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놈이 나와
뭐야. 그냥 죽자고 달리면 되는 거 아니었어?
오태영과 함께 달릴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져있다. 고작 사람 하나가 없어졌을 뿐인데.
정강준은 그저 트랙을 조금 돌았을 뿐이다. 그나마 오래 달리지도 않았는데 지치는 느낌. 정말 미세먼지 때문에 입과 코가 매캐한 것 같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한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집에 갈까? 역시 트레드밀이 답인가.
정강준이 벤치에 앉아 고민하는 동안, 스포츠백을 멘 체육복차림 소년 셋이 운동장으로 들어온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들의 얼굴에서는, 하나같은 불안이 묻어난다.
마치 우성고등학교를 돈 주고 사러 온 사람들처럼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며 의논을 한다. 표정들이 심각하기는 해도 딱히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건 아닌데, 그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눈에 확 들어온다.
체육복이 꽉 차 보이는 느낌이 들 정도로 건장한 소년들이다.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 때문이다.
그런데 셋 중 가장 날씬하고 날렵하게 생긴 소년이 벤치에 앉은 정강준을 유심히 바라본다. 백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과 정강준을 번갈아 보면서 몇 차례 확인까지 한다.
정강준 입장에서는 기분이 좀 나쁘기는 해도 뭐라고 말하기는 좀 애매한 상황. 그저 이마를 찌푸릴 수 있을 뿐이다.
야.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면 실례야 짜식아.
그러다가는 가장 체구가 큰 소년의 팔을 잡아당기면서 정강준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그러자 뭔가 말하고 있던 덩치 큰 소년은 놀란 듯 바로 입을 다물고 정강준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일어나 자리를 뜨자니 그건 왠지 도망치는 것 같아서 싫다.
가장 체구가 큰 소년은 망설임도 없이 정강준에게 다가온다. 다른 둘도 그 뒤를 따라와 뒤에 선다.
키가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가로로 넓게 퍼진, 장사 체형이다. 100킬로그램까지는 아니어도 80킬로그램은 족히 넘어 보인다. 떡 벌어진 어깨와 허리가 꼭 고목 같다.
머리와 턱은 둥근 모양에 보기 좋게 살이 붙어 있다. 살결이 꽤 흰 편이어서 마치 북극곰 같은 인상이다. 스포츠백에 콜라 한 병쯤은 넣고 다닐 것 같은.
“정강준? 니가 정강준이가?”
입에서 이름까지 나왔는데 더는 모른척할 수 없다. 정강준은 말없이 눈으로 눈을 들이받는다. 그러나 북극곰은 그 눈싸움에 응하지 않는다. 정강준의 찌르는 듯한 시선은 그대로 놔둔 채 정강준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볼 뿐이다.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의 눈빛이다. 왠지 그러고 그냥 놔두면 손으로 정강준을 만져보려고 들 것 같은.
아니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지?
정강준은 적이 당혹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 북극곰의 감정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눈이 크지 않은 편인데다 눈살까지 찌푸리고 있어서다.
거구의 소년이 머리를 긁적인다. 긴장감이 전혀 없다.
뭐하자는 거야 이건? 적의를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김명진 잡았다는 정강준이 니 맞나?”
옆에 서 있는 소년들에게서도 적대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신기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거구의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너무... 쪼꼬만 거 아이가?”
결국 정강준은 이제까지 긴장했을 때 늘 하던 것처럼, 뒤로 비스듬히 몸을 눕히며 상대를 노려보기로 한다. 그런데 하필 정강준이 앉아있던 곳은 등받이가 없는 벤치여서, 정강준은 휘청하고 꼴사납게 허우적대며 뒤로 넘어가버리고 만다.
어억,
하는 소리를 내며 두 다리를 내뻗고 버둥거려보지만, 이미 무게중심은 벤치 뒤로 넘어가 있다.
꼼짝없이 수치플레이를 당하게 될 각이던 그 순간, 북극곰의 손이 꼭 뱀처럼 휘릭 뻗어져 나와 정강준의 트레이닝복 목깃을 확 낚아챈다. 뒤로 넘어질 뻔했던 정강준의 몸을 간단히 멈춰 세운다.
그런 거구가 그렇게나 빠르게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사실에 정강준은 경악한다.
거구의 소년 역시 정강준이 생각보다 가벼워서 놀란 듯하다. 한 팔로 정강준의 몸을 끌어당겨 도로 벤치에 앉혀주더니 그 손을 다시 정강준에게 내밀고 악수를 청한다.
“내는 둥지고 유도부 이현민이다. 니 얘기 마이 들었다.”
입을 벌리지 않고 씩 웃는다. 왠지 밉지 않은 얼굴이다.
그러나 정강준은 그 손을 짝, 소리 나게 뿌리내면서 뛰듯이 벤치에서 일어난다.
이현민은 그 신경질적인 반응조차 이해한다는 듯 두 손을 내밀고 정강준에게 양 손바닥이 보이게 펴서 공격의사가 없음을 알린다. 두텁고 큰 손이다.
손이 뭐 발 같잖아? 악수를 하면 꼭 파묻히는 것 같겠네.
이현민이 갑자기 딴 소리를 한다.
“근데 여기는 우성고 아이가? 거문고 다닌다던 아가 와 여기 와 있노?”
하마터면 무심결에 ‘집이 가까워서’ 라고 대답할 뻔했던 정강준이 말을 삼킨다.
“...그러는 너는? 둥지고 유도부라고 안 했어? 여긴 왜?”
둥지고는 아예 다른 지역에 있는 고등학교다.
그런데 왜 왔냐는 소리를 들은 이현민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해진다. 옆에 선 둘의 표정도 마찬가지다. 셋이 거의 동시에 한숨을 쉰다.
“그기... 드러븐 사정이 있어 가 이래 됐다. 그러는 니는 지금 뭐하는데? 운동하러 온 기가?”
“응.”
멋모르고 순순히 대답한 정강준이 찔끔 놀라며 후회를 한다. 같이 있으면 어쩐지 무장이 해제되는 듯한 느낌.
이현민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비밀훈련이가? 역시 체육계 쪽이었던 가부지? 우리 맹키로.”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다. 물론 정강준의 근본은 개판 길바닥 막싸움이었지만, 지금은 복싱 5일차이기도 하니까 체육계인 것 같기도 하다.
체육계라고 하니까 뭐 좀... 있어 보이잖아?
정강준이 고민하는 동안에도 질문이 이어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무심결에 대답하게 되는 물음.
“니 운동 뭐하는데?”
“음... 복싱?”
“에에? 복싱? 뽀옥싱? 우와 진짜가? 다른 운동은?”
정강준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세상 심각한 얼굴이 된 이현민은 옆의 두 소년과 심도 있는 토론을 시작한다.
뭐라노? 복싱하는 애라 카는데. 이기 말이 되나?
못 믿겠는데. 복싱은 싸움에서는 열라 약하잖아요.
한 번 잡히거나 넘어지기만 해도 그냥 끝나던데?
아니 꼴랑 그거 하나 해가꼬 김명진이 같은 새끼를 잡아 조질 수가 있단 말이가?
그러니까요. 김명진 그게 인성은 진짜 개판이어도 실력은 장난 아니라고들 했었잖아요.
복싱도 의외로 쓸 만했던 거 아닐까요 형?
속단하긴 이르다. 쟤만 예외일 수도 있으니까.
사람을 앞에 놔두고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한다.
다 들려. 다 들린다고 이 자식들아.
그런데 그게 별로 기분 나쁘지가 않다. 뭔가 칭찬을 받는 듯한 느낌.
태도 때문일까. 정강준의 근본(?)에 대해서 토론하던 세 명의 태도는, 마치 우리가 최신 AV배우 동향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처럼 진지하기가 짝이 없...
아 쏘리. 이거 아니다. 정정.
마치 우리가 최근 시작한 게임에 대해 이야기할 때처럼 진중하고 삼엄하다.
“손 좀 봐도 되나?”
한창 이야기하다 말고 그냥 던지듯 한 이현민의 말에, 정강준은 멋도 모르고 선선히 강아지처럼 손을 내민다. 그러고 난 뒤에 또 뒤늦게 속으로 아차, 하고 후회한다.
“이야... 대단하다 니. 야, 이 봐라. 손도 이래 예쁜데. 애기 손이네?”
"그러네요."
손이 예쁘다는 말이 남자에게 칭찬일 리 없지만, 어쩐지 뿌듯하고 어깨가 으쓱해지는 건 사실이다.
“사실은, 김명진 글마 그거 소문이 너무 안 좋아 가꼬, 내가 한번 조져 놀라꼬 벼르고 있었다 아이가.”
정강준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뭐래? 흰소리나 해대는 놈인 건가.
하지만 정강준은, 그럼 왜 진작 나타날 것이지 내가 그런 일까지 당하게 만드냐? 라고 따지는 대신
“텔레비전 봤으면 너도 알겠지만... 그 새끼 폭력배들이랑 놀던 놈이라서 너 그놈들이랑 잘못 엮였으면 길바닥에서 칼 맞았을 수도 있어.”
라고 슬쩍 정리를 해준다.
그 소리를 들은 셋은 다시금 탄복한다. 오오오!
이것들 이상해. 암만 봐도 정상은 아닌 것 같은데. 꼭 이상한 종교에 빠진 놈들 같잖아.
“내도 안다. 그래서 더 놀랐던 기지. 그런 놈아를 식물인간 만들어 놨다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카니까. 누가 그러던데? 대통령아들 정도 되지 않는 이상은 그래 놓고 무사하기 어려울 거라고.”
웃음이 터진다. 대통령아들이라니. 정강준에게는 오랜만의 웃음이다.
“그런 거 아니야. 우리 아빠는... 기자들 비슷한 일을 하는 프리랜서였어.”
프리랜서‘였’다는 과거형에 이현민은 고개를 갸웃하지만, 뭐라고 묻지는 않는다.
긴장완화무드에 안심한 정강준은 슬쩍 손을 흔들고 그 자리를 떠나려 한다. 그런데 이현민이 펄쩍 뛰어 앞을 가로막는다.
“에헤이~ 잠깐만 기다려 바라.”
그리고는 어조 표정 태도 어느 것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정강준에게 말한다.
“니 내랑 함 싸워주면 안 되겠나?”
마치 나랑 게임 아이디 바꿔서 해볼래? 라고 묻는 듯 평온한 말투다.
안도하고 있었던 정강준으로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 아연해진다.
“...뭐라고?”
증오와 분노 없이 싸움을 하자니. 이제껏 죽기 살기로 싸워온 정강준에게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오해는 하지 마라. 니한테 뭐 악감정이 있어 가 이라는 기 아이고, 실력이 어떤지 볼라꼬 이라는 기다.”
아니 무슨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는가.
“내 아까 말했제? 김명진 글마 내가 찍어놓고 있었다고. 연말 되기 전에 함 붙어볼까 하고 정보수집하고 기술연구 중이었는데, 그래 공들인 걸 쏙 빼가뿌면 내는 우짜라는 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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