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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빌런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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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증영대근
작품등록일 :
2024.02.01 12:52
최근연재일 :
2024.04.03 18:52
연재수 :
65 회
조회수 :
3,217
추천수 :
26
글자수 :
320,181

작성
24.02.14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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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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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자퇴하고 싶어요

DUMMY

묻고 싶은 말들이 있기는 했지만 막상 이성연과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말조차 건네기 싫어질 정도로 한심하다.


넌 뭐야? 왜 빵에 안 들어가고 여기 있어? 너 그 새끼 졸졸 따라다녔었잖아. 애완동물처럼.


그러나 정강준은 머리에 떠오르는 말들을 도로 삼킨다. 공포에 질려 창백해진 얼굴이 왠지 재미있고 흡족하다.


한 번 웃어주기로 할까. 그러면 더 무서워할 것 같은데. 여러 말을 하는 것보다 한 마디 무게 있게 던져주는 게 더 낫겠지? 저 병신 같은 놈한테도 기억력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지만.


겨우 몸을 일으키는 이성연의 눈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댄 정강준이 조용히 속삭인다.


“졸업하면 인생 끝나?”


그리고 움칫 놀라는 이성연을 혼자 남겨두고 지나친다.


몸에 손가락 하나도 갖다 대지 않았지만, 이성연의 손은 떨리고 있다.


만일 정강준이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욕을 하고 위협을 가했더라면, 이성연은 돈으로 그 감정을 보상하고 길들일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러나 그런 자본주의식 거래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것을 눈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정강준은 웃고 있었으니까.


정강준의 눈 속에 자신과 동종의 악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성연의 눈밑에 경련을 일으킨다.


얼른 여기를 떠야겠어. 떠야 돼! 그리고 엄청난 돈을 벌어두지 않으면...!


*


거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위풍당당하게 한 마디 던져놓고 교실로 돌아온 뒤에 문제가 발생.


밥을 먹으면 나을 줄 알았더니 아픈 머리는 나아지지 않고, 점심밥이 얹혔는지 속까지 메슥거리고 현기증이 난다.


정강준은 담임한테 카톡 하나를 날리고 그대로 집으로 와 누워버린다.


그러나 집에 눕게 되어 긴장이 풀리자 머리는 더 아파진다. 끙끙 앓는다. 다행히 전날 밤에 밀린 잠이 와준다.


*


세상이 어두워질 때까지 땀을 내며 푹 잤는데도 몸은 여전히 무겁다.


세 체급 위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였나. 아니면 글러브 영향인가? 매에는 장사 없다더니 이거 많이 맞으면 제 명에 못 죽겠네. 뇌가 손상되면 기억력도 나빠진다고 하던데. 눈 건강에도 안 좋고.


이런. 마이크 바이슨처럼 파워풀하게 피 튀겨 가면서 관객들을 사로잡는 플레이를 하려고 했더니 안 되겠어.



그래도 체력이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는지 몸의 한가운데가 평소보다 튼실해져 있다.


응? 뭐지? 에로틱한 꿈이라도 꿨던 건가.


정강준은, 임정권의 잽을 얼굴로 막아(?)가면서 억지로 던진 주먹이 임정권의 턱에 얹힐 때의 촉감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확실히 그 순간의 감촉은, 시간이 정지한 틈에 꽂아넣은 주먹의 감촉과 다른 뭔가가 있었다.


당연히 위력은 시간 멈춰놓고 때렸을 때가 더 강했겠지. 살짝 얹히기만 한 것 같은데 그러고 쓰러졌으니까. 그렇지만 그건 손에 오는 느낌이 영 싱겁던데.


멈춰있을 때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때려야만 그 감촉이 와주는 건가. 짜릿하게.


이불을 덮은 채 옆으로 돌아누운 소년이,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상대에게 위해를 가했을 때의 성감을 천천히 복기해본다. 벽에 타일을 붙이듯 천천히.


그러다 손을 으스러뜨릴 것 같던 맨주먹 싸움의 감촉까지 기억에 되살아나면서, 온몸에 열이 오르기 시작한다.


몸이 뜨거워. 아플 때의 열과는 다르게.


암석처럼 단단하고 묵직해진 욕망이 직립한다. 소년은 자기 몸을 위로하기 시작한다.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더듬고 확인하던 순간, 꿈결처럼 부드럽게 이마를 짚는 손이 있다.


좋은 냄새.


“열이 있니?”

“으응...”


생시인지 꿈결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무심결에 어리광을 부리듯 대답한 소년이 바로 후회를 한다.


“많이 안 좋아?”

“으음... 엄마야?”

“아 이 새끼가 진짜? 또 이러네?”


정강준이 번쩍 눈을 뜬따. 어두운 방안이다.


그런데 하필 스스로를 위로하던 순간에 일이 그렇게 되고 보니 모든 것이 혼란스럽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엾게 허둥댄다.


정강준에게는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다.


봤나? 보고 있었어? 봤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본 거지?


분명히 몸에 열은 나고 있었지만, 유온이 말한 열은 이미 한 꺼풀 꺾인 뒤였다. 지금의 열은 그것과는 꽤 다른 종류의 열이었다.


잠깐만.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이불 덮고 옆으로 돌아누워 있어서 그런 건가.


정강준은 안도한다.


그럼 그렇지. 그걸 알아차렸더라면 저 더러운 성질머리에 이렇게 아무 말이 없을 리가 없잖아.


그래도 정강준은 말을 더듬는다.


“여기... 여기는 왜...?”

“병원엔 가봤어?”

“,,,”


대답도 없이 자기 할 말만 하는 유온의 질문에, 정강준도 입을 다문다. 그 잠깐 사이에 정신이 얼마간 돌아온다.


오후 수업 빼먹은 걸 알고 바로 집으로 찾아온 거겠지?


만약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게 궁금해서 찾아온 거였다면 정강준은 자다가 전화벨 소리에 깨었을 터.


도대체 어떤 새끼가 일러바친 거야?


또 공부 가지고 사람 닦아 세울 줄 알았더니 다행히 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


설마 진짜 아픈 건지 꾀병인지 알아보려고 온 건가.


“열은 내린 것 같네. 죽이라도 좀 먹고 쉬어.”


유온은 불 켜진 거실로 나간다. 은은하던 몸의 향기가 아쉬워진다.


유온이 열고 떠나간 현관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난다. 사실 적잖이 배가 고팠던 정강준은 서둘러 부엌으로 간다.


정말 죽이 있기는 하네. 뭐야? 사온 거잖아. 직접 만들었다는 줄 알았더니만.


그래도 얼른 식탁에 앉아 플라스틱 포장을 열고 부지런히 숟가락을 놀린다. 식은 죽 먹기.


엄마가 죽은 뒤로는 아플 때 늘 혼자였다. 그게 서러운 줄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오늘은 좀 기분이 낫다.


아플 때 누군가 있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나.


거의 나아가는 중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 가장 중대한 문제점을 깨달은 정강준은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만다.


비밀번호. 어떻게 알고 들어온 거지? 문 열어준 기억이 없는데. 닌자냐고?


아 이런 썅. 경비가 열어줬구나. 하긴 변호사 명함이랑 서류 몇 장 들이밀면 안 열 도리가 없었겠네.


학교 빼먹었다고 멋대로 열고 들어와? 제정신이 아니잖아. 미저리도 아니고.


유온은 언제든 다시 들이닥칠 수 있다.


나는 자유의 몸이 아니야. 행복할 수가 없어.


*


집 문 비밀번호를 바꾸고 심호흡을 하던 정강준이 결심한 듯 유온에게 전화를 건다.


“저... 학교 다니기 싫은데요. 자퇴하고 싶어요.”


사실 마음으로 하고 싶던 말은, 더 이상은 네 얼굴을 안 보고 싶다는 말이었지만, 뭐 첫술부터 배부를 수 있나.


칭얼거리는 느낌이 안 나게 애써 진중하고 무게 있게 말했건만, 정강준은 아직 열다섯 살 소년이다. 유온은 그냥 웃기만 한다.


이거 뭐? 어쩐지 비웃는 느낌?


그래도 처음부터 자퇴하겠다고 세게 불러 놓으면 나중에 조금이라도 유리해질 것 같아서 정강준은 그대로 밀고 나간다.


“아니 그때... 머리 다친 뒤로 계속 몸도 아프고...”


유온은 아예 반응이 없다. 곧 전화를 끊을 사람처럼. 조바심이 난다.


“그날 사고 난 뒤로 대인관계 설정 및 유지가 어려워져서... 애들이 내 옆으로 안 온단 말이에요.”


따돌림이라도 당한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겁을 집어먹고 근처에 안 온 거다.


하지만 어쨌든 가까이 안 오는 건 사실이니 거짓말은 아니지?


유온도 그 소리를 듣더니 대놓고 웃지는 않는다.


떠듬떠듬 이것저것 꾸며내서 말을 하는 사이, 일진이었던 국회의원 아들놈이 아무 이상 없이 계속 학교에 다니는 게 싫다는 말까지 툭 튀어나온다.


“...그럼 전학을 가야겠구나. 한 번 알아볼게.”


아니야 아니야 이것아 그게 아니야! 그럼 체육관은 어떻게 가라고?



“아니! 그러면 일이 복잡해지니까! 그냥 야간자습을 빼는 걸로 합의를 하는 게 어떨까요?”


이번에도 꾹 눌러 참는 웃음소리.


“집에서 인강 보는 게 더 공부 잘 된단 말이에요.”


고등학교 1학년, 열다섯 살 소년은 결국 체통을 포기하고 애처럼 칭얼대기 시작한다.


“그럼 내가 일일이 다 검사할 건데 정말 괜찮아?”


정강준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래 봤자 매일 올 것도 아니면서. 너도 네 일이 있을 거 아니니.


콜!


전화를 끊은 정강준이 소파에 쓰러지듯 드러누워 만세를 한다.


이렇게 되면 운동할 시간은 확보된 거지? 일단 아버지 유산 2억이 걸려 있으니 학습량은 채워주고, 시간을 남겨서 운동을 하자. 잠을 좀 줄여야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


“너는 체육관비 내지 마라.”

“왜요?”

“내지 말라면 그냥 내지 마 인마. 부모님 안 계시다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뭐라고 선뜻 설명하기도 힘든 상황?


“너는 운동을 늦게 시작했으니까, 다른 애들보다 빨리 배워야 돼.”


오 이건 마음에 드네? 자 이제 실전에서 쓸 수 있는 기술들을 배워볼까. 뎀프시롤, 가젤펀치, 플리커 잽...


“자. 이거 잡아.”


어? 아니 지금 장난하나 바쁜 사람 불러놓고.


“이게 뭐예요?”

“뭐긴 뭐야 줄넘기지? 이걸 빨리 배워야 된다고.”

“말도 안 돼. 이런 걸 왜 해요? 나는 이런 거 안 하고도 이겼잖아요? 이런 건 재능 없는 애들이나 하는 거라고요. 다음 거, 어려운 거부터 가르쳐줘요. 빨리 실력을 키우게.”

“나도 너만큼 급해 인마. 다다음주에 스파링 하나 잡아놨단 말이야.”

“스파링? 그럼 시합은 언제해요?”

“까불지 마 인마. 그렇게 쉽게 올라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

“아니, 나는 누구든 붙여만 주면 다 이길 수 있는데!”

“이거 안 하고는 아무것도 못 배워!”


에이 재미있어지려다가 말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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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우주인 24.02.20 30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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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맹점과 타이밍 24.02.17 27 0 11쪽
31 결전 24.02.17 26 0 11쪽
30 더티 복싱 24.02.16 32 0 10쪽
29 생전 처음 24.02.16 27 0 10쪽
28 달라진 분위기 24.02.15 58 0 10쪽
27 남자 대 남자라서 24.02.15 34 0 10쪽
26 만두귀랑 예약되셨지 24.02.15 41 0 10쪽
25 이상한 놈이 나와 24.02.15 32 0 20쪽
24 수상한 회복 24.02.15 57 0 10쪽
23 이어진 테스트 24.02.15 35 0 10쪽
» 자퇴하고 싶어요 24.02.14 37 0 10쪽
21 이상하게 엮여 24.02.14 50 0 10쪽
20 피가 붉다 24.02.14 36 0 11쪽
19 첫 다운 24.02.14 37 0 10쪽
18 첫 스파링 24.02.14 38 0 10쪽
17 스파링 세션 24.02.14 38 0 10쪽
16 낙관주의자 24.02.13 39 0 10쪽
15 천원권투체육관 +1 24.02.13 56 0 10쪽
14 무미건조한 24.02.13 62 1 10쪽
13 투명 올가미 +2 24.02.13 88 0 10쪽
12 슬기로운 입원생활 +2 24.02.12 64 1 10쪽
11 심리적 안전장치 +1 24.02.12 69 2 10쪽
10 똘마니들 +1 24.02.12 8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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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살인연습 +1 24.02.08 79 1 11쪽
7 이제 와서 어쩔 +1 24.02.08 93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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