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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더 싸운드 오브 싸일런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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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4.02.29 07:49
최근연재일 :
2024.04.03 18:52
연재수 :
6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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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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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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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높이의 문제

DUMMY

뭐냐고? 사람 키가 일주일 만에 갑자기 자라날 수도 있나?


정강준이 느낀 그 이상현상은, 스탠스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스탠스Stance란, 상대선수와 마주 섰을 때 취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스탠스라는 말은, 폼Form 또는 Style이라는 말과는 달리 주로 하체만을 한정해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즉 선수가 다리를 벌리고 선 각도와 보폭 등을 말하는 것이다.


지난번 이진수와의 스파링에서 정강준의 스텝과 스탠스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었다. 사실상 정식으로 복싱 스탠스를 취한 게 아니라 그냥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때문에 그날 정강준의 상체 높이는, 평소 자연스럽게 걸을 때의 높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대로 스탠스가 잡힌 선수들에 비할 때 꽤 높게 잡혀 있었다.


그러나 일주일간의 맹연습을 통해 정강준의 스텝과 스탠스가 적잖이 안정되면서 제대로 상체가 높이가 내려가고 조정됐던 것이다.


반면 상대인 이진수는, 지난번 스파링에서 초반에 기술이 다 먹히자 스탠스를 넓고 낮게 벌리고 인파이팅을 시도했었고, 상체 높이가 평소보다 더 낮아졌었다.


지난 번 스파링에서는 공교롭게도 이진수가 스탠스를 낮추고 정강준은 몸을 띄우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둘의 상체 높이가 비슷하게 잡혔던 것이다. 때문에 정강준은 이진수와의 신장차이를 제대로 체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스파링에서는 반대로 이진수가 정석적인 아웃복싱을 하면서 스탠스를 좁게 잡아 상체 높이가 올라갔고, 정강준은 자세가 잡히면서 몸이 따라 내려갔던 것.


정강준 입장에서는 빈틈없는 아웃복싱을 하는 상대가 갑자기 키까지 커진 셈이었다. 쫓아 들어가는 쪽에서는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오태영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문제였으니, 스파링 당사자인 정강준으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나 다름없었다.


자신보다 큰 상대와 싸우게 되면 더 빨리 지치는 법. 키가 큰 상대와 싸우는 선수는 연습할 때보다 더 높게 주먹을 뻗어야 하기 때문에 피로가 가중되기 때문이다.


이진수가 스웨이 백으로 고개만 뒤로 홱 빼내 주먹을 피하면, 표적이 순간이동한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진수는 하체 움직임 없이 상체만 젖히면서도 정강준의 주먹이 영 닿지 않을 곳까지 몸을 물릴 수 있는 마당이었다.


정강준으로서는 판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가 어려웠다. 곧 미들급으로 출전해야 하는데,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아래 체급인 웰터급 선수보다 도리어 열세였던 것이다. 정강준은 이 차이를 절절하게 실감했다.


안 닿잖아! 이런 제기랄. 현민이 말이 맞았어. 나는 작고 어리석어. 그저 이능빨로 이겨왔을 뿐이야.


시간정지 타이밍이라는 건 원래 정확하게 맞추기가 어려운 거잖아. 왜 생각 못했던 거지? 타이밍이 안 맞으면 지금처럼 쉬는 시간에 시간정지를 처박을 수도 있다고.


누가 상대로 나오든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했었던 것인지도 깨달았다.


정강준은 링 포스트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떨어뜨리고 헐떡였다. 입문한 뒤로 내내 1라운드에 녹아웃시켜왔기 때문에 그때가 생전 처음 겪는 휴식시간이었다.


모든 것이 다 엉망이었다. 겨우 1라운드밖에 뛰지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오태영이 전에 없이 링 위에 올라와있다는 것만 봐도 스파링이 개판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오태영은 호흡이 쉬워지도록 정강준의 마우스가드를 빼냈다.


그런데 오태영은 작전지시도 하지 않고 정강준의 얼굴을 말없이 관찰하기만 했다. 마치 정강준의 속을 스캔하려는 것처럼 예리한 눈길로.


자기가 알아서 반성하고 있는 건가? 이건 뭐... 펀치력보다 더 좋은 재능 아닌가.


“오늘 컨디션 안 좋은 것 같은데 그만 할래? 다음에 다시 붙으면 되잖아.”


슬그머니, 당면한 난관을 모면할 구실을 만들어 던져줘 봤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고개 숙여 바닥을 보고 있던 정강준은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리며 강한 눈빛을 내쏘았다.


뭐요? 이렇게 두들겨 맞기만 했는데 기권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생각.


역시. 싸울 생각이네.


정강준은 거칠어진 호흡을 억지로 걷어내고 악을 쓰듯 말했다.


“헉... 이길 수 없다면, 허억... 잊을 수 없게는 해줘야죠. 허헉!”


그러나 숨이 너무 차서 정작 목소리는 조그맣게 나왔다. 오태영은 내심 흐뭇했지만 못 말리겠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 웃었다.


정강준의 생애 첫 번째 휴식시간. 오태영의 첫 번째 작전지시가 떨어졌다.


“자폭할 생각하지 마! 이건 스파링이야. 그래 봐야 아무 의미도 없어. 가드 내리고 도발해서 상대를 흔들어보려고도 하지 마라. 스파링이든 시합이든 간에 그런 건 덜떨어진 놈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아 그럼 어떻게 하라고!? 너무 높고 멀다고요!


“내가 처음에 가르쳤던 걸 기억해봐.”

“헉. 뭔데요 그게? 헉!”


웃던 오태영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그런 건 기억을 해야지. 가르친 걸 기억도 못하는 놈이 여기는 왜 올라와?”


복싱의 쉬는 시간은. 시합자들에게는 턱없이 짧다.


땡!


수수께끼 하나를 던져놓은 오태영이 정강준의 입에 도로 마우스가드를 물려버렸다. 마치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듯.


2라운드 시작.


불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정강준은 거침없이 링 중앙을 향해 걸어 나갔다.



파파파팡!


그리고 또 열심히 얻어터졌다.


붕! 부웅!


간간히 1라운드와 같은 양상으로 헛스윙을 했다.


뭐야. 쉬고 나왔는데도 지쳐 있네? 그럼 슬슬 끝낼 때가 된 것 같은데.


1라운드 내내 복선을 깔고 있었던 이진수가 슬쩍 정강준의 상태를 점검했다. 스텝을 밟으며 반응을 시험했던 것.


굳이 옆으로 돌아 나가지 않고 직후방을 향해 일직선으로 몸을 빼내도 1라운드 때처럼 바로 따라붙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실 정강준의 시저 가드를 깨기 위해 신성호가 이진수에게 일주일 내내 연습시켰던 것은, 정강준의 주먹이 닿지 않는 원거리에서 복부에 잽을 찍고 바로 빠져나가는 방법이었다.


이 복부에 잽 던지고 도망나가는 동작은 사실 실전되어가던 기술이었다.


복부에 날리는 잽은, 십 수 년 전과는 달리 최근에는 타격으로 채점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암시와 복선은 굳이 아프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법이다.


시저 가드는, 두 팔을 다 끌어올려 전완과 팔꿈치로 얼굴을 막는 기술이다. 복부를 아예 비워야 하는 위험이 있지만, 대신 얼굴로 오는 상대방의 주먹은 상당히 안정적으로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얼굴 아래쪽에 가드를 대놓은 채 상체를 펴고 서 있는 자세이기 때문에, 상대 입장에서는 어퍼컷을 넣기가 어려워진다. 또한 시저 가드를 취한 시합자가 양 어깨를 웅크려서 끌어올리면 어깨가 방파제 역할을 해 의외로 공격자의 훅이 잘 넘어 들어가지도 않는다.


시저 가드를 취한 시합자가 일부러 허리를 숙이거나, 공세를 취하며 다가가 머리를 내밀지 않는 이상은 그렇다. 그리고 위빙과 더킹을 잘 연습한 시합자가 이 가드를 사용하게 되면 상대는 더욱 난감해진다.


지난번 이진수는 얼굴을 뚫지 못하게 되자 반사적으로 복부를 노리고 공격을 했지만, 복부에 주먹을 허용하는 그 순간에도 손을 낼 수 있는 정강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에 빠졌을 뿐이다.


그리하여 이진수의 작전은 변경됐다. 열려 있는 복부가 아닌, 가드 뒤에 숨겨진 머리를 노리는 것으로.


아웃복싱으로 뒤집을 수 없는 포인트를 획득하는 한편, 복부에 잽을 날려가며 주의를 분산시켜 시저 가드를 끌어내린 다음 머리에 결정타를 먹인다.


보리쌀을 해본 사람이면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간단한 전술.


보리, 다음에 보리, 그 다음에도 보리가 계속 나오게 되면 또 보리가 나올 줄 알고 본능적으로 기대하고 예측을 하게 된다.


복싱도 마찬가지. 계속 배에 잽이 들어가다 보면 점점 반응하게 된다. 결국 복부에 잽을 던지는 페인트 모션만 줘도 습관적으로 몸이 경직되고 가드에 빈틈이 생긴다.


상대의 가드가 몇 센티미터 정도만 내려와도 결정타를 먹이고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수준급 복서들도 있다. 아주 짧은 찰나의 경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주먹은 눈보다 빠르니까.


배에 주먹을 주는 척하다가 다시 보리가 들어오겠거니 하고 숙일 때, 머리로 큰 주먹을 날리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아웃복싱 전략을 취하게 될 경우 압도적으로 많은 유효타 수를 챙기고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진수에게 있어서, 그냥 안정적인 아웃복싱으로 끌고 가다가 판정으로 이기는 그림은 심히 불충분했다. 그런 건 일주일 전에 당한 수모의 앙갚음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진수의 불행은, 1라운드를 지켜본 오태영이 그 전술을 간파하고 정강준에게 새로운 작전지시를 내리게 된 데서 시작됐다.


이는 이진수의 복선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생긴 일이기도 했다.


지난번처럼 이진수가 정강준의 복부를 때려 주저앉힐 목적으로 노렸다면, 아니 노리는 척이라도 했다면 오태영으로서도 더 시간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아마추어 복싱은 3라운드까지를 하게 돼 있다. 1라운드에서 분석하고 2라운드에서 대처하고 3라운드에서 만회하지 않으면 역전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배에 의미 없는 잽을 남발하며 복선을 깔고 있던 동안, 이진수는 아직도 복부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복싱에서 대놓고 복부를 노리는 움직임은 머리를 노리겠다는 말과 같다. 지나치게 빈번했던 암시가 도리어 독이 되었던 것.


열심히 밑밥을 깔아놨더니만 정강준의 가드 형태가 바뀌고 말았다. 오태영이 가장 처음에 가르친 가드였다. 전완과 주먹을 11자로 세워 몸에 바짝 붙이는 가드. 오태엉이, 동양인 체형으로는 모든 곳을 다 막을 수 없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었던 가드 형태.


갓난애 앞에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가 떼면서 아이를 웃게 하는 동작을 닮았다 해서 피카부 Peek-A-Boo 가드, 즉 까꿍 가드라고 불리기도 한다.


물론 가드라는 것은, 공세를 취할 수 없을 때 수세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는 선택지다. 그것만 가지고는 상황을 주도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의 스파링 상황은 조금 미묘했다.


허리와 등을 뻣뻣이 세워놔야 쓰기 좋은 시저 가드와는 달리, 피카부 가드는 운동역학적으로 등허리를 조금이라도 숙여야 더 편해진다. 팔의 생김새 때문이다.


정강준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자 이번에는 이진수가 체감하는 정강준의 높이가 확 달라졌다. 정강준은 한층 더 낮아졌다. 상대가 몸을 낮게 숙이면 자연히 복부에 손을 대기가 어려워진다. 게다가 시저 가드에서는 훤히 노출되어 있던 복부가, 끌어내려서 몸에 붙인 팔과 팔꿈치에 의해 방어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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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싸운드 오브 싸일런쓰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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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위빙과 더킹 24.04.03 4 0 11쪽
64 폭발적 반응 24.04.01 6 0 11쪽
63 공이 울린다 24.03.30 6 0 11쪽
62 어퍼컷 24.03.29 8 0 11쪽
61 대박 이후 24.03.28 8 0 11쪽
60 거대한 링 24.03.26 8 0 11쪽
59 소의 성추행 24.03.23 15 0 11쪽
58 소고기집 상남자들 24.03.22 11 0 11쪽
57 국제시합의 추억 24.03.21 12 0 11쪽
56 훅이 시작됨 24.03.20 11 0 12쪽
55 두 번째 24.03.19 8 0 12쪽
54 참패 24.03.16 9 0 11쪽
» 높이의 문제 24.03.15 10 0 11쪽
52 욕구불만 24.03.14 13 0 11쪽
51 이상하게 당겨 24.03.13 11 0 11쪽
50 물물교환 24.03.12 14 0 11쪽
49 시합체중 24.03.11 13 0 11쪽
48 아이템 상점 24.03.08 13 0 11쪽
47 군식구가 있네 24.03.07 11 0 11쪽
46 폭파범들 24.03.06 13 0 11쪽
45 전학생이 왔 24.03.06 11 0 11쪽
44 착해진 아이 24.03.06 10 0 11쪽
43 무역수지 24.03.05 13 0 11쪽
42 자리가 났다고 24.03.05 10 0 11쪽
41 링의 악마 24.03.05 10 0 11쪽
40 왜 안 아프지 24.03.05 8 0 12쪽
39 스파링 세션 24.03.05 12 0 11쪽
38 아나콘다 24.03.05 9 0 11쪽
37 친구가 온 건 처음 24.03.05 10 0 11쪽
36 현질 24.03.05 10 0 11쪽
35 재주는 곰이 넘고 24.03.04 12 0 11쪽
34 우주인 24.03.04 11 0 11쪽
33 반칙왕 24.03.04 15 0 11쪽
32 맹점과 타이밍 24.03.04 11 0 11쪽
31 결전 24.03.04 11 0 11쪽
30 더티 복싱 24.03.03 13 0 10쪽
29 생전 처음 24.03.03 12 0 10쪽
28 달라진 분위기 24.03.03 12 0 10쪽
27 남자 대 남자라서 24.03.03 12 0 10쪽
26 만두귀랑 예약되셨지 24.03.02 16 0 10쪽
25 이상한 놈이 나와 24.03.02 18 0 10쪽
24 수상한 회복 24.03.02 19 0 10쪽
23 이어진 테스트 24.03.02 16 0 10쪽
22 자퇴하고 싶어요 24.03.01 18 0 10쪽
21 이상하게 엮여 24.03.01 21 0 10쪽
20 피가 붉다 24.03.01 17 0 11쪽
19 첫 다운 24.03.01 18 0 10쪽
18 첫 스파링 24.03.01 28 0 10쪽
17 스파링 세션 24.03.01 22 0 10쪽
16 낙관주의자 24.03.01 24 0 10쪽
15 천원권투체육관 24.03.01 27 0 10쪽
14 무미건조한 24.03.01 27 0 10쪽
13 투명 올가미 24.03.01 31 0 10쪽
12 슬기로운 입원생활 24.03.01 33 0 10쪽
11 심리적 안전장치 24.03.01 36 0 10쪽
10 똘마니들 24.02.29 39 0 10쪽
9 오직 시간이 문제 24.02.29 37 0 10쪽
8 살인연습 24.02.29 40 0 11쪽
7 이제 와서 어쩔 24.02.29 42 0 10쪽
6 아리가또오 24.02.29 46 0 10쪽
5 실험성공 24.02.29 54 0 10쪽
4 책과 사진과 아버지 24.02.29 61 0 10쪽
3 뭐가 들어있는지 24.02.29 62 0 10쪽
2 유산은 백억 24.02.29 78 0 10쪽
1 사라진 아버지 24.02.29 121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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