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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님의 서재입니다.

전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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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해
작품등록일 :
2011.11.10 19:59
최근연재일 :
2015.12.11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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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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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6,673

작성
09.06.0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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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글자
21쪽

사냥이야기 11 - 버려진 땅 4

DUMMY

*

어물어물 철장패 근처를 배회하는 다섯 명의 호위. 앞으로 걷지도 못하는 다섯 명의 부관에게 철장패는 큰소리로 물었다.

``마수 한 마리와 저기 다가오는 무리들이 싸우면 누가 이기겠냐?"


쭈삣거리는 자세를 풀지 못한 체 부관 진호는 대뜸 소리쳤다.

``마수 베이모스가 이기죠. 저기 다가오는 녀석들이 아무리 많아도 마수 베이모스를 이기지 못합니다."


옳은 소리를 했다는 표정으로 철장패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목적을 생각한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마주쳐도 웃으면서 싸워야 한다. 설혹, 목구멍에 칼이 꽂혀 죽는다고 해도 당당해야 한다."


잠시 눈을 감고 침묵하던 철장패가 눈을 번개처럼 뜨고 무서운 얼굴로 부관 다섯을 노려보았다.

``우리는 여행을 하는 게 아니다. 무사로써 수행 중이다. 극도의 위험 속에서 강해지기 위해 나온 길이다. 처음부터 너희들을 데려 올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함께 하게 됐으니, 무리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나약한 너희들이 살아나도록 확률을 높여야 한다. 마수와 싸우기 전에 강해지도록 훈련시킬 필요가 있다. 절박한 위기에서 대처할 수 있는 실력은 둘째로 하고, 죽을 수 있는 위험 속에서도 한 치의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않을 정도로 정신력이 강해져야 한다.... 지금처럼 빌빌 몸이나 꼰다면, 한없이 약한 자세를 보인다면,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철장패는 곧게 몸을 편 상태에서 엄중한 태도로 꾸짖었다. 말은 나직했지만 겨울철의 차가운 삭풍처럼 듣는 사람의 머릿속을 차갑게 식혔다.


마냥, 어릿광을 부리던 다섯 부관은 침묵했다. 나이도 스물두 살이면 어리지 않다. 오히려 청년으로서 강렬하게 꽃을 피울 시기였다.


서서히 눈가에 독기가 머무는 다섯 부관은 한 사람씩 철장패를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서로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젠장, 어쩐지 분위기가 요상했어. 한마디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네."

부관 안수종이 낮게 독백했다.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앞장서서 걸었다.


네 명의 부관이 걸어가고 마지막으로 부관 김현우가 남았다. 잠시, 차가운 시선으로 철장패를 똑바로 보던 김현우는 몸을 숙여 인사하고 결투가 벌어지는 장소로 뚜벅뚜벅 걸었다.


실버나이트가 검강을 사용하는 결투 속으로 끼어드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렇지만 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마수 베이모스는 약하다고 살려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마수는 인간을 먹이로 생각하는 존재였다.


차분히 부관들을 응시하던 철장패는 싸늘한 일성을 토했다.

``가만히 있어! 손을 허리춤에서 빼는 순간, 손목을 자르겠다."


투명하고 싸늘한 시선이 빨간머리에게 꽂혔다. 어느새 포승줄이 느슨해진 채 은밀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거 어쩌나! 벌써, 포승줄도 풀었는데... 그만 죽...."


마저, 마지막 소리를 외치지 못했다. 눈깜짝할 사이에, 허공에 붕붕 뜬 `월아도'가 매섭게 허리춤의 손목에 닿아 있었다.

``실력을 감추는 행동과 일부러 잡히는 과정까지 재밌게 보고 있었다."


철장패는 포승줄을 다시 묶었다.

``품속에 있는 암기와 신발 밑창에 있는 단검을 빼지 않으리라 믿는다. 뺀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 순간이야말로 빨간 머리가 죽는 순간일 테니...."


거짓으로 항복했던 빨간머리는 당혹스러웠다. 여차하면 기회를 틈타 멍청한 청년귀족을 인질로 삼을 작정이었었는데, 수포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도망치지 못한 건 연극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쫓아온 무사보다 한층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감찰단을 잡지 못하면 귀왕도 조호로에게 문책을 당했다. `귀면'을 쓰고 움직이는 놈에게 사소한 문제로 트집을 잡히기 싫었다. 그래서 모험했다.


포승줄에 묶여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풀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감행한 계획이었다. 재수없으면 사지 중에 하나가 잘려도 감당할 생각이었다. 사지가 잘리면 흑마법사에게 키메라 시술을 받으면 되었다. 기분이야 더럽지만 귀왕도에게 트집을 잡혀 칠대천왕 중의 한 명인 혈왕 조모고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싫었다. 언제고 혈왕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은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다친 만큼 감찰단이라고 온 놈들을 갖고 놀면 되었다. 무엇보다 위험이 없는 모험은 재미가 없었다. 멋지게 성공할 기회였는데, 위험한 냄새를 풍기는 청년귀족에게 막혔다.


재차, 포승줄을 풀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렇지만 포승줄이 점점 몸을 조여왔다. 어떻게 감았나 모르겠지만 왈칵 짜증이 났다. 별 수 없었다. 조금씩 움직여 옷깃에 심은 실줄을 뽑아 포승줄을 잘라야 했다. 시간이야 오래 걸리겠지만 조심하면 문제가 없었다. 애써 몸을 움직여 이빨로 실줄이 박힌 부분을 물었다.


실줄은 특별하게 제작되어 뽑는 데 주의를 요했다. 잘못 뽑으면 혀가 잘렸고 옷이 잘렸다. 뽑기 직전에 주변을 살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격투에 신경을 쏟는 감찰단을 살폈다. 그래봤자, 세 명이었다. 흑곰처럼 생긴 녀석은 싸우려고 뛰쳐나간 후였다. 노마법사, 비리비리한 꺽다리 그리고 위험한 놈이었다. 조심히 위험한 놈을 안 보는 척 곁눈질했다.


차가운 눈망울, 재밌어 하며 올라간 입술, 손가락을 흔들며 그의 입이 벌어졌다.

``네놈은 참 재밌는 녀석이야. 계속 해! 마지막에 다시 묶어줄게."


저절로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어떻게 된 게 지랄 같은 상황이냐고! 신이여, 나를 엿 먹이지 마소서!"


빨간머리의 입에서 울부짖은 짐승의 외침이 터졌다.


난장판으로 변했던 격투는 갑자기 중지가 되었다. 새롭게 마적단의 무리에 세 명이 가세했을 뿐이었다. 그들이 앞에 서자 저절로 격투가 멈추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세 명은 뭔가 달랐다.


손을 올려 싸움을 멈춘 귀왕도 조호로는 여포를 주시했다. 쓰고 있는 건 가고일의 얼굴처럼 생긴 귀면탈이었다. 둥근 눈알, 독수리 코, 잔인한 이빨이 먼저 눈에 띄였다. 입이 벌어지자 귀면탈의 볼살이 실룩였다. 그 속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곱게 항복해라."


그렇게 큰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주변을 울렸다. 서산으로 저무는 노을이 피처럼 붉게 보이도록 했다.


잔잔히 이어지던 침묵은 깨어졌다.

``호, 별별 놈들이 다 있네. 이거 내 꺼!"


귀왕도를 발견하고 성큼성큼 다가서는 여포의 외침에 청오도 지지 않고 외쳤다.

``오른쪽의 거인은 제가 맡겠습니다. 정말 우악스럽게 생겼네요. 하인으로 삼으면 딱 좋겠습니다. 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볼 거 같습니다!"


청동거력패 전후아를 앞에 놓고 하는 소리였다. 청동거인족인 전후아는 드문 종족이었다. 청오의 황당한 헛소리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심안호는 남은 한 명 앞으로 다가섰다.


심안호는 상대 앞에 섰다가 흑곰처럼 걸어오는 마르쿠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상대하고 싶다. 호위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던데 자네가 없으면 곤란하겠지. 이 놈은 나에게 맡겨라."


마르쿠스의 호의에 기꺼운 마음으로 심안호는 자리를 비켰다. 스물두 명밖에 없는 호위들은 숫적인 열세로 서로 등을 의지하며 싸워야 했다. 지휘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컸다.


가볍게 주먹을 쥔 마르쿠스는 해골야차로 불리는 모용탁금과 마주했다. 해골야차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방울소리가 들리는 괴인이었다. 해골처럼 생긴 모습에 단추마저 방울로 달아 움직일 때마다 듣기 싫은 울림을 던졌다.


노을이 깔린 하늘 아래 긴장감이 어렸다.


감찰단에 합류한 왕국군 오백 명 중에 서른두 명이 마적단에게서 얻은 무기를 들고 함께 싸웠다. 그 중에 다섯 명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나머지 왕국군은 저지선을 만들고 안전한 성벽 위로 올라갔다. 일반 병사인 왕국군에게 가려면 철장패가 앉아 있는 자리를 거쳐야 했다.


귀왕도는 대열을 갖추고 기다리는 감찰단이 가소로웠다. 단, 한 번에 역전이 될 상황이 기다리는 걸 모르고 있었다. 저절로 즐거움이 생겨 입술 양쪽이 위로 올라갔다.

``네놈들을 이끄는 젊은 놈은 우리에게 잡혔다. 등을 돌려 보아라. 미리 잠입했던 빨간 머리 광혈랑에게 잡혀 있지 않느냐."


갈수록 커지는 목소리에 격투에 합류한 서른두 명의 왕국군은 서둘러 뒤로 보았다. 그에 반해 감찰단은 등을 돌려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여포가 복장이 터져 크게 웃었다.

``뭐, 뭐라고? 푸하하하하! 우리를 기습하려고 별 요상한 소리를 다하네. 그냥, 엉뚱한 수작은 부리지 말고 항복하는 게 어때? 벌써 죽은 녀석들이 스무 명도 넘잖아. 다친 놈들은 저기서 끙끙거리고 말이야. 우리는 한 명도 죽지 않은 것에 비하면 너희들은 그야말로 수수깡처럼 부러지는 마적단에 불과해. 어서 항복해라. 시간을 길게 끌고 싶지 않다. 이제부터 좀 세게 나갈 생각이다. 싸우는 도중에 항복한다고 해도 거짓 항복일 수가 있어 죽일 작정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다. 항복해라!"


귀왕도는 여포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광혈랑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야, 이 자슥아! 당장 포승줄을 풀고 젊은 놈을 족쳐!"


빨간머리는 귀왕도의 외침에 창피해서 고개가 점점 수그러졌다. 뭔 쪽팔리는 순간이란 말인가. 실력을 감추고 일부러 포승줄에 잡혔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가볍게 포승줄을 풀고 일어나지 않는 이상은 쪽팔려서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귀왕도와 광혈랑은 서로 경쟁자였고 앙숙이었다. 조금이라도 깎아내리려고 하는 상황에서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렸다. 한없이 체면이 바닥으로 뒹굴었다.


불같이 화를 내던 귀왕도는 여포의 공격에 떠들던 입을 다물어야 했다.

``되게 시끄러운 놈이네. 이놈의 동네는 뭘 삶아 먹었기에 이리도 시끄럽게 떠들어."


한 번 더 빨간머리 광혈랑에게 외치려고 하던 귀왕도는 얼굴에 강한 주먹을 맞고 정신을 차렸다. 여포를 가볍게 밀치려고 하던 귀왕도는 두 개의 그림자가 연속으로 생기며 다가오는 모습에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종류는 다르지만 `이형환위'가 분명했다.


다급히 애병인 `귀두도'를 뽑았다. 칼을 앞으로 세우고 발놀림을 부지런히 움직여 옆으로 날아갔다. 이미, 빨간머리에 대한 생각은 사라졌다. 당장은 싸우고 볼 일이었다.


칼과 함께 솟구쳐 힘껏 내리쳤다. 칼날과 비슷한 강기 덩어리가 쏟아져 나아갔다. 짧은 공격을 이용해 재차 공격을 펼치려 했지만 세 개의 그림자에 휩싸인 여포의 주먹에 옆구리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몇 번 맞자, 귀왕도 조호로는 제대로 할 마음이 생겼다.


한편, 감찰단에 속한 대부분은 힘차게 나아가는 기세로 마적단을 몰아쳤지만 유달리 비참하게 낑낑거리는 곳도 있었다. 실버나이트 다섯 명, 명실상부한 대공의 부관인 다섯 명, 은색의 깃털투구를 휘날리며 멋지게 싸우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상대하는 마적단의 절반은 이류무사의 실력이었다. 일반 마적단은 한 명이나 두 명밖에 없는 게 이류무사였다. 그에 반해 보염진을 장악한 마적단은 너무나 강했다. 같은 검기를 사용하는 무사였지만 마적의 기예는 기발했고 위험천만했다. 기본기를 튼튼히 하지 않았다면 벌써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굴러도 한참 전에 굴렀었다.


김현우, 진호, 안수종, 차민태, 정광희가 펼치는 작전은 두 가지였다. 일명, 초필살 눈치 작전과 무서운 놈이 오면 호위대 옆에 붙여놓기 작전으로 촌평할 수 있다.


진호는 절대 가운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호위대에게 상처 입어 뒹구는 놈을 향해 외쳤다.

``좌측 세 걸음에 한 놈 떨어졌다!"


진호의 외침을 듣자마자 김현우를 필두로 삽시간에 달려가 밟았다.

``당장 멈춰. 뒤로 다섯 걸음 후퇴! 좌측과 우측에 무서운 놈이 온다. 다시 다섯 걸음 후퇴."


진호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눈 먼 칼이 날아오면 방패를 전담한 차민태와 정광희는 옆구리에 서서 쏟아지는 검날을 집중적으로 막아냈다. 앞뒤로 선 김현우와 안수종이 이를 악물며 마적단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검을 휘둘러 막았다.


가장 중요한 역활은 뭐니 뭐니 해도 진호였다. 검풍탄을 뿜는 마적은 다섯 명이 힘을 합쳐 어찌어찌 상대가 되었지만 절정무인의 검강 앞에는 추풍낙엽처럼 죽어야 했다. 그에게 맡겨진 임무는 검강을 사용하는 절정무인이 보이면 무조건 피할 수 있게 외치는 경계병이었다. 상대하는 마적단 속에는 아직까지 스물아홉 명이 쌩쌩하게 살아서 검강을 뿜었다. 그들의 행보를 살펴 절대 가까이 가지 않게 조율했다.

``온다, 와! 좌측으로 열 걸음으로 달려!"


한꺼번에 다섯 명의 절정무인이 다가오자 진호의 눈알이 커졌다.

``왕창 온다. 무조건 호위대 후방으로 돌진!"


까짓것, 기사로서 당당하고 잘난 척은 잊은 지 오래였다. 아니, 따질 겨를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싸우지 않았었다. 일 대 일로서 남자답게 기사답게 싸웠다. 그래서 얻은 건 진짜 죽을 거란 사실이었다. 마적들의 기본기는 허술했다. 그에 반해 임기응변은 혀를 내둘렀다. 아차 하는 순간에 부상을 입었다. 김현우와 진호의 허벅지와 팔뚝에는 찔린 부위에서 피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호위대 뒤에 숨어 부들부들 떨며 옷을 입은 채로 연고를 찍어바르고 붕대를 감는 응급조치를 했지만 살필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살고 볼 일이었다.


싸우면서 느끼는 건 마적이라고 우습게 볼 일이 전혀 아니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실력이 약한 거지 기술과 체력은 악과 깡으로 뭉쳐 있는 놈들이었다.


갑자기 여섯 줄기의 검풍탄이 다가오자 차민태와 정광희는 방패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팔방풍우'의 수법으로 막아냈다.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마적들은 김현우와 안수종이 내려치기와 찌르기 위주로 공격했다. 고급기술? 사용할 틈이 없었다. 마적들도 사람이라 멍청하지 않았다. 고급기술을 사용하도록 시간을 주지 않았다. 한마디로 내려치기와 찌르기를 제외하고 당장 써먹을 기술이 없었다. 동작이 긴 기술이 아니라 간단하고, 빠르고, 변형이 쉬운 기술이 필요했다.


전쟁할 때는 비슷비슷한 놈들이 싸우는 거라 동작이 눈에 들어왔지만 마적들은 전혀 생판의 동작을 취하다가 갑자기 공격했다. 백병전을 치를 때도 기사단의 진형을 유지하고 공격했었기에 처음으로 당하는 난감함이었다. 김현우와 진호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죽음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자 깨달았다.


격투를 의자에 앉아 구경하던 철장패는 일어섰다.

``벌써 저녁이어서 그런지 육포 몇 개를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네."


시무룩하게 있는 빨간머리를 툭툭 찼다.

``그만 일어나라. 옆에 있는 변장한 놈을 들어라."

``아니, 짜증나게 차지 마. 그리고 뒤에 손이 묶였는데 어떻게 든다는 말이야?"


철장패는 히죽 웃었다.

``다 풀었으면서 헛소리는 그만하지. 쉬지도 않고 푸는 소리에 잠도 오지 않더라. 남작으로 변장한 놈을 들고 나를 따라와. 그리고, 조노야도 움직이죠.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구경하기도 힘드네요."


철장패가 움직이자 우르르 왕국군까지 내려와 쫓았다.


아직도 격투가 한창인 곳으로 다가서자 마적 스무 명이 얕잡아 보고 달려왔다. 근처까지 도약한 마적들은 환희에 차서 커다란 소리로 부르짖었다.

``드디어 잡았다!"


순간, 새하얀 광망이 어둡게 변하는 공간을 가르고 쏟아졌다. 스무 개의 검풍탄이 검을 뽑지도 않았는데 번개처럼 솟구쳐 다가온 마적의 몸을 갈랐다. 뛰어오거나, 도약하는 자세로, 칼을 내리치던 자세 등등이 한순간에 멈추었다. 이내, 시체가 한꺼번에 수직으로 갈라지며 피거품이 주변으로 쏟아졌다.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걷는 철장패와 달리, 뒤를 따르던 빨간머리는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언제, 어떻게, 검을 뽑았나 발견하지도 못했다. 단지, 수십 줄기의 하얀 빛이 솟구치자 시체로 나뒹굴었다. 자신이 누구를 상대로 인질을 삼으려고 했는지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젠장맞을, 운수가 더럽게 징그러운 날이었구만."


철장패는 곧장 앞으로 걸어갔지만 뒤를 따르는 무리들은 피가 쏟아진 자리를 피해 걸었다.


젊은 귀족에게 다가서려면 마적들은 주춤거렸다. 멈추었지만 점점 다가서는 젊은 귀족의 기세에 밀려 도망치려고 했다. 순간, 또다시 하얀 빛이 뿜어졌다. 거리가 삼십 미터가 넘는 거리였는데 번개와 같은 속도로 거리를 좁혀 주변을 시체로 떨구었다.


싸우던 존재들도, 구경하던 존재들도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다. 몇몇 마적들이 도망가려고 수십 미터 밖에서 몸을 움직이자 젊은 귀족의 몸에 걸렸던 두 개의 검이 허공으로 떠올라 사라지는 순간, 비명이 터졌다. 쾌검을 절정으로 익히면 펼칠 수 있는 빠르기로 날리고 소환마법으로 검을 소환시키고, 빠르게 날리고 소환시키는 과정이 압축되어 한순간에 주변에 펼쳐졌다. 그 과정이 찰나에 이루어졌다. 무엇이든 달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익히면 그 행동 하나하나가 범접할 수 없는 위엄으로 변했다.


``감히, 누구 앞에서 도망을 가겠다는 것이냐. 무릎을 꿇고, 오체투지하라! 하지 않는 자, 죽음뿐이다!"


작은 목소리가 분명한 데도 벽력처럼 주변을 때렸다.


사방은 침묵의 도가니였다. 뒤를 따르던 왕국군도 겁에 질려 말문이 벌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내 말을 따를 마음이 없나. 그럼 죽겠다는 뜻으로 간주하겠다!"


또다시 벽력처럼 울리는 준엄한 심판에 새가슴으로 변해 화들짝 놀랐다. 마적이 아닌 왕국군마저 소스라치게 간담이 철렁했다. 저도 모르게 철장패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태연한 기색으로 차가운 광망을 뿜는 철장패에게서 엄청난 신위를 엿보자, 하나 둘씩 오체투지했다.


그러나, 반항하는 놈은 꼭 있기 마련이었다.

``아직, 아직, 난 싸울 수 있다!"

두려움을 일부러 떨치려는 듯 힘차게 고함치는 청동거력패 전후아는 수십 미터 밖에 있던 철장패가 눈깜짝할 사이에 `이형환위'의 수법으로 눈앞에 있자 거대한 덩치가 절로 굳어졌다.


싸늘하게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다가 곧장 이어지는 풍차 형태의 `십이연타' 발길질에, 엄청난 거구가 붕 떠서 성벽 쪽으로 날아갔다.

``또, 떠들 놈은 없나?"


청동거인족의 어마어마한 무게가 공깃돌처럼 성벽에 부딪히고 떨어지자 뿌연 먼지구름이 지나간 자리에 맴돌았다. 공포심이 마음을 장악하자 머뭇거리던 마적들은 사라졌다.


죽은 마적을 제외한 팔십 명 가량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 속에는 귀왕도, 청동거력패, 해골야차도 속했다. 빨간머리와 어떤 소년은 철장패의 등뒤에 붙잡혀 있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이곳에 있다가 내일 아침에 나와 함께 진천황야로 간다."


격투가 벌어졌던 자리는 왕국군에 의해 치워졌다. 날이 완전히 어둠에 잠겼지만 보염진은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곳곳에 불이 밝혀지고 감옥 문이 활짝 열렸다. 마적들이 숨겨놓았던 돈과 무구들을 다시 찾았다.


그동안 철장패는 보염진의 부대장 고현에게 보고를 듣고 있었다.

``감옥에 갇혔던 기사들을 구출했습니다. 그러나 절반 정도가 기사로서의 생명은 끝났습니다. 잔인하게도 마적들은 마나로드를 파괴했습니다."


이어서 여러 가지를 보고했지만 철장패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옆에 자리한 김현우가 부상을 당했음에도 세세하게 내용을 숙지하면서 메모했다. 장시간의 보고가 끝나자 철장패는 툭 말을 던졌다.

``수석천인장, 다른 건 됐고... 밥이나 좀 주지 그래. 바쁜 상황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육포만 뜯어서 뱃속이 별로야. 대단한 건 바라지 않을 뿐더러 원하지도 않아, 닭곰탕 한 그릇이라도 갖다 줘. 이왕이면, 마적들이 찢어죽이고 싶겠지만 그들에게도 같은 음식을 갖다 주고... 더러운 짓거리가 나쁜 것이지 사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겠나."


배고파서 애처롭게 부탁하는 철장패를 수석천인장 고현은 다시 보았다. 인간 같지도 않은 신위를 보이던 철장패가 비로소 사람처럼 보였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닭곰탕 한 그릇에 마냥 행복해진 철장패는 왕국군이 마련한 숙소에서 잠에 취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자, 밖은 소란스러웠다. 백성들이 그동안 당했던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적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마적 대부분이 상당한 실력이기에 별 소용이 없는 짓이었지만 백성들의 원성은 끊이지 않고 메아리쳤다.


참다 못한 마적 중에 하나가 크게 외쳤다.

``짜증나게 하지 마라. 너희들이 무서워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일순간, 싸한 분위기가 주변을 감돌았다. 두려움과 분노, 증오와 아픔이 어우러져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고함을 지르며 백성들이 마적을 향해 쏟아졌지만 경계를 선 기사와 왕국군에 의해 제지가 되었다. 같이 마적을 죽이고 싶었지만 당장이라도 마적들이 반발한다면 수없는 사망자가 생겼다.


마적을 향해 분노를 폭발시키지 못하자 백성들은 땅바닥에 철퍼덕 앉아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날 아침, 감찰단과 마적은 보염진에서 사라졌다. 억울하게 마적에게 짓밟혔던 성채만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진천황야로 향하는 무리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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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99 다르미
    작성일
    09.06.09 23:33
    No. 1

    어제 저녁 선작하고 여기까지 보느라고 진짜 힘들었네요,
    재미없었으면 그냥 포기할건데 넘 재미있어서 다 읽었습니다.
    작가님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2 류판산맥
    작성일
    09.06.10 00:43
    No. 2

    제국은 여러 민족을 포함하고 있으니 제국이겠지요. 로마가 제국일 수 있던 건 잉글랜드부터 이집트까지가 그들의 땅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단지 로마인들로 이뤄진 나라였다면 제국이라고 부르진 않았을 거예요. 로마 시대의 귀족들은 잉글랜드와 이집트의 문화가 완전히 다르니 여행하는 재미도 분명히 있었을 거라고 봅니다.
    철장패가 속한 나라도 그와 같지 않나요? 새로운 문화를 보고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평가맘
    작성일
    09.06.10 08:57
    No. 3

    잘보고갑니다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99 근원적인삶
    작성일
    09.06.10 14:32
    No. 4

    클클..:>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철혈기갑
    작성일
    09.07.02 13:35
    No. 5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9 sfartar
    작성일
    11.07.03 09:53
    No. 6

    갑자기 버려진 땅 부분에 와서
    구성이 허술해 졌어요
    좀더 다듬어야 할듯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마녀의솥
    작성일
    16.04.18 15:07
    No. 7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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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사냥이야기 23 - 잘못된 재판 3 +9 09.06.29 8,611 69 16쪽
144 사냥이야기 22 - 잘못된 재판 2 +11 09.06.26 8,679 64 24쪽
143 사냥이야기 21 - 잘못된 재판 +15 09.06.25 9,010 68 29쪽
142 사냥이야기 20 - 올빼미 소년 2 +10 09.06.24 8,536 68 16쪽
141 사냥이야기 19 - 올빼미 소년 +13 09.06.22 8,801 66 19쪽
140 사냥이야기 18 - 마수 삼두견인 6 +19 09.06.19 9,052 68 24쪽
139 사냥이야기 17 - 마수 삼두견인 5 +12 09.06.18 8,599 56 17쪽
138 사냥이야기 16 - 마수 삼두견인 4 +11 09.06.17 8,801 68 23쪽
137 사냥이야기 15 - 마수 삼두견인 3 +11 09.06.16 8,508 63 17쪽
136 사냥이야기 14 - 마수 삼두견인 2 +15 09.06.15 8,899 62 25쪽
135 사냥이야기 13 - 마수 삼두견인 +13 09.06.12 9,505 71 22쪽
134 사냥이야기 12 - 버려진 땅 5 +7 09.06.12 9,165 68 25쪽
» 사냥이야기 11 - 버려진 땅 4 +7 09.06.09 8,836 72 21쪽
132 사냥이야기 10 - 버려진 땅 3 +7 09.06.08 9,051 68 17쪽
131 사냥이야기 9 - 버려진 땅 2 +7 09.06.07 9,018 59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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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전쟁이야기 119 - 새로운 시대 2 +6 09.05.12 9,994 66 15쪽
118 전쟁이야기 118 - 새로운 시대 +10 09.05.09 10,728 66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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