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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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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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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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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01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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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
40쪽

해의 그림자 263

DUMMY

"여기가 맞느냐?"


금줄을 두르고 자물쇠도 채워놓은 판문을 보면서, 김익훈은 눈을 의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등뒤에 선 편비를 돌아보는 그의 눈시울이 실룩였다. 편비 역시 당혹스런 눈초리로 한발 뒤로 물러서서 품에서 한장의 지도를 펼쳐서 지세를 살폈다.


서쪽 언덕을 등진 둔덕에 돌담을 두른 모양새까지 지도와 똑같았다. 하지만 문이 굳게 잠겼으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도를 따라서 표시된 지점으로 왔는데, 자물쇠가 채워진 것이 문제였다. 아니, 자물쇠가 문제가 아니라 저 금줄이 문제였다. 애초에 여기는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고, 들어가서도 안 되었다. 그러니 상관이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지만, 표시는 여기가 맞았다.


"예, 영감. 여기 이렇게..."


편비는 김익훈의 눈앞에도 지도를 펼쳐 보였다. 김익훈의 눈가가 실룩였다. 편비보다도 더 김익훈의 눈엔 익숙한 지도였다. 발엔 익숙하지 않았어도, 최소한 환갑의 눈이 짓무르도록 수백 아니 수천번도 더 살폈던 지도였다.


"왜 여기서 보자고..."


의혹으로 김익훈의 두눈이 흔들리는데, 문 안쪽에서 중년사내의 팽만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셨으면 들어오시지요."

"..."


김익훈의 눈시울이 다시금 실룩였다. 그는 뜨악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문이 잠겼는데 들어오라니. 편비 역시 난처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피더니, 김익훈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월담을..."

"..."


김익훈은 월담이란 두글자를 듣자마자 고개를 홱 비틀었다. 자신이 누군가. 명색이 이 나라 조선의 국모인 중궁의 지친이었다. 중궁을 친손녀처럼 키웠고, 중궁에게도 친조부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자신더러 중궁이 관장하는 장고의 뒷담을 넘으라니? 김석주가 하는 짓이 해괴하고 괴이했다.


"후회하실텐데요."


김석주의 짤막한 한마디가 또 다시 장고 돌담에서 흘러나왔다. 김익훈은 그 음성을 들을수록 온몸의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편비를 돌아보았다. 편비는 이미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건지, 보는 눈이 없나 사방을 돌아보는 참이었다.


"..."


김익훈은 거친 들숨소리를 내고선 민첩하게 담장마루로 올라섰다. 갓 환갑을 넘은 나이로나 붓대만 쥐는 문반 신분으로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동작이었다. 누가 보면 두눈을 의심할 정도로 유연하고 날렵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그다지 놀랄 것도 없는 듯이, 편비는 망을 보듯 주위를 돌아보기만 했다. 김익훈 역시 편비가 제대로 망을 보겠거니 믿는 건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침 없이 담벼락을 타고 올라 담장마루로 올라섰다.


"역시...무예도 탁월하셔라."


턱밑을 파고드는 듯한 김석주의 감탄사에 괜스레 소름이 끼쳤다. 김익훈은 하마터면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그대로 담장 아래로 추락할 뻔 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는 담장마루를 단단히 짚으면서 담장 밑을 내려다 보았다.


해 질 녘의 붉은 석양이 장고 안을 속속들이 비추었다. 맨위 기단에 선 사내의 옆얼굴은 세상의 모든 빛마저 삼켜버릴 듯이 마냥 검었다. 사내는 앞에 놓인 수십개의 오지독을 태평하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김석주...


김익훈은 또 한번 눈시울을 움찔했다. 저 팽만한 체구에 꿍쳐둔 꿍꿍이가 왠지 두려웠다. 헌데 그가 쓰다듬는 오지독의 운두로, 웬 아이의 고개가 비죽 솟은 상태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거요?"


김익훈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따져 물었다. 검은 오지독 운두로 쑥 삐쳐나온 아이의 얼굴이 검붉게 보였다. 살았을까, 죽었을까. 그나마 평온하게 잠든 얼굴이었다.


중궁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식에도 애써 찾지 않으려 했었다. 헌데 김석주가 보내온 편비를 따라서 이리로 왔더니, 계집아이 하나가 오지독에 갇혀 있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오지독은 숨구멍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여, 저 안에선 온갖 종류의 게들은 물론 사람도 질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오지독에 이도 덜 났을 법한 어린 계집을 가둬두다니.


"어허...소리를 낮추시지요."


김석주는 뒷짐을 진채로 고개를 살짝 돌리고 김익훈을 향해 씨익 웃었다. 검은 낯빛에 허연 이를 드러내고 웃으니, 보는 사람은 어깻죽지에 소름이 돋을 판이었다.


"허!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하고도..."


격분하는 김익훈의 얼굴을 빤히 보면서, 김석주는 오히려 기가 차다는 듯 피식 웃었다.


"천인공노? 천인공노? 허!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뭐?"

"애 얼굴이나 똑바로 보시지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지 않습니까?"


김석주의 비웃음에, 김익훈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졌다. 붉은 노을 탓일까. 그는 아이의 얼굴을 미처 제대로 보질 못했다. 헌데 지금 김석주가 자신을 협박하듯 하는 말이 요상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니.


그는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노을빛에 아이의 얼굴도 불그스름하였지만, 김석주의 말마따나 어쩐지 눈에 익었다. 한번도 이 아이를 직접 본 기억이 없는데도.


"무슨..."


설마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삼키고서, 김익훈은 경계어린 눈빛으로 김석주를 쳐다보았다.


"이리 내려와서 한번 잘 보시지요. 어디서 많이 보셨을 터인데...?"


김익훈은 차마 담장 아래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질 않았다. 한적한 곳이라 내관이나 궁인의 눈에 띌 위험은 적지만, 그래도 언제까지나 담장마루 위에 걸터앉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도, 내려가서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게 더럭 겁이 났다. 차라리 이 아래 장고바닥에 수천수만의 칼자루가 있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만 같았다.


"내 아는 사람의 아이요?"

"글쎄...보면 아실 것을."


김석주는 김익훈의 애를 살살 태우면서, 계속해서 독촉했다. 뱀의 혀끝처럼 낼름거면서 김익훈의 귓볼을 휘감는 듯 했다.


"광산김문의 피가 흐르는 얼굴 같지 않소이까."


김익훈은 온몸의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뜻모를 말을 하는 김석주의 얼굴을 들여다 보니 동공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광산김문의 피가 흐르는 아이라니.


"광김의 후예다?"


김익훈은 놀뭔가 이상한 느낌에 김석주를 돌아보다가 온몸이 오싹해졌다. 자신을 보는 김석주의 눈빛이 먹이 앞에 발톱을 드러낸 맹수의 것인 양 번들거렸다. 마주치는 것 만으로도 자신이 그 먹이가 된 것처럼 기분이 나빴다.


"왜 이런 얘길 나한테..."

"광산김문 사람이니까요."


경직된 목소리로 묻는 김익훈을 똑바로 쳐다보며 김석주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눈꼬리에 묻어나는 웃음을 보려니, 김익훈은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광..."

"그 아이의 아비를 찾아드릴테니...늘 전하를 위해 노심초사 하시는 우리 대비마마께 한손 거들어주시지요."

"한손...거들라?"

"한성부 우윤右尹(종2품직)이시니...큰힘이 되어드릴 수 있으십니다."


김석주가 웃었다. 눈꼬리며, 눈머리까지 온통 주름이 패여, 눈시울에 눈동자가 파묻힐 만큼 진하게 웃었다. 어떤 눈빛인지 김익훈은 알 수 없었다. 그 저의를 모르니 그저 답답하여, 김익훈은 미간을 찌푸리고 김석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 힘이 필요하다?"


무슨 수작일까. 김익훈은 미간을 실룩였다. 이 아이의 생부가 누군지, 이미 알고서 김익훈 자신의 숨통을 잡고 쥐고 흔들려는 건지, 아니면 아직 모르고서 자신을 떠보는 건지, 김석주의 진한 눈웃음이 어쩐지 거북했다.


"열서너살 된 노비아이 하나만 궐을 빠져나가게 해주면 됩니다. 나중에요."

"무슨..."

"서로 돕고 사는 게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열서너살 된 노비아이만 빼돌리는 일이라면야...김익훈으로선 식은죽 먹기였다. 김석주의 주변에도 궁녀나 관기를 건드려 아이까지 낳은 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지 몰라도 그 아이를 빼돌리는 척 하며 뒷조사를 해서 역으로 김석주의 숨통을 죄면 그만이었다. 김익훈은 딴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마주 웃었다.


"그렇긴 하지요."

"흠..."


김익훈을 보는 김석주의 입매가 슬며시 뒤틀렸다. 하지만 그 눈매는 미동이 없었다. 아주 잠깐, 그 칠흑같은 눈동자에 깊은 동공이 요동칠 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고서, 먹이 앞에 발톱을 숨기듯이, 김석주는 눈에 아무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허면 이 아이의 뒷처리를 제게 맡기고, 이만 물러가시지요."

"부원군 대감께?"

"제가 이 아이를 데려가야 중궁전하께오서도 마음이 놓이실 것입니다."

"..."


김익훈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달싹였다. 구렁이 수천은 족히 삶아먹었을 법한 김석주가 데려가야 중궁전하가 안심할 거라니? 진심으로 말하는 건지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괜히 김석주를 긁을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긁을 자신도 없었다.


"오랜만에 중궁전하를 뵐 핑계 하나쯤 나도 있어야겠소만..."

"아...직접 데려가시게요?"


김석주가 야릇한 눈빛으로 김익훈을 돌아보았다. 여태껏 한번도 중궁전에 걸음하지 않았던 김익훈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알기로는 김익훈은 통명전 근처로는 얼씬도 하질 않았다. 중궁이 통명전의 주인이 된 후로는, 또 이 아해가 통명전의 사람이 된 후로는.


"아니 됩니까?"

"아니...아니 된다기 보다는..."

"병판대감보다는 제가 이 아해를 데려가야 전하께오서 마음이 놓이실 것입니다. 병판대감도 피한방울 안 섞인 외간사내가 아닙니까."

"그..."


김석주의 미간이 실룩였다. 김익훈이 데려가면 남의 눈이 무서워서 중궁이 불안해 할 거라고 자신이 은근히 꼬집어 주었더니, 김익훈 역시 왕이 불안해 할 거라며 되받아치는 꼬라지라니. 분하지만 반박할 건덕지가 없는 게 문제였다. 중궁에 대한 왕의 집착은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허면 어디 데려가 보시지요."


김석주는 턱짓으로 우희를 가리켰다. 여태 예의를 차려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중궁의 친정어른이라서였다. 품계로는 자신보다 아래인 김익훈을 대접해주는 것도 여기까지였다. 어차피 중궁의 명줄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허면..."


김익훈은 김석주에게 고개숙여 고마움을 표하고서 장고 맨 위의 기단基壇으로 올라가서 우희를 오지독 틈새에서 끌어당겼다. 아이가 두눈을 감은 채로 움찔하는 것이 곁눈으로 들어왔다. 김익훈은 흠칫 놀라 우희를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흐트러지는 것을 김익훈은 놓치질 않았다.


깨어 있구나?


김익훈의 눈시울이 실룩였다. 눈동자가 자신도 모르게 흔들렸다. 김석주가 눈치챌까 두려웠다. 이 아이가 자신들의 대화를 듣고 하나라도 알아챌 리는 없었지만, 자신과 김석주가 모종의 밀약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 만으로도 김석주의 표적이 될 법 했다.


그는 김석주가 알아챌 세라, 김석주의 시선을 등지고 우희를 안아들었다. 오지독 사이로 한발 내딛는데, 뚜껑에 허벅지를 찧이고도 내색조차 못하고서, 숨죽이고 담벼락 아래로 다가갔다. 김석주의 시선이 닿지 않도록 우희의 고개를 자신의 어깨로 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김석주는 김익훈이 우희를 담장마루에 눕혔다가, 다시 조심스레 둘러업고 담장 밑으로 뛰어내릴 때까지, 그들을 못 본 척 손을 뻗어, 우희가 있었던 자리의 오지독 뚜껑들을 만지작거리는 참이었다. 손끝에 모서리가 닿았을 뿐인데, 그의 입가에 기묘한 웃음이 스쳤다. 실은 모서리에 손끝이 닿았을 뿐이었다. 오지독의 번들번들한 운두에 비친 것은 그 등뒤에 찬 칼자루였다.


"어린 것이 깜찍하기는."


김석주는 오지독의 매끈한 표면을 거울삼아 여태 우희의 모습을 지켜본 탓에, 어린 계집이 이미 의식을 찾고서 자신과 김익훈 모르게 대화를 엿듣던 것도 놓치지 않았다. 모르는 척 하자니, 아이가 하는 짓이 너무 맹랑해서 참느라고 혼났다.


그 쥐방울 같은 것을 어쩐다...석주는 짜증스레 눈우물을 새끼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자신들의 대화를 엿들어봤자...얼마나 알아듣겠냐마는...또 그 내용을 제 상전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고해봤자...그 자리에 없었던 중궁이 얼마나 알아채겠냐마는...그래도 찜찜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우희가 쓰러져 있던 오지독 바로 옆 오지독에서 기척조차 내지 않고 숨어있었던 듯...

정영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조심스레 물어왔다. 석주는 나른한 눈빛으로 정영을 돌아보곤 눈우물을 긁적이던 새끼손가락을 멈추었다.


"뭐...중궁에겐 이미 시간이 없잖으냐. 사람이 곧 시간이니."


김석주의 음성은 얼음장처럼 싸늘했다. 그는 차디찬 눈길로 장고 안을 둘러보았다. 장고를 잠궈 놓는다고, 자신들이 여기로 못 들어오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자신들이 장고를 범했는데도, 찍소리도 못하고서 그 어린 것만 데리고 자리를 뜬 김익훈이 그 증거였다. 장고 안을 천천히 돌아보는 김석주의 검은 얼굴에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웃음이 어렸다.



우희를 둘러업은 채로 담장에 기대어 선 김익훈의 얼굴이 연기에 질식한 사람처럼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김석주의 득의에 찬 웃음소리가 고막을 들쑤시는 참이었다. 못 들은 척 참으려니 속이 뒤틀렸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두눈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김석주 밖에 보질 못했지만, 자신의 눈길이 미치지 못한 어딘가에서 그 심복이 잠복해 있을 것만 같아 겁도 났다.


"갔습니다. 저쪽으로."


김익훈이 장고에서 나오자마자, 편비가 바람같이 담장마루로 올라가서 망을 보다가 반대편 담장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김익훈은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꽉 막힌 숨통이 겨우 트이는 기분이었다.


실핏줄이 도드라진 두눈으로, 그는 고개를 돌려서 우희를 돌아보았다. 좀전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김석주의 웃음소리를 그저 듣기만 한 탓인지, 그의 눈자위는 온통 시뻘겋게 충혈된 상태였다.


"갔다."


우희를 내려다 보며, 김익훈은 무뚝뚝히 말했다. 아이가 꼭 감은 두눈을 움찔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가슴 한켠 뭉클했다. 겁먹지 말라고, 마음편히 있으라고 말해주고 싶어졌다.


"..."


김익훈의 귀설은 목소리에, 온신경이 쭈뼛 섰는지,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속눈썹이 꿈틀했다. 아무리 못 본 척, 못 들은 척 두눈 딱 감고 자리를 모면하려 해도, 어린애는 역시 어린애였다.


"갔대도."


김익훈은 더욱 거칠어진 말투로 말했다. 둘러업은 아이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말투나 눈빛을 누그러뜨릴 수가 없었다. 고작 눈시울을 꿈틀하는 것이 전부였다.


"갔다니깐."


짜증스레 말하는데, 아이의 눈두덩이 대번에 벌개졌다. 김익훈은 헛숨을 들이키고 아이를 보았다. 눈두덩만 벌건가 싶었더니, 눈시울도 벌갰다. 벌써 아이는 닭똥 같은 눈물이 눈시울 가득 고여선 젖은 눈망울로 자신을 보는 참이었다.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잔뜩 겁에 질려서.


"사...살려주세요."


우희는 겁에 질려 더듬더듬 울먹였다. 자신을 장고에서 데리고 나온 이 눈앞의 무관은 장고에서 김석주와 뭔가 일을 꾸미던 사람이었다. 그 사실 만으로도 우희에겐 충분히 위험인물이었다. 아무리 어려서 철 모르는 우희라 해도, 그 정도 알아들을 눈치코치는 있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네?"

"중궁전하의 숙조...할애비뻘이다. 널 해칠 리가 있겠느냐."

"..."


안심시키려고 꺼낸 말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말투에 날이 섰다. 아이를 겁주려는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겁을 먹은 아이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욱해서 이 모양이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가 울먹이는 모습을 보니 후회가 되었다.


"정말요?"


우희는 경계를 조금 풀고서 김익훈에게 어색히 되물었다. 이 수염이 희끗한 무관에게 병판대감이 광산김문 사람이라 말하는 것을 우희 자신도 들었다. 스스로 할애비뻘이라 말하는 것도 들었고, 차림새도 꽤나 높은 사람처럼 보였다. 중궁전하의 숙조...라고 말을 하다 말았으니 숙조부쯤...게다가 중궁전하께는 조부님이 안 계시니, 친할애비나 다름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통명전에서 중궁전하를 모신 지 5년은 되었는데도 그동안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사람이었다.


"왜 그동안 안 오셨어요?"

"뭐?"


김익훈은 자신도 모르게 뜨끔해서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뭘 알고 자신에게 묻는 건지 뜨악해서 눈을 쳐다보는 것도 사실은 겁이 났다. 아이가 커다란 눈망울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니, 더 시선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이 어린 것이 남의 눈속까지 읽어낼 재간은 없는데도.


"첨 뵙는 분이라서요. 광산김문 사람들은 다 뵈었는데..."


우희가 두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을 쳐다보니, 김익훈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움찔했다. 어린 것의 맑은 눈망울에 자신이 비치는데, 괜히 눈앞이 아찔했다. 겁이 났다. 아이의 눈을 마주 대할 자신이 없었다. 괜히 켕겨서 아이의 질문을 똑바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랬...나..."

"예...가까운 친척분들은 모두 다녀가셨는데...영감나리는 첨 뵈요..."


우희가 자신의 안색과 복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하는 말에 김익훈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네가 여기 있었으면 얼마나 있었고, 중궁을 모셨으면 얼마나 모셨냐고 반박하는 것도 잊었다. 이미 우희가 중궁의 곁에 오랫동안 붙어 있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탓이었다.


"왜 안 오셨는데요?"

"도성 밖에 나가 있었다."


우희가 재차 묻자, 김익훈은 목이 꽉 막힌 채로 겨우 목소리를 내어 대꾸했다.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는지, 아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김익훈을 쳐다보았다.


"도성 밖...거짓말..."

"뭐?"

"아까는 한성부 우윤(右尹 종2품직)이라고."

"그..."

"여기 한성부의 머리인 판윤, 그 오른팔이잖아요."


우희가 왼손을 들어 붓끝처럼 모아보이고선, 한획한획 긋듯 자신의 머리를 왼손으로 짚어보이고선 이내 오른팔꿈치를 꼭 붙들어 보이며 반박했다.


"근데 왜 도성 밖이라고 하시어요? 도성 안인데요?"

"썩을..."


김익훈은 아이의 기억력에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다가 멈칫했다. 자신의 말을 곱씹는 아이 목소리가 들린 탓이었다.


"썩을?"


아이의 눈높이는 고작 자신의 등허리였다. 그 낮은 눈높이로 자신을 올려다 보는 아이의 뜨악한 눈길이 자신의 머리로 떨어지는 도끼질 같이 그냥 무서웠다. 그 눈길에 자꾸만 무릎에 힘이 빠지는 자신의 꼬락서니도 마냥 우스웠다.


"써...글...자로 써보란 얘기다."

"네?"

"써보거라. 네 이름..."


김익훈은 자신의 욕지거리를 수습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아이한테 욕설을 쓴 자신을 들키고 싶진 않은 건지, 어떻게든 둘러대는 참이었다. 그런 김익훈의 모습이 어색해 보였는지, 우희는 반항조로 대꾸했다.


"왜요?"

"그냥, 써 보란 말이다. 네 이름."

"제 이름은 왜요?"


자꾸 되묻기만 하는 우희를 보는 김익훈의 두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제 처음 만난 아이의 맹랑함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발치가 온통 불바다처럼 뜨겁고도 따가웠다.


"얼마나 똑똑한가...보려고 그런다."


입김도 떨리고, 수염도 떨렸다. 김익훈은 우희를 보면서 온몸을 휘감는 격동에 당황했다. 아까부터 자신은 자꾸만 이 아이 앞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부관의 눈치를 살폈다. 어느틈에 부관은 서너발짝 떨어져서 의아한 눈길로 자신을 지켜보는 참이었다.


"써...보거라."

"제 이름은..."


자꾸만 이름을 써보라고 보채는 김익훈의 태도가 미심쩍어서, 우희는 살짝 인상을 썼다. 궁에서 몇년 지내다 보니, 누가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는 게 그리 좋은 일 만은 아니란 사실을 어린 우희도 익히 알았다.


"소녀는 잘못한 게 없사옵니다."


갑자기 또 예를 차리고 당돌하게 말하는 우희의 모습에 김익훈은 눈시울을 실룩였다.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아마 자신이 이 아이를 다시 만날 일은 두번 다시 없을 터였다. 다시 만나선 안되었다. 애써 아이에게서 눈길을 피하면서, 속으로 마음을 다잡는 김익훈의 곁눈에 아이가 자신의 발치에 웅크려선 부러진 나뭇가지 끝으로 흙바닥에 글씨를 쓰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崔..禺..莃..


김익훈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움찔했다. 김金씨로 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최崔씨로 써서 더더욱 다행이었다. 하지만 눈시울을 실룩이며, 김익훈은 자신도 모르게 목화 신은 앞발로 초두머리艹를 밟아 뭉개버렸다.


"어?"


우희는 자기의 이름이 짓이겨지자, 어린 마음에 놀랍고 화나서 고개를 쳐들었다. 아무리 자신이 천한 궁녀라지만, 이름을 함부로 발로 뭉개니 화가 치밀었다.


"무슨 짓이세요?"

"뭘 말이냐?"

"제 이름요. 어찌 발로..."

"아, 미안하다. 내 잠시 딴 생각을 하다..."

"아무리 소녀가 천한 궁녀라 한들...사람의 이름이온데..."

"미안하구나."

"미안하면 다여요?"

"아...내 고쳐주마."


김익훈은 허리 뒤로 늘어뜨린 환도를 잡아당겼다. 워낙 투박한 손놀림에 띠돈을 꿰찬 끈목이 뜯어지는 것도 모르고서, 그는 환도를 감싼 검집 끝으로 글자를 새겼다. 자신이 초두머리艹를 지워버린 바랄희希자가 아닌 원숭이우禺자 위로.


"어? 일만만萬인데?"


우희는 두눈을 뎅그랗게 뜨고 고개를 젖혀서 김익훈을 올려다 보았다. 커다란 눈망울에 반항심이 솟구쳤다.


"요기 아니라 조기에요."


원숭이우禺자가 아니라 바랄희希자를 손가락 끝으로 콕콕 가리키며, 우희가 볼멘소리로 불퉁하게 말했다. 눈앞의 무관을 노려보느라 속눈썹마저 빳빳하게 곤두섰다. 그 속눈썹에 두눈이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김익훈은 또 다시 눈시울을 움찔했다.


"조기, 요기라구요. 제대로 쓰셔야지요."


우희가 손가락을 옮겨서 바랄희希자 위를 재차 콕콕 찔러보였다. 눈빛도 당돌했다. 김익훈은 또 눈시울을 움찔하면서도 그대로 환도를 도로 띠돈에 걸려 했다. 이미 뜯어진 끈목에 환도가 그대로 미끄러져 툭 허벅지를 쳤다. 김익훈은 콧잔등을 찡그리면서도 발치로 떨어지는 환도를 허둥지둥 받아들었다. 얼른 환도를 끼울 띠돈을 찾아 등허리를 더듬으면서 또 우희의 눈치를 보았다. 한심했다. 이 아이 앞에 왜 이리 못난 꼴만 보이는지.


"최우희거나, 김만희거나."

"예?"

"네 이름의 우자는 꼬리가 긴 성성猩猩이를 말한다. 원숭이 주제에 사람의 얼굴을 하고, 사람의 흉내를 내는 놈이지."

"잰납이...말이옵니까?"

"잰납이? 잔나비 말인가?"

"그건가...사람의 얼굴을 가졌다 하시어...그게...저기 절에선 잰납이라 불렀거든요."


우희의 말에 김익훈은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게다."

"제가...원숭이란 말씀이시옵니까?"

"숲으로 돌아갈 희망이 없으니..."

"예?"


우희는 김익훈의 알쏭달쏭 헷갈리는 설명을 알아듣지 못하고 두눈을 말똥말똥 뜨고 쳐다봤다. 이 사람은 누구기에 생면부지인 우희 자신의 이름을 설명하는 걸까. 어떻게 알고서? 그나저나, 숲으로 돌아갈 희망은 또 무슨 뜻일까.


"제가 궁녀라서 밖으로 나갈 희망이 없단 말씀이시어요?"

"..."


김익훈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침묵했다. 우희를 보는 눈빛이 아릿했다. 궁녀를 건드린 대가가, 궁녀가 된 아이를 보는 것이려나. 평생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아이를 보는 기분이 너무도 이상했다.


"우세요?"

"뭐?"

"지금 우시잖아요."

"내가 언제..."

"지금요."


우희는 손을 뻗어 김익훈의 눈가를 가리켰다. 김익훈이 어깨를 뒤로 젖히며 우희를 쳐다보니, 우희의 손가락도 끈질기게 따라갔다.


"뭐, 뭐야?"


김익훈은 자신도 모르게 질겁하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가뜩이나 작은 아이였다. 오그리고 앉았으니 손을 뻗어봤자였다. 그 손끝이 무릎께나 닿을까나. 하지만 아이의 손끝이 무릎에 닿자마자, 김익훈은 자신도 모르게 그대로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어? 괜찮으세요?"


우희는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상대는 펄쩍 뛰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어버렸다. 오지 말란 말을 하고 싶은 지, 오른손은 뒤로 땅을 짚고도 왼손을 뻗어서 손을 내젓는 참이었다.


"오..."

"네?"


차마 오지 말란 말은 못하겠는지 김익훈이 입술만 달싹이는 꼴을 보고, 우희는 인상을 썼다. 혹시나 싶어서 일부러 한발 두발 다가가니, 상대는 엉덩걸음까지 하며 뒤로 빼는 참이었다.


"저 무서우세요?"

"뭐? 무슨..."

"근데 왜 자꾸 뒤로 가시어요?"

"내, 내가 언제...너 아주 이상한 아이구나! 어딜 어른한테 그딴 소릴...어른이 아이를 겁내다니! 네가 뭐라고! 네가 뭐라고!"


김익훈은 얼굴이 벌개져서 버럭 소리쳤다. 악을 쓰는 자신의 얼굴 따윈 보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초면에 이 아이 앞에서 자꾸 못난 꼴만 보이게 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 눈에도 자신이 이상하니, 자기가 이상한 것을, 왜 도리어 아이더러 이상하다고 덤터기를 씌우게 되는 건지.


"저 이상해요?"

"뭐?"

"괜찮아요.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괜찮...? 뭐가 괜찮다는 게냐?""


김익훈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우희의 태도에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자신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가 나왔다. 괜히 더운 입김이며 콧김까지 내뿜었다. 어린 것과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자꾸만 낭패인 기분이 되는 것이, 차라리 입을 꾹 다물어야지 싶다가도, 지금은 머릿속이 온통 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 안이었다.


"저 이상하대요."

"이상? 네가?"


방금 자신의 입으로 이상한 아이라고 욕하고도, 김익훈은 욱해버렸다. 그는 양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눈! 코! 입! 다 똑바로 달렸구만!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좀전엔 저더러 이상하다고..."

"내가 언제!"

"방금요."

"그거야 말이 헛나온 거고...누가 너 보고...!"


김익훈이 계속해서 흥분조로 소리치자, 편비가 한발짝 떨어져서 지켜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참견했다.


"저, 영감...목소리가 너무 크십..."

"뭐 임마?"

"그게...언성 좀..."


편비가 주의를 주자, 김익훈은 흠칫하여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보는 눈이 없었다. 적어도 담장으로 가로막힌 여기 장고 뒤켠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듣는 귀가 있었는지, 자신이 낸 기척을 찾아서 궁인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어?"

"왜 그러느냐?"

"방금 이상한 소리가..."

"무슨 이상한 소리?"

"에? 그게 잘..."

"볼꼴 못 볼꼴 다 보는 곳이 여기 궐이니...냅두거라."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궁녀를 겁박하는..."

"쉿. 껴들면 우리만 다쳐."

"네?"

"쉿. 쉿."


궁인들의 대화가 점점 잠잠해졌다.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만 할 뿐 애써 이쪽으로 와볼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김익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우희와 자신을 돌아보았다. 얄궂은 눈빛이 되어 자신을 빤히 보는 아이의 눈길에 괜히 무안해졌다.


새파란 생각시를 데리고 장고 뒷켠에서 큰소리로 윽박지르는 모양새였다. 누가 봐도 수상한 광경이었다. 아이 신분 자체가 저자거리의 아이가 아니라,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구중궁궐의 생각시라는 게 문제였다. 더군다나 중궁전하의 측근이라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일단 이 아이를 데리고 여기 장고 뒤켠을 벗어나야 했다. 지금 당장.


김익훈이 우희를 데리고 통명전 동협문으로 들어서니,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나인들의 처소마다 방문이 한뼘 만큼 벌어진 것이 이상했다. 궁녀들과 상궁들이 저마다 맞은편 통명전 쪽을 훔쳐보거나 각자 옆방 대화를 엿들으며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양이었다.


김익훈은 발 뒤꿈치도 떼지 않고 대충 뒤를 돌아보는 시늉을 했다. 몇몇 나인들이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다가 옴칠 움츠리는 기척들이 느껴졌다. 김익훈이 인상을 쓰는데, 코끝에 약탕 냄새가 희미하게 닿았다.


"어? 어의영감 오셨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우희가 냉큼 통명전 마당을 가로질러 월대 서쪽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올라갔다. 김익훈은 우희를 데려왔다고 설명할 겨를도 없이 통명전으로 달려가버리는 우희의 돌발행동에 당황하진 않았다. 그저 협문으로 들어섰을 뿐인데 벌써부터 여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서 괜히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 걸음 참 빠르네요."

"그런가?"


김익훈의 등뒤에서 편비가 우희의 걸음에 감탄했다. 김익훈은 귀가 솔깃해져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런 김익훈을 보는 편비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이 판국에 웃음이 나오셔?


편비는 기가 막힌 얼굴이 되어 곁눈으로 김익훈을 흘겨보았다. 방금 아이 칭찬을 한 이유는 김익훈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아이와는 무슨 관계인지, 아이에게 어떤 자세인지 알고 싶었다. 아까 장고 뒤편에서 아이에게 쩔쩔매던 김익훈의 태도가 너무 이상했던 탓이었다. 저 작은 아이 앞에서 더 작아지는 김익훈의 모습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수상쩍기도 했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잊을다.

와얏놈의 아들인지 진흙에 뽐내듯이

야서놈의 영식인지 꾹꾹이 뒤지듯이

사공놈의 장남인지 삿대로 찌르듯이...


노랫가락은 대낮에는 차마 듣지 못할 만큼 낯뜨거웠다. 아무리 궁녀를 겁간하고 역적의 첩을 취한 파렴치한이라 해도. 김익훈은 듣다 못해 두눈을 흘겼다.


"거 노래가 왜 이리 음란한가...?"

"네? 음란?"

"궁녀들 앞일세. 그 주둥이는 좀 붙이고 있게나..."

"앞이 아니면 뒤에 붙이면 됩니까?"

"뭐?"

"궁녀들 앞이 아니면 뒤면, 그럼 궁둥인데...제 주둥이를..."


금세라도 목을 조를 듯이 김익훈의 시선이 험악한데, 편비는 계속해서 농으로 눙치려 들었다. 그 느물느물한 혀끝에 김익훈은 괜히 속이 느글느글해지는 것만 같았다.


"허면 그 주둥이를 내 몽둥이로 뽀솨줄까?"


김익훈은 버럭 짜증을 냈다. 눈초리가 사나웠다. 편비는 움찔해선 목을 움츠리곤 우희의 뒤꽁무니를 찾아서 힐끔 눈길을 돌렸다. 어찌나 날랜지, 다람쥐처럼 통명전 월대로 뛰어올라가는 참이었다. 마침 물항아리를 안아들고 우물가쪽에서 월대로 올라오던 본방나인 한명이 뜨악한 눈초리로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어딜 갔다 이제 와!"

"중전마마는요?"

"대답은 않고!"

"중전마마는요?"

"안 좋으셔."

"어뜨케..."


우희는 헐레벌떡 운혜를 벗고 대청으로 뛰어올랐다. 통명전 마당에서 월대로, 다시 대청으로 쏙 들어가버리는 모습이 한마리의 날다람쥐 같았다. 편비는 김익훈을 따라서 통명전 월대로 향하며 우희가 쏙 들어가버린 통명전 대청을 쳐다보았다.


저 조무래기 하나로 김석주가 김익훈을 겁박했다. 저 생각시가 뭐기에? 김익훈도 뭔가 꿍꿍이를 감추고 김석주와 손을 잡는 눈치였다. 그래서 더 저 아이의 정체가 궁금했다.


궐에 들어오는 궁녀들 대부분은 출신이 천하디 천한 공노비였다. 하지만, 궁녀들끼리도 엄연히 귀천이 있고 가업이 있어서, 대대로 궁녀를 배출한 집안에서 조카나 누이 등을 또 데려오는 식이었다. 특히나 왕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될 수도 있는 자리인 삼방, 즉 지밀, 침방, 수방의 나인들은 중인가문에서 선별해서 데려오는 식인 만큼...저 아이도 누군가가 은밀하게 심어놓은 아이라면?


주인을 무는 개가 되긴 싫지만, 주인에게 짖어대는 개는 되고 싶었다. 그냥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주인을 물지는 않더라도, 주인에게 짖어대는 개를 보면, 최소한 다른 개들이 뒤따르긴 하니까.


그렇게 흉금을 품고서 편비는 김익훈을 뒤따라 조용히 월대로 올랐다. 생각시가 좌측 섬돌 아래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쪽빛 흑혜를 보며, 김익훈이 혀를 차는 것도 지켜보면서.


"이게 신이야?"

"에?"


편비는 김익훈의 뒤에서 흘낏 시선을 비껴서 낡은 흑혜를 내려다 보았다. 앞코가 구름문양으로 장식이 되었는데, 너무도 볼품 없이 닳아 있었다. 순식간에 거칠어진 김익훈의 목소리에, 우희를 데리고 도로 대청으로 나온 봉이가 놀라서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여기가 어디라고..."

"이것이..."


김익훈이 두눈을 부랴리자, 봉이는 더 기가 막혀서 파르르 치를 떨었다.


"이것이? 당장 여기서 나가세요! 당장!"

"저..."


옆에 있던 우희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치맛자락을 잡아당겼지만, 봉이는 흥분한 나머지 우희의 고사리 같은 손을 대충 잡아뗐다.


"놔 봐!"

"저분..."

"놔 보라고...아니...여긴 아무나 들어오는 곳이 아닌데...어찌...양화당으로 가실 거면 저쪽이구요. 아니 아무리 시뻘건 관복을 입으셨어도 그렇지...어찌..."

"네 그새 내 얼굴을 잊어먹은 게냐?"


봉이가 계속해서 횡설수설 쫑알대자 김익훈이 어이없는 웃음으로 대꾸했다. 봉이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미간을 찡그렸다.


"네?"

"기억력이 나쁘구나. 우리 광산김문의 핏줄은 다들 기억력이 나쁘진 않은데...우리 핏줄이 아니구나."

"에?"


봉이는 다시 찬찬히 김익훈을 쳐다보았다. 이상하게 낯이 너무 익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물끄러미 쳐다보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중궁을 따라 입궁하기 전만 해도 어릴 적 호현방 시절 외별채에서 아침저녁으로 뵙던 얼굴이었다. 김익훈이 내전 출입을 끊은 탓에, 까마득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에...영감..."


봉이의 날선 눈초리가 누그러졌다. 대번에 등줄기도 움츠려졌다.


"광산김씨성을 받은 것이...어찌?"


이제야 알아보다니. 김익훈은 기가 차서 혀를 찼다. 봉이의 얼굴이 더욱 벌겋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중궁을 따라 교전비로 여기 들어온 이유도 자신의 출신 탓이었다. 자신의 생부는 김익훈의 편비였다. 그 편비 역시 광산김문의 서자였으니, 온전하진 않긴 해도, 광산김문의 혈통을 물려받은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봉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다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어서 더 잊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선지 더 김익훈 앞에서 목소리가 작아졌다.


"어?"


우희는 놀란 얼굴로 봉이와 김익훈을 갈마보았다. 방금 자신 앞에서 마냥 쩔쩔매던 김익훈이 오히려 지금 나인 김가를 꾸짖는 참이었다. 너무도 기세등등하게.


"어르신은 뉘신데 감히 중궁전하의 시녀를 욕보이십니까?"

"뭐? 뭐라?"

"감히 중궁전하의 시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이는 하늘 아래 한분 뿐이시옵니다. 중궁전하의 아비도, 지아비도 아닌, 오직 중궁전하 본인 뿐이시옵니다. 이것이 궁중의 법도라, 그리 배웠나이다."


우희가 또박또박 발음하며 따지는 말에 김익훈은 할 말을 잃었다. 이제 열한살의 나이에 시뻘건 홍단령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에게 따지는 맹랑함이라니. 등뒤에서 편비놈이 또 키득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인상을 쓰며 뒤돌아보려는데, 대청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없이 젊은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상전하께서 계시니, 모두 월대 아래로 내려가...시오."


두광도 김익훈을 보고서 말투를 어색하게 고치는 참이었다. 김익훈이 놀란 눈빛으로 쳐다보니 두광은 의외란 눈빛으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영감께서도 일단 내려가시지요. 전하께오선 지금 아무도 월대로 들이길 원치 않으시옵니다."


김익훈은 되물을 듯 입술을 달싹이다 멈칫했다. 왕의 신경이 사납게 곤두선 모양이었다. 월대로도 발길 들이지 말라? 이상했다. 괜히 심장이 철렁해서 싸늘하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알겠네."


그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하곤 조용히 돌아섰다. 하지만 월대를 내려서는 순간 분주한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어명이라 이미 내전과 대전의 모든 궁녀와 내관들이 월대 밑으로 물러나는 참이었다. 그는 재빨리 통명전 서쪽 언덕을 살폈다. 저 언덕을 타고 뒤로 돌아가서 엿들으면 될 일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서, 편비를 흘낏 쳐다보았다. 편비 역시 김익훈이 너무 순순히 물러나서 내심 이상하다 여긴 탓인지, 제법 눈치를 보는 참이었다. 그는 왼눈꼬리를 문지르며 슬그머니 편비에게 눈짓을 보냈다.


"너는 물러가 있거라."

"예, 영감."


편비가 두말않고 물러갔다. 어디로 가겠다거나, 어디서 기다리겠다는 말도 없었다. 그래도 두광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얼른 물러가 주기만 바라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최근 몇년간 통명전을 찾지도 않은 김익훈을, 편비가 내전까지 따라온 일이 더 이상해서, 그가 물러가는 일은 이상하지도 않았다.


통상 문무관의 반종伴倘들은 주군이 계신 대내大內에는 머무르지 않고 궐문 밖에서 대기하는 법이었다. 반종까진 아니어도, 편비까지 데리고 김익훈이 내전까지 들어온 것 자체가 불경한 짓이었다. 그나마 김익훈이 중궁전의 친정사람이니 문제삼지 않는 것이었다.


아무도 엿듣는 일이 없도록, 두광은 월대에 서서 주변을 감시했다. 대전이며 중궁전 궁녀와 내관들은 누구 하나 월대에 발도 딛지 못하도록 할 태세였다. 그는 김익훈이 아직도 월대에 서 있자, 차갑게 쳐다보았다.


"안 내려가십니까?"

"중궁전하께 연통을 드리게."

"내려가서 기다리시지요."

"나도 말인가?"

"영감께오선 중전마마의 친정어른이기 이전에, 상감마마의 조정신하이십니다."


두광은 무뚝뚝히 대꾸했다. 김익훈은 낯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이 천한 내관이 자신의 신분을 논하는 참이었다. 중궁의 친인척이기 이전에 왕의 신하라는 사실이나 똑바로 알라고 훈계하는 것이었다. 괘씸했다. 그는 두광의 무례를 곱씹는 듯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래, 저 아래에서 기다림세."

"그러시..."

"허니, 연통은 꼭 드리게. 내가 상감마마의 조정신하이기 이전에, 중궁전하의 친정식구였다는 사실도, 잊지는 말고."

"..."


두광의 말허리를 자르고서, 김익훈은 한발한발 월대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두광의 눈초리가 사뭇 따가웠다. 두광은 자못 당찬 기세로 월대에 딱 버티고 서서 통명전 마당을 굽어보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 끝은, 서쪽 섬돌 밑에 어쩐지 흐트러진 한켤레의 목화에 꽂혔다.


- 쥐새끼 한마리 얼씬 못하도록 해라.


상전의 옥음은 몹시도 딱딱했다. 무덤을 지키는 석상의 표면 같았다. 그런 상전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백광현의 목소리는 죽을 날을 받아놓은 죄수처럼 덜덜했다. 지금 저기 동온돌 안에선 두광 자신마저 들어서는 안될 얘기가 오갈 터였다.


"그래서, 고칠 수 없다는 것인가?"


숙종은 서안 저편의 백광현을 텅빈 동공으로 바라보며, 착 가라앉은 옥음으로 물었다. 백광현은 서안 앞에 꿇어엎드린 채로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는 참이었다. 백광현은 그저 머리로 동온돌 바닥을 쿵 찧다시피 하여 울먹일 뿐이었다.


"두번 다시...회임을 하실 수가 어...없사옵니다."


숙종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백광현을 보는 두눈을 깜빡하지도 않았다. 누가 보면 피도 눈물도 없이, 그저 담담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흔들림 없이 백광현을 바라보는 숙종의 흰자위는 점차 시뻘겋게 실핏줄이 터지기 시작했다. 검은 눈동자도 점점 핏빛으로 물들었다. 숙종이 두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텅빈 동공으로 허공을 응시한 탓이었다.


중궁은 철모를 나이에 입궁했다. 하지만 사람의 도리를 알았다. 중궁 자신도 싫은 일은 아랫것들에게도 함부로 시키지 않았다. 그리 맑은 연꽃 같은 성품으로, 더러운 연못 안에서 썩어가는 물고기들을 한결같이 보듬었다. 헌데, 그런 그녀가 왜 이토록 모진 된서리를 맞아야 하는가. 하늘이 이상했다. 많이 이상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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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6.05.02 18:14
    No. 1

    정말 핏줄인가요? 우희한테 절절 매는군요. ㅎㅎ
    숙종 내외의 애달픔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듯하여 심난하네요.
    잘 봤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4 슬픈달님
    작성일
    16.05.15 02:25
    No. 2

    한 번은... 한 번쯤은... 속 시원히 중궁의 한과 괴로움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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