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신노아 님의 서재입니다.

게임 속 작가놈이 되어버렸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신노아
작품등록일 :
2023.05.10 10:51
최근연재일 :
2023.05.26 11:40
연재수 :
22 회
조회수 :
88,908
추천수 :
4,767
글자수 :
166,892

작성
23.05.13 18:00
조회
3,769
추천
220
글자
21쪽

시궁창 동기들. (2)

DUMMY

 




‘내가 인간혐오증을 가지게 된 원흉······!’


에우리피데스의 청동빛 눈동자가 성장기의 원한과 분노로 타올랐으나――.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정작 상대방이 이쪽의 얼굴을 쳐다본 순간 그녀는 휙,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리는 속도만큼은 월클인 에우리피데스였다.


‘새, 생각해보니까 역시 선생님이랑 완전 비슷하게 생겼을 뿐인 생판 남일 수도 있고······.’


그럼 그냥 ‘혹시 아르투어 선생님 맞으세요? 아하하, 저희 10년 전에 같이 문학수업을 했는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라고 물어보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럴 깜냥 따윈 에우리피데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리스크를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만에 하나 ‘예? 아닌데요? 처음 뵙는 분 같은데’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의 리스크를······!


그럼 자신은 생판 타인을 지인으로, 심지어 어린 시절 과외선생님으로 착각하는 것이 되어버리며, 어색한 공기 속에서 ‘앗, 그, 그렇구나. 제가 착각했네요. 죄송합니다······’라는 대화를 억지로 이어가야 하겠지.

에우리피데스는 그것만으로도 가볍게 9일 동안 이불을 걷어찰 자신이 있었다.


‘어, 어떻게 하지? 미케나이 백작가의 가문 모토가 뭔지 아냐고 물어볼까? 아니······. 이미 망한 귀족 가문인데 그걸 물어보는 건 이상하잖아. 아! 아르투어 선생님은 소피아랑 약혼자였으니까 혹시 소피아를 아냐고 물으면······. 아니아니, 더 이상해! 엄청 수상해!’


에우리피데스의 정신 상태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을 때.

어째선지 상대방이 무척이나 포근하고 따스한 눈빛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에우리피데스는 끝끝내 눈치채지 못했다.




3.


‘얘 또 혼자서 생쑈 찍고 있구만.’


척 봐도 그랬다. 게임에서 유리를 육성한 횟수만 가볍게 300번을 넘어가는데 저놈의 속마음을 어찌 짐작하지 못할까.

이대로 내버려두면 5분이고 10분이고 영원히 혼자만의 생각에 갇혀서 북 치고 장구 치고 결국 자기 자신의 뺨까지 치는 유리의 일인연극을 직관할 수 있겠지만, 그건 조금 불쌍하기에 먼저 말문을 열어주었다.


“자네.”

“네, 네헤에?! 선생님?”

“담당 편집자는 벌써 구했는가?”


선생님이란 호칭이 이상했으나 딱히 개의치 않았다. 또 혼자만의 망상에 따른 결과겠지.

얘, 플레이어가 여자 편집자를 고르면 가끔 말실수로 ‘엄마’라고 부른다. 이 녀석의 말에 일일이 신경 쓰면 대화가 진행되지 않는다.


“에? 펴, 편집자요?”

“그렇다네. 자네를 전담해주는 편집자 말일세.”

“아······ 아뇨. 편집자라니, 그런 거추장스러운······. 어차피 제 작품을 알아볼 만큼 무, 문학적 식견이 뛰어난 사람이 편집자로 있을 리도 없고······. 대부분의 인간은 쓰레기······. 딱히 필요없고, 생각도 없고······.”


음.

물어보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까지 딥하게 중얼거리는 모습은 실로 유리다웠는데, 사실 저 중언부언 속에 아주 결정적인 힌트가 담겨 있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이 세계의 운명과 관련된 힌트라고까지 말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역시. 이 세계에는 [플레이어]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없는 모양이로군.’


플레이어들의 부재.

지금 보다시피 유리 얘는 성격이 끝장나게 파탄 났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이 세계에서 작가 노릇을 하는 캐릭터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비록 유리만큼은 아니긴 하되, 저마다 정신적 질병을 앓는 캐릭터들이란 것이다.


‘그걸 옆에서 케어해주는 게 플레이어인 편집자의 역할이거늘.’


나는 마음속으로 한탄했다.

······만일 이 세계에 플레이어 역할이 존재했다면 유리는 벌써 자신의 담당 편집자와 만나야 했다. 그것도 6달 전에.


설정상 이 편집자는 원래 베이커리를 전공하다가 어찌저찌 출판사에 취직하게 된 케이스인데, 디저트 만드는 솜씨가 끝내줘서 유리가 헛소리를 지껄일 때마다 그 입에 과자를 물려준다.

이 디저트가 유리의 입맛에 그야말로 직격.

두 사람은 편집자-작가의 관계라기보다 전담 셰프-귀족영애의 관계에 가까워지고, 점차점차 친구가 되어간다.


‘게임상으로는 그 디저트가 슬럼프 디버프를 없애주는 효과를 가지는데······. 플레이어가 없다, 이 말이지.’


내 눈이 가늘어졌다.


‘보아하니 얘뿐만 아니라 다른 작가들한테도 플레이어 역할의 편집자가 안 붙었을 수도 있겠어.’


솔직히 좀 곤란했다.

가령, 작가들 중에 러브크래프트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극렬 아인종 차별주의자가 된다. 심지어 왕국의 반란군이나 적대 세력에 합류할 가능성마저 높아진다.

다행히 게임상에선 바로 그 아인종 출신의 편집자가 러브크래프트에게 붙어서 이런저런 오해가 사라지게 되는······ 어라?

시발, 잠깐만. 기다려봐.


‘······이러면 이거, 왕국의 미래가 생각보다 지옥 난이도로 바뀌는 거 아닌가? 러브크래프트는 둘째치고 사드 후작은 어쩔 거야? 그 새끼는 진짜 완전 또라이잖아. 편집자 없으면 걔 자기 저택 지하에다 별 지랄을 다 해놓을 텐데?’


오. 세상에.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졌다.


‘아니, 진짜로 왕국 망하는 거 아니냐?’


내 생각보다 어쩌면 사태가 심각할지 모르겠다는 경각심이 등골을 타고 쫘아악- 올라왔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원작 지식들, 설정집에 적혀 있던 뒷이야기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르투어의 지능은 기본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상당히 좋은 편에 속했다. 페널티들이 덕지덕지 붙었다지만 이래 봬도 [천재] 특성을 지니지 않았는가.

그렇기에 쉽게 결론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망할 것 같은데, 가 아니라·····. 정말 망하겠군.’


마음 같아서는 예정된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싶었다. 나는 이 세계를 사랑했으며, 특히 소작설의 주요 배경이 되는 왕국을 애정했으니까.

하지만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변명이 아니라, 진짜 [귀차니즘의 성자] 때문에 내 마음대로 거동하기도 불편했다.


‘······그냥 최대한 손이 닿는 범위에서 원작 인물들을 보조해주는 수밖에 없겠네. 이건.’


현재로선 그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

그때 심사장 쪽에서 감독관이 나와 소리쳤다.


“32번 참가자! 32번 참가자 차례입니다!”

“아.”


에우리피데스가 반응했다. 나는 혀를 쯧 찼다.


‘하필이면 나 바로 다음 차례가 유리인가.’


이럼 진득하게 얘기를 나눌 기회조차 없잖아.

내 마음이 조급해진 것과 별개로 에우리피데스는 오히려 안색이 밝아졌다. 나와 헤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너무 과잉 해석일까.


“저, 저기. 유리는 그럼 이만······.”

“잠시만 기다려주게.”


얼른 자리를 떠나려던 에우리피데스의 앞길을 내가 가로막았다.


“엑?”

“종이 좀 빌리지.”


나는 아까 얘한테 건네주었던 원고지를 도로 뺏은 다음, 품속에서 연필을 꺼내 들었다.


“에? 어, 서, 선생님? 예선심사, 보러 가야 하는데······.”

“어허. 잠시만 기다리래도.”

“히익······.”


슥슥.

나는 원고지 뒤편에 얼른 글자를 적었다.


‘편집자가 없는 이상, 유리의 슬럼프 디버프를 없애는 방법은 한정된다. 그중에서 지금 당장이라도 쓸 수 있는 방법은······.’


다행히 내 필기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어서 금방 내용을 써낼 수 있었다. 나는 유리한테 다시 원고지를 넘겨주었다.


“주소지 두 곳을 기재해두었네.”

“네, 네에?”

“아주 정확한 주소까지는 나도 모르네만 어차피 자네는 귀족영애 아닌가. 적당히 사람 풀어서 조사하면 금방 나올 것이야. 하나는 디저트 카페고, 다른 하나는 오락실일세.”


디저트 가게에는 본래 이 아이의 편집자가 돼야 했을 인물이 파티시에르로 근무하고 있을 것이고, 오락실은 그 파티시에르와 데뷔 2년 차 때 즐기게 될 데이트 코스다. 오락실이라 해도 전자오락실이 아니라 짭중세 판타지 랜드 버전의 오락실이다.

아무튼 두 장소 전부 원작 시나리오에선 에우리피데스한테 붙은 정신적 디버프를 해제해주는 효과를 가졌다.


‘게임에서의 효과가 현실에서도 그대로 먹힐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이대로 방치해두는 것보단 낫겠지.

이 녀석도 스트레스가 임계점에 다다르면 여러모로 폭주하니까.

나는 에우리피데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아이를 설득하는 데엔 다소 억지스러운 방법이 제일 잘 먹혔다.


“둘 중 한 곳은 반드시 방문하게. 알겠나? 반드시야. 되도록 빨리, 가능하다면 한 군데 정도는 오늘 안에 들르게나.”

“에······. 카, 카페랑 오락실? 그런, 쓰레기 같은 구덩이를 왜······.”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길을 비켜주지 않을 걸세.”

“읏. 아, 알겠어요! 선생님. 가, 갈 테니까······. 약속할게요······.”


좋아.

나는 흔쾌히 길을 열어주었다. 에우리피데스는 내 얼굴을 한 차례 올려보더니 쭈삣쭈삣, 마치 미친개한테서 등을 내보이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얼른 도망쳤다.


“으음.”


흐뭇한 미소가 내 입가에 감돌았다.

우리 아싸찐따 유리를 위해 참 좋은 일을 해주었구나, 하고 만족감에 잠기려던 순간.


[특성 ‘귀차니즘의 성자’가 발동됩니다.]

[당신은 만사가 귀찮아집니다.]


“아.”


휘청.

백화전이라는 원작 이벤트가 종료된 데다 원작 캐릭터인 에우리피데스까지 사라지자, 귀신처럼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원작과의 연결고리가 옅어지면 이 몸뚱어리는 한낱 곰벌레에 불과했다.


‘이런 미친. 아무리 그래도 여관에 돌아갈 때까진 좀 유지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인간적으로?’


응, 어림도 없어.

전신에 무력감이 퍼져나가더니 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복도 주랑의 기둥에 기대어서 주저앉았다. 딱딱해야 할 터인 바닥이 어째선지 고급진 카펫처럼 폭신폭신하게, 차가워야 할 터인 기둥은 안락의자의 등받이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시바아알······.’


겁나게 기분이 좋았다.

결국 10분이 지나, 아무리 기다려도 예선심사장에서 나오지 않는 나 때문에 요제피나가 찾으러 올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꿀잠을 즐겼다.


“·········.”


그때 나를 깨우면서 요제피나가 지었던 표정은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

요제피나는 나를 억지로 끌어내어서, 온몸에 땀을 줄줄 흘리며, 겨우겨우 마차에 태웠다. 마치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건물에서 까대기 노가다를 한 것처럼 요제피나가 숨을 헉헉거렸다.


“······아르투어.”

“음.”

“당신, 진짜, 쓰레기야.”


나도 안다.

팩트 폭력은 그만해줘.





4.


에우리피데스는 무사히 예선심사를 끝마쳤다.

그녀는 어머니 몰래 빼온 가문 마차에 올라타고 자꾸만 히죽히죽거렸다. 심사 때 자신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떠올리면 솔직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나, 엄청 재능 있어······.’


어쩌면 우승해버릴지도.

같이 백화전에 출전한 소꿉친구 소피아를 제끼고, 과외선생님인 아르투어까지 제껴서, 어쩌면, 진짜로 우승해버릴지도······?


‘뭔가, 심사위원들 반응은 왠지 모르게 미지근했지만······.’


그거야 최대한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표정 관리를 한 거겠지.

에우리피데스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이미 왕국 역사상 역대급 재능을 가진 불멸의 천재작가였고, 수많은 유명 출판사들이 제발 자기네 브랜드에서 책 한 권만 내어달라고 싹싹 빌었으며, 자신은 그런 이들을 향해서 ‘죄송하지만, 저는······ 일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문학으로 향하는 도정을 걷고 싶을 뿐이니까, 요······ ’ 하고 슬픈 듯 말하고 있었다.


‘에헤, 으히. 우흐으······. 히이.’


무척 기분이 좋았다.


‘심사장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엄청 긴장됐는데, 아르투어 선생님이랑 만나서 오히려 긴장이 풀린 것 같기도······. 아.’


그제야 에우리피데스는 망상에서 빠져나와 허둥지둥 원고지를 꺼냈다.

행여라도 집안에 놔두면 어머니나 어머니의 수족한테 발견되어, 불에 태워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아예 들고나온 원고들.

그 뒤편에는 아르투어로 추정되는 남자의 필기가 적혀 있었고.


“윽.”


글씨체를 보고서 에우리피데스가 미간을 절로 찌푸렸다.


“그, 글씨 더러워······.”


겁나게 못생긴 필기체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 악필이야말로 오늘 마주친 하얀색 머리의 남자가 어린 시절의 과외 선생님임을 확증하게 해주는 또 다른 증거였다.


‘선생님, 옛날부터 글씨가 존못이었지······. 어, 얼굴값을 정반대로 반전시키면 글씨값이 될 거야······.’


왕국민의 식자층 가운데 99%는 감히 읽어내지 못할 악필.

그렇지만 에우리피데스는 너무나도 쉽게 아르투어의 손글씨를 해독했다. 성장기에 강압적으로 학습된 결과였다.

원고 뒷장엔 특정 베이커리 카페의 주소지가 조금 대충 적혀 있었고, 아래엔 이런 문장이 덧붙여졌다.


[추천 메뉴]

[애플민트초코바나나시나몬롤 <<< 메뉴판엔 없지만 점원한테 말하면 내어줄 것. 남은 게 없으면 추가금을 지불해서라도 반드시 먹어볼 것. 인생이 달라짐.]


“애플, 민트초코, 바나나시나몬······롤······?”


뭐지.

역시 선생님의 장난인가.

혹시나 싶어 같이 마차를 타고 온 시종한테 물어보니, 이 근방에선 꽤 유명한 디저트 카페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런, 품행 가볍고 발걸음 가벼운 인간들이나 가는 장소에 전혀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어서 전혀 몰랐다.

마침 장소도 가까웠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르면 딱 좋을 정도.


“······.”


이건 결코 카페에 가보고 싶기 때문이 아니다.

오늘 우연히, 여태까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옛 인연이랑 마주쳤고, 그 인연이 어째선지 여기를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복도에 엎드려 애걸복걸했고(아님), 과거와 달리 이제는 귀족영애가 된 자신이 그 부탁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뿐이다.

또한 이제는 백화전 우승이 확정된 천재 신인작가로서(아님), 아무리 카페가 천박한 장소라고는 하나 그러한 천박함 또한 경험을 해야만 훗날 작품에 반영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마, 맞아. 경험······. 작가적 경험······.”


모든 작가에게 있어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든 완벽한 변명이 되어주는 마법 주문을 외운 채, 에우리피데스는 카페에 당도했다.

가게 안에 거의 가득 들찬 손님들의 위압감에 소녀는 어깨를 움찔했고, 아 역시 괜히 직접 오지 말고 시종한테 시킬 걸 그랬구나- 하고 후회했으나, 그 전에 카페 점원이 활짝 웃으며 접근했다.


“앗! 어서 오세요! 한 분이신가요?”

‘읏.’


보기만 해도 안면에서 태양빛과 같은 광채가 쏟아져 나오는 사람······.

제일 서투른 유형의 인간이었고 제일 싫은 유형의 인간이었다. 에우리피데스는 슬쩍 고개를 떨구어서 상대방의 시선을 피했다.

참고로 에우리피데스에겐 ‘제일 서투른 유형’이 36가지 정도 되었다.


“네, 네에······. 한 명, 이에요······.”

“예! 창가 쪽에 자리 남아 있으니까 그쪽에 앉아주시면 되고요.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저기. 저어. 자작가 영애인데······.”

“네?”

“······.”

“······.”


죽고 싶어졌다.


“애, 애플민트초코······바나나시나몬롤······. 하나, 주세요······.”

“네? 앗, 네에! 와! 뒷메뉴를 아시는 분이었구나!”


눈을 깜빡깜빡거리던 파티시에르가 자기 가슴팍에 양손을 접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미소가 어찌나 예뻤는지 주변으로 해바라기꽃이 피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렇게 웃음이 화사한 사람도 에우리피데스에게 있어선 제일 서투른 유형의 인간이었다.


“제가 개발한 메뉴거든요, 그거! 아직 점장님이 정식으로 메뉴판에 올리진 않았지만 단골손님들한테 테스트 삼아 돌리고 있어요! ”

“네······.”

“손님은 처음 오시는 분 같은데 어떻게 뒷메뉴를 아셨어요?”


왜 자꾸 말을 걸지??

점원은 주문을 받아서 주문을 실행하면 될 뿐인 존재인데, 그러라고 존재하는 직업인데, 이 세상에는 프로의식이 결여된 인간이 너무나도 많다. 이래서 왕국이 망해간다는 소리가 공공연히 나오는 거다. 보나 마나 이 점원은 순인우선주의자에 아인차별주의자일 것이고 반석파 지지자일 거다. 얄팍하고, 왕국의 올바른 의사결정과정을 무너뜨리며, 협의와 협치의 정신을 손상시키는 극단주의자들······. 죽어. 죽어라. 제발 말 걸지 말아주세요.


“저어. 제가, 작가인데······. 동료 작가들 중에서 한 명이, 여기가······ 맛있다고 추천해줘서······.”

“화아! 작가님이셨어요?! 작가님이시면 막 소설 쓰고 책 내고 그러시는 거예요?”

“네, 네에······. 아하하······. 뭐······.”

“헤에, 그렇구나. 작가님들도 저희 가게 이용해주시는구나. 단골손님 중에 출판사 경영하시는 분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한테도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시는데······. 아! 어서 오세요!”


그때 천만다행으로 카페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이 틈을 노려서 에우리피데스는 얼른 창가로 도망쳤다.

잠시 뒤.


“여기 애플민트초코바나나시나몬롤 나왔습니다!”

“아······.”

“이건 홍차. 단골손님 추천으로 오셨다니까 서비스예요!”


파티시에르가 방긋 웃으면서 테이블에 메뉴를 내려놓았다.

에우리피데스는 의자에서 살짝 엉덩이를 들어 허겁지겁 인사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하핫. 뭘요! 저희 가게에서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작가님! 아! 어서 오세요!”


점원은 끝까지 해바라기꽃 같은 활기를 주변에 흩뿌리면서 총총 떠났다. 점원이 멀어질수록 에우리피데스의 근처에 남은 해바라기꽃들은 급속도로 시들었지만.


‘······응. 다시는 오지 말자.’


테이블에 올려진 디저트는 보기만 해도 속이 거북스러워지는 외양을 가졌다.

만약 자신이 이런 음식에 손대는 걸 알면 어머니가 난리를 치겠지.

······어머니가 싫어할 만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니 또, 나쁘지만은 않아서 기분이 묘해졌지만.


‘홍차맛은······. 응. 평범하구나.’


정말로 선생님은 왜 이런 가게를 추천했을까?

평생 이런 가게랑 인연이 없을 것 같다는 인상은, 자신뿐만 아니라 아르투어 선생님에게도 마찬가지로 있을 텐데.

또 여자를 꼬셔서 왕도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맛집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더욱더 다시 오기 싫어졌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런저런 잡념을 떠올리며 시나몬롤 귀퉁이를 포크로 잘라서 냠, 하고 한입 물었고.


“······?!”


그 순간, 벼락과도 같은 정전기가 에우리피데스의 미각과 뇌리를 뒤흔들었다.


‘마, 맛있어?’


아니.

맛있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했다.


‘엄청······ 맛있어······!!’


또각. 또각. 에우리피데스의 포크가 쉴 새 없이 시나몬롤을 잘랐다.

순식간에 귀퉁이를 잃어가서 뭉툭하게 되어버린 시나몬롤 덩어리를, 에우리피데스는 마치 스테이크를 먹듯 한꺼번에 포크로 찍어다가―― 입안 한가득 와락 물어 깨물었다.


“······! ······!”


에우리피데스는 한손으로 자기 입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절규했다. 기쁨의 비명이었다.

뭐지. 왜 이렇게 맛있지. 이, 이게. 이, 보기만 해도 더부룩하고 천박한 디저트가, 어째서.

지난 10년 동안 아르투어 선생님과 헤어진 이후로 에우리피데스는 단 한 번도 욕설을 입에 담은 적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선생님 정도를 제외하면 비속어를 내뱉는 인간 따윈 없었기에.

그러나 선생님과 재회한 오늘, 그녀는 10년 만에 다시금 비속어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존나······ 맛있어······!’


너무나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인간은 동물로 돌아간다.

동물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맛있는 걸 먹는 것이다. 등 따스하고 배부르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다 가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에우리피데스는 행복을 느꼈다.


‘아아······.’


근래에 우울했던 감정이 싹 씻겨져 나가는 감각.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왜 그렇게 작은 것들을 고민했을까, 하고. 고민 자체가 굉장히 작게 느껴져서 자신의 마음이 가벼워지는 느낌.


‘음식이란 건. 맛있는 음식이란 건, 이렇게나 위대하구나······.’


그제야 에우리피데스는 선생님의 뜻을 이해했다.

틀림없이 선생님도 지금 자신이 느낀 감정을 똑같이 겪었으리라.


‘아니면, 내가 10살 더 먹어서 이제 나한테까지 추파를 던지고 마수를 뻗으려는 걸지도······.’


활-짝.

에우리피데스는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

당연하지만 그 선생님이란 작자가 얼마나 인간쓰레기인지 철두철미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아르투어의 호의에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까웠다.


‘그럼······. 문학에 재능 없고 글 못 쓰는 허접 따위랑은 안 사귄다고, 차버려야지······.’


상상만 해도 행복했다.


에우리피데스는 뒤끝이 길었다.

좀 많이 길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게임 속 작가놈이 되어버렸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연재 중단 공지입니다. +67 23.05.26 7,513 0 -
공지 연재 시간은 오후 6시 5분입니다. 23.05.10 2,947 0 -
22 외전 - 에우리피데스 혹은 종소리 +74 23.05.26 2,666 126 19쪽
21 몽마의 금서. (1) +17 23.05.25 2,830 163 17쪽
20 외전 - 배드 엔딩1: 화마(火魔) +27 23.05.24 2,555 174 17쪽
19 운수 좋은 날. (2) +19 23.05.23 2,578 192 14쪽
18 운수 좋은 날. (1) +15 23.05.23 2,317 158 15쪽
17 잉크색 피. (3) +19 23.05.22 2,732 178 16쪽
16 잉크색 피. (2) +20 23.05.21 3,035 206 16쪽
15 잉크색 피. (1) +41 23.05.20 3,324 226 22쪽
14 첫 집필. (3) +22 23.05.19 3,093 217 15쪽
13 첫 집필. (2) +23 23.05.18 3,210 221 17쪽
12 첫 집필. (1) +24 23.05.17 3,217 222 15쪽
11 반역낙인. (3) +27 23.05.16 3,279 214 18쪽
10 반역낙인. (2) +29 23.05.15 3,452 197 16쪽
9 반역낙인. (1) +20 23.05.14 3,512 206 14쪽
» 시궁창 동기들. (2) +25 23.05.13 3,770 220 21쪽
7 시궁창 동기들. (1) +21 23.05.12 3,979 240 18쪽
6 데뷔 무대. (2) +19 23.05.11 4,646 253 14쪽
5 데뷔 무대. (1) +56 23.05.10 5,786 306 17쪽
4 페널티 천재. (3) +18 23.05.10 4,939 262 15쪽
3 페널티 천재. (2) +13 23.05.10 5,125 239 13쪽
2 페널티 천재. (1) +17 23.05.10 6,167 259 18쪽
1 에디터. +65 23.05.10 11,148 288 1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