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신노아 님의 서재입니다.

게임 속 작가놈이 되어버렸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신노아
작품등록일 :
2023.05.10 10:51
최근연재일 :
2023.05.26 11:40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88,889
추천수 :
4,767
글자수 :
166,892

작성
23.05.20 18:00
조회
3,322
추천
226
글자
22쪽

잉크색 피. (1)

DUMMY

 




1.


스륵.

서공왕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원고를 넘겼다. 물집이 군살이 되고 다시 군살이 거죽이 되어버린 손끝에선 종이의 감촉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


스르륵. 스륵.

페이지가 페이지로 넘어가면서 내는 잔물결과도 같은 소리. 어느 안개 낀 호수에서 늙은 뱃사공이 노를 젓는 소리를 닮은 것도 같았다.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고요를 엿들으며, 왕녀는 이 원고를 집필한 작가의 소문에 관하여 생각했다.


『헤라야. 올해 우승 후보작을 읽어보았느냐?』


얼마 전, 자신의 언니가 와서 말했다.

언니는 오랜만에 진심 어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작 우승 후보작을 써낸 작가의 신상명세서에 ‘반역혐의’ 네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한 뒤엔 노발대발했으나, 적어도 이때의 언니는 행복해 보였다.


『정말 갑자기 우승후보가 대뜸 나타났지 뭐냐! 허어. 올해는 뻔히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가 우승하겠거니 싶었거늘. 아, 물론 그 아이들도 여전히 흰꽃관을 거머쥘 가능성이 있긴 하지. 그러니 더욱 재밌는 거고. 실로 가열찬 경쟁 아니겠느냐. 헤라야, 너는 어떻게 생각······. 음?』


자신의 대답을 듣고 언니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여즉 안 읽었다고? 왜? 사서들 사이에선 이미 난리가 났다. 아, 혹시 원고를 구하지 못한 것이냐? 하긴 없어서 못 구하는 물건이긴 하지. 이 언니가 가져다주랴?』


자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언니가 미간을 좁혔다.


『아니, 어찌하여서?』


아직 안 죽었으니까.


『뭐라?』


살아있는 작가의 글은 읽지 않기로 정했다.

오직 이미 죽은 작가들의 작품만을 읽겠노라고 아주 오래전부터 다짐한 것이었다.


『······.』


도서해의 주인이자 가장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 중 한 명이며, 자신의 배다른 언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술을 벌렸다.


『헤라야······. 아니, 그래. 아무것도 아니다. 하기사 너도 도서해의 짠물에 물든 사서이거늘. 이 바닥에 괴짜가 어디 한둘이겠는고?』


그녀의 언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작가를 죽이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이상에야 그 정도 취미는 가져도 상관없다. 뭐, 본녀가 제일 아끼는 동생이 하필 네크로필리아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좀 골이 아프다만. 헤라클레이토스. 너는 옛날부터 왜 그러느냐?』


······네크로필리아라니.

그런 천박한 취미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공왕녀는 굳이 언니에게 변명하지 않았다. 왜 자신이 이런 원칙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타인에게 설명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언니의 예견대로 백화전 우승은 그 신인작가로 내정되었다. 반역혐의가 밝혀지지 않는 이상 수상은 확실했고, 그 작가의 본선용 원고도 서공왕녀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제본해야 될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녀는 해당 소설을 읽지 않았다.


――살아있는 작가의 삶은 별로 좋아할 수 없다.


불순하다.

불온하다.

불결하다.


살아있는 작가의 인생은 쉽게 조롱받는다. 사람들은 그의 실패에 기뻐하며 그의 실수를 비웃는다.

당장, 언니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반역의 혈통이란 사실을 몰랐을 때는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기뻐했으면서. 지금은 눈빛이 숫제 정치인으로 변해버려, 자신에게 금서들을 동원하여 그 역심을 끄집어내라 명령했다.


서공왕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어떻게 ‘고작’ 반역한 가문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으로 작가에 대한 사랑을 저버릴 수 있을까? 자신을 깨물었다 하여 버려버릴 애완견이라면 처음부터 기르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미 죽어버린 작가에 대해서는 모두가 다정해진다.

죽은 작가의 실패는 돌연 성공보다 더 탐스러운 꽃향기를 흘린다. 실수는 멋진 로망으로 바뀐다. 그처럼 ‘인간적인’ 단점들이 있었기에 비로소 그 작가는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라고, 사람들은 작가를 용납하며 용서해준다.


『······.』


자글.

자글.


어린 시절이었다.

왕녀는 궁의 화원에서 고양이를 본 적 있었다.


한여름. 죽은 고양이.

무수한 딱정벌레들이 갈색빛의 등딱지를 반짝이며 고양이의 사체에 파고들어, 아직 덜 죽은 살을 파먹었다.


자글.

자글.


더는 먹을 것이 없어질 만큼 사체가 말라붙자 벌레들은 서서히 흩어졌다. 카니발은 끝났다. 고양이의 유골은 깨끗해졌다.

여름의 늙은 바람이 유해를 쓰다듬어 조용히 풍장(風葬)을 치러주었다. 벌레가 울었다. 살점을 파먹은 딱정벌레들의 울음소리는 아니었다. 고양이 옆에 자라나 있던 버드나무. 살점에는 아무런 연도 없고 입맛도 없는 매미들만이 울고 있었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하늘의 곡소리였다.


자글.

자글.


왕녀는 무너졌다.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지엄하신 존체의 혼절에 궁궐 시녀들이 한바탕 난리를 치렀다. 처음에는 단순한 열사병인 줄 알았던 왕녀의 차도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여러 사람이 오갔고 그때마다 진단서가 갱신되었다.


『전하께서는 천재이십니다.』


마침내 어의가 진단서의 마지막 줄을 멈춰 세웠다.


『태어나실 때부터 신기를 가지셨군요. 이제 내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만일 지금이 아직 용제국들이 건재하던 시절이었다면 성녀 혹은 마녀가 되셨을 것이다. 건국신화에 버금가는 족적을 남기셨을 재능이라고, 어의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잘못 태어난 시대. 잘못 태어난 신체.

신내림을 감당하기엔 왕녀의 심장이 지나치게 여렸다. 어의가 나흘 밤낮으로 간호한 끝에 간신히 어린 심장의 박동이 되살아났다.

모든 궁인들이 기뻐했다. 정작 단 한 사람, 왕녀의 삶을 이 지평선에 붙들어놓은 어의만은 미간을 찌푸리며 제 환자를 들여다보았다. 마치 자신은 어떠한 병도 치유하지 않았고, 애당초 치유할 수 있는 병 따윈 없었다는 듯이.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땀이 흐르는 소리엔 소리가 없었다. 잔물결과도 같았고, 어느 호수에서 늙은 뱃사공이 노를 젓는 것도 같았다. 나룻배는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어의의 표정은 뱃사공을 닮았다. 그 어깨 너머에서 궁인들은 그림자들이 되어 환호하며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자글.

자글.


왕녀는 이 세상을 등지고 싶어졌다.

한번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이래로 왕녀는 달라졌다. 말수가 적어졌다. 무뚝뚝해졌다. 왕궁의 시종장과 집사장, 시녀들의 애원과 간원을 뿌리치고 그녀는 출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녀는 서공령주가 되었다. 일 년에 하루도 세상에 나갈 필요가 없는 이 심해의 도서관이 왕녀에게는 편안했다.

······고양이의 풍장을 치른 이후 단 한 번도 살아있는 작가의 책을 들춰본 적이 없었건만.


“······.”


스륵.

검지에 후회를 담고 엄지에 망설임을 묻힌 채, 왕녀의 손가락은 페이지를 집었다. 하얀 원고지. 그곳에서 그림자와 벌레들의 꾸물거림을 닮은 악필이 문장을 펼쳐냈다.


────────────

지난 세기부터 관곽장(棺槨匠)에 대한 비난이 도를 넘었다.

────────────


“관곽장.”


왕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안 팔릴 것 같아.”


왕국에서는 ‘관을 만드는 장인’을 관곽장이라 불렀다.

지극히 마이너한 소재.

혹시 백화전에서 우승을 거머쥔 것도 힙스터들의 입맛을 사로잡았기 때문일까? 그러면, 조금 실망.

역시 내기는 자신의 승리로 끝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겼으나―― 바로 다음 장에서 왕녀의 손가락은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

요즘 시대의 권력자, 소위 고위 관료들은 시체를 꺼린다. 불경하고 불길하다는 것이다. 관료들은 종종 관곽장에게 시체성애자라는 혐의를 붙인다.

────────────


멈칫.

물살처럼 쉽게 흐르던 시선이 문득 소설의 한 구절에서 고였다. 바로 얼마 전, 언니가 이곳에 찾아와서 흘리고 간 말소리가 불현듯 떠올랐다.


『본녀가 제일 아끼는 동생이 하필 네크로필리아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네크로필리아. 시체성애자.

어디까지나 우연에 불과하겠으나 그래도 기이한 우연이었다. 평생 들어본 일이 없는 단어를 고작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접한 것 아닌가.


“······.”


서공왕녀는 잡념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글을 쫓아가는 그녀의 시선은 더 이상 흐르는 물처럼 가볍지 않았다. 독사의 몸뚱어리처럼 구불구불 이어진 악필의 비포장도로를 그녀는 조금 느려진 걸음걸이로 밟아갔다.


────────────

심지어 유족들조차 관곽장을 의심할 때가 없지 않다. 그들은 관곽장이 시체의 키를 재는 모습을 엄격히 지켜본다. 그때마다 관곽장은 괴로워하며 작은 어깨를 떠는데, 오히려 사람들은 관곽장의 경련을 보며 저거야말로 ‘잘못된 성욕과 흥분’의 증거라고 수군거린다.

────────────


평범한 문장.

평범한 문장일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왕녀가 한줄한줄 읽어갈수록 꼭, 문장들이, 장미덩굴처럼 꿈틀꿈틀 기어올라 자신의 손끝에 감겨오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이건······.’


그리고 그녀는 불현듯 깨달았다.


‘설마.’


서공이란 무엇인가. 책에 표지를 입히는 자다.

왕녀는 오직 죽은 작가의 유작에만 표지를 제작해왔다.

그렇다면 자신의 직업이란―― 죽은 시체들을 위해 관을 짜는 관곽장, 그 자체 아니던가.


‘나의 이야기······인 거야?’


꿈틀.

왕녀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한뼘씩 자라나던 장미덩굴은 순식간에 자라났다. 문장이 줄기를 이루고 단어들이 가시를 이루어 그녀의 팔뚝을 휘감았다.


‘아.’


현실에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아야 할 영상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구역질을 일으킬 정도의 해상도를 지닌 채 눈앞에 펼쳐졌다.

어느 여름날 신내림을 받았을 때처럼.

자신이 작품을 몰입해서 읽을 때 항상 그랬듯이.


────────────

관곽장이 인생에서 가장 명예로웠던 나날, 동시에 가장 증오스러웠던 순간은, 아마도 제국의 황제를 위해 관을 짰을 때였다. 황제는 살아서 악명이 높은 폭군이었다. 저잣거리에서 가장 천한 술꾼조차 폭정을 욕했다.

────────────


어느새 왕녀는 구중궁궐 한복판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틀림없이 작가의 글을 읽고 있었으나, 또한 현실에 없는 풍광을 비추고 있었다.


까앙!


누군가가 그녀의 앞에서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늙은 노인. 왕녀는 그가 작품에서 말한 관곽장임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노인의 옆에는 시체가 누워 있었다. 이따금 노인은 망치 대신 자를 들어 시체의 키를 재보기도 했다. 시체는 무척이나 거추장스러운 군주복을 입고 있었다.


────────────

먼 훗날, 어느 역사학자가 이 시기의 사료를 본다면 지나치게 과열된 여론에 의아해할 것이다.

황제는 지극히 평범했다. 그가 저지른 실수는 황위에 일찍 오른 젊은이라면 으레 저지르기 마련인 정치적 모험에 불과했다. 가뭄은 날씨의 소관이었으며 가난은 계절처럼 돌아오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의 재위기간이 소빙하기에 속했다는 점을 참작한다면 황제는 선방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북풍에 모든 것이 몰래 얼어붙었다. 황제는 태어나서 19살이 되던 해, 생애 33번째 기우제를 지내던 도중 쓰러졌다.

────────────


안다.

이것이 무엇에 관한 비유인지. 관곽장은 누구이고 저기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황제는 무엇인지, 자신은 알고 있다.


‘황제는······.’


작가다.

그녀가 사랑하는 작가들이다.

설령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모를지라도 서공왕녀 본인만큼은 모를 수 없었다. 작품에서 소곤거리는 비유들이 그녀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왜냐면.

왜냐하면, 이건 그녀의 생각과 똑같았으니까.


────────────

······그는 달랠 수 없는 가뭄을 달래려다 죽었기에 가여운 황제였다. 군주의 악덕은 무지의 소산으로 변했다. 조정에서 대소신료들은 선제(先帝)를 폭군이 아니라 단지 어리석었던 암군으로 기록하는 데 합의했다.

────────────


꿈틀.

악필의 검은색 잉크, 묵빛 가시넝쿨은 이제 팔뚝을 넘어서서 왕녀의 어깨까지 기어올랐다. 그녀가 한 줄의 글을 읽으면 넝쿨 또한 한 뼘의 너비만큼 자라났다.


────────────

관료들은 황제의 영(靈)에 이름을 바치면 신하 된 본분을 다한 것이라 여겼다. 악덕을 부덕으로 눈감아주었으니 이보다 더한 충성이 없었다.

────────────


어깨에서 가슴으로.


────────────

살아있는 임금을 비판하고 죽은 임금을 감쌌으니 그들은 두 배로 충직한 신하였다.

────────────


가슴에서 목으로.


────────────

신하들이 목소리를 높여 종묘에서 영원해질 임금의 시호를 지을 적에, 관곽장은 황제의 관을 짓고 있었다.

────────────


꾸욱.

가시가 천천히 목을 조여왔다.

동시에 적장미는 왕녀의 몸 아래로도 뿌리를 뻗었다. 가시가 왕녀의 가슴을 뒤덮고 정확히, 심장 어림을 향하여 발톱을 세웠다.


────────────

그러나 신료들이 주의하지 못했던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기우제에서 황제는 의식을 잃었을 뿐, 아직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의가 사망선고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혼자서 생사를 오가고 있었다. 관곽장이 관을 짜기 위해 입궐한 바로 그 순간에도 가느다란―― 너무나도 미약하여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은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


아.


────────────

관곽장이 관을 짜기 위해 입궐한 바로 그 순간에도 여전히 황제는 살아 있었다. 황제의 생사를 알아본 관곽장은 몹시 당황하였다. 살아 있는 황제를 위해 관을 짜본 경험은 그에게도 일천했기 때문이었다.

────────────


따끔하게.

붉은 핏방울이 뾰족한 가시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왕녀의 피였다. 아무에게도 드러낸 적 없고 자매한테도 보여준 적 없는, 심장의 밑창에 고인, 진흙물처럼 썩어 질척해진 핏물이었다.


『헤라클레이토스.』


가시넝쿨을 타고 핏방울이 미끄러지는 흔적에는 소리가 없었다. 하얀 종이가 넘어가는 도중에도 소리가 없었으며, 땀이 흐르는 자국에도 소리는 없었다.

귀를 기울이면, 그곳에는 언제나 자글자글거리는 소음만이 백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너는 옛날부터 왜 그러느냐?』


왕녀의 귓속에서 그 소음은 늦여름의 낡은 바람을 닮았으며, 사랑하는 자매의 목소리를 닮았다.

바람의 풍경(風磬)과 혈육의 음성이 헤라클레이토스를 어느 여름날로 훅 끌어당겼다.


────────────

관곽장에게 진정으로 고통스러웠던 것은 황제의 여생, 즉 남은 수명이었다. 엄밀히 말해 황제는 살아 있다기보단 죽어가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불과 세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절명하리라는 사실을 예측했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 작업에 필요한 시간과 정확히 일치했다.

시체의 안치소는 문이 바깥에서 잠겨 있었다. 관곽장의 외침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드넓은 구중궁궐 속에서 죽은 황제가 아직도 죽어가고 있음을 아는 자는 오직 관곽장뿐이었다.

────────────


살아있는 작가의 삶은, 별로 좋아하고 싶지 않아.


────────────

『아니, 어찌하여서?』

────────────


왜냐하면, 보기 싫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흙탕물에 굴러 무수한 벌레들에 살점이 물어뜯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

관곽장은 살아서 죽은 황제의 힘겨운 숨소리를 들으며 관을 지었다. 장인의 고용주, 즉 제국의 신료들은 관곽장에게 호화로운 관을 주문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관에 교태로운 봉황과 너그러운 황룡을 새겨넣을 수 없었다. 그는 생매장되는 순장의 풍경을 관에 그려넣었다.

황제의 심장이 멎었을 때 그의 망치도 동시에 멎었다.

────────────


여름이었다.

사실, 사실은, 고양이는 죽어 있지 않았다.


살아 있었다.

죽어가고 있었다.


더는 일어설 기력을 잃은 고양이가 얌전한 볏짚처럼 땅에 엎어져 있었다. 벌레들이 죽음보다 조금 더 일찍 모여들어 야윈 고양이의 가죽에 파고들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고양이는 눈을 뜨고 있었고,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수 시간에 걸쳐 눈을 감고 있었다. 흐르는 땀처럼. 고양이의 새파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 들짐승이 눈을 뜨고 감는 억겁의 찰나에 삶과 죽음이 매달려 있었다.

여름이었다.

왕녀는 이 세상을 등지고 싶어졌다.


────────────

신하들은 새로이 황위에 오른 임금에게 관곽장의 잘못을 논죄했다. 그가 만든 관은 비루했다. 나무의 냄새가 마르지 않아 날것이었다. 비록 어리석었으되 심성이 고왔던 선황 폐하께 감히 어울리지 않는 누추함이라며 신료들은 한목소리로 간하였다.

────────────


왜.

어찌하여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에게 그토록 가혹하고 비로소 죽어야만 너그러워지는가. 왜 땅 밑에 묻혀야만 작가는 작가이고 인간은 인간인가.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생리이고 순리라면 그 세상을 등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만일 묻힌 사람만이 사람이 되는 것이 인륜의 자명한 이치라 한다면 차라리 지상을 지하라 부르고 세상을 지옥이라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째서, 언제나 사람보다 시체가 더 귀한가.


────────────

신료들이 간하기를, 『물론 그 아이들도 여전히 흰꽃관을 거머쥘 가능성이 있긴 하지』, 본래 관곽장은 시체에 집착하는 병증을 앓는 별종인지라 참람하게도 선제의 옥체를 보고 욕정하였으니, 『아니』, 산 자가 산 자와 어울리지 아니하고 죽은 자를 애호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 고양이의 유골은 깨끗해졌다. 여름의 늙은 바람이 유해를 쓰다듬어 조용히 풍장을 치렀다. 벌레가 울었다. 살점에 아무런 연도 없고 입맛도 없는 매미들만이 울었다. 매미의 울음소리는 하늘의 곡소리 매미의 소리────

────────────

────────

────

──







여름이었다.

장미의 화원에서 혼절하여 시녀들에게 발견되기 전에, 어린 왕녀는 자신보다 어린 짐승의 유해를 묻어주지 못했다.


“······.”


잊고 있었다. 그때도 지금도 자신은 그저 가엽게 세상을 놓아버린 아이들을 묻어주고 싶을 뿐이었다.

아무리 작은 손이어도 그들의 유해에 흙을 덮어 씌워줄 수는 있을 테고, 죽은 작가의 책에 고운 가죽을 표지로 덧씌워 염해줄 수 있을 테니까. 유해도 유작도 이미 죽어버린 무엇의 흔적임에 다를 바 없어, 흙도 가죽도 똑같이 관(棺)이 되어줄 것이었다.


‘살아 있었는데.’


아직 살아 있었는데 도와주지 못했다. 그러지 못했다. 못했었다.

헤라클레이토스 왕녀는 그 여름날에 자신이 묻어주지 못했던 손으로 한 겹의 원고지를 꾹 쥐었다.

눈앞에서, 노인은 대소신료의 탄핵을 받아 극형이 언도되었으나 왕녀는 그가 지나치게 불행하진 않음을 알고 있었다.

적어도 저 장인은 어린 황제를 위해 관을 짜주었으므로.


사형을 선고받은 장인의 목이 칼날에 끊어져 굴렀다. 몸을 잃은 머리는 정처없이 굴러오다가 툭, 왕녀의 발치에 부딪혔다.

그 순간 풍경은 깨지고 모든 것이 검은색 잉크로 허물어졌다. 노인의 머리는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

모든 금서의 묘지기, 헤라클레이토스 전하께 이 소설을 바칩니다.

────────────


“······.”


그녀는 관곽장이었다.

‘가장 밑바닥에 웅거하는 화산’도 ‘책바치들의 해령에 군림하는 자’도 ‘74대 서공령주’도 ‘제6 왕녀’도 아닌,

어린 시절부터 쭉 이렇게 되고 싶었고, 자신의 삶이 다만 죽어가는 것들을 추모하는 조금 긴 장례가 되길 원했으며, 자신의 죽음은 단지 늦여름의 늙은 바람이면 족할 뿐인.

단지 바다 아래의 묘지기.


원하던 삶을 원하는 대로 살고 있음에 왕녀는 슬퍼했다. 자기 자신을 슬퍼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이, 이 지옥이 슬펐다.

사람들이 가여웠다.


‘미안해.’

‘내가 약해서. 무능해서. 왕녀인데도, 왕족인데. 아무것도 못 해서. 이것밖에 못 해서. 당신들의 왕국이, 이것밖에 안 되어서.’

‘미안해요.’


그녀는 허리를 굽힌 채 숨을 죽였다. 노인의 머리가 떨어진 그 자리를, 원고지의 백색 무덤을, 손끝으로 간신히 짚었다.

그리고.


-어라.

-왕녀님, 울어?


헤라클레이토스의 숙여진 등 위로.

죽음의 냄새를 맡은 벌레들이 모여들었다.

금서들은 소리없이 날갯짓을 하며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들 모두 누군가가 죽으면서 남긴 흔적들이었고 여전히 죽어가고 있는 잔해들이었다.


-죽고 싶어?

-자살하고 싶어?

-생을 끝내고 싶어? 증오스러워? 경멸스러워?

-언제든지 말해.

-우리가 세상을 태워줄게.


이 세계의 액(厄)들이 소곤거렸다.


-단 한 마디.

-단 한 번의 손짓이면 충분하단다. 어린 왕족아. 저주받을 봉인의 가마지기야. 우리가, 너희를,

“닥쳐.”


왕녀가 중얼거렸다.

이빨에 짓이겨진 목소리였다.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한 울림을 감지하고서 금서들은 꺄르르륵- 웃었다.


읽었다!

언제 어디서든 흔들림이 없었던 저 왕녀가 마침내 살아있는 작가의 글을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피를 흘렸다. 탐스러운 피다. 저 작가가 죽으면 더욱더 탐스러워질 테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르투어. 아르투어 아트만이라 했으렷다. 그것이 언제까지 살까? 30년? 60년? 아무리 길어도 100년이야 되겠는가. 우리가 이 지긋지긋한 바닷속에서 이미 천 년을 기다렸거늘 고작 백 년을 더 기다리지 못할 성싶더냐.

금서들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천천히 날아다녔다.


“······.”


헤라클레이토스는 늙은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를 들으며 꾸욱, 망치를 쥐었다.


왕국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 나라의 관곽장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1

  • 작성자
    Lv.31 마젠타시저
    작성일
    23.05.21 12:12
    No. 31

    맛있다...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62 별표.
    작성일
    23.05.21 12:25
    No. 32

    허...글 진짜 재밌네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99 無雙狂人
    작성일
    23.05.21 13:52
    No. 33

    재밌게 읽고 갑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0 이시오넬
    작성일
    23.05.21 15:43
    No. 34

    15화만에 진한 딥키스를 갈겨버리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4 나무핥기
    작성일
    23.05.21 23:22
    No. 35

    신노아 !!! 신노아 !!!

    찬성: 2 | 반대: 0

  • 작성자
    Lv.1 g1******..
    작성일
    23.05.24 18:47
    No. 36

    ※※※장문주의※※엔터가 안 먹히네요... 가독성 죄송합니다!!※※※
    가입 한번 하기가 참 어렵네요...

    헌데도 작가님 신작 나왔다는 소식에 한번 설레고, 오늘 이 순간 이 화를 보며 또 다시 설레어서 무어라도 말 남기지 않고는 잠들 자신이 없었어요. 그리고, 잠은 늘 약간의 번거로움보다는 중요하니까...



    우선, 다시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작이 나오지는 않았을까, 언제 한번 스자헌 외전 한편이라도 올라오지 않을까, 아 근데 여기서 외전이 붙으면 역시 사족일까... 등 온갖 잡생각을 다 해가며 정주행하기를 거진 이 삼년 즈음 됐을까요?

    그 오래도록 응어리 진 애탐과 기다림이 오늘에서야 비로소 흘러가는 듯 하여 기분이 참 좋네요 헤헤......><



    작가님이 마냥 문학을 다루지 않는 사람이어서 좋아요.

    이를테면 저번도 이번도 시작이 가벼웠죠. 스자헌은 그 가벼움에 참신함마저 얹어졌었고. 나아가 중간중간 유머까지 얹어주시며 환기해주시니, 읽으며 마음이 마냥 무거워지지 않아 좋고 또 감사합니다.

    그 가벼움이 작가님의 글을 좋아하게 해준다면, 글의 무거운 부분들, 이번 화 같은 부분들은, 감히 자신하건데 이 글에 대해서 몇번을 곰씹게 되어요. 그러다보면 사랑하게 되고요.

    작가님이 다루시는 그 모든 무거움과 진중함, 진지함, 직관, 주관... 앞으로는 어찌 될 지는 모르는 일이기는 하지만. 최소, 여지껏 남기신 그 모든 행적들만큼은 정말 많이 사랑해요.



    사실 요즘 같은 시기, 시대에 진중함을 논하는 곳을 찾기 쉽지 않잖아요. 전작의 무협편 말마따나, 모든 진지함을 조롱하게 된 시대죠. 모든 까지는 아니긴 하겠다마는.

    다 멋있고 쿨해보이려고 애쓰고, 근데 생각과 고민은 깊게 하지 않아 알맹이는 없고. 헌데 어디서 또 주워들은 것 있어서 말은 그럴 듯 하고... 그렇게 하나둘씩 생겨나는 쿨병이 유행해서, 다 그게 멋있는 줄 알고 따라하고. 진지한 것들은 과몰입이니 선비니 진지충이니 뭐니 조롱하고.

    물론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야 각자도생이기도 하고, 직시하여 받아들이는 일은 아프고, 그것을 모르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서도 그런 이들 보고 있자면, 말 나누고 사람에 대해 논할 이는 적어지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공급 없는 수요에 목 말라서 헥헥대는 제 꼴이 참 안쓰러울 만큼ㅋㅋ.


    작가님이 그 목마른 수요에게 물방울 가득 내려주시는, 정말 몇 안되는 분들 중 한분이세요! 어쩌면 작가님의 글이 제 수요의 계기가 되었던 것일 수도 있구요.

    학폭이 해로운 이유가 가치관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듯.
    제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글을 써주신, 더없이 좋은 영향을 끼쳐주신 작가님에게 또한, 그만큼 감사하는 것이 맞겠지요...



    고마워요!

    덕분에 하루를 살아내고 있고, 심지어는 나름 잘 살아 가고 있기까지 한 것도 같습니다. 이전에 비하면 정말 많이 나아진 요즈음이에요.

    요컨데 살 만합니다! 아주 살판이 났어요. 이번 신작이 나왔으니 더더욱 살 만한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작가님에게도 올 한 해가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완전무결 백퍼센트 좋을 수야 물론 없겠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만족스러울만큼.

    요즘 날씨가 한창 더운데, 물 많이 드시고, 잠도 충분히 주무시고, 맛난 것도 많이 드시면서 집필해주세요.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글이 나오는 법이잖아요!!

    이번 작품에서도 잘 부탁드려요, 오래 봐요~!!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85 헛헌
    작성일
    23.05.26 00:28
    No. 37

    잘보고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2 ijason05
    작성일
    23.05.26 15:04
    No. 38

    무슨 짓을 한거니? 신발 밑창인 줄 알았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맛탱이21
    작성일
    23.05.26 23:23
    No. 39

    용제국...왕국....스자현 탑주의 세계를 연상시키네요 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2 켈리포늄
    작성일
    23.07.24 22:30
    No. 40

    산자가 죽은자를 부러워하게 되리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1 신케이
    작성일
    24.04.30 07:34
    No. 41

    윗 댓글처럼 책속의 책을 창작하시는 능력이..필력이 대단합니다ㄷㄷ 잘 읽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게임 속 작가놈이 되어버렸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중단 공지입니다. +67 23.05.26 7,508 0 -
공지 연재 시간은 오후 6시 5분입니다. 23.05.10 2,947 0 -
22 외전 - 에우리피데스 혹은 종소리 +74 23.05.26 2,665 126 19쪽
21 몽마의 금서. (1) +17 23.05.25 2,830 163 17쪽
20 외전 - 배드 엔딩1: 화마(火魔) +27 23.05.24 2,555 174 17쪽
19 운수 좋은 날. (2) +19 23.05.23 2,576 192 14쪽
18 운수 좋은 날. (1) +15 23.05.23 2,316 158 15쪽
17 잉크색 피. (3) +19 23.05.22 2,732 178 16쪽
16 잉크색 피. (2) +20 23.05.21 3,034 206 16쪽
» 잉크색 피. (1) +41 23.05.20 3,323 226 22쪽
14 첫 집필. (3) +22 23.05.19 3,093 217 15쪽
13 첫 집필. (2) +23 23.05.18 3,210 221 17쪽
12 첫 집필. (1) +24 23.05.17 3,216 222 15쪽
11 반역낙인. (3) +27 23.05.16 3,279 214 18쪽
10 반역낙인. (2) +29 23.05.15 3,452 197 16쪽
9 반역낙인. (1) +20 23.05.14 3,512 206 14쪽
8 시궁창 동기들. (2) +25 23.05.13 3,769 220 21쪽
7 시궁창 동기들. (1) +21 23.05.12 3,978 240 18쪽
6 데뷔 무대. (2) +19 23.05.11 4,646 253 14쪽
5 데뷔 무대. (1) +56 23.05.10 5,786 306 17쪽
4 페널티 천재. (3) +18 23.05.10 4,938 262 15쪽
3 페널티 천재. (2) +13 23.05.10 5,124 239 13쪽
2 페널티 천재. (1) +17 23.05.10 6,165 259 18쪽
1 에디터. +65 23.05.10 11,144 288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