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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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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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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0.1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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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39쪽

해의 그림자 256

DUMMY

"밥!"

"밥!"


별장이 직접 군졸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밥상을 옥문 구멍으로 들였다. 정원로는 목에 칼을 차고 두손에 차꼬가 채워진 채로 벽에 기대어 고개를 떨구고 앉은 채로 밥상을 힘없이 거들떠 보았다. 소반 위에 덜렁 놓인 국밥 한그릇이 마뜩지가 않았다. 삼시세끼 고기반찬을 먹던 입이라선지, 고기 몇점에 파 몇점만 겨우 썰어넣은 국밥을 보니 군침은 커녕 쓴침만 입에 고였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정원로는 밥상 앞으로 어기적어기적 다가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이내 숟가락을 푼주에 넣어 휘저어 보니 닭다리살 한두점 보일락 말락 했다. 그나마 두부 부스러기라도 보이니 구색은 갖췄다고 해야 하나. 있지도 않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에이..."


차마 숟가락은 놓지 못하고서, 정원로는 숟가락 위의 닭다리살을 빤히 쳐다보았다. 거뭇한 빛깔이 실날처럼 군데군데 섞인 것이 괜히 찜찜했다. 숟가락을 도로 내리고서 다시 한술 뜨니 이번엔 콩알만한 두부 부스러기도 눈에 들어왔다.


정원로의 입가가 실룩였다. 뽀얀 닭국물에 보드라운 두부건더기라면, 연포갱이 분명했다. 두부가 워낙 손이 많이 가는 것이다 보니, 연포갱은 아무나 먹지도 못하는 음식이었다. 그런데 정원로 자신에겐 먹다 남은 연포갱 국물에 밥만 말아준 것 같기도 했다. 누가 먹던 건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드시지요..."


착각처럼 들린 공손한 목소리는 옆방에서 났다. 정원로는 귓불이 쭈뼛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옆방엔 누군가가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을까.


엊그제 정원로 자신이 보았던 형틀 장판의 핏자국이 뇌리를 스쳤다. 사촌형 조빈?


"형님! 형님! 계시우?"


정원로가 소리쳐 불렀지만, 안에선 아무 대답도 들리질 않았다. 분명히 숟가락 젓가락이 소반에 부딪혀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데도. 정원로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사촌형 조빈이 자신을 피하느라 대답도 않는 걸까.


아니다. 병조의 별장씩이나 되는 높은 무관이 고작 사촌형 조빈 따위한테 공손하게 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을 고변했다는 이원성? 그 썩을놈의 핏자국이던가? 아니, 무과에 급제하고도 출신으로 썩어가는 이원성 따위에겐 더더욱 공대를 할 리가 없었다. 방금 전에 자신에게 밥을 넣기 전에 앞서, '밥!'이라 소리쳤으니...앞방에 사촌형 조빈이든, 이원성이든 있을 터였다. 그리고 지금 저 뒷방엔 또 다른 누군가가...


"드시지요?"


부지런히 곱씹어보다가, 정원로는 두눈을 희뜩하게 떴다.


"신범화...그놈 시키!"


정원로는 숟가락을 도로 푼주에 쳐박아놓고서 상체를 뒤로 확 젖혔다. 자존심이 상했다. 신범화가 쓴 책자까지 자신이 공초에 밝혀놓았는데, 이런 극빈 대우가 다 뭐란 말인가. 연포갱까지 갖다바치면서 극진한 존대라니. 꼭 감옥에서 간수들의 시중을 드는 허견 같았다.


"이보시오! 책자는 찾았소? 이보시오! 책자요! 책자!"


정원로는 그대로 뒤로 벌러덩 누우며 목청 높여 소리를 질렀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 신범화가 쓴 책자가 있다고 밝혔는데, 저런 예우를 한다는 것은, 책자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은닉하였거나, 둘중 하나란 얘기였다.


"시끄럽게! 조용히 해!"

"아 책자 찾아냐니까!"


정원로는 이를 악물고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아예 굵은 나무 창살 앞으로 달려들어, 더욱 큰 목소리로 고함을 쳐댔다.


"책자 찾아냈냐니깐!"

"조용히 하래도!"

"책자! 책자 어쨌어!"


정원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자, 훈련원 별장은 짜증스레 어깨를 움칫하며 등뒤의 참군參軍들 셋을 돌아보았다.


"금부도사가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지 않았나?"

"예, 어디에도 없었답니다."


참군이 재빠르게 대답하자, 정원로는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말도 안돼...잘 찾아봐. 내 집에 있다니까."

"네 집?"


별장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정원로의 집? 금부도사가 책자를 찾아서 수색을 한 곳은 정원로의 집이 아니라 신범화의 집이었다. 어디서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걸까.


"네 집?"


한번 더 되묻는 별장의 모습을 나무창살 틈새로 보면서, 정원로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럼 어디를 갔다 왔다는..."


되묻다가 말고, 그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설마...정원로 자신의 집이 아니라, 신범화의 집에 가서 엄한 짓을 하다가 왔다는 얘긴지. 이건 말도 안되었다.


"신범화의 집엘 간 거야?"

"..."

"신범화의 집 맞아?"

"..."


정원로가 갈라진 목소리로 계속 다그쳐 묻자, 별장은 아무 대꾸도 하질 못했다. 그 모습에 정원로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말도 안돼. 난 분명히 내 집에 있다고 똑바로 적었는데..."

"..."

"내집에 있댔는데 어떻게 그놈집에...!"


정원로는 숟가락을 움켜쥔 채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비 맞은 중처럼 중얼중얼하는 정원로를 팔뚝 만한 나무창살 사이로 똑바로 응시하며, 훈련원 별장은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웃었다.


똑같은 죄인이라 해도, 병조의 번소番所인 여기 내병조에선, 똑같은 죄인이 아니었다. 신범화는 자그마치 병조의 수장인 김석주, 그분이 아끼는 이종아우의 신분이었다. 깨물어도 안 아프다는 다섯손가락 중 집게손가락...당연히 여기 내병조의 무인들은 수장인 김석주를 대하듯이 신범화를 떠받들어 모셔야만 했다. 그러니 자연히 신범화에게 불리한 증거 따위 찾아올 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차피 신범화가 아니었어도...저들은 제정신일 수 없었다.


내전자궁불호....


그렇게 엄청난 글귀를 공초에 적어놓았으니, 조정에서 잔뼈가 굵은 국청대신鞫廳大臣들이 모조리 넋이 빠져서 허둥지둥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정원로 이놈이 자초한 일이었다. 자업자득.


"가서 얼른 가져오라고...얼른...누가 빼가기 전에 얼른..."


정원로는 억울한 눈빛으로 별장에게 하소연을 하려다가, 그 뱀처럼 차가운 눈동자를 보고 또 한번 할 말을 잃었다. 저 별장 역시 결국은 김석주의 사람이었다. 저들이 실수로 잘못 찾아갔든, 고의로 갔든, 그 실수를 바로잡을 생각은 없을 터였다. 문랑인 심유라면 모를까. 하지만 심유 역시 결국은 한통속이려나.


잠시 정원로의 두눈에서 초점이 흩어지는 사이, 별장이 돌아서서 옥사를 벗어났다. 정원로는 옥사 밖을 돌아보곤 이내 허탈히 나무창살에 등허리를 기대면서 힘없이 주저앉았다. 듬성듬성 곰팡인지 먹뜸인지 모를 검은 얼룩들이 있는 짚자리에 덩그라니 놓인 국밥 그릇을 보니, 괜히 눈앞이 침침하고 컴컴해졌다.



"뭐야, 손도 안 댔잖아?"


군졸이 정원로의 감방에서 수거해온 밥상을 보고 훈련원 별장은 입가를 실룩였다. 건더기는 커녕 국물까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을 보니 기가 막혔다. 정원로 저자가 한입도 대질 않은 모양이었다.


"예, 그냥 버리게 생겼는데요."


수거해 온 군졸이 입맛을 쩝 다셨다. 죄수놈이 배가 불렀다. 흔히들 죄수들은 비린내 나는 멸칫국물에 밥만 말아서 옥문 구멍으로 넣어주는 정도였다. 옆에 갇힌 신범화 덕분에 그나마 닭국물이나 얻어먹게 되었으면 감지덕지하며 국물 한방울 남기지 않고 싹 비울 것이지...오히려 한 모금도 먹지 않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제가..."


먹어도 되냐고 별장에게 묻다 말고, 군사가 혀끝으로 살짝 아랫입술을 축였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상관은 별안간 칼날같은 눈초리로 군졸을 내려다보곤 그대로 팔로 푼주를 툭 쳤다.


"치워!"

"어..."


군졸은 눈앞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구는 푼주를 보고 두눈을 부릅떴다. 놋쇠 재질이라 바닥에 부딪혀 진동하는 소리도 요란했다. 출신이 천한 죄수들은 그냥 함지박에 담아서 주지만, 귀한 죄수들에겐 구리로 만든 푼주에 담아서 주기도 했다. 헌데 푼주에 담긴 닭국을 안 먹다니. 한술 더떠 저 닭국을 그냥 버리다니.


"어후, 이 아까운 걸!"


아까워서 자신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구르며, 군졸은 인상을 팍 쓰고 죄수와 상관을 갈마보았다. 하지만 그새 상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버렸다.


"에이...진짜...어떻게 사람 먹을 음식을 버려? 고깃살꺼정 있는 것을...천벌을 받을겨...피죽도 못 먹고 쫄쫄 굶어 배에 구메가 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군졸이 옆에서 궁시렁거리거나 말거나, 정원로는 땅바닥에 절반쯤 엎어진 푼주를 나무창살너머로 멍하니 내다보았다. 그의 두눈에서 초점이 흐릿해지다가 갑자기 세차게 흔들렸다.


설마...도, 독?


턱관절이 갑자기 시큰거렸지만, 정원로는 깨닫지 못했다. 엎어진 푼주에서 쏟아진 닭국물이, 옥사의 축대를 적시며 그밑 흙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모습에 괜히 소름이 끼쳤다.


정원로는 몸서리를 치며 옆에서 군졸이 궁시렁거리는대로, 정원로 자신이 거부한 저 닭젓국은 그래도 못 먹을 음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버리다니. 국에 독을 탄 게 분명했다.

사색이 되어서 정원로는 엉덩걸음으로 물러나며, 나무창살 너머로 훈련원 별장의 뒷모습을 보았다. 비스듬한 시각이라 옆얼굴이 보일락 말락 비쳤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낯짝으로, 정원로 자신을 곁눈으로 흘겨보고 가는 모습이었다.


날, 날....


정원로는 어깻죽지를 한차례 떨더니, 이내 사시나무처럼 계속 떨었다. 그의 눈동자도 두려움에 휩싸여 동공이 커진 채로 어지러이 흔들렸다. 터럭 같은 의심이 더럭 들어선, 순식간에 벼락같이 후려쳤다.


죽이려고?


어깻죽지가 움츠러들며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정원로는 미친 듯이 떨리는 어깻죽지를 힘껏 부여잡았다. 양손 엄지가락으로 자개미를 꾹 눌러도, 양손 새끼가락으로 팔꿈치를 꼭 받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검붉은 뱀이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자, 먹어."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군졸이 옥문 구멍으로 또 다시 푼주 한그릇을 내밀었다. 정원로는 반대편 벽에 등허리를 바짝 붙인 채로, 힘없이 옥문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나무창살에 바짝 달라붙은 군졸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희미한 윤곽으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까 별장을 따라왔던 군졸이었다. 그를 본 정원로의 두눈이 한순간 살기를 품고 번뜩였다.


"안 먹어."

"뭐?"


군졸은 귀를 의심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기도 모르게 왼눈이 꿈틀했다. 그는 시선을 내리고 옥문 구멍 밑을 흘끗 내려다 보았다. 함지박에 노란 빛이 감도는 국물이 밥과 함께 골막하게 담겨 있었다. 또 약간 검누르긴 해도 계란고명까지 둥둥 떠서.


좀전에 닭국물을 엎었으니 배를 곯을 게 뻔해서 특별히 신경써서 가져온 구메밥이었다. 닭국보단 한참 질이 떨어지는 멸치국이지만, 그래도 사람이 못 먹을 음식도 아니고, 옥바라지마저 금지된 대역죄인 주제에 고마운 줄도 모르고 안 먹겠다니.


"안 먹어! 안 먹어!"


정원로는 연달아 소리치곤 홱 고개를 돌렸다. 뭔가 울분이 복받쳐 올라서 저 구메밥을 거들떠 보기도 싫었다.


"뭐야..."


군졸은 뜨악한 얼굴로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옥문 구멍 아래로 밀어넣은 푼주를 보니 기가 막혔다. 그는 어이가 없어서 그저 짤막히 되물었다.


"안 먹어?"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쇳소리가 섞였다. 군졸은 정원로가 방금 자신과 구메밥을 보는 눈빛이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마치 못 먹을 걸 줬다는 듯이 쳐다볼 건 또 뭐람.


"아 진짜. 안 먹어."

"허. 미친놈. 싫음 마라!"


군졸은 정원로를 쏘아보고 분노가 끓는 목소리로 욕했다. 옆방 신범화와 대우가 다른 것만 봐도, 이 죄수는 목숨끈 떨어진 게 분명했다. 가문이 변변치 않거나, 출신이 온전치 않거나...둘 중 하나인 놈이었다. 그래서 더 같잖게 느껴졌다. 하긴 뭐 곧 죽을 놈이 밥은 먹어서 뭣하겠냐마는.


"다 지만 손해지."


한마디 더 궁시렁거리며, 군졸은 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는 정원로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저 군사가 아닐 수도 있었다. 먹는 음식에 장난치는 짓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아까 그 연포갱 국물을 쏟아버린 별장놈의 작태를 생각하면 어쩐지 찜찜했다. 정원로는 별장이 푼주를 엎던 그 장면만 계속 곱씹었다. 약해지면 안되었나. 순간의 방심이 원통한 죽음을 부를테니. 집요한 의심 만이 그가 살 길이었다.


"자전마마, 중전마마께오서 문후 드리러 왔나이다."


장지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대비 김씨는 흠칫 놀라며 보료 위에서 두눈을 번쩍 떴다. 방안이 환한 것이, 벌써 동이 텄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서 베개맡의 조보 한장을 쳐다보았다. 이 조보 한장 때문에 밤새 잠을 설치는 바람에 이렇게 늦잠을 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상을 쓰며 며느리 탓부터 했다.


"왜 이렇게 일찍..."

"어찌할까요?"

"기다리라 하여라."

"예, 마마."


엄상궁의 대답을 확인하고, 대비김씨는 얼른 서안 앞으로 다가앉아 경대를 열어젖혔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다소 벌건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대비김씨는 짜증스레 시선을 비꼈다.


날이 갈수록 경대의 거울을 보는 것이 달갑지가 않았다. 이제는 거울에 비친 얼굴을 피하고 싶어졌다. 스물을 넘기면서 조금씩 얼굴에 생기는 잡티 같은 것이 눈에 거슬렸다.

거울을 보는 것도 싫어질 지경이니, 거울보다도 더 비교가 되는 며늘아이의 얼굴은 더 눈엣가시였다. 네번의 회임과 출산, 반산을 거듭하고도 여전히 피부가 마치 활짝 핀 연꽃처럼 해맑으니, 함께 있으면 대비김씨 자신은 동시에 시들어가는 목련처럼 싯누렇기만 했다. 자신이 며늘아이의 싱싱한 얼굴을 보는 반면, 며늘아이는 대비 자신의 시든 얼굴을 보는...그런 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찜찜했다.


대비 김씨는 다시 경대를 보며 분첩을 꺼내어 흰 분을 몇번이고 덧발랐다. 검은 피부에 흰분이 묘하게 위화감을 자아내었지만, 그녀는 얼굴의 잡티가 눈에 띄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분을 두드리고 덧발랐다. 그렇게 단장을 마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 지도 알 수가 없었다.


"뫼시어라."


한참을 단장을 하고서야, 대비 김씨는 장지문을 향해 말하였다. 장지문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느라 지쳐 떨어졌을 며느리에게 미안한 기분은 없었다. 그저 며느리가 일찍 온 탓이라 치부하면서, 그녀는 머리매무새도 마저 다듬었다.


"어디...편찮으시옵니까?"


진홍은 사뿐사뿐 걸어오며 대비김씨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말했다. 대비 김씨는 며느리가 자신의 안색을 살피는 것도 어쩐지 찜찜하여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니...괜찮습니다."


며느리의 관심조차 짜증스러울 때가 있었다. 특히 지금은 대비 김씨 자신의 몸상태를 꿰뚫어보려는 듯한 며느리의 시선이 바늘처럼 뾰족하고 따갑게 느껴졌다. 기껏 공들여서 얼굴에 분칠을 한 것이 오히려 아파보인다는 조롱처럼 들렸다.


"근데 왜...내가 아파보이기라도 합니까?"

"평소보다 기침이 늦으시어, 혹여 잠자리가 편치가 않으셨나 해서 그리 여쭈었사옵니다."

"내 그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더 이상의 관심을 차단하려는 듯 대비 김씨는 오른손까지 내저으며, 아니 휘저으며 대꾸했다. 자신도 모르게 신경질이 어린 손짓이었다. 워낙 손목에 힘이 들어간 탓에, 서안 모서리까지 치고 말았다. 화끈한 고통에 대비 김씨는 오른손을 감싸쥐고 눈물까지 글썽였다.


"어마마마, 괜찮으시옵니까?"

"오지 마, 오지 마세요."


대비 김씨는 거듭 손짓으로 며느리의 접근을 가로막았다. 며느리가 어느새 자신의 서안과 보료 쪽으로 다가온 것이 영 못마땅했다. 시선이 닿는 자리에 하필이면 문제의 조보가 있었다. 왜 이 조보를 치울 생각을 못했을까. 그녀는 더욱 긴장해서 자세를 고쳐 앉으며, 치맛자락으로 조보를 감추었다.


진홍은 머뭇하며, 시어미의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나치게 경계심이 깃든 손짓이 어쩐지 이상했다. 꼭 무언가 켕기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방금 시어미가 감춘 무언가, 종이쪼가리가 문제였을까. 시선을 한번 더 주니, 시어미의 치맛자락 밑으로 살짝 삐쳐나온 종이의 글씨가 눈에 익었다.


빛날화華


진홍의 눈시울이 살짝 꿈틀했다. 당장 보이는 글자가 한글자 뿐이라,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당장 시어미가 지나치게 경계심을 보이니 호기심이 일었다. 그녀는 시어미가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고 흘겨볼 때까지도 계속해서 빤히 쳐다보았다.


"뭘, 뭘 보는 겝니까?"

"치마에 뭐가 붙었사옵니다."


진홍은 마냥 해맑은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조보를 정확히 가리켰다. 대비 김씨는 흠칫 놀라 발끝을 꿈틀했다. 자신이 감추려고 애쓰는 것을, 며느리가 이토록 태연자약하게 들추고 나올 줄은 몰랐다. 맹랑했다.


"이만 돌아가세요."

"예?"


진홍은 벙찐 얼굴이 되었다. 아직 차 한모금이 목구멍을 넘기는 커녕, 찻상조차 문지방을 넘지도 못했다. 헌데 돌아가라니?


"어허! 어서 돌아가지 못할까!"


허울 뿐인 공대조차 벗어던지고서 대비 김씨는 표독하게 소리쳤다. 진홍의 표정이 굳었다. 이상했다. 시어미의 태도가 너무도 예민했다. 진홍 자신이 봐선 안될 글귀인 걸까.


"어서 돌아가시래도. 이만 눈 좀 붙여야겠습니다."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대비 김씨가 다시 한번 축객령을 내렸다. 진홍은 뭔가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돌아가면 가만 있을 시어미가 아니었다. 가란다고 정말 간다느니, 오히려 꼬투리를 잡아서 타박을 해댈 시어미였다. 헌데 지금은 돌아가지 않는다고 버럭대는 모습이라니. 마치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


"하오시면 오후에 다시 오겠사옵니다."

"그럴 것 없습니다. 그냥 오지 마세요."

"어마마마?"

"내일 오세요."


며느리의 문안 자체를 꺼리는 본심을 들킬세라, 대비 김씨는 서둘러 덧붙였다. 내일 오라고. 오늘은 정말 경황이 없다는 식으로 며느리가 받아들여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그래서 진홍은 읽었다. 시어미의 눈밑에 푸석푸석하게 말라붙은 그늘을. 최소한 시어미가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할 일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일을 진홍 자신이 알아채는 것을, 시어미는 원치 않는 것이 분명했다.


"허면...다시 불러주시옵소서."


진홍은 고개를 조아리곤 사뿐사뿐 문앞으로 다가갔다. 문밖을 지키는 지밀나인들이 장지문을 열기 시작했다. 한뼘 만한 너비로 문이 열리는 찰나, 시어미가 불쑥 뒤에서 물어왔다.


"요즘도 조보를 안 읽습니까?"

"예?"

"듣자니...중궁이 정치에 너무 관여를 한다는 소문이 돌아서 말입니다. 내 중궁이 너무 세상물정 모를까 저어되어 조보를 읽으라 하였으나, 이런 태평성대에 치맛바람이 드세다는 말이 나와서는 아니 되지요."


시어미가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타이르는 말에 진홍은 할 말을 잃었다. 언제는 조보를 읽으라고 야단이더니, 지금은 또 조보를 읽지 말라고 야단이었다. 도대체 왜?


"알아들었습니까? 이젠 세상 일에 눈감고, 귀막고, 입닫고...그리 사시란 말입니다. 그때는 남인천하였지만, 지금은 우리 서인천하니...중궁이 나서지 않는 게 세상을 돕고 주상을 돕는 길입니다."

"..."

"알아들었습니까?"

"예, 어마마마."

"허면 그리 알고 물러가세요. 중궁이 앞으로 조보를 읽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조보를 올린 아랫것들부터 내 엄히 다스릴 터이니."

"..."

"이만 나가보세요."


진홍은 대답을 하려다 입가가 굳어졌다. 조보에, 진홍 자신이 봐서는 안될 일이 있었다. 그래서 시어미가 미리 단속을 하는 것이었다. 진홍 자신이 조보를 보고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라도 하면, 바로 그녀의 아랫사람을 잡아다 혼찌검을 내겠다는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누구를 위한 엄폐일까. 진홍 자신? 아니면 대비 본인?


의혹을 더듬다가, 진홍은 손끝에 닿는 비단치맛자락을 비틀어쥐었다. 자신이 아는 시어미는 결코 며느리를 위해 두눈을 가려줄 만큼 사려깊은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과 친정 가문을 위해서 열두폭 치맛자락으로 덮을 만큼 사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조보....


장지문이 마저 열렸다. 상궁과 나인들이 장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밖을 지키는 지밀나인과 상궁들의 얼굴이 진홍의 두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진홍을 보는 눈빛은 저마다 제각각이었다. 경외, 연민, 그리고 조소...?


못본 척하고 문턱을 넘으며, 진홍은 문득 통명전 서온돌의 광경을 떠올렸다. 시어미가 조보를 읽지 말라 엄포를 놓았지만, 어쩌면 그녀의 서온돌 서안 위엔 이미 조보가 놓였을 터였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누군가의 손에.


작고 거친 손끝이, 아침햇살이 비치는 비자나무 서안 위를 젖은 면포로 조심조심 닦아내더니, 한장의 조보를 올려놓았다. 어린 계집아이의 손 치고는 엄지와 중지에 유독 벌건 바늘자국이 많았다. 우희였다.


우희는 무심코 오늘자 조보를 서안 위에 올려놓고 일어서다 멈칫했다. 고개가 잠시 서안 위로 돌아갈 락 말 락 했다. 우희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문갑 앞으로 다가들어 위에 놓인 자리끼 빈그릇을 챙겨 들었다. 문쪽으로 한발짝 떼다가, 우희는 또 다시 멈칫했다. 또 한번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우희는 도로 서안을 돌아보았다.


"내전內殿?"


평소 쓰는 중전이나 중궁이란 말이 아니라서, 한눈에 들어오진 않았었다. 하지만 저 두글자가 요상하게 우희의 발뒤꿈치를 잡아끄는 기분이었다. 우희는 조보를 빤히 쳐다보다가, 오른손을 쭉 뻗어서 조보를 집어들었다.


"범화範華...평론評論...상명上命...언嘗言...내전內殿...자궁불호子宮不好...?"


뭔 말이지? 우희는 맛볼상嘗자처럼 모르는 글자는 제쳐두고 아는 글자만 더듬더듬 소리내어 읽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전이란 말은 알았다. 조보 심부름을 하다 보면, 눈치로 자전慈殿이니 내전內殿이니 하는 어려운 한자가 무얼, 아니 누굴 뜻하는 건지 알았다. 하지만 나머지 네글자가 해석이 되질 않았다. 어린 우희가 알아차릴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자궁子宮?


아들의 궁? 아직 낳지도 않은 아기씨의 거처를 따로 낙점해두었다는 얘긴가?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우희는 계속해서 조보를 읽었다. 말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그 앞뒤를 읽고 문맥으로 어림짐작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직 아는 한자보다 모르는 한자가 더 많은 우희로선 더욱, 읽으면 읽을 수록 모르는 한자가 시야를 막았다.


"우왈又曰...내전內殿...약생자若生子...광성光城...득지得志, 즉則...오가吾家...필불보전의必不保全矣..."


우희로선 뒷문장을 읽을 수록 내전자궁불호內殿子宮不好라는 문구가 더 미궁에 빠졌다. 뒷문장은 중궁이 아들을 낳으면 광성부원군이 뜻을 얻어 신범화의 가문이 망한다는 얘기였다. 그러다 보니 자궁불호라는 말은 우희가 더 짐작할 수가 없었다.


"자궁불호...?"


그때 장지문이 열렸다. 우희는 조보를 움켜쥔 채로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벌써 상전이 대비전께 문안을 드리고 온 모양이었다. 아니, 우희 자신이 이 조보를 너무 오래 붙들고 씨름을 한 탓일 지도 몰랐다. 헌데 우희 자신이 소리내어 읽은 이 조보의 글귀를, 중궁은 장지문 밖에서 듣기만 하고도 그 뜻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밀랍처럼 굳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생기라곤 하나도 없었다.


"중전마마..."


중궁은 우희를 보면서도, 꼭 보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 뒤에서 봉이가 당황해서 허둥지둥 손짓으로 야단쳤다.


"얘가...무슨 짓이야! 그걸 왜 읽어!"

"아니 전..."


중궁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이 조보를 보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상전에 관한 얘기가 조보에 오르내릴까 신경이 쓰여서 찾아보게 되는 법이었다. 그 외의 소식은 그냥 무심하게 흘려보내곤 하지만서도. 그렇게 읽은 조보를 때로는 상전이 볼까봐 감추거나, 또 때로는 상전이 못 볼까봐 내놓거나 했다. 지금 우희가 읽은 조보의 글귀는, 봉이 자신도 상전에게 보이지 않고 숨기고 싶은 내용이었다.


"전..."


우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뒷말을 꾹 삼켰다. 눈치를 보니, 상전이 봐선 안될 글귀인 모양이었다. 뭘까. 자궁불호란 말이. 앞뒤가 맞진 않지만, 굳이 맞춘다면, 내전자궁불호는 중궁이 아들을 낳기 힘들다는 얘기일까...


"신범화..."


진홍은 밀랍처럼 굳어버린 아랫입술을 달싹였다. 범화란 이름을 우희가 읊은 것을 보니, 서화전의 그 신범화가 분명했다. 진홍 자신이 직접 광산김문 사람들을 거느리고 광통교로 가서, 그 서화전으로 가서 응징했던.


신범화 그자가 진홍 자신의 자궁을 입에 담았다? 어이가 없었다. 신료들도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아니될 발언을 참람하게, 신범화 그자가 입에 담았다는 사실이 몸서리 처지게 끔찍했다. 하지만 진홍은 왠지 모를 두려움에 온몸이 갇힌 채로, 손끝 하나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그제야 우희를 똑바로 보았다.


조보를...


조보를 가져오란 말이 입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목소리가 입천정에 달라붙었다. 그래도 우희가 영리하게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릎으로 기다시피 달려와서 조보를 진홍에게 전했다.


진홍은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한 채로 조보를 받아들고 기별을 살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의 눈길이 기별의 글귀 하나하나를 예리하게 꿰어찼다. 읽으면 읽을수록, 진홍의 눈시울은 점점 얼어붙었다.


이건 대체...


허공을 응시하는 진홍의 동공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흔들렸다. 진홍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가벼이 흘려넘길 일이 아니었다. 자궁불호란 말이 신범화의 입에서 나왔다면, 그전에 김석주의 입에서 나왔다면...아마도 그전에 시어미인 대비 김씨 입에서도 똑같은 말이 나왔을 터였다. 말은 물처럼 흐르고 흐르는 것이기에.


"설마..."


불안하게 흔들리는 상전의 두눈을 해맑은 눈망울로 보다가, 우희는 다시금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상전의 손으로 건너간 저 조보에 적힌 내전자궁불호란 글귀는 상전의 차분한 눈동자를 뒤흔들 만큼 위험한 말인 듯 하였다. 무슨 얘긴지는 몰라도.


- 허면 그리 알고 물러가세요. 중궁이 앞으로 조보를 읽거나 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조보를 올린 아랫것들부터 내 엄히 다스릴 터이니.


진홍은 뒤늦게야, 시어미의 엄포가 생각났다. 조보를 읽은 사실이 시어미의 귀에 들어가면, 이 어린 우희가 쥐도 새도 모르게 결딴나게 생겼다. 물론 죽은 참새도 묻어두라고 분부할 정도의 자비심 정도는 있는 시어미지만, 지엄한 분부를 어긴 아랫것들을 용서할 정도의 포용심은 없는 분이기도 했다. 열한살짜리 어린 아해라고 해서 용서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 우희가 시어미의 눈에 띄는 것 자체가 싫었다. 지금쯤 시어미가 우희의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는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막연하게나마 심증만 잡고 물증을 잡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또 물증을 잡고도 문제삼지 못할 터였다. 우희의 생모는 이미 시어미의 손으로 죽여 없앴으니.


"다 젖어서...한글자도 알아볼 수가 없구나."


진홍은 자리끼 그릇을 기울여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물을 그대로 조보에 쏟았다. 우희가 놀라서 진홍을 보았다.


"무슨..."


하지만 진홍은 더는 대꾸도 없이 당장 돌아서서, 곧장 문앞으로 다가섰다. 등뒤에 서 있던 봉이가 놀라서 문고리를 잡으며 눈치를 보았다. 상전의 눈짓을 확인하고, 봉이는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어디로 가시려고..."

"양화당."

"예?"


봉이는 흠칫 놀라 두눈을 크게 떴다. 양화당은 편전을 대신해서 왕이 신료들을 접견하는 곳이었다. 대비전조차도 함부로 발도 딛지 못하는 데를, 지금 상전이 듭시려 하다니. 왕의 성정이 워낙 지랄맞아서, 결코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이러다 상전이 왕의 눈밖에 날까 더럭 겁이 났다.


"마마, 양화당은 아니 가시는 게..."


봉이가 쭈뼛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점점 모기의 날개짓처럼 사그러들었다. 상전이 왕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 만큼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야 한다."

"예?"


봉이는 놀라서 두눈을 뎅그렇게 떴다. 상전이 양화당에 가야 하는 이유...그런 이유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그만큼 상전이 위기에 몰렸다는 얘기였다. 뭔가 상전이 잃을 게 많아져서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왜...


봉이는 불안한 눈빛으로 진홍을 쳐다보다가, 문득 상전의 뒤로 바짝 다가서는 우희의 얼굴을 보았다.


또 너냐?


봉이의 눈밑이 꿈틀거렸다. 짜증이 났다. 봉이 자신도 죽은 상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챙겨주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업보려니 생각하고 우희를 받아들이면 되었다. 그래도 지금은 짜증이 폭발할 정도로, 우희가 거슬렸다.


그새 문이 열리고, 진홍빛 치맛자락이 문턱을 넘었다. 남빛 치맛자락도 중궁을 뒤따랐다. 봉이의 시야에서 우희가 날다람쥐처럼 쪼르르 상전을 뒤따랐다. 봉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우희를 뒤쫓았다. 우희는 벌써 대청마루를 가로지르는 참이었다. 봉이는 더는 걸음을 내딛지 못하도록 우희의 팔뒤꿈치를 꽉 잡고서, 진홍을 보고 머뭇머뭇 아뢰었다.


"마마, 양화당은 좀..."

"그만. 너는 예서 기다리거라."


진홍은 봉이의 말을 더는 듣고 싶지 않은지 단호하게 일축했다. 봉이가 무슨 말인가를 더하려다 입술만 달싹이는 것도, 두눈 한번도 깜빡이지 않고 똑바로 지켜보면서.


"하..."

"가자."


봉이가 재차 만류하는데도, 진홍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거침없이 가운뎃섬돌을 딛고, 자신의 사슴가죽 당혜를 신고, 또 바로옆 섬돌로 걸었다. 봉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어느새 우희가 봉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


봉이는 순식간에 우희를 놓치고, 닭 쫓던 개처럼 우희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깡총거리면서 우희는 금세 운혜를 신고 상전을 따라잡았다. 상전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우희의 두눈이 뎅그렇게 되었다. 최근 두어달은 무릎이 좋지 않아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상전이 지금은 무릎도 곧게 펴고 빠른 걸음으로 양화당으로 직행하는 참이었다.


"마마, 천천히..."

"..."


봉이는 다시금 진홍을 말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어느덧 상전의 걸음이 양화당 앞에 이르렀다. 큰방상궁과 대전나인들이 진홍을 보고 놀라서 대청 앞으로 쪼르르 달려나왔다.


"중전마마..."

"당장 전하를 뵈어야겠다."

"하오나 지금은 최전한이..."

"최전한 뿐인가?"


되묻는 중궁의 옥음이 심상치가 않았다. 큰방상궁은 고개를 조아린 채로 두눈을 치뜨고 진홍을 보았다. 설마 신하를 접견하는 자린데, 이대로 들어오겠다는 건 아니겠지?


자신이 아는 전하께선 결코 월권을 용납할 분이 아니었다. 실수는 용서해도, 무례는 용납지 않았다. 어미인 대비 김씨가 야대청에 난입해서 신료들을 설득하려고 했던 일이며, 약방의 신료들에게 유서를 전달해서 왕의 권위를 떨어뜨린 뒤로, 왕은 자신의 어미마저 소 닭 보듯 했다. 어미가 통명전에 발을 딛는 것도 성가셔 했다. 저 판장 역시 신료들이 아니라, 어쩌면 그 어미 대비 김씨의 이목을 차단하려는 것이 목적일 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번엔 중궁이 감히 양화당에 발길을 들인다? 왕이 어떤 사람인데?


큰방상궁이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는 순간, 진홍은 그대로 섬돌을 딛고 대청으로 올라섰다. 경악하여 대전나인들이 큰방상궁의 양쪽에서 한발 앞으로 나섰다.


"마마, 아니되옵니다."

"전하께오선..."


큰방상궁은 재빨리 좌우의 대전나인들의 팔을 붙잡았다. 대전나인들이 흠칫 놀라 돌아보자, 그녀는 눈짓으로 제지했다. 그냥 놔두라고. 대전나인들의 눈시울이 의혹으로 꿈틀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중궁이 실내로 난입하면 자신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었다. 아니, 그전에 왕의 분노가 중궁에게 향하면 안전하려나.


그 사이, 중궁은 거침 없이 문고리를 잡고 장지문을 열어젖혔다. 왕 앞에 공손하게 부복한 최석정이 놀라, 문쪽을 돌아보는 것이 진홍의 시야야 들어왔다. 물론 지아비 역시 서안 앞에 앉은 채로 노한 눈동자로 진홍 자신을 보는 참이었다.


"이 무슨 짓이오, 중궁!"


진홍은 두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갔다. 바닥을 짚은 최석정의 손목에 그녀의 진홍빛 치맛자락이 스쳤다. 최석정은 뭔가 심상치가 않아서 움찔하며 손을 옮겨 짚었다. 자신도 모르게 왕의 눈치가 보여서, 헛기침이 나왔다.


그런데, 중궁이 자신을 지나쳐서 왕의 서안 앞에 앉았다. 치맛자락이 바람 한번 일으키지 않았지만, 석정은 가슴 속이 괜히 서늘해졌다. 예전엔 밖에서도 버드나무 가지에 얼굴을 가리고 노출을 피하던 여인이, 이제는 안에서 거리낌 없이 동석한다?


사람은 힘들면 힘들수록 변한다더니.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이렇게 변하나. 석정은 충격으로 두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홍의 뒷모습을 보았다. 감히 왕의 면전에서 중궁을 바라봐선 안되었다. 하지만 그저 얼떨떨하고 놀라웠다.


"중궁! 감히!"

"결례를 용서하소서."

"중궁!"

"신첩, 감히 전하께 간청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중궁의 옥음이 석정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석정은 떨리는 손끝으로 방바닥을 꾹 눌렀다. 손톱이 장판을 파고드는 촉감에, 그는 놀라서 손밑을 보았다. 홀이 잠시 손에서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물론 왕을 배알하는 내내 홀을 쥐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은 아예 홀을 손에서 놓다시피 했다. 그런데, 석정은 새삼스레 자신의 실수가 당혹스러워졌다. 중궁이 여기 양화당에 듭시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중궁은 선을 넘지 말았어야 했다. 다른 사람은 다 선을 넘어도, 오직 중궁 만은 선을 넘어선 안되었다. 중궁 만은 선을 넘어도 용서하실 왕이기에. 그래서, 더 하나둘씩 자신의 권위를 명분을 허물어뜨릴 왕이기에...그래서 현명한 중궁도 그간 자중하지 않았던가.


"간청? 간청이라?"

"예, 전하...조보를 보여 주소서."


진홍은 지아비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숙종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진홍을 똑바로 마주보는 참이었다.


"지금...그말을 하려고, 여기 양화당까지 뛰어든 것이오? 그 얼굴을 하고?"

"예, 전하."


진홍의 목소리가 살짝 죄책감에 짓눌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홍은 두손으로 치맛자락을 더욱 힘껏 쥐었다. 지아비의 진노 쯤은 각오하고 뛰어든 참이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조보라?"


숙종이 날카로운 옥음으로 되물었다. 어미든 중궁이든 조보를 읽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어미가 억지로 중궁에게 조보를 권하는 것도 싫었다. 그저 중궁과 관계된 사건이라 해도, 어쩐지 껄끄러웠다. 더군다나, 지금은 중궁이 읽어선 안되는 기별이 실렸다. 내전자궁불호라는 글귀는 중궁을 여인으로서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일진대.


"예, 보여 주소서."


숙종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진홍의 두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진홍의 두눈엔 호기심이라곤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짙고 진했다. 절박하고 간절했다. 지금의 눈빛을 예전에도 한번 본적이 있었다. 반년 전쯤, 어떤 꼬맹이를 지킬 때도 저런 눈빛을 했었다.


"이미 보고 왔잖소."


숙종의 옥음은 노여움을 애써 억누르는 티가 났다. 석정은 흠칫 놀라서 고개를 움츠렸다가, 자신도 모르게 틀어서 진홍을 보았다. 이미 조보를 보고 와서, 왕에게 조보를 보여달라 청한다? 대체 왜? 신료인 자신이 보는 앞에서, 왜 이렇게까지 할까.


"전하..."


왕의 서안 서쪽에 바딱 다가앉아 먹이나 갈다가, 두광이 아무 말도 없이 슬쩍 문간으로 내뺐다. 문턱을 넘기 전에 상전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듯한 손짓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숙종은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보여주소서."


진홍의 옥음에 잠시 불안이 깃들었다. 숙종을 보는 눈동자에 애원의 빛이 빠르게 스쳤다. 숙종은 진홍의 두눈을 들여다 보면서 더욱 확신했다. 진홍이 지금 이미 조보를 보고 왔다는 것을. 저렇게 슬프고, 아프고...복잡한 눈으로, 자신을 보면서, 마치 온힘을 다해서 견뎌내는 듯한 모습을 보니, 확실히 중궁은 이미 조보를 보고 온 것이 분명했다.


숙종은 서안에 엎어진 조보에 손을 뻗었다. 엎어놓긴 했어도, 먹물자국 덕분에 진홍은 읽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 정도는 숙종 자신이나 중궁 같은 사람들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그렇게 숙종이 느릿느릿한 손길로 조보 오른쪽 귀퉁이를 움켜쥐자, 진홍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보여주시옵소서."

"하..."


숙종은 차디찬 한숨을 내쉬며, 조보를 진홍의 손에 내밀었다. 그제야 진홍은 안도하는 듯이 날갯죽지를 축 늘어뜨렸다.


이제 되었다....


진홍은 손끝으로 서안 위를 더듬어, 조보가 손끝에 닿는 느낌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전혀 달갑지 않은 글귀였다. 한번 보았지만, 두번 보기는 그런 글귀였다.


"망극하옵니다, 전하...신첩을 벌하소서."


진홍은 떨리는 목소리로 고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문간쪽으로 다가갔다. 신료인 최석정도 있는 자리인데, 계속 한방에 머물 수는 없었다. 진홍빛 치맛자락이 양화당 문턱을 넘었다.


그렇게 진홍이 물러가기 무섭게, 두광이 긴장된 얼굴로 들어섰다. 두광은 방안에 진홍이 있는지 없는지 신경이 쓰이는 듯이 시선으로 방안을 훑었다.


"전하...조금전에 중궁전께오서 저승전엘 다녀오셨다 하옵니다."

"저승전?"

"예, 전하...조보를 읽으면, 그 조보를 진상한 아랫것들도 용서치 않겠다는 엄포도 대비전께오서 중궁전께..."

"그래서, 그랬군."


숙종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애써 웃음을 지었다. 조보를 내놓으라고, 진홍이 억지로 재촉할 때 이미 알아봤다. 이미 조보를 읽고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조보를 그녀에게 몰래 바친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아마도 그 누군가는 통명전의 우물이나 지키는 그 아이일 터였다. 이렇게까지 진홍이 지켜야 하는 존재도 그 아이 뿐이었다.


"예, 전하...우희 그 아이가 걱정되어 중궁전하께서..."

"누가 누굴 걱정해? 누가 누굴 지켜?"


숙종은 인상을 쓰고 초조히 뇌까렸다. 어미는 조보를 읽은 일로 중궁을 탓할 수 없을 터였다. 그 조보에 적힌 신범화란 이름 만으로도, 어미와 김석주는 중궁 앞에서 할 말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앞에서 할 말이 없으니, 뒤에서 돌을 던질 사람들이었다. 어미와 김석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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