기기로 했다. 목욕탕은 의외로 1인실이었는데 목욕을 원하는 손님이 생각보다 많지 않은 듯 했다. 어쨌거나 이쪽 입장에선 잘 된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싶다가 리디아가 갈아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에 옷을 가지러 방으로 돌아갔다.


" 아. "


방 안에는 에이미가 이불을 갈고 있었다. 여관주인은 여전히 날 수상하게 보고 있겠지만 아무래도 일손이 모자라서 할 수 없이 보내준 모양이었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 앞에 서면 여전히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지만 몇 번 반복되니 어느정도 버틸 수는 있었다. 애써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자니 그녀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 그... 리디아의 가족분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여기까진 어쩐 일이시죠? "


나는 뒷통수를 긁적였다. 난감한 이야기인데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부모님의 부고는 말해주기로 했다. 리디아의 부모가 엄연히 살아있는데 나와 리디아가 떠돌아다니는건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백번 양보해도 부모와 함께 다녀야 하는데 그 부모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 숨겨봐야 할 수 없는 일이다.


" 두 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전 그분들의 마지막 부탁으로 리디아를 어른이 될때까지 돌봐주기로 했죠. 그래서 그럭저럭 살만한 도시를 찾아 이쪽으로 온겁니다. 아쉽게도 농사짓는 재주는 없거든요. 테오라고 했던가요? 리디아의 오빠와 연락이 닿았으면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끝끝내 연락이 닿지 않아서 마을 사람들에게 말만 남겨놓고 떠나왔습니다. "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어딘가 기뻐하는 듯도 하고, 슬퍼하는 듯도 했다.


" 리디아의 가족들과는..... 어떤 사이신가요? "


당연한 질문이 이어졌다. 나는 부탁을 받았다는 말을 했지만 아무한테나 혈육을 부탁하진 않을 것이다.


" 제가 생김새가 좀 별나지 않습니까. 살기 힘들었지요. 그러다가 두분에게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저한테는 양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분들이셨죠. "


" 네에... "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은 묘했다. 왠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한 느낌. 리디아의 부모님은 평소 동정심 넘치는 분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이 세계의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 그래도 사람이란 변하는 법 아니겠는가?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었으니 그녀라고 해도 확신하지는 못할 것이다.


" 혹시... 테오가 뭘 찾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


" 글쌔요. 전 테오가 집을 나간 뒤에야 들어와서 말입니다. "


" 그... 언제쯤? "


" 한 2년 지났네요. 돌이켜보면 짧은 시간이군요. "


나는 거짓말을 능숙하게 늘어놓았다. 그녀는 계속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를 못했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아무리 봐도 그녀는 테오라는 사람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게 알게 모르게 기분나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몰랐다. 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일로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도록 표정관리에 신경썼다.


그래요, 하고 에이미는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듯 이불과 침대보를 갈았다. 이야기가 더 하고 싶었던 나는 그걸 도와주면서 좋은 구실이라 생각하며 물었다.


" 이런 일은 힘들지 않아요? "


에이미는 내가 침대를 들어올린 사이 침대보를 아래쪽까지 끼워넣다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 힘들어요. "


대화할 마음이 없는걸까. 딱 끊어지는 그녀의 말에 약간 실망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계속 끌고갔다. 나는 그녀와 한시라도 더 오래 있고 싶었고 한마디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 아까 보니까 여기 주인의 딸인 것 같던데요? "


" 네. "


여전히 무성의한 대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설마 그녀에게 내 비중은 지금 갈고 있는 침대보 이하로 취급받는건 아니겠지? 살짝 불안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 이만한 여관이면 제법 잘 살 것 같은데 대단하네요. 나 같으면 일 시키고 싶거든 돈 가지고 사람 고용하라고 소리를 빽 질러버리고 말 것 같은데. "


" 엄마에겐 약점이 잡혀있거든요. "


듣기에 따라 안좋게 해석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좋게 받아들였는지 처음으로 웃음기 어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거기에 고무되어 줄기차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헤에. 꽤 대단한 약점인가본데요. 혹시 숨겨둔 애인이라도? "


이런, 젠장. 대전차지뢰를 직통으로 밟아버린 기분이다. 말하고 나서야 엄청나게 실례되는 질문을 했다는걸 깨달았다. 가벼운 분위기로 한 농담이었지만 이 세계의 기준으론 해석하기에 따라 어마어마한 모욕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에이미의 눈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눈초리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그녀는 곧 푸근한 목소리로 받아넘겼다.


" 비슷한 이야기에요. "




잠시의 기다림 끝에 리디아의 목욕이 끝나고 다시 침대에 눕힌 뒤 이번에는 내가 목욕탕에 들어갔다. 목욕탕이라고 해봤자 커다란 나무통에 담긴 따뜻한, 무언가 우려낸 것 처럼 보이는 옅은 초록빛 물과 작은 통, 그리고 수건 하나가 전부였다. 나는 통안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물은 미지근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않아 기분이 약간 언짢아졌다. 물에 우러난 뭔가의 냄새도 나름 향기라고 못할 것도 없지만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 하아... "


절로 터져나오는 긴 한숨. 목욕을 하면 기분이 풀려야 할텐데 오히려 울적해졌다. 안돼지, 안돼. 나는 머리는 세차게 흔들어 마음을 달랬다. 지금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다. 그래, 앞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아직은 돈도 제법 있고 건강도 그리 나쁘진 않다. 초원에서 주린 배를 부여잡고 사람을 찾아 해매던 그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

다.


그런데 왜 이렇게 울적할까? 한숨을 쉬는 내 머릿속에 잠시였지만 날카롭게 쏘아보는 에이미의 눈동자가 떠나질 않았다. 에잇, 젠장! 뭘 그렇게 진지하게 상처받고 있는거야? 고작 여관 점원이 째려봤을 뿐이잖아. 나 이렇게 섬세했나?


뽀글뽀글


욕조에 깊이 누워 오늘의 일을 회상했다. 이상하게 리디아가 쓰러지는 큰일이 일어났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건 죄다 에이미의 일 뿐이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 일거수일투족이 머릿속에 틀어박혀 떠나질 않았다. 음미하듯 하나씩 되새겨보다 마침내 이 말에 이르렀다.


' 비슷한 이야기에요. '


무슨 뜻이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농담조로 그냥 받아넘긴 말이라면 좋을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엔 그녀의 얼굴은 너무 진지했었던 것이다. 그럼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정도로 해석해야할까? 아니면 그녀에게 데쉬하다가 부모에게 걸린 남자가 있는걸까? 어느 쪽이건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런데 내가 왜 기분 나빠하는거지? 에이미와는 오늘 처음 만났을 뿐이다. 말도 몇 마디 나눠보지 않았고 비가오는 탓에 어두워서 외모를 자세히 살펴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왜 그렇게 호감을 못따서 안달이지? 도무지 내가 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이해할 수 없는게 자신이라더니 딱 그짝이다.



" 무슨 생각해? "


불쾌감을 극대화시키려고 작정이라도 했는걸까. 한참 혼란스러운 타이밍에 나타난 짐승은 빙글빙글 웃으며 등 뒤로 다가왔다. 곧이어 맨살위로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끌어안은 것이다. 이것은 요즘들어 자주 있는 일이라 별로 놀랍지도 않다. 이쪽에서 건드리려고 하면 공기처럼 통과해버리지만 저쪽에서 만져오면 닿고마는 상대에게 기껏해야 칼질밖에 못하는 내가 무슨 수로 저항하겠는가. 주먹질로는 유령을 잡을 수 없는 법이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갈수록 두려움이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놈의 기술이 향상된 것인지 내가 익숙해진 것인지 몰라도 이제는 거의 보통 사람만치 위압감이 사라졌다. 그래서일까, 대꾸하는 내 말투가 가볍다.


" 시끄러. 할일없으면 꺼져버려. "


" 그 여자애 생각하지? "


키득키득, 기분나쁜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마치 평범한 여고생의 목소리 같아 더욱 기분이 나빴다. 비록 위압감이 사라졌다고 해서 저것의 본질이 바뀌는건 아니지 않는가. 호랑이는 아름다운 가죽을 지녔지만 그렇다고 호랑이가 애완용 고양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맹수가 고양이처럼 울고 있으니 기분나빠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괴물은 내 머릿속을 들여다본다. 그건 지금까지 충분히 겪었다. 어쩌면 괴물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내 머리는 표면에 떠오르는 생각과 달리 사실 전혀 다른 이유로. 그래, 에이미가 다른 남자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우울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설령 사실이 그렇고, 그걸 짐승이 읽었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 그럴거야, 그 여자. 너랑 비슷한 냄새가 났거든. "


" 비슷한 냄새? "


나도 모르게 소리내서 물었더니 짐승은 아련한 듯, 슬픈 듯, 기쁜듯, 허무한 듯 수많은 감정을 담은 오묘한 눈빛을 지어보이더니 마침내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 그래, 비슷한 냄새. 영혼의 냄새가 비슷한 사람들은 서로 끌리기 마련이지. 그 멍청한 여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말이야. "


킬킬대며 웃는 소리가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남의 험담은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에이미에 대한 험담이라 생각하니 불쾌감이 끝없이 샘솟았다.


" 닥쳐. 보통 인간이 영혼을 못느끼는게 뭐가 이상하다는거야! "


" 어라, 진짜로 화났네. 혹시 반했어? "


짐승은 재미있다는 듯, 그러나 어딘가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설마하니 본인에게 반했냐는 말은 아닐테니 에이미에게, 라는 뜻일 것이다. 놀림감이 된 기분에 화가 치밀어오른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짜증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 닥쳐!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


" 흐응. 뭐, 크게 상관은 없지만. 네가 가여워서 말이야. "


" 가여워?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당장 꺼져주시지. 네 존재가 날 가엽게 만들고 있거든. "


매도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갑자기 불안감이 밀려왔다.


" 그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선고.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짐승의 즐거운 표정이 코앞에 있었다. 짐승은 내 멍청한 표정을 즐기는 듯 보였다. 그리고, 최후의 선고를 내렸다.


" 그 멍청한 여자는 곧 죽을거야. "


" 그게... 무슨 소리야? "


" 말 그대로야. 그 여자, 오래못가. "


패닉에 빠진 사내의 표정을 즐기며 짐승은 심술궂은 웃음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빙글빙글 웃고 있던 얼굴은 몸을 돌리는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극점의 얼음처럼 차가운 무표정만이 냉기를 풍겼다.


' 감히 내 밥그릇에 포크를 놨다 이거지? '


향기로운 영혼의 냄새에 짐승은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였다. 저 남자는 아무런 특징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 영혼만은 한없이 아름답고 향기로운 냄새를 뿜어대는 것이다. 그 냄새는 짐승을 미치도록 만들었다. 얼마든지 먹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먹어버리면 이 냄새를 더는 맡을 수가 없다. 한없이 먹고싶지만 먹기엔 아까운 보물... 그것에 대한 집착은 이제 와서는 거의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발전해 있었다.


짐승은 에이미의 영혼을 상기하곤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없이 닮은 냄새를 풍기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나락이 들어있는 신의 함정. 신은 가끔 황홀할 만큼 훌륭한 영혼을 내보내지만 그것을 망가뜨릴 오물도 같이 보낸다. 그것들은 겉보기에는 한없이 닮아있다. 향기로운 영혼은 자신과 같은 영혼에 정신없이 달라붙지만 결국 내포된 나락에 빠져들어 변질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이 향기로움도, 그 아름다움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분명히 맛도 형편없이 전락해버릴테지.


짐승은 살기를 내뿜었다. 그 누구도! 이 세상 그 누구도 그것을 망쳐놓을 수는 없다. 그건 내꺼야!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아.


생각과 동시에 미간에서 검붉은 돌이 빠져나와 번쩍거렸다. 크기는 기껏해야 엄지손톱만하다.


' 사흘, 길어야 나흘 정도... '


짐승은 입맛을 다셨다. 단단히 준비를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버티지 못했다. 이래서야 직접적인 간섭은 룰 위반이다. 하지만 분노는 이성을 집어삼켰다. 이 파괴적인 욕구는 이제 짐승으로서도 억누를 수 없었다. 아니, 억누를 생각이 없었다. 짐승은 이제 완전히 욕구에 따라 움직였다.








" 글쌔요, 여행을 떠나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


멈춰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테오, 느림보 테오.


테오는 항상 세상을 보고 싶다느니 지리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장대한 꿈을 꾸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아이였다. 우리가 헤어졌던 6년 동안 어떻게 자랐는지는 몰라도 부모님을 좀처럼 거스를 줄 모르는 성격의 꼬마가 집을 박차고 나가는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는다. 어렸을 적부터 항상 말해왔던, 새로운 지도를 만든다는 꿈을 이루러 떠난 걸까? 그럴지도 몰라. 얼간이였지만 꿈만큼은 진짜였던 아이니까.


그런데 혹시, 혹시, 혹시 말이야.


혹시... 날 찾으러 떠난게 아닐까 하고 기대하게 된다.


얼간이 테오인걸. 지금쯤 내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사방을 헤메고 있는지 모른다. 여기까지 오면서 하나하나 남겨뒀던 흔적들은 벌써 6년 전의 것이다. 우리처럼 어딘가로 떠났을수도, 세월에 지워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테오라면, 만약 테오가 날 찾으러 나선 것이라면 반드시.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예전부터 그랬으니까. 테오는 평소에는 약해빠진 주제에 자기 마음먹은 것은 절대로 손에 넣고야 마는 아이였으니까.


두근두근


테오가 날 찾아 떠났다는 소식에 무슨 일을 해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래.


기억하고 있던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창밖에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가벼운 발걸음을 옮긴다. 항상 눈살을 찌뿌리게했던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의 비명소리가 천사의 노랫소리마냥 기분좋게 울린다. 나도 모르게 눈을 살포시 감았다. 닫긴 눈꺼풀에 14년전,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14년전, 여름. 우리가 아직 다섯살 꼬마였을 때의 일이다.


그래, 14년.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시간이 기억을 흐리려 했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은 유달리 더웠다.


매앰-매앰-매앰-


짜증나는 매미소리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떄의 나는 아마 선머슴에 가까웠던 쾌활한 성격이었을 것이다. 감정을 숨기는 법 따윈 모르고 숨기려고 시도했던 적도 없었다. 대게의 다섯살짜리 시골 꼬마처럼 이제 갓 집이라는 울타리에서 살살 빠져나와 놀잇감을 찾아 작은 모험을 시작하던 나이였다.


그날도 그런 작은 모험의 하나였다. 아마, 마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에 오르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다섯살의 나는 마치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수백년간 마을을 굽어 살폈던 고목으로 향했다.


멀리서만 보던 고목은 가까이서 보니 한없이 거대해 보였다. 부모님도 거인처럼 보이던 시절이다. 장정이 보아도 압도당할 크기의 나무와 조우한 꼬마는 그만 살짝 겁을 먹어버렸다. 에헴, 어린아이의 헛기침. 오늘은 너무 더워. 땀이 나잖아. 찐득찐득해서 기분나빠. 이래가지고 어떻게 나무를 탄다는거야? 흐, 흥! 겁나서 이러는거 아니야. 날이 안좋은거 뿐이라구, 하고 자기합리화를 한다. 거대한 목표 앞에서 소녀는 나이에 맞는 나약함으로 쪼그라들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데도 마음속으로 변명을 늘어놓으며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거대한 나무를 올라다보았다. 아아, 쪼그라든 마음이 콩알만큼 쪼그라들어버렸다. 한심한 마음에 시선을 내린다. 장정 다섯명이 붙어도 감싸안지 못할 듯한 굵은 둥치를 보며 침을 꿀꺽 삼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다보니 뭔가 이상하다. 나무 왼쪽 끝에 뭔가 이상한게 붙어있다. 저건 뭘까? 호기심에 살금살금 생선을 발견한 고양이처럼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위화감의 정체는 금새 판명났다. 나와 나무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던 소년의 옷자락이었다. 어째서 거기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소년도 이 나무에 도전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나처럼 실물을 보자 압도당해 주저앉아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와서 하는 생각일 뿐, 그때의 나는 침울하게 앉아있는 소년을 놀려주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조용한 걸음으로 타겟의 배후를 점한 어린 고양이는 코너에 몰린지도 모르는 먹잇감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 와악! "


흐에에에에엑! 하는 한심한 비명소리. 배를 부여잡고 킬킬대며 웃었다. 아아,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 무, 무, 무, 무, 무....! "


어찌나 놀랐던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년.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고 한심했던지 도무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었다. 결국 소년의 가슴이 가라앉고 너무 웃어서 배를 부여잡고 새우처럼 몸을 굽힌 뒤에야 빽 하고 들려온 울먹이는 고함소리.


" 무슨짓이야!!!! "


그게 테오와 나의 첫만남이었다.







나는 잔뜩 굳은 얼굴로 목욕탕을 나섰다.


에이미가 죽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겉보기엔 아직 스무살도 안된 아이인데? 헛소리야.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어차피 그 괴물이 날 현혹시키려고 지껄인 것 뿐이라고. 암, 그런 일에 내가 눈이나 하나 깜짝할 것 같아?


.....깨닫고보니 대충 옷을 걸쳐입고 1층으로 내려와 필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관 주인이 경계하는 빛을 숨기지 않았지만 그딴거 아무래도 좋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불안감이 가슴속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성이라는 이름의 성벽은 아직까지 굳건하게 버텨주고 있었다. 그래, 성벽의 아랫쪽이 불룩불룩거리는게 설마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땅굴은 아니리라 믿는다.


" 아. "


있었다.


1층에 있는게 아니라 2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무언가 일이 있어서 올라갔었겠지. 그녀는 어딘가 들뜬 얼굴로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에 느꼈던 허무감이 사라진 진짜 미소였다. 나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생각했다.



거짓말이야.


저렇게나 건강해 보이는데 곧 죽어버린다고? 생기만 넘치잖아?


거짓말이 틀림없어.



나도 참 글렀다. 악마는 언제나 거짓말을 달고 사는 존재잖나. 그런게 하는 말을 믿다니, 이 험한 세상에서 굴러먹으면서 뭘 배운거냐. 하핫, 기가 막혀서 원. 너털웃음 한번으로 털어버리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 좋아보이네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


에이미는 빙긋 웃었다. 정말로 좋은 일이 있는걸까. 기대감으로 가득찬 미소를 보고 있으니 나까지 기분이 좋았다.


" 으음~ 조금 좋은 방향으로 생각했을 뿐인데... 그렇게나 티가 났어요? "


" 네, 정말 행복해보이는데요. 부러울 정돕니다. "


보고있는 나도 행복할 정도로 말이죠. 누가 보고 있다면 헛웃음을 한번 흘릴만큼 녹아내린 표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다시 한번 미소지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다음 순간, 그녀의 어머니가 불편한 듯 소리를 꽥 질렀고 행복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2층으로 돌아와 문을 연다. 리디아의 안정된 호흡과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침대의 모습이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한결 가벼운 기분으로 침대 곁에 주저앉아 눈을 붙였다. 어두운 방 안에 추적추적 빗소리만 가득하다. 차라리 조용했으면 좋았을 것을, 비가 끊이지 않으니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꽤나 피곤할만한 하루였는데 정작 자려니까 정신이 오히려 맑아진다. 망할 수마란 놈은 청개구리랑 동기동창일게 틀림없다. 어두운 방안에서 의식이 깨어있으니 온갖 잡생각이 몰려든다.


악마는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


그래서 뭘 얻을 수 있지?


에이미가 건강하다면, 아무 일도 없다면 악마는 내게서 얻을 것이 없다. 하지만 만약 놈의 말이 사실이라면. 예를들어, 사실 그녀에게 남모르는 병이 있다면, 그걸로 인해 곧 죽게 된다면 나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놈과 계약할지도 모른다. 그걸 노리고 미리 심리적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일까? 좀 더 쉽게 계약하기 위해?


아니, 아니다. 이건 술수다. 이런식으로 날 고민하게 만들어 정상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드려는 술수인게 틀림없다. 젠장, 쉬자. 생각하면 지는거야. 그러니까 제발 빌어처먹을 의식아 잠 좀 들어주면 안되겠니?


그러나 간절히 바랄수록 머릿속은 점점 더 맑아졌다. 정신이 맑아질수록 가슴에서 불안감이 스물스물 자라기 시작한다. 생각을 멈추려는 생각이 끊이지 않고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누적되어간다.


빌어먹을 악마.


네놈이 원한게 날 불면증으로 말려죽일 셈이라면 적절한 떡밥이었다고 칭찬해주마.


아아, 인간이란게 만화처럼 간단했으면 좋았을텐데.


이게 만화였다면 난 주저없이 대가리를 벽에 처박고 의식을 놔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현실이고 벽에 대가리를 처박는다고 해서 정신줄을 놓을지 명줄을 놓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망할, 또 잡생각을 해버렸다.


날은 길다. 비구름이 태양을 막아버렸기에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이제 기껏해야 저녁 여섯시나 되었을까 하는 이른 시간이다. 이건 완전히 고문이군, 하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야심한 밤. 에이미는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최근 6년 간 처음으로 찾아온 희망은 그녀에게 흥분을 유발했고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 테오... "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함께 보냈던가? 얼마나 많은 추억들을 함께 했던가? 언제나 함께였고 언제까지고 함께 있자고 약속했었었다. 그들이 보내왔던 나날은 에이미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추억이라는 형태의 보물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었다.


" 뭘 실실 웃고 있어? "


달콤한 추억은 차가운 목소리에 산산조각났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착각했다고 생각했을 때, 끔찍한 고통이 그녀를 찍어눌렀다.


" 꺄아아아아아악!!!! "


에이미는 있는 힘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배에서 느껴진 뜨거운 통증은 그녀가 일찍이 느껴본 적도 없었고 겪어보리라 생각해보지도 못한 잔인한 것이었다. 그녀를 습격한 짐승은 손을 들어올렸다. 가닥 가닥 끊어진 내장이 그 손에 딸려올라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에이미는 그것을 볼 겨를이 없었다.


빠지직!


흥미없다는 듯 내장을 뽑아버린 짐승은 이어 에이미의 왼쪽 다리를 밟아버렸다. 이상한 소리와 함께 다리가 힘없이 부서지더니 그대로 끊어졌다. 비명소리는 이제 목쉰 소리로 변했다. 짐승은 아랑곳 않고 에이미의 상세를 살폈다.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몇십초. 짐승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에이미의 머리를 잡았다. 으직, 힘을 주자 사람의 머리가 모래로 이루어진 것 처럼 그대로 바스러졌다. 처참한 죽음이었다.


" 이야, 이거 늦어버렸네요. "


살해를 마친 짐승은 낮선 사내의 능청스러운 목소리에 손에 묻은 오물을 털어내며 돌아보곤 눈살을 찌뿌렸다.


" 웃기지 마. 빤히 지켜보고 있었잖아? "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빙긋 웃고는 냉정하게 말했다.


" 우리는 자유 의지를 존중합니다. 조사부 같은 딱딱한 놈들과는 다르지요. 당신이 저지르겠다면 우리가 그걸 막을 이유는 없어요. "


짐승은 일이 꼬였다는걸 깨달았다. 룰 위반에 대해서는 대게 조사부가 오지만 이번에 온 놈은 처리반이다. 조사부가 상대라면 인간 하나쯤 없애버린건 어떻게든 묻어버릴 수 있을텐데 처리반이 상대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저것들은 신의 직속이고 그들만의 룰을 가지고 있다. 물론 짐승은 그 룰을 알 수 없었기에 저놈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알 수 없었다.


"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네가 내 의지를 존중한다면 이대로 꺼져 줬으면 하는데. "


사내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였으나 가늘게 떠진 그의 눈은 여전히 공허했다. 그는 태도와는 달리 한없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 그건 곤란합니다. 당신은 어찌됐든 정면으로 룰을 위반했으니까요. 설마 위반인줄 몰랐다고 주장하시는건 아니겠죠? "


" 물론이지, 하지만 그건 너희 소관이 아닐텐데? "


짐승의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입에서 나온 것은 긍정의 말이 아니었다.


" 사건을 따지자면 그렇습니다만 당신은 우리 관할이라서요. 아시겠습니까? 당신이 저지른 사건은 우리들이 담당합니다. "


짐승은 포기했다. 저쪽이 이렇게 나온다면 더 이야기 해봤자 소용없었다.


" 그래. 마음대로 해봐. 하지만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지금 난 별로 제정신이 아니거든. 까딱 잘못 건드리면 큰일날걸? "


이빨은 세웠지만 그 내용은 항복이다. 사내는 그것을 읽고는 피식 웃었다.


" 그러죠. "


사내는 빙긋 웃으며 제안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짐승의 표정은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 왜 이런 제안을 하지? 룰 위반엔 다른 합당한 대가가 있을텐데? "


" 물론입니다. 원칙대로라면 그렇게 해야죠. 그런데 공교롭게도 전 이 세계에서 아직 할 일이 있답니다. 당신의 존재는 제 일에 방해일 뿐이죠. 머지않아 당신은 돌아오겠지만, 그 시간이면 제 일이 끝나기엔 충분한 시간입니다. 냉정하게 따져봤을때 당신에게도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가벼운 처분일 텐데요. "


짐승은 입을 닫았다. 그 모습에 만족한 사내는 공기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고 짐승도 흔적없이 모습을 감췄다. 그와 동시에 비디오을 되감듯 세상이 서서히 뒤로 돌아갔다. 처참하게 박살났던 에이미는 어느새 멀쩡히 누워 추억을 회상하고 있었고 찢어지는 비명도 사방에 흩날렸던 선혈도 온데간데 없었다. 끔찍한 사건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새도 쥐도 듣지 못한 비밀스러운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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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정리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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