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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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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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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09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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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43쪽

해의 그림자 275

DUMMY

"이 사람, 사하생査下生(이사명을 지칭하는 말) 알면 그 성미에 가만 있겠나. 적당히 좀 하게나."


사위의 친형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기분이라서 조금 거북했는지, 만중이 석정을 타일렀다. 하지만 그 역시도 그 목소리에 웃음기가 배었다. 이사명의 안면근육이 실룩였다. 당장 뛰쳐나가서 따지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었다.


"적당히 한 겁니다. 본인이 면신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을 한번이라도 했더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것을...어떻게 아직도 못 알아채는지, 저도 실망입니다."


석정의 대꾸를 엿듣고 이사명의 두눈엔 분노의 빛이 치밀었다. 그의 발끝이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내쳤다. 그때였다.


"꺽정영감 맞대도요..."

"울 꺽정이 목소리가 옥당까지 들릴 리가 없다니깐."

"탁주 한병 내기! 어때요?"

"한병 말고 반병..."

"에걔? 반병이 뭡니까, 반병이!"


건너편 진선문 쪽에서 박태보와 오도일이 나타났다. 이사명은 도로 안쪽 모퉁이 그늘에 더 깊숙이 몸을 숨겨야 했다. 혼자라면 이 정도 어둠에, 이 정도 그늘이면 들키지 않겠지만, 문제는 같이 있는 김석주였다.


그나마 이쪽이 그늘이 고이는 곳이고, 저쪽에서 주의만 기울이지 않으면 들킬 우려는 없었다. 가만히 숨죽이는 동안, 오도일과 박태보는 숙장문을 지나 연영문까지 다가들었다. 여전히 만중이 석정을 말리는 것이, 그들 귀에 들렸다.


"그래도 적당히...중간에서 나만 죽겠으이. 알고도 모르는 척...내 사위 생각하면 못할 노릇일세. 나중에 사하생이랑 둘이 날 원망하면..."

"사위분 생각해서, 참아주시지요. 남들 다 하는 면신례, 혼자 안 하면, 여기저기 미운털 박힙니다."

"그래도 좀 적당히..."


오도일은 '면신례' 소리에 멈칫하더니 박태보를 돌아보았다.


"면신례라 그랬나?"


박태보가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툭툭 쳐보였다. 똑똑히 들었다는 손짓이었다. 그러자 오도일은 석정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냉큼 박태보를 돌아보며 내기 조건을 깎아내려 들었다.


"어이구, 반병일세!"

"한병이래두요!"

"반병!"

"한병!"

"반병!"

"한병!"


입씨름을 하다가, 최석정의 얼굴까지 보이자, 오도일은 더욱 내기 조건을 깎았다. 하지만 워낙 고집이 센 박태보에겐 씨알도 먹히질 않았다.


"반에 반!"

"한!"

"반에 반에 반!"

"한!"

"반에 반에 반에 반!"


둘의 목청이 큰 탓에, 만중은 석정을 만류하다 말고 짜증을 부렸다.


"시끄러우이! 자네들도 좀 적당히 하게!"

"뭘 적당히요. 요 떼보가 있는데."

"떼보?"

"에, 접니다. 이 박떼봅니다."


김만중이 되씹는 목소리에 박태보도 화답하며 낄낄 웃어댔다.


"자넨 빠지게. 자네 부친이 응교로 있는 한 옥당에 못 돌아오는구만."

"에이, 제 아부진 그 성격에 오래 못 버티십니다. 저 곧 돌아갑니다. 내일이라도 당장요."

"허이구..."


이사명은 이제 분노로 아랫입술까지 온통 퍼렇게 질렸다. 이제 보니 소위 '옥당관玉堂官'들은 모두 최석정과 짜고 자신을 여태 물 먹인 모양이었다. 치가 떨렸다.


본래 면신례란 신래를 괴롭히고 놀리면서 기강을 확실하게 잡기 위한, 일종의 악습惡習이었다. 그 폐단을 지적하며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기강을 잡는다는 미명하에 내리물림은 여전했다. 내가 당하면 악습惡習, 남이 당하면 학습學習인 탓에. 그러니 저 최석정도 본인이 호되게 겪은 면신례를, 이사명 자신이 옴팡지게 덮어쓰게 만들려는 것이리라.


"아니, 그 쉬운 걸 왜 모르는 건지."

"또, 또...무슨 문젠지 몰라도, 자네 기준에만 쉬운 거지, 하나도 안 쉬울 수 있으이."

"정말입니다. 본인이 면신례 중이란 것만 자각하면, 금방 풀어낼 문젭니다. 저 이사명이라면요."


최석정의 말소리를 엿들으면서, 이사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분통이 터졌다. 그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면서 안쪽 모퉁이에서 불쑥 몸을 빼냈다.


"사..."


석주가 흠칫 놀라서 손을 뻗어 제지하려다, 멈칫 손끝을 잘숨했다. 괜히 목소리를 냈다간 저쪽에 들릴 터였다. 불과 모퉁이 하나 차이로 자신들이 엿듣는 만큼, 저들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승정원쪽을 돌아보며 두눈을 부라리고 이사명을 뒤따랐다. 사명의 걸음은 맹렬한 속도로 진선문을 돌파해서, 그대로 옥당 쪽문으로 들어갔다.


면신례 중인 줄도 모른다고?


그는 열띤 얼굴로 서행랑 앞으로 다가들었다. 다락방 계단처럼 생긴 서행랑의 목조계단을 바라보니 숨이 턱 막혔다. 홍문관의 말단이나 오는 곳이 여기였다. 차라리 서리를 시켜서 책을 가져오라 할 지언정, 직접 책을 꺼낼 엄두도 나질 않았다. 물론 물과 서너달 전만 해도 여기서 최석정과 자리싸움을 했지만, 지금은 그리 찾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최석정이 자기도 모르게 면신례 문제를 냈더라면, 그 답은 여기 있을 터였다.


그는 두발로 걷는지, 네발로 기는지 모르는 기분으로 정신 없이 올라갔다. 목조계단만 지나면 무릎이나 허리에 병이 난다고 숙부 이민서가 투덜대던 것이 생각났다. 숙부는 알까. 설마 알고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도대체 문제가 뭐기에.


차라리 그 자리에서 최석정의 멱살을 붙들고 직접 따져 물을 걸 그랬나 싶은 충동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여기서 풀어내야 했다. 감히 자신을 뒤에서 남몰래 희롱하고 조롱한 최석정의 눈앞에, 보란 듯이 답을 내어놓아야 했다.


컴컴한 서행랑 서고 구석구석에 놓인 좌등을 죄다 환히 밝히고서, 그는 숨을 씨근거리면서 사납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최석정의 명당이 눈에 띄었다.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 와중에도 자기 서안은 또 챙겨갔는지, 그 서안이 보이지 않았다. 사명은 고개를 비끼고 한숨을 내쉬고는 홧김에 텅빈 바닥만 발끝으로 툭 찼다.


아직도 치르는 중이라 했으니, 그래도 아직 여기 어딘가에 문제가 있을 터였다. 마방진 몇문제 내고서 천한 서리들 앞에 으스대던 그 경박한 최석정이라면, 필시 마방진 문제를 내었을 것만 같았다. 두눈이 시뻘겋게 충혈이 되도록, 그는 서행랑 구석구석을 보고 또 보고, 또 돌아보았다.


마방진, 마방진, 마방진...


두눈에 불을 켜고 마방진을 찾던 이사명의 두눈에, 이책저책 겉장에 두른 띠지가 눈에 들어왔다. 책을 찾아보기 쉽도록 세필로 적어서 살짝 두르는 종이쪼가리들인데, 최석정도 저 띠지를 이용했을 것만 같았다. 이사명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그는 냅다 손을 뻗어 남쪽 가운뎃열列 책장에서 서책 몇권을 집어들었다. 여기 최석정의 필체로 뭔가가 적힌 띠지가 있을 것만 같았다. 대여섯권 뒤지다 보니 눈익은 서체로 적힌 글자 하나가 나왔다.


海東書聖 - 玖

해동서성 - 구


해동서성이라면, 신라의 김생金生...그를 두고 왕희지에 버금가는 신필이라고 송인宋人들이 일컫던 말이었다. 그 김생의 얘기가 적힌 삼국사기 48권에 최석정의 필체로 적힌 띠지...그리고 구玖자라...숫자 아홉구九를 대체하는 갖은자 옥돌구玖자가 적혔다.


하늘이 감춘 자, 옥돌구玖...혹은 아홉구九


이사명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옥돌구玖자 자체가 하늘이 감춘 자라는 뜻이었다. 고려 때 사신 홍관이 김생의 글씨를 들고 송宋에 가니, 송나라 사람들이 왕희지의 글씨라며 한사코 믿지 않더라던 일화가 있었다. 그 전설의 신필, 김생金生...그를 뜻하는 암어인지, 아니면 숫자 九의 갖은자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물론 마방진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띠지인 만큼, 사명으로선 아홉구를 뜻하는 말이길 바랄 뿐이었다.


사명은 오른손에 그 띠지를 움켜쥔 채로 계속해서 손을 뻗어 책장을 뒤적이면서 한걸음 떼었다. 이번엔 앞줄의 책장들도 살피는 참이었다. 헌데 이번엔 앞서 띠지가 나온 그 앞책장에서 또 다른 띠지가 나왔다.


壺中玉冊 - 壹

호중옥책 - 일


호리병에 든 옥책(왕이나 중전, 자전 등에 존호를 올리는 문서)이라면...사명은 후한서의 방술전이라는 책을 든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 서가에 아무렇게나 놓인 호리병들에 옥책문을 넣었다는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서가에 놓인 호리병 하나를 집어들어 그 빈속을 들여다 보니, 그 속엔 아무 것도 없었다. 사명은 아차 싶어 왼손의 띠지를 다시 쳐다보았다. 호중옥책이란 네글자, 마찬가지로 작게 써진 갖은한일자...사명의 눈시울이 실룩였다.


그냥 말장난일 뿐이었다. 자신이 책장 윗면에 아무렇게나 올려둔 서책을 보니 후한서의 호중지천壺中之天...좁디 좁은 호리병 속에 별천지가 들어있다는 뜻이었다. 좁은 호리병 주둥이를 지나야만 신선의 세계가 나온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게 그저 파자破子라면...박팽년의 아들 박일산朴壹珊을 말하는 얘기였다.


"사육신의 유일한 핏줄, 박일산朴壹珊의 그 일一..."


이미 속이 홧홧한데, 눈시울까지 뜨거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사명은 두눈을 끔뻑이며, 더욱 미친 듯이 책장을 뒤척였다.


羞與噲伍 - 伍

수여쾌오 - 오


사기史記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실린 한신의 고사였다. 한신 같은 거물이 번쾌와 같은 졸자와 같은 대오에 서게 된 현실을 자조하던 일화였다.


번쾌와 같은 대오, 그 오五


사명은 더욱 열띤 손길로 서가의 책들을 뒤척였다. 하나씩하나씩 찾아낼 때마다, 그의 두눈엔 시뻘겋게 독이 올랐다.


啄鏡中影 - 捌

탁경중영 - 팔


거울 속 그림자를 쪼아라? 사명은 자신이 집어든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을 대충 들춰보았다. 거기에 흥덕왕과 앵무새의 일화가 있었다. 당나라에서 가져온 앵무새 한쌍 중에서 암놈이 죽어서 숫놈이 하도 슬피 울어 거울을 걸어놓았더니, 숫놈이 그 거울을 쪼다가 죽더라는 얘기였다. 세간에선 앵무새나 구관조를 혼동해서 팔가八哥로 통칭하니, 그 앵무새를 말하는 건가. 사람人 같은, 하지만 사람은 아닌八, 그 여덟팔八이니...그는 더는 깊이 생각지 않고 그 앞쪽 책장을 분주한 손길로 뒤졌다. 역시 또 한줄의 띠지가 나왔다.


任賢勿貳 - 貳

임현물이 - 이


어진 이에게 맡겼으면 두 마음을 갖지 말라, 두이二. 이건 군자가 아닌, 군주가 명심해야 하는 덕목이었다.


군주의 자리인 북쪽에 놓인 두이貳자, 그리고 여덟팔捌자를 보니, 마방진이라는 확신이 더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발끝도 돌려서 서쪽 책장도 살폈다. 앞서 수여쾌오의 오伍란 띠지를 찾았던 그 책장과 같은 행行의 책장에서 두줄의 띠지가 연달아 나왔다.


曾參殺人 - 參

증삼살인 - 삼


膠漆之交 - 漆

교칠지교 - 칠


한줄은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서, 또 한줄은 백거이의 백씨문집白氏文集에서 나왔다. 三과 七...이사명은 미간을 찡그리고, 그대로 헹감치고 앉아, 발치에다 띠지를 나열해 보았다. 정중앙에 다섯오伍를 놓고, 북쪽에 여덟팔捌과 두이貳를 놓고, 서쪽에 석삼參과 일곱칠漆...자신이 띠지를 찾아낸 배열대로 놓으니 숫자 두개만 더 찾으면 열십十자 형태가 될 터였다. 그러니 나머지 두줄의 띠지는 이 다섯오伍자가 발견된 책장의 동쪽 책장들에 있을 터였다.


敬肆修悖 - 肆

경사수패 - 사


陸績懷橘 - 陸

육적회귤 - 육


정여창의 일두유집一蠹遺集에 이어 누가 갖다놓았는지 모를 삼국지에서까지 띠지가 나왔다. 사명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선, 마방진 앞으로 되돌아가서 나머지 동쪽의 숫자들도 맞춰보았다. 四, 六....


......二......

......八......

..三七五四六..

......一......

......九......


동쪽은 사四와 육六, 서쪽은 삼三과 칠七, 남쪽은 일一과 구九, 북쪽은 이二와 팔八, 그리고 정중앙은 오五라니...못 보던 마방진이긴 하지만, 네개의 날개는 각각 더하면 십十이 되어, 중앙의 오까지 더하면 여느 마방진처럼 네 날개의 합이 십오十五가 되는 배열이었다. 아니, 가운데 오를 기점으로 해서 원뿔로 생각하면, 다섯 수의 합이 각각 이십오가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마방진이지만, 풀어내긴 너무 쉬웠다. 그저 허탈해서, 사명은 어깻죽지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나 싱겁다니.


자신이 면신례 중인 것만 자각하면 쉽게 풀어낼 문제라던, 최석정의 말이 맞았다. 풀고 나니 뿌듯하거나 흐뭇하긴 커녕, 오히려 홧홧하니 미친 듯이 속바람이 일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면신례免新禮...


이사명은 멍하니 그 석자를 뇌까렸다. 자신이 치른 면신례는 특별했다. 여느 면신례보다 더 은밀했고, 더 치밀했다. 이 면신례를 치르는 줄도 모르고서, 최석정의 손바닥 안에서, 자신은 철저히 처참히 놀아났다.


양휘산법에도, 산법통종에도 없는, 독창적인 마방진이었다. 이 만들어내긴 어렵고, 풀어내긴 쉬운 마방진으로, 최석정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입증하면서, 이사명 자신을 바보로 만들었다. 자존심이 상해서 어디 가서 입도 벙긋 못하도록, 철저히 자신을 짓밟아버렸다.


감히 날 갖고 놀아?


그냥 갖고 논 정도가 아니었다. 문제가 너무 쉽다는 사실에, 더 자존심이 상했다. 서고인 서행랑에, 이 따위 어린애 장난을 쳐놓다니. 그런데도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해서 웃음거리가 되다니. 이젠 쪽팔려서, 어디 가서 이 문제를 풀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또 계속해서 웃음거리가 될 수도 없었다.


"빌어먹을!"


발치의 마방진을 발꿈치로 꾹꾹 지르밟고, 발부리로 짓이기고, 그러고도 직성이 안 풀려서, 발날로 흩어놓고, 아예 마구잡이로 걷어찼다. 좌등이 기우뚱하며 위에 씌워놓은 불어리가 툭 떨어져내릴 때까지, 그의 발길질은 맹렬했다. 떨어진 불어리마저 발길질로 툭 차버리고, 숨이 가빠져서 몇번이고 꾸억거리다가, 그는 눈시울이 온통 시뻘개진 채로 마방진의 잔해를 노려보았다.


"사명아..."


목조계단 아래서 들리는 김석주의 목소리에, 사명은 핏빛 시선을 돌려서 목조계단 아래를 굽어보았다. 목조계단에 두손, 두발로 그저 엎드릴 뿐, 비대한 몸집 탓에 올라올 생각도 못하고서 이모부가 그저 시뻘건 홍단령자락 아래로 목조계단 발그림자만 드리운 참이었다.


"이 은혜는...꼭 갚아줘야겠습니다."


빠져버린 불어리 자리로, 불머리가 낼름낼름하면서 사명의 얼굴에 불그림자가 흔들흔들했다. 석주는 목조계단에 비스듬히 엎드려서 사명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쩌려는 것이냐?"

"최석정의 집에서 풀린 책들, 이모부께서 다 사들여 주셔야겠습니다."

"뭐? 그 많은 책들을 다?"

"돈 많으시잖습니까."

"뭐 하러 돈지랄을? 배보다 배꼽이 더 크구만..."


석주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 뒷짐을 졌다. 헛돈을 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몸짓이었다. 사명은 눈시울을 실룩이곤, 발치에 뭉개진 띠지들 중에서 '敬肆修悖 - 肆'가 적힌 띠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상처입은 짐승의 억눌린 울음이 섞인 웃음을 토해냈다. 그 띠지를 움켜쥐고 목조계단을 내려와서, 사명은 석주의 손에 가만히 쥐여주었다. 눈도 밝은 석주인 만큼, 끄느름히 불빛이 새어나오는 목조계단 쪽에서도 한눈에 띠지의 글자를 읽어낼 수 있었다.


"경사수패(敬肆修悖공경 또는 종사, 수신 또는 괴패)?"

"정여창의 유집에 있는 말이지만, 평소 퇴계인지 퇴물인지도 입에 담았던 말이지요."

"그럼..."

"서인이 남인을 본받으니 웃기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이걸로는 좀..."


석주는 두눈을 게슴츠레 내리뜨고, 띠지의 글자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니 최석정의 서책들을 사들이자는 거지요. 여기 홍문관의 책들로다 감히 경사 운운하며 마방진을 꾸린 최석정입니다. 자기 집 책들로는 뭔 짓을 못했겠습니까?"

"그 말인 즉슨...비밀이 있을 거다?"


그제야 김석주의 두눈이 번들거렸다. 그저 최석정의 책들을 사들이는 데엔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 책의 비밀을 사들이는 데엔 군침까지 흘렀다. 사명의 말마따나, 뭔짓을 못했을까 싶었다. 사명 역시 시뻘겋게 독 오른 눈으로 웃음을 지었다.


"비밀이든, 빌미든, 한가지는 있겠죠."

"흥..."


비로소 흥미가 동하여 입꼬리를 비틀어 웃다가, 석주는 멈칫했다. 그는 두눈을 치뜨고 하늘을 보았다. 남쪽에서 새하얀 유성이 움직였다. 뚫어져라 지켜보니, 이십팔수의 하나인 남방주작의 자리에서 새하얀 별똥별이 나오는 참이었다. 귀성鬼星 밑에서 나와선 저 멀리 동쪽으로 날아갔다.


천구天狗가 도망갔어?


불길했다. 적시성積尸星이 흔들리고, 귀성鬼星이 빛을 잃고, 천구天狗도 도망갔다. 석주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사명을 보았다. 사명은 보지 못했을 터였다. 저 계단 위, 서행랑 안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참이었으니, 별똥별이 눈에 들어왔을 리가 없었다. 저 별똥별을 목도한 관상감의 이민철은 지금쯤 얼굴이 백짓장처럼 질려서 측후단자를 들고 통명전을 찾을 것이고, 남의 탓 하기 좋아하는 소인배들은 중궁을 두고 입방아를 찧기 바쁠 터였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하필 중궁전하의 탄일을 앞두고, 천구 한마리가 도망을 쳤구나."


석주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대꾸했다. 그의 입가가 얄궂게도 실룩였다. 귀성鬼星은 빛을 잃었지만, 이런 밤이야말로 그들의 귀계鬼計가 빛을 발할 터였다. 그는 음험한 눈빛으로 용마루도 없는 통명전 지붕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그 말은 곧 귀성鬼星이 약해지니..."

"병란兵亂이 일거나, 역병疫病이 돈다지..."


세상이 어지러워질 징조였다. 하지만, 석주의 입가는 회심의 미소로 들뜨는 듯 했다. 어슴푸레한 불빛이 그의 시꺼먼 동공까지 비추지는 못했어도, 사명은 그 속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모부의 시선이 통명전에 닿았으니, 곧 동온돌이나 서온돌의 주인이 바뀔 터였다. 통명전을 돌아보며, 사명 또한 비릿한 웃음을 입가로 흘렸다.





일찌감치 먼동이 텄는데도, 서온돌엔 끄느름한 공기만 감돌았다. 우희가 진홍의 서안에 펼쳐놓은 한장의 조보가 이미 통명전 안팎으로 짙은 먹내음을 풍기는데도, 진홍은 한참 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뭐야? 네가 뭔 조보를 본다고...나와, 안 나와?"

"아는 글자 좀 있어요."

"뭐?"

"이거요. 유성流星. 흐를유流 별성星."

"뭐, 또야? 미친 거 아냐? 왜 또!"

"별이 어떻게 미쳐요?"

"아니 관상감에서도 한달에 한두번 볼까 말까 하다더니...뭐 사흘이 멀다 하고 이게 뭐야...오늘 중궁전하 탄일인데..."

"그래서 더 중궁전하께오서 눈을 못 뜨시는 건가 봐요. 별똥별 떨어지면 꼭 옥체미령..."

"시끄러. 눈 뜨실 거야."

"그쵸? 뜨시겠죠?"


누구누구 목소린지, 잠결에도 조금씩 분간이 되고서야 진홍은 비로소 눈꺼풀이 열렸다. 하지만 겨우 눈을 뜨고도, 온몸이 노곤하여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미 머리맡에서 의녀들은 물론 봉이와 우희까지 당의며 목함 등을 껴안다시피 하고 자신을 지켜보는 참이었다.


"아...눈 뜨셨다..."

"진하례, 아니 권정롄데...눈을 안 뜨셔서...그냥 문안만 올리는 걸로...그래서 지금 월대 밑에 줄이... "


봉이가 머뭇머뭇 아뢰었다. 진홍은 멍하니 두눈을 깜빡였다. 권정례든 아니든, 월대 밑에 문안행렬이 대기한다는 말에 괜히 숨이 답답해졌다. 하루종일 문안을 받게 생겼다. 한사람한사람 전문과 표리를 들고 와서 바치다 보면, 또 한마디한마디 주고 받게 되기 마련이었다. 하루가 끔찍하게 길어질 것만 같았다.


"더 주무시려면...더..."

"되었다. 어찌 더 기다리게 하겠느냐."


진홍은 이맛살을 살짝 찡그리고서 힘없이 대꾸했다. 도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기고 눈을 붙이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문안問安을 하겠다고 즐비하게 줄선 사람들을 생각하니 그럴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도 뻣뻣한 자신의 다리를 보니, 수많은 사람들의 다리로 겹쳐 보였다.


"나 좀..."


일으켜 달라며, 진홍은 두손을 각각 자신의 좌우에 앉은 봉이와 우희에게 내밀었다. 스스로 일어나 앉을 기운도 없으면서, 우희한테까지 손을 내미는 진홍을 보니, 봉이는 일으켜 앉힐 의욕도 뚝 떨어졌다.


"그냥 좀 더 주무시지...조반도 드셔야 하는데..."


봉이는 궁시렁대며 손끝에 힘도 주지 않는데, 우희 요것이 혼자서 상전의 손목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는 참이었다. 풀썩 일어나 앉아버린 상전을 보면서 봉이가 한숨을 내쉬는데, 불현듯 대청에서 대비 김씨의 옥음이 들려왔다.


"중궁께선 기침하셨는가."


진홍은 자신도 모르게 두눈이 커진 채로 대청을 돌아보았다. 저 대청에 시어미가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이렇게 가까이서 목소리가 들리니 괜히 모골이 송연했다. 왠지 모를 오한을 느끼고, 진홍은 무릎맡의 누비이불을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중궁?"

"예, 어마마마."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진홍은 옥음을 가다듬었다. 방금까지 혼자서는 일어날 기운도 없더니, 등허리를 곧게 세우는 진홍을 보니, 봉이는 자신도 모르게 속이 홧홧해졌다. 죽은 상아도 여기 궁에 들어온 것을 후회하고, 그래서 내심 중궁인 상전이 원망스러웠겠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더 여기 궁중에서 나가고 싶은 사람은 바로 상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궐밖 어디선가는 고부간에도 서로 아껴주며 오순도순 지내는 사람들도 있을 법도 한데. 왜 상전의 시모는 항상 칼끝을 며느리의 턱밑에 들이대고 거두지도 못하는 걸까.


"얼른 나오세요. 다들 기다리느라 목 빠집니다."


웬일로 목소리가 매끄럽고 정겨웠다. 그 만큼 이 장지문 밖엔 보는 눈과 듣는 귀가 많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부끄럽고 역겨웠다. 아마 상전은 더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봉이가 상전의 심기를 읽으려 곁눈을 돌리니, 아직 어려서 철도 없고 눈치도 없는 우희 조것이 하필이면 자신의 몫까지 챙겨서 상전에게 적의翟衣를 입히고 치마끈까지 두번세번 매듭을 동여매는 참이었다. 봉이는 마지 못해, 머리단장을 거들었다.


"참으로 고우시옵니다."

"고...맙다."


진홍은 파리한 입술을 파르르 달싹이다 겨우 답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내려서 우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어린 것한테 기대어 걸을 수도 없었다. 진홍은 허공을 보며 애써 입술을 앙다물었다.


"중궁!"

"에, 어마마마."

"아직 멀었습니까?"

"아뇨, 갑니다."


왠지 숨이 차오른 옥음으로 답하고서, 진홍은 한발한발 힘겹게 내디뎠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장지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데, 오히려 닫히는 기분으로, 진홍은 한발한발 문턱을 넘었다. 중엄中嚴 소리에 숨이 턱턱 막혔다.


"어서 오세요, 중궁."

"탄일을 경하드립니다."


서온돌보다 환히 들어찬 햇볕을 한웅큼 모아쥔 듯한 모습으로, 대청에 동쪽에 마련된 교의에 대왕대비 조씨와 함께 나란히 앉은 대비 김씨가 진홍을 돌아보고 활짝 웃었다. 진홍은 그대로 걸음이 멈칫했다.


웃는다. 너무도 다정하게 시어미가 웃는다.


대청 한복판에 마련된 자신의 교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진홍은 어쩐지 얼굴이 순식간에 말라붙어서 들뜨고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신물이 울컥 올라왔다.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문설주를 짚었다.


"중궁! 괜찮으세요?"

"괜찮으시지요?"


시어미, 그리고 시할미까지 정답게 말을 건넨다. 진홍은 얼굴이 온통 굳어서 아무 감각도 없었다. 마치 자신이 무덤의 문인석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탄일인데 이상하게도 꼭 죽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이리 와서 앉으시오, 중궁."


지아비가 강사포絳紗袍에 통천관 차림으로 중앙에 앉아서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옆자리를 가리키며 손짓했다. 진홍의 손끝이 꿈틀했다. 저 손끝만 보면, 늘 자신도 모르게 손을 맞잡게 되는 습관 탓이었다. 늘 맞잡던 저 손어름은 지남석과도 같아서, 진홍은 얼얼한 얼굴로 아무 생각 없이 문설주를 놓고, 한발한발 걸음을 내쳤다.


"괜찮소?"


자신의 옆자리에 진홍의 손을 잡아 앉히고선, 누가 보거나 말거나, 숙종은 손을 뻗어 진홍의 이마를 짚어보았다. 미열이 있었다. 숙종은 미간을 와락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미는 가체를 고정한 머리의 용떨잠을 고치는 척을 하며 눈길을 피하는 참이었다. 하지만 그 눈길 끝은 뾰족하니 가시가 돋쳐서, 슬그머니 진홍을 쏘아보기까지 했다.


"이게 뭐랍니까. 진하례도 아니고, 권정례도 아니고. 내외內外도 없이."


월대에까진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대비 김씨가 나직하게 푸념했다. 하지만 숙종은 듣는 둥 마는 둥 월대를 흘끗 쳐다보았다. 조정에선 도승지이자, 왕실에선 숙종의 사돈인 오두인도 묘한 웃음을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내외內外 타령을 하도 여기저기에서 듣다 보니 은근히 거북한 모양이었다.


"이만 문안례問安禮를 거행하겠습니다."


대청 서쪽에 시립해 있던 상의尙儀가 월대를 보고 고하였다. 사기司記가 왕비 어보御寶를 받들고 나와서 향안에 올려놓고 뒤로 물러났다.


"사배하라."

"사배하라."


전언이 서쪽 계단에서 올라가서 진홍의 앞으로 나아갔다. 엎드려 꿇어앉는 모습을 진홍은 그저 멍하니 쳐다보았다. 낙양춘洛陽春이 울리는 것도 같았지만, 귓결에 스칠 뿐 잘 들리지도 않았다.


"대전에서 문안이 있습니다."

"궤跪하라."


상의와 전찬의 목소리에, 대비 김씨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원래는 이 앞에 빈첩이 어쩌고...후궁들의 치사致詞가 나와야 하거늘...후궁이 없으니..."


중궁의 탄일에 오히려 후궁 운운하는 대비 김씨의 말에, 대청 안엔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다. 진홍은 굳은 얼굴로 대비 김씨를 돌아보았다.


"그렇사옵니까? 몰랐사옵니다."

"허? 몰라요?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요?"


대비 김씨는 자신을 맹랑하게 마주보는 진홍의 눈빛에 기가 막혔다. 주도면밀한 며느리의 성품으론 모든 행사를 의궤까지 일일이 들여다 보며 확인할 터였다. 그런데, 몰랐다니? 몰랐다니?


"어떻게 모른다는 말을 그리 당당하게 합니까? 그게 자랑입니까?"

"선대에 후궁이 있었어야지요."


중궁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비 김씨는 진홍을 한껏 노려보다 움찔했다. 중궁의 옥음이 아니었다. 지랄맞은 저 말소린, 하필이면 자신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들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와락 인상을 쓰고 숙종을 돌아보았다.


"어마마마 때도 없었으니, 어찌 알겠습니까."

"주상...!"

"참으로 어마마마가 자랑스러울 겁니다. 중궁은요. 아바마마께오서 다른 여인은 곁에 두시지도 않으셨으니. 아니 그렇습니까, 중궁?"


숙종은 어미의 말문을 얄궂은 칭송으로 틀어막았다. 대왕대비 조씨도 대비 김씨 옆에서 대청의 대화에 실소를 흘렸다. 대왕대비 조씨만 웃은 게 아니었다. 상궁이며 나인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키득거렸다. 대비 김씨는 얼굴이 홧홧해져서 대왕대비 조씨를 흘겨보았다.


지겨워.


자신보다 고작 네살 많은 시할미였다. 내리사랑이란 말도 있는데도, 터울이 지지 않아선지 한번도 자신을 따스하게 보듬어준 적이 없었다. 터울이 스물도 넘는 시어미도 자신을 품어주긴 커녕 후벼파기 바빴으니 나이가 많다고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서도. 대비 김씨가 속으로 궐안 식구들에 대한 원한을 곱씹고 또 되씹는 동안에도, 월대에선 문안례가 계속 진행되었다.


"대전에서 문안이 있습니다."

"사배하라."

"궤하라."

"왕비 전하의 탄신을 만나서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대전의 궁인들이 월대로 나와서 일제히 부복했다가 일어나고, 다시 국궁사배를 마치고 사빈司賓의 인도를 따라 서쪽 계단을 내려갔다.


"대왕대비전에서 문안이 있습니다."

"사배하라."

"궤跪하라."

"왕비 전하의 탄신을 만나서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왕대비전에서 문안이 있습니다."

"사배하라."

"궤跪하라."

"왕비 전하의 탄신을 만나서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명안공주 외 외명부 문안이 있습니다."

"사배하라!"

"궤하라!"

"첩 명안공주 등은 왕비 전하 탄일을 만나서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내명부 및 외명부의 문안이 있더니, 이제는 신료들의 문안까지 잇따랐다. 그나마 통명전이 백관의 행례를 받기엔 다소 협소한 탓에 백관이 참석지 않고 청화직淸華職의 소수 관료만 참석하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대비 김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승정원에서 문안이 있습니다."


당사자인 진홍에게도 고된 시간인 건 마찬가지였다. 몸이 편치가 않으니 교의에 앉아 있는데도 콧잔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내명부 및 외명부의 문안을 받을 때는 그나마 사가의 반가운 얼굴들이라도 잠깐씩 볼 수 있어 좋았는데, 신료들은 친분이라곤 없으니 어쩐지 거북했다. 보첨만補簷幔까지 처마에 덧대어 쳐서 신료들의 얼굴에 그늘이 진 덕분인지, 신료들의 얼굴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아는 얼굴도 꼭 모르는 얼굴 같았다. 진홍은 딱딱한 얼굴로 '고맙소'란 말만 반복했다.


"신 동부승지 최석정, 중궁 전하의 탄신을 만나니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모르는 얼굴이 아는 얼굴 같았다. 진홍은 그제야 석정의 얼굴을 알아보고 두눈을 깜빡였다. 당연히 낯익은 얼굴이었다. 보첨만 그늘에 얼굴이 더 흐릿해 보이긴 했어도, 틀림 없는 최석정이 맞았다. 안도감에 입꼬리가 살짝 풀렸다.


"동부승지...반갑소, 고맙소."


자신도 모르게 반갑다는 한마디를 보탰다. 승정원의 신료들이 최석정을 곁눈지리로 흘끔거렸다. 왕만 최석정을 총애하는 게 아니었다. 이제 보니 중궁도 총애하는가 싶었다. 물론 중궁의 사가인 광산김문이 최석정의 스승 남구만과 인연이 깊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이렇게나 눈에 띄게 차별이라니. 고작 세글자에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도승지 오두인을 보고도 굳어 있던 중궁의 얼굴에 화색이 돌다니.


"아, 천원술天元術을 좀 익혀보려 하는데, 무슨 책을 봐야 하오?"

"측원해경, 산학계몽, 사원옥감 등이 있습니다. 헌데 신이 알기로는..."


석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아는 중궁은 산학에도 은근히 조예가 깊었다. 내탕고의 장부 등을 순식간에 대조하고 확인하는 솜씨만 봐도, 천원술을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었다. 물으니 답하긴 했지만, 자신이 열거한 서책들은 중궁이 충분히 읽고도 남았다.


"열흘 전쯤 청국사신이 다녀갔다는데, 새로 들어온 책은 없소?"

"아...천신도 알아보았지만 청국에선 천원술의 명맥이 끊긴 듯 합니다. 여기 조선에서나 천원술을 쓰는데, 경선징이 20년전에 쓴 묵사집黙思集이 더 도움이 되실 겁니다."

"경선징?"

"우리 조선이 낳은 천재 중의 천재지요. 중인이라, 중궁전하께서 그 이름을 들어보진 못하셨겠지만요."

"한번 봐야겠군요. 묵사집이라 하셨지요?"

"예, 묵사집산법입니다."


석정은 책이름을 얼른 정정했다. 편한대로 줄여 부르던 습성이 중궁 앞에서도 나왔다. 송구스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옹그렸다. 하지만 중궁은 그런 석정을 탓할 생각이 없는지 책의 저자와 이름만 뇌까렸다.


"경선징慶善徵의 묵사집산법..."

"천신이 주도가 끝나면 필사해서 빌려드리겠습니다. 책이 집에 있다 보니...아...집이 아니라, 어쨌든 지금은 당장 빌려드리기 곤란하여..."


석정은 중궁에게 선뜻 책을 필사해서 빌려주겠다고 아뢰다가 흠칫했다. 책은 집에 있지 않을 지도 몰랐다. 아내가 팔아치워 동상전에 있을 지도 몰랐다. 유학도 아니고 산학에 관한 책이니, 잡스러운 책이라 여기고 팔아치워 쌀을 샀을 터였다.


"아, 그냥 내가 구해보겠소. 하루라도 더 일찍 살펴봐야겠으니..."

"아, 예..."


석정은 어정쩡히 대꾸하며 곁눈으로 힐끗 왕의 흉배를 쳐다보았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더니, 아무래도 중궁도 왕을 닮아 성격이 급해지신 건가 싶었다. 물론 석정 자신이 주도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서 책을 되찾고 하다 보면 시일이 좀 걸릴테니, 중궁으로서도 기다리다 지칠 수도 있었다.


"아, 저...홍문관과 이二품이상 육조 문안도 있사오니...."


문답이 길어진 듯 하여, 상의가 끼여들었다. 이미 동벽에 앉은 대비 김씨의 눈총이 온몸을 들쑤셔댄 탓이었다. 견디다 못해서 나서긴 했는데, 이번엔 또 왕의 시선이 번갯불처럼 내리꽂혔다. 콩볶는 소리가 들릴 법한 저 뜨겁고도 따가운 시선에 배겨날 재간은 상의에겐 없었다.


'설마 제가 콩자반으로 보이시는 건...'


따져묻고 싶지만, 감히 따져물을 수는 없는 지존이었다. 상의는 그저 바싹 타버린 윗입술을 혀끝으로 축였다.


"알았다."


다행히도, 중궁이 언짢은 기색 없이 넘어갔다. 중궁이 앞뒤 다른 성품도 아니니, 뒤끝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상의는 문안례를 속개하게 되어서 그저 기분이 좋았다. 다만, 뒤가 켕길 만큼 그악스런 왕의 눈총이 문제였다. 왕의 뒤끝은 만리장성보다 길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했다. 그래도 일단은, 대비 김씨의 압박에서 벗어나니 좋았다. 자신은 내명부의 사람이고, 내명부의 어른이 제일 무서울 수 밖에 없으니.


승정원 관료들이 물러가고, 홍문관 관료들이 나아갔다. 진홍의 숙부인 부제학 김만중도 있었고, 시꺼먼 멧돼지 같은 김석주도 있었으며, 눈밑이 거뭇하니 한숨도 자지 못한 듯한 교리 이사명도 있었다.


"홍문관 대제학 이민서,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겸兼 홍문제학 김석주, 삼가 천천세수를 비옵니다."

"부제학 김만중, 삼가 천천세수를 비옵니다."

"응교 박세당,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부응교 윤경교,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교리 이현성,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교리 이사명입니다.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부교리 오도일,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부교리 홍만종洪萬鍾(홍만종의 동명이인),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수찬 임영,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수찬 박태손,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부수찬 신완,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부수찬 이수언, 삼가 천천세수를 비나이다."


진홍은 고단할수록 등허리를 더욱 곧게 펴고 문안을 받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옥당관원들이 일일이 이름을 밝힐수록, 그들을 면면이 살필수록, 진홍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마지막 저작까지 이름을 밝히기를 기다리며, 진홍은 마뜩잖은 눈초리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두루두루 편안하신지요?"


이민서의 질문에, 진홍은 씁쓸한 미소를 띠고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조금 불편하오."

"예? 그게 무슨..."


이민서는 당황해서 곁눈으로 옥당관원들의 눈치를 보았다. 비록 자신들이 문안을 여쭙긴 하였으나, 약방관원은 아니었다. 왜 자신들에게 이런 말을 꺼낸 건지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내 알기로 상피제相避制란 것이 있는데, 어찌 옥당은 숙질간에, 사돈간에, 뒤엉킨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거요?"

"그게..."

"말해 보시오."

"송구하오나...고故 대제학 이식李植의 공석을 신이 다시 메우는 바람에...이리 되었사오나, 곧 정리가 될 것이옵니다."


이민서는 중궁의 대쪽같은 기질에 질려서, 목소리가 꽉 잠겼다. 등뒤에서 옥당관원들이 피식피식 웃는 듯 했다.


"경들이 이해하시오. 본디 우리 중궁이 단정한 성품이라, 흐트러진 건 못 본다오."


숙종이 팔걸이로 손을 내밀어 진홍의 손등을 토닥이며 하는 말이었다. 이민서를 비롯하여 옥당관원들은 할 말을 잃고 서로 눈길을 주고 받으며 고개를 살래살레 내저었다.


"중궁은 염려 마시오. 비록 저들이 숙질간에, 사돈간에 한 데 모이긴 하였으나,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안다오. 오죽 하면 누군가 넉달째 면신례를 치러도 귀띔도 못해주고 꾹꾹 참겠소?"


숙종의 말에, 이사명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왕도 안다? 기가 막혔다. 최석정이 자신을 철저히 갖고 놀았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똘똘 뭉쳐서, 숙부인 이민서도, 아우의 장인인 김만중도, 자신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았다. 김석주라도 알았다면, 넌지시 알려주었겠지만, 김석주마저도 따돌림을 당했다. 그래서 더 분통이 터졌다. 마침 앞줄에 앉은 상관들이 낄낄대며 자신을 뒤돌아보는 눈꼬리들이 보였다.


"송구하오나, 교리 이사명은 오래전에 면신례를 끝마쳤사옵니다."


석주가 욱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사명은 흠칫 놀라 눈짓을 보냈지만 이미 늦었다.


"아, 병판께서 얼마간 옥당을 비운 덕에 모르는가 보오?"

"아니옵니다. 모르는 척 했을 뿐이옵니다. 여기 그 증거가 있사옵니다."


석주는 품속을 주춤주춤 뒤져서 손가락만한 띠지를 무릎맡에 펼쳐놓았다. 너덜너덜해지고, 또한 꾸깃꾸깃해지긴 하였으나, 거기에 깨알처럼 적힌 글자들은 김석주의 어깨너머로 김만중도 알아볼 수 있었다.


"어? 언제..."

"문제가 너무 쉬워...풀었다고 나서기도 민망하여, 그간 조용히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은 간밤에 풀었지만, 사명의 체면을 위해서 석주는 거짓말로 포장했다. 하지만 사명을 보는 숙종의 눈빛은 묘하게 차가워졌다.


"문제가 쉬웠다?"

"처음 보는 마방진이나, 그렇다고 못 풀어낼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사명은 자신도 모르게 냉랭한 옥음으로 대꾸했다. 숙종은 그런 이사명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그 무릎맡의 띠지를 가져오라 두광에게 손짓으로 일렀다. 두광이 얼른 띠지를 주워들고 숙종에게 바쳤다. 숙종은 최석정의 필체로 적힌 띠지의 문구를 흘끗 내려다 보고선 진홍에게 툭 내밀었다.


"뭔지 알겠소?"


진홍은 눈앞에 지아비가 내민 띠지에 적힌 글귀를 얼떨떨히 쳐다보았다. '敬肆修悖 - 肆'란 글귀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띠지 같은데...설마 홍문관의 책들로 마방진을 꾸렸단 말입니까?"

"그렇소. 그 문구 또한 일부터 구까지 숫자를 내포한 글귀로...호중옥책壺中玉冊, 임현물이任賢勿貳, 증삼살인曾參殺人, 경사수패敬肆修悖, 수여쾌오羞與噲伍, 육적회귤陸績懷橘, 교칠지교膠漆之交, 탁경중영啄鏡中影, 해동서성海東書聖...이렇게 총 아홉이오."

"아...하오면...정중앙에 수여쾌오羞與噲를 넣고..."


진홍은 비로소 생기를 되찾은 눈빛으로 숙종을 쳐다보았다. 그런 진홍의 밝은 눈빛을 보는 숙종의 얼굴도 웃음이 어렸다.


"그렇소. 수여쾌오..."

"헌신처럼 버려진 한신이 번쾌와 같은 대오가 되는 걸 부끄러워 했지만, 그 누구도 그 대오를 벗어날 수가 없는 법이지요."


진홍은 묘한 미소를 머금고 이사명을 쳐다보았다. 최석정이 저 이사명에게 장난을 쳐놓았다? 결코 누군가를 농락하려는 장난은 아니었다. 필시 깊은 뜻이 있었을 터였다. 헌데 그 마방진을 풀어놓고 오히려 이사명과 김석주는 수치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수여쾌오의 글귀처럼. 이사명과 김석주를 보는 진홍의 두눈에 언뜻 연민의 빛이 스쳐갔다.


저 둘도...한신韓信과 같은 자들인 건가.


홍문관 관원들이 물러가고, 그 뒤엔 이품이상 육조 당상의 문안이 잇따랐다. 계속되는 문안에, 진홍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하지만 등줄기는 여전히 곧았다. 그런 진홍을 보다 못해 민유중이 한마디 했다.


"탄일이라 더 고단하시지요? 내명부, 외명부는 물론, 문무백관이 바치는 표리에 전문에, 팔도 방방곡곡에서 방물方物이 쌓여, 더 고되실 듯 하온데..."

"받는 내게 고되다 말할 자격이나 있겠소? 보내는 이들이 더 고될 터..."


진홍은 아랫입술이 허옇게 타버린 채로 힘겹게 대꾸했다. 달갑지가 않은 자였다. 그 기백이 대나무처럼 올곧으면서도, 그 초리는 뾰족하여, 진홍의 턱밑을 파고드는 느낌이니, 참으로 이상했다. 진홍은 두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민유중은 그런 진홍의 모습에 흠칫했다. 금세라도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중궁이, 방문을 받는 고역보다는 보내는 이들의 노역을 생각하며 애써 참아내는 모습이었다. 엄청난 인내심이었다. 받는 자신에겐 고되다 말할 자격이 없다?


그는 문득 자신의 총명하고 침착한 여식과 비교하는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딸 역시 외양이며, 소양이며, 무엇 하나 빠짐이 없었다. 하지만 민유중 자신을 닮아서, 간혹 잘 참다가도 욱하는 불뚝성이 있었다. 애써 도스르고 또 추스르는 모습을 중궁의 재목이라 가상하게 여겼건만, 막상 눈앞의 중궁을 보니 오히려 미흡한 건 아닌가 싶어서 내심 가책이 들었다.


아니다. 중궁은 왕실의 대통을 끊어놓은 죄인이다.


회임을 네번이나 해놓고서 용종을 번번이 잃어버린 죄인에게, 가책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괜히 죄스럽고 또 안스러웠다. 그는 어쩐지 얼떨떨한 기분으로 문안을 마치고 물러나왔다. 월대를 내려서며 통명전 마당을 곁눈으로 굽어보는 그 눈길이 흔들렸다.


참 요상했다. 중궁의 옥체가 편치 않을 때는 이렇듯 가을날에도 날씨가 흐리다니. 관상감에서 연일 천기가 이상하다고 측후단자를 올리는 일이 조보로 실리는 참이었다.


민유중은 품속에서 돌돌 만 조보를 꺼내어 펼쳐 보았다. 간밤에도 유성의 출현을 알리는 기별이 있었다. 또 귀성鬼星 아래서 나와서 동방東方으로 들어갔다는 글귀였다.


流星出鬼星下, 入東方。


"뭘 또 보냐? 또 그 유성이냐?"


불쑥 끼여든 정중의 목소리에 민유중은 고개를 들었다. 이내 겸연쩍은 얼굴로 유중은 형 정중의 열없는 도리질을 보고선 수중의 조보를 흘끗 내려다 보았다.


"그게..."

"왜 자꾸 신경을 쓰는 게야?"

"중궁이 잘못될 때마다 유성이..."

"답답한 소리 한다. 유성이야 일년 열두달에서 스무날도 넘게 발견되는 거고, 근자엔 한달에서 열흘도 넘게 발견된다는데...그중 중궁이 잘못되는 게 어찌 유성과 관련이 있겠누..."

"그렇긴 하지만...여기 이 귀성鬼星까지 우연이 겹치니..."

"말 그대로 우연이야, 우연..."


민정중은 아우 유중의 불안을 일축하곤 힐끗 하늘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아우 유중이 이리 흔들리다니. 하필 귀성 때문에 더 마음이 약해졌다. 귀성이 잘못 되면, 백성이 잘못 된다 하니, 괜한 가책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자식이 사라지고, 애가 닳아 이리 못나빠진 모습이 되는 걸까.


"진원이는 아직이지?"

"살았는지, 죽었는지라도 알면, 알면..."


조보를 움켜쥔 유중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아들 진원이를 찾을 수만 있다면, 살릴 수만 있다면, 중궁전하께 무릎이라도 꿇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고고한 자존심으로도.


"그렇군, 그거야..."


비로소 무언가를 깨단한 눈빛으로, 유중은 서온돌을 돌아보았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숲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비로소 길을 찾아낸 기분이었다.


아들 진원이를 그의 품에 무사히 되돌려줄 수 있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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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해의 그림자 281 +2 16.12.11 736 4 42쪽
281 해의 그림자 280 +2 16.11.29 701 5 41쪽
280 해의 그림자 279 16.11.24 565 7 44쪽
279 해의 그림자 278 +2 16.11.16 1,007 4 41쪽
278 해의 그림자 277 +1 16.11.05 958 8 44쪽
277 해의 그림자 276 +2 16.10.15 954 10 45쪽
» 해의 그림자 275 +1 16.10.09 904 6 43쪽
275 해의 그림자 274 +1 16.09.30 612 9 42쪽
274 해의 그림자 273 16.09.22 581 8 43쪽
273 해의 그림자 272 +1 16.09.15 853 8 44쪽
272 해의 그림자 271 +2 16.09.07 1,193 10 44쪽
271 해의 그림자 270 16.08.30 679 8 42쪽
270 해의 그림자 269 +1 16.08.24 929 10 44쪽
269 해의 그림자 268 +2 16.08.16 646 3 43쪽
268 해의 그림자 267 +2 16.08.08 987 7 41쪽
267 해의 그림자 266 16.07.24 596 11 44쪽
266 해의 그림자 265 +1 16.07.03 952 11 42쪽
265 해의 그림자 264 +2 16.05.30 989 11 44쪽
264 해의 그림자 263 +2 16.05.01 997 13 40쪽
263 해의 그림자 262 16.03.29 726 10 40쪽
262 해의 그림자 261 16.02.18 1,023 13 41쪽
261 해의 그림자 260 +1 16.01.21 1,162 15 40쪽
260 해의 그림자 259 +1 15.12.26 773 12 41쪽
259 해의 그림자 258 +3 15.12.04 920 13 41쪽
258 해의 그림자 257 +4 15.11.08 994 16 38쪽
257 해의 그림자 256 +2 15.10.12 847 14 39쪽
256 해의 그림자 255 +4 15.09.19 1,007 16 40쪽
255 해의 그림자 254 +2 15.08.27 909 14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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