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정증영대근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빌런이었음

웹소설 > 일반연재 > 현대판타지, 스포츠

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4.02.01 12:52
최근연재일 :
2024.04.03 18:52
연재수 :
65 회
조회수 :
3,219
추천수 :
26
글자수 :
320,181

작성
24.03.29 21:24
조회
9
추천
0
글자
11쪽

어퍼컷

DUMMY

약한 공격과 강한 공격이 마구 섞여 들어오며 가드를 뒤흔든다. 그러나 정강준의 주먹에는 흔들림이 없다.


쾅!


흐름을 끊는 정강준의 주먹이 터진다. 하지만 그것도 역시 가드 위다. 이진수 역시 지난번처럼 허둥대지는 않는다. 이미 맛본 적이 있는 주먹이니까.


파파팍!


스파크가 일어나듯 연타가 터진다. 훅성 연타를 퍼붓느라 가까이 붙었던 이진수가 또 고개를 숙이면서 돌아나간다. 이때 훅으로 격추시켜해야 할 상황이지만, 웬일인지 정강준의 훅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관전하던 오태영이 아랫입술을 깨문다. 쉽게 깰 수 없는 전술이라는 방증이다.


그런데 오태영이 이진수의 파훼법을 생각하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1라운드 말미, 번개처럼 주먹이 꽂히고 다운이 터진다.


쿠당탕!


한 순간 오태영의 온몸이 감전되듯 경직된다.


제기랄! 앞으로 쓰러졌어! 못 일어난다. 10초 안에는 절대로!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시합과 스파링을 봐온 트레이너 둘이 동시에 확신하는 사항이다.


턱이 천장을 향해 홱 쳐들려지고 난 뒤, 무릎이 꺾이며 온몸이 앞을 향해 쏟아졌다.


주먹의 힘이 남김없이 타격력으로 전환된 경우에 이런 다운이 나온다. 조금이라도 힘이 남거나 포인트가 어긋나면, 다운되는 시합자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거나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쓰러지게 된다.


그뿐인가. 허용한 펀치의 종류도 좋지 않았다.


망할! 어퍼컷이라니. 주의를 줬어야 했는데.


오태영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싸쥔다. 어퍼컷은 아래에서 위로 쳐 올리는 주먹. 뇌를 가장 잘 흔들어놓을 수 있는 타격이다.


다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 오늘은 택시 태워 보내야겠다.


하지만 동공검사를 하기 위해 주섬주섬 휴대전화를 꺼내들면서도, 곧바로 링 위로 올라가지는 않는다. 신성호도 마찬가지.


그런 상황에서 선수출신들은 대체로 카운트 텐이 다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못한다. 심판을 따로 두지 않는 약식 스파링이라고 해도, 속으로 열까지 세고 난 뒤에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직업병 때문이기도 하고, 결과에 대한 미련 때문이기도 하다.


신성호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사실 이번 스파링의 전술은, 정강준이 시저 가드Scissor Guard를 쓸 것이라는 예측 위에서 설계되었다. 지난번 효과를 보지 못했던 복부 잽을 포기하고, 빠른 콤비네이션을 한계까지 가다듬었다. 그리고 위아래로 주먹을 나누어 내며 주의를 분산시키고, 정강준의 반격 타이밍을 흐트러뜨리는 것이 작전목표였다.


스트레이트성 타격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던 정강준의 방어전술 사각으로 반칙에 가깝게 몸을 숙이며 돌아나간 회피동작 역시 면밀히 준비된 것이었다.


물론 아무리 연타와 히트 앤드 런을 활용한다고 해도, 정강준을 상대해야하는 위험성은 지난번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시한폭탄 해체반이 느낄 법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이진수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훌륭한 전술수행능력을 보여줬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돌아갔던 건 아니었다.


지난번에 잘 쓰던 시저 가드 놔두고 굳이 처음부터 피카부 가드를 들고 나올 줄은 몰랐는데


복싱의 태동기부터 사용되어 온 시저 가드에 비하면, 피카부 가드Peekaboo Guard는 한참 후기에 형성된 기술이다. 그만큼 기술적인 이점과 안정성이 있지만, 그건 능숙하게 쓸 수 있을 때의 이야기.


시저 가드와 피카부 가드는, 안면 가드의 힘이 집중되는 포인트가 다르다. 양팔의 전완을 二자형으로 위치시키는 시저 가드는 팔꿈치와 팔이 중점이지만, 피카부 가드는 주먹에서 손목까지 글러브로 가려지는 부위가 안면 방어의 중심이 된다. 공격자 입장에서는 흔들어 놓기가 더 편할 수 있다.


이진수가 날린 잔 펀치에도 정강준의 얼굴 가드가 쉽게 떨어졌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이진수보다 높이가 낮은 정강준이 일부러 몸을 숙이고 들어와 주기까지 하니, 어퍼컷을 치기에는 최상의 각이었다.


사실 어퍼컷을 넣으라고 했던 것은, 지난번 스파링의 말미에 이미 신성호가 주문했던 사항이었다. 신성호조차도 이를 잊어버리고 있었지만, 이진수는 독하게도 이것을 기억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오태영 역시 정강준의 스타일 상 어퍼컷의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난번 정강준이 스트레이트로는 맞추지 못했던 간격을 활용하던 이진수를, 이번에 새로 학습한 훅으로 해결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1라운드 정도는 관망하기로 했던 것.


자기 선수의 승리를 확신한 신성호가 오랜만에 시원하게 웃는다.


그렇지만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건 너무 이른 환희였다.


“어어!?”


링 바닥에 쓰러져 있던 정강준이 자력으로 일어나 버린다.


신성호가 오태영을 쳐다본다. 신성호의 카운트는 나인Nine을 막 넘어간 시점이었으니 만약 신성호가 주심이었다면 정강준이 일어나건 말건 스파링은 종료됐을 것이다.


그러나 오태영은 반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고개까지 젓는다. 오래 알고 지내온 선배의 몸부림 치는 듯한 동작에 신성호는 움찔한다.


아니야! 아직 에잇Eight이야!


오태영의 카운트는 아직 에잇이었다. 오태영은 그 사실을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맹세할 수도 있었다.


나인이었어도 에잇! 텐이었어도 에잇! 하여간 카운트 에잇이었다고 이 새기야!


원래 카운트라는 건 우기는 놈이 왕인 법이니까.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을 만치 짧은 눈 마주침의 순간, 신성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에 질문을 띄우고 만다.


그런데 저걸 맞고 어떻게 일어나?


보통 강한 일격이 아니었다. 어퍼컷을 적중시켜 정강준의 뇌를 흔들어놓은 직후, 신성호가 일주일 내내 연습시켰던 콤비네이션이 무의식중에 발동됐었다. 그래서 쓰러지며 내려앉던 정강준의 뒤통수에, 조금 늦게 출발한 이진수의 레프트 훅이 살짝 얹히기까지 했었는데.


그러나 정강준의 하체에는 이상이 없다. 풀리지도 않았고 비틀거리지도 않는다.


뭐야. 저거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놈이냐고?


그 의문에는 오태영도 답해줄 수가 없다. 내막을 모르는 건 오태영도 마찬가지니까.


정강준의 사정은 이랬다.


*


스파링 직전, 정강준은 손바닥의 상처를 평소보다 더 깊게 남겨놓았다. 하지만 1라운드에 이진수를 끝내지 못한다면 또 시간정지가 쉬는 시간으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 내심 초조해하고 있었다.


가급적이면 자력으로 1라운드 내에 해결하고 싶은 욕심이 지나쳤다. 그래서 서두르다가 역습을 당했던 것. 얼굴을 가리고 있던 피카부 가드에 이진수의 연타가 꽂히면서 가드가 튕겨져 나갔다.


튕겨나간 가드를 원위치 시키려고 힘을 주는 순간, 가드는 흔들렸다. 그리고 바로 시야 아래에서 치고 올라온 어퍼컷이 턱에 꽂혔다.


뇌가 세로로 흔들리면서 두개골을 들이받게 되면 같은 충격량이라도 몸의 반응이 달라진다. 임정권과의 스파링에서의 당한 첫 다운과도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아 이렇게 더러운 기분이라니!


뇌에 심한 타격을 입었을 때 일어나는 일들은 이렇다. 정신이 멀쩡히 남아 있고, 보일 것이 다 보이고 들릴 것이 다 들리는데도, 손과 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마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중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몸이 털썩 바닥에 내려앉게 된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충격임계점이 아주 높게 잡혀 있던 정강준은 실신까지 하지는 않았다.


원,

투,

쓰리,


다운당한 자에게 카운트는 언제나 무정하다.


포,

파이브,


정강준은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애를 썼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식스,

세븐,



텐까지 세면 복싱 경기가 끝난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에잇,


그러나 그 순간, 온 세상의 카운트가 멈췄다. 시간이 정지하자 정강준의 눈동자는 의미심장하게 굴러다녔다.


당연히 카운트는 리셋. 거기서부터는 정강준만이 카운트를 할 수 있다.


원, 투, 쓰리,


시간이 멈춰버린 틈에, 잠시 정강준을 버리고 육체를 떠났던 영혼이 돌아왔다. 의식도 명료해졌다.


시간정지 이능을 회복에도 쓸 수 있는 건가? 이런 상황에서도?


포, 파이브,


아니지. 섣불리 일어나려고 할 게 아니네. 가만히, 최대한 가만히. 쉬고 간다. 가만히.


식스, 세븐, 에잇,


그 순간 시간정지가 풀리고 주변 소음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강준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링 줄 너머에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정강준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일어난 거냐.


말 그대로 기사회생한 정강준에게는 어쩐지 그런 놀람조차도 만족스럽다.


다리가 풀리지도 않았고 비틀거리지도 않는다. 다운 당하기 전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움직임.


정강준이 아닌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순간의 일들이었다.


*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이진수가 돌진한다. 1라운드 남은 시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벌인 일이다.


다운 당한 선수에게는 몇 초 간의 회복시간이 주어진다. 오태영 신성호 어느 쪽이 주심이었다고 해도, 다운 당했던 선수에게 그렇게 빨리 달려들게 놔두는 주심은 없다.


반칙은 아니지만, 비신사적인 행태다. 신성호가 기겁을 한다.


“야야야! 너 뭐해 인마!”


정강준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다. 이진수를 걱정해서다.


저걸 맞고도 일어나는 미친놈한테 묻지 마 돌진이라니!


그러나 이진수는 아랑곳 않고 주먹을 날린다.


파파파팡!



더 거세진 이진수의 연타에 쫓긴 정강준은 속절없이 로프가 있는 곳까지 밀려난다. 사냥당하는 짐승처럼.


그러나 로프를 넘어서까지 도망칠 수는 없다. 빨랫줄의 빨래처럼 널려서 난타 당하기 시작한다.


피카부 가드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끌어올리고 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쯤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투파파파팍!


이진수가 소나기 같은 콤비네이션을 퍼붓는다. 풋내기에게 깨지고 나서 지옥구경을 했던 설움이 쏟아져 나온다.


명백히 흥분하고 있다. 도리어 초심자인 정강준이 더 냉정하게 대처하고 있다.


펀치 소나기를 받아내는 중에도 정강준은 가드를 올린 채로 점점 등허리를 쭉 편다. 이렇게 허리를 살려놓으면 링 줄에 널리게 된다고 해도 상체에 회피움직임을 줄 수 있고, 이런 움직임을 줄 수 있게 되면 당연히 반격도 가능해진다.


쯧! 신성호가 아닌 오태영이 혀를 찬다.


이렇게 중요할 순간에 통제를 못하면 어떡해? 멘탈이 저래가지고 무슨...! 저렇게 아예 대놓고 반격하겠다고 버티고 있는데?


그렇지만 지난 2주간의 시간 동안 이진수가 받은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1차전에서는 운동 시작한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다는 정강준에게 참패를 당했고, 2차전에서는 1차전의 수모를 설욕하기 직전에 오태영이 링에 난입해 진상을 피웠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빌런이었음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후두부 타격의 위험 24.02.20 71 0 -
65 위빙과 더킹 24.04.03 12 0 11쪽
64 폭발적 반응 24.04.01 10 0 11쪽
63 공이 울린다 24.03.30 10 0 11쪽
» 어퍼컷 24.03.29 10 0 11쪽
61 대박 이후 24.03.28 9 0 11쪽
60 거대한 링 24.03.26 9 0 11쪽
59 소의 성추행 24.03.23 11 0 11쪽
58 소고기집 상남자들 24.03.22 9 0 11쪽
57 국제시합의 추억 24.03.21 12 0 11쪽
56 훅이 시작됨 24.03.20 15 0 12쪽
55 두 번째 24.03.19 13 0 12쪽
54 참패 24.03.16 16 0 11쪽
53 높이의 문제 24.03.15 15 0 11쪽
52 욕구불만 24.03.14 17 0 13쪽
51 이상하게 당겨 24.03.13 18 0 11쪽
50 물물교환 24.03.12 18 0 11쪽
49 시합체중 24.03.11 17 0 11쪽
48 아이템 상점 24.03.08 17 0 11쪽
47 군식구가 있네 24.03.07 17 0 11쪽
46 폭파범들 24.03.06 30 0 11쪽
45 전학생이 왔 24.03.05 30 0 11쪽
44 착해진 아이 24.03.02 17 0 11쪽
43 무역수지 24.03.01 20 0 11쪽
42 자리가 났다고 24.02.29 21 0 11쪽
41 링의 악마 24.02.28 27 0 11쪽
40 왜 안 아프지 24.02.27 20 0 12쪽
39 스파링 세션 24.02.24 24 0 11쪽
38 아나콘다 24.02.23 43 0 11쪽
37 친구가 온 건 처음 24.02.22 26 0 11쪽
36 현질 24.02.21 38 0 11쪽
35 재주는 곰이 넘고 24.02.20 28 0 11쪽
34 우주인 24.02.20 30 0 11쪽
33 반칙왕 24.02.18 32 0 11쪽
32 맹점과 타이밍 24.02.17 27 0 11쪽
31 결전 24.02.17 26 0 11쪽
30 더티 복싱 24.02.16 32 0 10쪽
29 생전 처음 24.02.16 27 0 10쪽
28 달라진 분위기 24.02.15 58 0 10쪽
27 남자 대 남자라서 24.02.15 34 0 10쪽
26 만두귀랑 예약되셨지 24.02.15 41 0 10쪽
25 이상한 놈이 나와 24.02.15 32 0 20쪽
24 수상한 회복 24.02.15 57 0 10쪽
23 이어진 테스트 24.02.15 35 0 10쪽
22 자퇴하고 싶어요 24.02.14 38 0 10쪽
21 이상하게 엮여 24.02.14 50 0 10쪽
20 피가 붉다 24.02.14 36 0 11쪽
19 첫 다운 24.02.14 37 0 10쪽
18 첫 스파링 24.02.14 38 0 10쪽
17 스파링 세션 24.02.14 38 0 10쪽
16 낙관주의자 24.02.13 39 0 10쪽
15 천원권투체육관 +1 24.02.13 56 0 10쪽
14 무미건조한 24.02.13 62 1 10쪽
13 투명 올가미 +2 24.02.13 88 0 10쪽
12 슬기로운 입원생활 +2 24.02.12 64 1 10쪽
11 심리적 안전장치 +1 24.02.12 69 2 10쪽
10 똘마니들 +1 24.02.12 89 1 10쪽
9 오직 시간이 문제 +1 24.02.12 87 2 10쪽
8 살인연습 +1 24.02.08 79 1 11쪽
7 이제 와서 어쩔 +1 24.02.08 93 1 10쪽
6 아리가또오 +1 24.02.03 127 1 10쪽
5 실험성공 +1 24.02.03 165 2 10쪽
4 책과 사진과 아버지 +1 24.02.02 156 3 10쪽
3 뭐가 들어있는지 +2 24.02.02 173 3 10쪽
2 유산은 백억 +2 24.02.02 217 4 10쪽
1 사라진 아버지 +2 24.02.02 405 4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